2024년 7월 3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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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잘 산다는 것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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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6 ㅣ No.492

잘 산다는 것의 의미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제3공화국 시절에 적어도 유년기를 보낸 사람이라면 이 노래를 들으면서 저절로 흥얼거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겨운 가난을 이겨내고자 집권 세력이 “새마을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의도적으로 전개한 잘 살기 운동은 나라 전체를 경제적으로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 공과에 대한 논란은 여기서 접어두기로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 역사적 전환점을 지나온 우리는 현재 잘 살고 있는가? 그 이전에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이런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이 글을 통해 구하는 시도를 해본다.

 

 

1. 잘 사는 것과 윤리

 

우리나라의 경제체제는 자본주의, 또는 흔히 시장경제체제라고 불린다. 한마디로 시장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경제제도라는 뜻인데, 문제는 이 시장이라는 것이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말대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엄밀히 말해 자본가들과 사업가, 정치가들 그리고 이들과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들의 보이지 않는 힘이 시장을 움직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또한 이들이 완전히 시장을 장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는 자생력을 가진 일종의 유기체처럼 유연성을 가지고 오늘날 가장 강력한 경제제도로 군림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폐해에 관한 논의는 1990년대 초반의 좌파의 몰락, 곧 소련과 동구 공산주의 국가의 몰락으로 마르크스(Karl Marx)에서 시작된 일종의 실험이 실패로 끝난 뒤에도 그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는 사회적 시장경제(Sozialmarktwirtschaft) 제도를 도입하여 성장과 분배의 조화를 꾀하고 있는 독일의 경우조차도 정의롭지 못한 분배에 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폐해가 이전처럼 극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서도 더욱 강하게 소득의 불균형을 초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언론매체가 흔히 보도하는 대로 자본주의 경제제도가 운영되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빈부 격차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심화되고 있다. 가지지 못한 자, 다시 말해 서민의 삶은 경제발전의 성과의 분배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은 여전히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 남아있다. 

 

그러나 일상적인 생활 세계 안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서민들에게 이러한 경제제도의 모순에 대한 거시적 분석은 커다란 의미가 없다. 더욱이 이러한 모순을 감히 ‘해결’해 보려는 시도는 엄두도 낼 수 없을 정도로 자본주의 경제제도는 이제 강력한 패러다임으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제제도 아래서 특히 서민들이 “잘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가? 단순히 젊을 때 근검절약하여 경제적으로 풍요하지는 않으나 그럭저럭 안정된 노년을 보내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아니면 복권이든 투기든 ‘한탕’하여 30-40대에 10억을 모아 그 이후 종종 태국에 놀러가 골프도 치면서 안락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아니면 교회나 성당에서 성직자들이 설교하는 대로 지상의 것에 대한 ‘헛된 욕심’을 버리고 천상의 영원한 보물을 모으기에 여념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인가?

 

사실 요즈음처럼 복잡한 시대에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강하지만 정작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과연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스로 서민이라고 생각하는 평범한 사람이, 특히 가톨릭 신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 여기에서는 복잡한 경제적 분석 없이 사회윤리, 특히 경제윤리적 관점에서 기술해 보기로 한다.1)

 

 

2. 잘 사는 것과 재산

 

재산은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하느님 나라와 적대적인 관계를 가진 것으로 오해되었다. 그러나 지상에서 육적인 삶을 영위하는 한 재산을 적대시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재산, 특히 사유재산은 소유(Haben)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 자신인 존재(Sein)와 늘 대립한다(Kerber, 113면). 소유의 본래의 의미는 소유한 자, 곧 인간의 주체적 사용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소유의 주체가 지나친 소유에 따라 오히려 재산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재산, 곧 부의 거의 무한에 가까운 집중이 합법적으로 허용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통제 능력을 벗어난 부의 축적이 재산의 소유주의 재산에 대한 지배권을 오히려 박탈하는 모순적 상황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게 된다. 곧 돈을 모은 사람이 결국은 돈에 지배되는 자기소외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는 또 다른 형태의 인간의 재산에 대한 종속 현상이 있다. 곧 재산에 의존하는 인간들을 결국 재산의 소유자가 지배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볼 때 부모의 유산이 없거나 스스로 축적한 재산이 부족할 경우 특히 현대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가능성은 현저하게 줄어들게 된다. 바로 이런 두 번째 종류의 종속에 대한 두려움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맹목적인 재산의 축적에 말 그대로 혈안이 되어있는 것이다. 

 

특히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난의 대물림 현상까지도 구조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에, 사람들은 재산의 축적이 곧 잘 사는 길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물론 돈이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부터 고상한, 예를 들어 예술적 감각의 충족에 이르기까지 모두 돈, 곧 사유재산의 소비를 바탕으로 충족시키는 구조가 정착되어 있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산이 없다는 것은 인간적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말과 같은 의미를 가진 것이다. 

 

소극적인 의미에서 볼 때에 이와 같은 두 가지 형태의 재산에 대한 종속의 현상을 피하는 길이야말로 잘 사는 길이 될 것이다. 그 길은 어떤 것인가? 교회에서는 이에 대한 답을 이미 오래전에 제시한 바 있다. 

 

“(…) 소유권의 이중적 성격, 곧 개인을 존중하느냐 공동선에 관심을 갖느냐에 따라서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이 되는 이중성을 거부한 적도 의심한 적도 없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겠다. 그들의 한결같은 주장은 사유권이란 자연에 의해서, 또는 오히려 창조주에 의해서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것이고, 그것은 개인이 자신이나 가족의 필요를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창조주께서 인류를 위해서 마련해 준 재화가 그 목적에 진정으로 봉사하기 위함이란 것이다”(「사십주년」, 19항).

 

곧 현세 재화의 보편적 차원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서있지 못하면 재산의 궁극적인 존재 의미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그 결과 인간은 물질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잘 살려면 절제된 사유재산의 축적을 추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할 만큼 넉넉한 사유재산을 확보하고도 여유가 있어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평범한 개인이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현재 한국의 경우와 같이 사회보장제도가 미비하여 사유재산의 손실이 개인의 기본적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는 상황에서, 과연 사유재산의 사회적 성격이 어느 정도나 존중받을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이는 개인이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난 문제이다. 그렇지만 사유재산 축적을 시작할 때부터 사유재산이 사적일 뿐 아니라 동시에 사회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의 불행뿐 아니라 사회적 불평등과 윤리적 타락에 따른 혼란이 가중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3. 잘 사는 것과 노동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먹고살려면 자본가가 아닌 이상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노동력을 파는 것은 이미 주어진 틀 안에서 일정한 직업을 가질 때에만 비로소 가능한 구조가 수립되어 있다. 고전적으로 노동력이란 육체노동을 통해 제공되는 것을 의미하였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정신노동, 나아가 창조적 정신활동까지도 환금성이 보장되는 노동력의 성격을 가진 것이 되었다. 이는 정보산업의 발달과 더불어 나타난 정보사회가 도래했어도 여전히 유효한 원칙이다. 

 

기본적으로 노동은 유급이든 무급이든 노동력의 투여를 통해 발생하는 것이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직업을 통해 구체화되며 임금으로 보상되는 노동을 더 실질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한다. 그래서 한마디로 돈이 되지 않는 일은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노동력의 구체화는 거의 모든 경우에 직업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런 성격의 직업은 다시 소명으로서의 직업(Beruf)과 생계 수단으로서의 직업(Job)으로 구분된다. 소명으로서의 직업의 보상은 단순한 임금뿐 아니라 내적 충만을 가져온다. 이에 비해 생계수단으로서의 직업은 단순히 노동과 임금의 교환을 위한 수단의 기능만을 할 뿐이다. 물론 어느 종류의 것이든 관계없이 “새가 날기 위해서 태어난 것처럼, 인간은 노동하기 위해서 태어났으므로”(「사십주년」, 29항) 노동은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노동도 사유재산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이며 동시에 사회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 된다. 그런데도 흔히 노동은 노동자와 자본가의 일대일 계약을 통한 거래로만 인식되는 경우가 흔해서 혼란이 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혼란의 결과로 오늘날에는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는 속담처럼 무책임하고 이기주의적인 소비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후기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서서 노동의 사회적 성격은 더욱 극명하게 나타나게 된다. 곧 고도로 분업화된 사회에서 재화의 생산을 위해서는 공동의 노동의 투여가 필수적인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는 모든 경제제도가 잉여이익을 지향하는 것이기에 반드시 수익이 비용을 초과해야만 한다. 여기서 노동력의 소모가 바로 비용이 된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의 수익을 위해 노동이 얼마나 투여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잣대를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노동의 투여가 가져다주는 잉여이익이 노동자와 자본가들만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현대사회 내에서는 노동력을 상실한 사람들에게도 인간다운 삶을 살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곧 이들이 노동을 통해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직업이 없는 경우에도 금전적이고 물질적인 보조 형태의 비용을 발생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라는 말을 적용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정신의 근본을 오해한 결과에서 나온다. 이 경우에는 오히려 롤즈(John Rawls)가 「정의론」(The Theory of Justice) 46장에서 설명하는 차등의 원칙(Difference Principle)을 적용하는 것이 타당하다. 곧 최소 수혜자에게 좀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인데, 이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마태 26,45)을 염려하는 주님의 정신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력을 가지고 있고 또한 그 노동력을 직업을 통해 구체화하는 가운데 이익을 창출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건강한’ 사람이 자신의 노동이 순수하게 개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 된다. 

 

 

4. 잘 사는 것과 이자(불로소득)

 

이제는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복권이 선풍적으로 판매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복권은 불로소득의 상징이 되고 있지만 사실 인간 사회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자’라는 제도를 통해서 불로소득으로 ‘보이는’ 형태의 이익 추구가 만연해 왔었다. 한국의 경우 보릿고개가 만연하던 시절에는 봄에 곡식을 빌리면 가을에 ‘이자’ 형태의 불로소득을 더해 배상하는 것을 당연시해 왔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이야기가 좀 다르다. 수백 년에 걸쳐 서양에서는 이자의 금지가 종교적 요청사항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다가 19세기에 들어서서야 이 금지를 해제한 것이다(Kerber, 143면). 사실 노동이 투여되지 않았음에도 이득이 발생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화폐는 초기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가 갈파한 것처럼 교환의 수단일 뿐이었기 때문에 금융이자가 발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재산이나 화폐가 잉여이익을 낳는 자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자는 합법적이고 나아가 도덕적으로도 정당한 것으로 평가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재산이나 화폐로 구체화된 자본은 일종의 생산수단으로 인간 노동력의 생산성 향상에 기여하는 바가 있는 것이고, 이는 자연자원과 마찬가지로 이익을 창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구분해야 할 것은 ‘정당한’ 이자(Zins)와 ‘부당한’ 고리대금(Wucher)이다. 이자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생산재가 산출한 이익의 일부이다. 그러나 고리대금은 사회적인 약자가 소유자의 권력 때문에 착취당하는 구조를 가진 것이다. 고리대금은 그 윤리적 핵심에서 정치적 권력의 압력을 통한 경쟁 가격의 조작으로 정의된다(Kerber, 145면).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사악한 고리대금업이 합법적인 제도적 장치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전히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속칭 “카드깡” 등의 방법을 통한 고리대금업자들의 횡포는 법적 장치의 미비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경제적으로뿐 아니라 사회적인 파국으로 몰아 결국 자살에 이르게까지 하고 있다. 그런데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러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젊어서 많은 돈을 벌어 중년 이후에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직접적인 고리대금이 아니면서도 고리대금 못지않은 형태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착취가 바로 복권이다. 구매자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운데에도 일확천금의 유혹에 넘어가 복권을 구매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확률이 거의 없는 무모한 도박을 감행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착취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고리대금과는 다르게 복권은 그 제도의 지배자의 권력이 약자들 간의 상호 착취를 구조적으로, 나아가 죄의식 없이 가능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더욱 윤리적으로 사악한 것이다. 그래서 복권에 당첨되었다하여도 그 돈으로 사는 삶이 잘 사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비록 이자가 정당한 이익의 추구라는 자본주의의 기본 원칙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이자인지 고리대금인지, 아니면 그 못지않게 구조적으로 사악한 복권인지를 구분하고 후자를 경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5. 잘 사는 것과 기업(윤리)

 

흔히 말하는 경제윤리라고 하는 것은 사실 질서윤리와 기업윤리를 의미한다(Kerber, 112면). 현재 기업은 크게 미국적인 것과 유럽적인 것, 그리고 이 둘을 혼합한 형태의 것으로 나눈다. 미국적 기업은 주주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데 비해, 유럽적인 것은 기업 관계자들의 이익 극대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기업은 단순히 주주나 경영자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운명에도 영향을 끼치는 하나의 권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이들에 대하여 사회윤리적 책임을 묻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이를 통해 사회는 기업가에게 “품격 있는 경제”(Wirtschaft mit Ethos)를 주문하게 된다(Kerber, 136면).

 

문제는 이러한 기업윤리가 법처럼 제재를 동반한 강제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기업가들은 최소한의 법, 최소한의 윤리(minimal ethics)를 지키는 것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칸트의 정언명령 형식을 빌리자면 기업가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사람들이 준수할 의사가 있는 행위준칙을 모든 기업이 따르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받아들이기 힘든 종류의 것이라면 사회 전체를 위해, 곧 공공복리와 도덕에 어긋나는 것이 된다(Kerber, 137면). 

 

구체적으로 기업가들은 이른바 인간의 얼굴을 한 기업문화의 형성을 위해서 노동세계의 인간화와 자연보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는 단순히 수입과 비용의 차에서 나오는 화폐로 즉시 환산되는 이익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기는 해도 장기적이고 전체적인 관점에서는 또 다른 의미의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앞에서 칸트(Immanuel Kant)의 정언명령을 응용한 기업윤리의 정착이 얼마나 현실적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기업이 유기체적인 성격을 가지고 한 사회 안에서 “지속 가능한 성장”(Growth with Sustainability)을 하기 위해서는 기업윤리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6. 나가는 말 : 진정 잘 살아보세?

 

잘 사는 나라는 단순히 수치적으로 나타난 경제적인 부만으로 평가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른바 우리나라의 “부패지수(CPI)”가 4.2로 짐바브웨와 더불어 조사 대상국 85개국 중 42위를 차지했다는 연구 결과(박영렬, 『윤리지수의 국제비교』, 1999년)가 우리를 우울하게 한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한 경쟁과 인격을 포함해 가능한 모든 것의 상품화가 시대정신처럼 회자되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윤리적인 경제생활을 통한 잘 살기는 일견 무모한 시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개인적 덕성이 윤리적 사회 구성의 기초가 되던 근세 이전의 시대와는 상황이 바뀐 현실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잘 살기 위해서는 공동선을 지향하는 사회윤리적 의식의 함양은 필수적인 것이다.

 

진정으로 잘 사는 길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른 양태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경제가 전적으로 인간적인 것에서 출발하는 이상 인간의 이성을 요구하는 것이고, 인간의 이성의 보편성이 전제되는 한 모든 인간의 경제활동에 적용되는 보편법칙은, 칸트(Immanuel Kant)의 용어를 빌리자면, 필연적인 요청(Postulat)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필연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당위(Sollen)를 현실(Sein)로 실행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자유로운 결단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윤리의 영역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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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기에서 사용하는 경제윤리의 개념과 이해는 주로 Walter Kerber의 Sozialethik(Kohlhammer, 1998년) 가운데 “경제윤리 I, II(Wirtschaftsethik I, II)”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목, 2004년 7월호, 이종범(주교회의 한국사목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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