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해 본 인간의 초기 생명 존중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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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7 ㅣ No.381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해 살펴본 인간의 초기 생명 존중에 관한 고찰

 

 

시작하는 글

 

오늘날 생명과학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연구와 업적들은 우리의 귀를 의심할 정도로 인간 삶의 엄청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치매나 당뇨병 등의 난치병 극복은 물론이요, 장기 기증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인간 장기의 양산, 불임부부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다는 복제인간의 출현 등, 소설 같은 이야기들이 가까운 미래에 실현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고맙게도 인간은 생명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그 어느 때보다 향상된 건강을 누리게 될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생명 연장의 꿈도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생명과학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몇몇 내용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단순히 그 분야의 고마움만을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인간 생명의 초기 단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여러 기술적 개입이 상황에 따라서는 필연적으로 인간 생명을 파괴하는 과정을 거쳐야만하고, 여기에 매우 심각한 윤리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일부 생명과학자들은 인간 배아(胚芽, Embryo)는 아직 인간 생명이라 볼 수 없기 때문에 인간 배아에 대한 연구, 실험은 윤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인간 배아 역시 마땅히 존중되어야 할 인간 생명으로 간주하므로 이에 대한 인식론적 및 윤리적 견해 차이는 매우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인간 배아의 지위 문제는 생명윤리의 매우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인공 출산, 유전자 진단 및 치료, 피임, 낙태, 배아 연구 및 실험, 배아 복제, 잔여 배아 활용 등, 이 분야에 대한 윤리적 판단 기준이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 배아의 지위에 대한 논쟁은 오늘날같이 생명과학의 눈부신 발전이 있기 이전에는 그리 큰 논란거리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생명과학 분야가 세분화되고 배아 연구를 통해 의학 기술이 진보를 이루고 수많은 만성질환의 치료법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게 되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를 가속화하기 위한 윤리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인간 생명의 시점을 좀더 늦추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논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생명공학의 잇따른 가시적 결과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하게만 여겨 왔던 수정되는 순간부터 인간 생명이라는 사실을 서서히 논의의 밖으로 몰아내면서 물질성과 유용성을 그들 판단의 매우 중요한 축으로 삼아 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 배아 연구를 통해 암치료를 비롯해서 퇴행성 뇌질환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뼈질환, 혈액질환 등을 치료하고 신약의 독성 검사라든가 이식용 장기를 양산하는 등의 숱한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만일 그러한 유용성이 인간 생명을 파괴하면서 얻어지는 결과라면 과연 이를 수용할 수 있겠는가? 생명과학의 여러 기술들은 물론 사람을 도울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을 해칠 수도 있는 심각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글은 생명과학의 여러 기술들이 때로는 인간 생명을 심각하게 위협하기 때문에 그러한 기술들로부터 인간의 참된 가치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내용으로 인간 생명의 존중과 인간 배아의 지위 문제에 대해 가톨릭 교회가 역사를 통해 어떻게 접근했는지를 다루게 될 것이다. 곧 생명 존중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서술하기 위해 먼저 인간 생명이 어떤 것인지를 언급하게 될 것이고, 계속해서 가톨릭 교회가 초대교회 때부터 가르쳐 온 태아 및 배아의 존중에 대해 역사적 관점에서 기술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가톨릭 교회의 최근 문헌들에 나타난 인간 생명의 시작 및 인간 배아의 지위 문제를 조명할 것이다.

 

 

1. 그리스도교의 생명 이해

 

그리스도교 생명윤리의 기초는 무엇보다도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다. 인간 생명이 인간 자신에게 있어서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귀하게 보호받아야 할 가치라고 하는 이유는 생명이 우리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 이웃에게 봉사하도록 인간에게 그 생명을 맡기신 창조주 하느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바로 이 생명을 통해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에 대한 가치를 실현시키고, 진, 선, 미, 기쁨, 평화, 정의, 우정, 사랑 등을 구체화시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곧 인간은 자신의 육체적 생명이 지속되는 동안 자기 자신의 완전한 실현을 위한 노력을 계속 할 것이며, 따라서 생명을 통해 인간 삶의 완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생명은 고귀한 것이며, 언제나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고귀한 존엄성을 지닌 인간 생명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는 어떠한지 살펴보자.

 

1.1. 선물로서의 인간 생명

 

인간의 생명과 관련된 여러 윤리 문제들, 특히 생명과학의 눈부신 발전과 함께 따라온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들이 지니고 있는 실재 자체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실재는 물론 인간 생명의 문제이다. 대체 생명은 무엇이고, 또 생명과 연관된 윤리 문제가 왜 그리 중요한가에 대한 질문들이 이제는 생명윤리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피할 수 없는 질문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시각에서 볼 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인간 생명은 창조주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가장 위대한 선물이라는 시각에서 시작된다.1)

 

생명의 존엄성에 관한 성서의 사상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생명의 주관자라는 데에 기초한다. 이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생명을 뜻하는 단어 네 가지를 통해 볼 수 있다. 즉 ‘하이임’, ‘네페쉬’, ‘루아흐’, ‘너샤마’의 네 단어이다.2) 이 네 단어는 공통적으로 생명, 숨, 숨결, 바람, 영 등으로 표현되며 여기에는 특별히 하느님께서 인간에 대해 가지시는 특별한 관계가 표현되고 있다. 즉 살아 있는 존재인 인간은 하느님의 생명의 숨결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생명체인 인간이 된다는 것이고, 인간은 하느님께서 그 숨결을 거두시면 사라질 존재요 입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렇듯이 이 숨결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며, 인간은 이 숨결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3)

 

신약성서에서도 생명과 관련된 내용들은 대부분 그리스도와의 관련 아래 소개되고 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그리스도(마르 5,21~ 43; 마태 9,18~26; 루가 7,11~17; 8,40~56; 요한 11,38~44),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는 그리스도. 이처럼 신약성서는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느님의 권능을 통해 생명이 다시 주어진다고 분명히 알려 주고 있다. 이렇게 생명은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다.4)

 

그러므로 선물로서의 인간 생명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생명에 관한 문제들에 대해 정확하고도 올바른 답을 제시해 준다. 본래 하느님께 속한, 그리고 창조주 하느님의 선물인 인간 생명이기 때문에 온 정성을 다해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하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 해답이다.

 

1.2. 생명의 관리자로서의 인간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 생명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생명에 대해서도 자유로운 주인이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의 주권에 종속되는 관리자일 뿐이다. 생명은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 생명에 대한 어떠한 권한도 인간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의 주권에 속한 이 생명을 위협하거나 임의로 포기하거나 혹은 위험에 내버려두는 일체의 행위를 명백히 하느님을 거스르는 행위로 간주한다. 비록 인간의 생명보다 더 상위의 가치 실현을 위해 생명이 위험에 빠지게 되는 것을 수용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생명에 대한 인간의 최우선적인 자세는 하느님의 선물로서의 생명을 잘 보호하고 가꾸어 나가는 생명의 관리자로서의 자세일 것이다.5) 성서의 사상뿐만 아니라 동양사상에서의 생명 역시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명(命)이란 포괄적인 의미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단순히 숨쉬는 것만을 지칭하지 않고 온 우주의 모든 질서까지도 포함한다. 인간의 생명뿐만 아니라 자연의 질서, 인간 행위의 도덕성 등, 창조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이에 해당된다. 이런 의미에서 명(命)은 천명(天命)이 되며, 따라서 절대적이다. 따라서 명(命)은 인간이 임의로 조작하여 변화시키거나 없애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의 명령은 천(天)이라는 절대성에 근거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신성하며 특별하다. 이는 또한 생명의 존엄성의 근거이기도 하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늘의 뜻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를 구하고, 깨달아 천명(天命)을 수용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다. 바로 하느님의 계약에 충실해야 하는 이스라엘이나, 그 뜻을 실천해야 하는 신앙인의 행위와 같은 것으로 이해된다.6)

 

분명한 것은 생명은 우리가 만들어 내거나,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7) 생명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주어진 생명을 살아갈 뿐이지 생명의 주인은 아니다. 생명의 관리자일 뿐이다.8)

 

 

2.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해 나타난 태아 및 배아 존중 사상

 

그리스도교 이전의 고대 서구 사회, 특히 고대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는 태아에 대한 존중 사상이 크게 부각되지는 않은 듯하다. 이 시대에는 유아 살해와 낙태에 대해 어느 정도 관대한 편이었다는 기록과 동시에9) 다른 한편으로 낙태 시술을 엄격히 금지하려 한 기록도 함께 전해진다. 일반적으로 당시 사람들은 태아를 소극적이긴 하지만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고 인식했고, 출산 전후의 아기 생명을 빼앗는 일 역시, 일상적인 사건은 아니었지만, 당시의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이 시기에는 출생 전의 초기 생명에 대한 적극적인 보호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10)

 

그러나 당시 의료인들의 태도는 일반 시민들의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히포크라테스(BC.460~370년경)는 제자들에게 남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통해 “나는 여성에게 낙태약을 처방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문장을 남김으로써 낙태 시술을 엄격히 금지하였고, 또 기원전 2세기의 한 비문에는, 디오니소스에게 바쳐진 어느 사원 신도들의 “필터나 낙태약, 임신 방지 장치나 다른 유아 살해 수단들을 사용하지도, 권하지도, 사용에 협력하지도 않겠다”는 선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초기 생명이 소중하게 여겨졌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11)

 

또한 다음과 같은 당시의 한 법률 문구는 생명 존중 사상을 매우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임신된 것은 이미 출생으로 간주한다”(Concep-tus pro iam nato habetur). 고대 서구 사회에서 태아는 세상의 빛을 보기 전에는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시기였으며, 따라서 이 문장이 비록 이론적 또는 학문적 의구심을 해결해 주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법적 분쟁, 특히 상속과 관련한 법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법조인들의 추정 사항으로 이 문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12) 그렇지만 그리스' 로마 사회에는 어떤 방법으로든 태아를 보호하기 위한 형법상의 조치는 없었다. 가정에서 태아와 관련된 모든 결정은 가장(家長)의 몫이었고, 가장의 권한에 종속되어 있지 않은 여성은 자기 의사에 따라 결정할 수 있었다고 한다.13)

 

2.1.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

 

태아 존중에 대한 그리스도교 사상은 일차적으로 성서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유대 민족의 뿌리 깊은 전통이나 구약성서의 사상은 생명을 하느님께서 주신,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거룩한 선물로 여기고 있으며, 신약성서, 그중에서 마태오 복음과 루가 복음에서 소개되는 그리스도와 세례자 요한의 잉태 및 임신 기간에 대한 이야기는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마리아가 사촌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뱃속의 두 아기는 이미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주인공으로 소개되고 있다.14) 그리고 루가 복음사가는 태중에 있는 세례자 요한을 가리켜 ‘βρεφοs’(brephos, 뱃속에 든 아기: 루가 1,44)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 용어는 루가 복음사가가 일반적으로 어린 아기15)를 가리킬 때 쓴 표현이다.16)

 

성서의 생명 존중 사상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퍼져 나가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그대로 전승되었으며, 우리는 당시의 여러 기록들을 통해 초기 생명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자세를 살펴볼 수 있다.

 

2.1.1. 디다케

 

2세기 초반의 그리스도교 신자의 생활을 잘 알려 주고 있는 이 문헌은 당시 이교도였던 예비신자들을 위해 특별히 쓰여진 책으로, 가장 먼저 생명에 이르는 길을 선택하라고 가르친다. 디다케는 생명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여야 하며, 다른 이들이 자기에게 하기를 바라지 않은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해서도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17) 특히 그런 이들은 “낙태로 아이를 살인하지도 말고, 갓난아이를 죽이지도 말아야 한다”18)고 매우 구체적인 계명을 제시한다.

 

디다케는 또한 자녀들은 하느님의 작품이며, 따라서 특별한 존엄을 지니고 있으므로 단순히 부모의 소유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침으로써 생명과 죽음에 대한 가부장의 권한에 대해 일정한 제한을 가하였다.19)

 

이 시기의 교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150~215년경)는 피임 문제를 다루면서, 혼외 관계를 숨기기 위해 낙태약을 먹은 여자들은 태아와 함께 자신의 인간성도 잃게 된다고 하였는데,20) 이 기록은 아마도 인간 배아에 대한 존중이 근본적으로 인간 본성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명확하게 말해 주는 최초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21)

 

2.1.2. 테르툴리아노(Tertullianus)

 

태아를 옹호하는 내용 중 가장 유명한 문헌들은 저명한 로마 법률가 테르툴리아노(AD.160~220경)의 저술들일 것이다. 그는 197년부터 206년 사이에 적어도 네 개의 문헌에서 낙태와 유아 살해를 매우 단호하고도 공개적으로 반대하였다.22) 특히 Apologeticum(호교론)에서 기술한 다음의 문장은 출생 전 생명에 대한 테르툴리아노의 사상을 매우 잘 보여 준다. “태아는 이미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낙태는 참으로 의도적인 살인이다.”23) 낙태에 대한 그의 강한 비난은 De virginibus velandis(수도녀에 대하여)에서도 잘 드러난다. 당시에 심각한 악습을 야기한 문제들 중의 하나는 젊은 처녀들의 이중 생활 문제였는데 테르툴리아노는 본인의 의사와는 달리 가족들의 강요로 수도 생활을 시작하게 된 젊은 처녀들이 정결 서약을 지키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륜의 관계까지도 지속하면서, 임신이 되었을 때 이를 감추기 위해 낙태까지도 서슴지 않는 것을 매우 강하게 비난한다.24) 이렇게 테르툴리아노의 사상에서도 인간 생명은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는 그리스도교 사상의 근본 원칙이 재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초대 그리스도교 시대의 낙태에 관한 이러한 사상들은 서서히 낙태죄에 대한 규범들을 형성하여 갔으며, 이러한 규범에 관한 첫 번째 기록은 305년 스페인에서 열린 엘비라(Elvira) 시노드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시노드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두 개의 조항이 결정, 반포되었는데, 하나는 낙태죄는 공동체로부터 파문되며 이는 죽을 때에야 비로소 철회될 수 있다는 조항이고, 나머지 하나는 낙태를 한 예비신자는 죽을 때까지 세례가 연기된다는 조항이다.25)

 

2.1.3. 성 바실리오(St. Basilius)와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us)

 

참회의 교리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성 바실리오(330~379)는 낙태죄와 관련된 참회에 관해서 안키라(Ancyra) 공의회가 승인한 규정을 따라야 한다고 강조한다.26) 그에 따르면 낙태는 언제 이루어지든지 항상 살인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따라서 처벌은 당연하다. 그는 처벌과 관련하여 교정 효과는 형량뿐만 아니라 얼마나 깊이 뉘우치는가에 따라 그 형량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종신형이 아닌 10년 파문형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히포의 주교 성 아우구스티노(354~430)는 낙태죄와 피임이 혼인의 출산 의의와 부부 일치를 심각하게 침해한다는 내용을 처음으로 피력한다. 특히 가정의 일치를 깨뜨리는 낙태와 피임을 시도하는 자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아니라 내연 관계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미 성 아우구스티노 시대에는 태아의 생명을 침해하는 다양한 공격들에 대해 맞서는 규범들과 제도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27)

 

성 아우구스티노는 태아 살해에 대한 형벌 적용에 있어 태아의 형태적 특성에 따라 그 처벌을 달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단순히 출애굽기 21장 22~25절에 대한 그의 성서해석학적 이해에서 비롯된다. 공동번역의 이 본문을 먼저 보도록 하자.

 

“사람들이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밀쳐서 낙태시켰을 경우, 다른 사고만 없으면 그 여인의 남편이 요구하는 배상액을 재판관의 조정하에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사고가 생겨 목숨을 앗았으면 제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출애 21,22~25).

 

출애굽기의 이 구절은 낙태죄와 관련한 교회법과 참회 교리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28)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성서 본문에 대한 성서 주해에서 태아의 특성에 따라 서로 다른 처벌 규정의 가능성을 찾으려고 한 것이다. 태아의 형태에 따른 인간 배아의 이중 정체성의 문제가 이제 서서히 교회 안에서 논의되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의 이러한 이해는 단순히 구약성서의 형법에 관한 성서해석학적인 관점에서의 이해이지 인간 자체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에 대한 접근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2.1.4. 요약

 

태아 존중에 관한 교부들의 문헌을 통해 우리는 초기 4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또 그러한 사상을 어떻게 전달하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태아(배아)가 인간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은 일관적이다. 이 시대에 이는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다. 테르툴리아노가 언급한 대로 ‘예기된 살인’인 태아 살해는 시민이 될 사람을 미리 살인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가장을 포함하여 부모라도 자기 자녀에 대하여 절대적인 권한을 가질 수 없다. 태아의 생명은 생명을 주시고 또 가져가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하느님께 달려 있다. 셋째, 태아를 존중하지 않고 태아의 존재와 신체적 완전성을 공격하는 것은 끔찍한 죄를 짓는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사람으로 타락하는 행위이다.

 

태아 존중과 보호에 관한 교리는 교부 전통, 특히 테르툴리아노, 성 예로니모, 성 아우구스티노를 따라 학문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형성된 배아와 형성 전 배아의 이중 정체성에 대한 가설은 그 후 매우 중요한 주제가 되는데, 이 문제는 서서히 태아의 생명과 완전성에 대한 다양한 공격들을 구별하여 다루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2.2. 11세기 이후의 논쟁

 

태아 존중에 대한 그리스도교 사상은 교부 시대나 그 이후 중세 시대를 거쳐 오면서 일관성을 갖추게 되지만 11세기에 들어서면서 완전한 의미의 인간으로 간주될 수 있는 시점은 언제인가의 문제가 서서히 구체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한다. 이는 곧 태아를 임의로 처치하는 것이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진정한 의미의 살인으로 간주되는가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2.2.1. 성 이보(St. Ivo, 1040~1115)

 

샤르트르의 주교였던 성 이보는 Decretum29)과 Panormia30)에서 태아를 완전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예로니모의 세 가지 주장을 인용하여 대답한다. 곧 태아는 형성 전후가 각각 다르게 인식되기 때문에 그 각각에 대한 처치도 서로 다르게 판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첫 번째 주장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출애굽기 21장 22~25절의 해석31)에 따른 것으로 태아의 특성에 따라 서로 다른 처벌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이 텍스트에 대해 그리스어 성서 번역 70인역U㉯?주해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형성 전후의 태아를 각각 달리 판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순전히 구약의 형법에 관한 성서해석학적 접근이지, 진정한 의미의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이해는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이보는 이러한 관점의 차이를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두 번째 주장도 아우구스티노의 주장이라고 하여 그 근거를 당시 아우구스티노의 저서로 알려진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질문들'(Questiones de Veteri et Novo Testamento)에서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상 이 책은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노의 외경이 아니라는 것이 이미 밝혀졌다.32) 이보는 세 번째 주장을 성 예로니모가 알가샤(Algasia)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용하는데 이 또한 문맥에 있어 실제와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예로니모는 알가샤의 요청에 따라 신약성서의 열한 곳에 대해 자신의 성서신학적 관점을 설명하는데, 제4장에서 마태오 복음 24장 19절을 설명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예로니모는 ‘좋은 사상이라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처럼 수정된 정자도 인간적인 측면을 갖출 때까지는 인간으로 여기기 어렵다’는 단순한 의미의 고행주의적 생각을 무심코 쓰고 있는데, 이보가 바로 이를 인용하여 주장한 것이다. 예로니모의 생각이 그의 성서해설처럼 배아는 인간성이 늦게 부여되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는 주장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33)

 

그러나 12세기 카말돌리 수도회의 수사인 그라시아노는 '그라시아노 법령집'Concordia discordantium canonum)에서 이보가 제기한 문제를 받아들이게 되며, 이 텍스트는 최초로 일치된 시각을 가진 교회법 규범을 제시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비록 개인 저자의 저술이었지만 몇몇 신학적 문제들에 대한 접근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그라시아노는 이보의 글을 인용하여 “육체에 영혼이 깃들기 전에 낙태를 시키는 사람은 살인자가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주장하였던 것이다.34) 이제 형태의 형성에 관한 배아 문제는 영혼주입시기의 문제와 함께 논의되기 시작한다.35)

 

2.2.2.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4?~1274)

 

인간 생명의 시작에 관한 중세의 전통적인 이론들 중의 하나는 인간 배아의 지위에 대한 존재론적 토대로서의 영혼주입설인데 중세신학의 대표적인 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영혼의 단계적 주입이론’을 주장한다. 즉 배아가 최종적으로 인간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영혼은 처음에는 식물과 같은 정적인 상태에서 서서히 동적인 상태, 즉 동물과 같은 상태로 변하기 때문에 영혼은 서서히 주입된다는 이론이다.36) 토마스는 “40일이 지나서야 남아의 잉태가 이루어지고[…]여아는 90일 이전에는 잉태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를 수용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펴는 것이다.37) 토마스는 이렇게 말한다. “동물의 탄생은 하나의 탄생만이 아니라 탄생과 죽음의 연속이다. 우선 씨[胚]의 형태(예컨대, 임신의 첫 단계)가 있고, 둘째로는 생명이 완성될 때까지 (응고된) 피의 형태가 있다. 그리고 죽음과 탄생은 형태를 버리고 취하는 것을 포함하며, 먼젓번의 불완전한 형태는 버려지고, 배아가 완벽한 형태를 갖추게 될 때까지, 더 완벽한 것이 취해진다. 따라서 우선 씨 안에는 식물성의 영혼이 있고, 이는 탄생의 과정에서 성장하며 감수성이 있는 다른 것으로 대체되고, 이는 다시 성장하면서 감수성이 있고 동시에 이성적인 또 다른 것으로 계승된다.”38)

 

토마스에게 있어서 인간의 육체는 영혼이 주입되기 전에 잉태되며, 이는 아담의 모든 후손들에게 있어서 인간 탄생의 한 단계로 이해된다. 다만 성령의 권능에 의해 마리아가 잉태된 순간에 육체가 생명을 갖게 된 예수만이 예외인 것이다. 토마스의 사상적 영향력은 그 이후 배아에 이성적인 영혼이 주입되는 시기는 임신 후 40일이 지나서라고 시간을 고정하게 되었고, 이는 교회 안에서 17세기까지 생명의 기점을 가늠하는 기준적 관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39)

 

토마스 이후의 시대에도 태아 존중의 사상은 변함 없었지만 가끔은 이 문제와 관련된 논쟁이 벌어지곤 했다. 16세기의 저명한 신학자인 예수회 소속의 산체스(Thomas Sanchez, 1550~1610)는 형태가 형성되기 전의 태아는 인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실언함으로써, 그의 개인적인 명성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대다수 신학자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샀던 것이다. 비록 형태가 형성되기 전의 태아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영혼이 들어오기 이전의 단계라고 하더라도 미래의 인간(futurus homo)이라는 사실은 반드시 고려되고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주된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나치게 해이한 사상이 담긴 산체스의 대부분의 논문들은 1세기가 지난 1679년에 인노첸시오 11세 교황 재임시 검사성 훈령에 의해 오류적 사상으로 분류되었다.40)

 

2.2.3.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와 그 이후

 

우리는 1566년에 출판되고 최근 1923년에 재판된 트리엔트 공의회의 "문답집"에서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매우 흥미로운 문장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복되신 동정녀가 천사의 말에 동의하자 즉시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육체가 형성되었고 영혼이 여기에 결합되었다.[…]어느 누구도 이것이 새로운 사건이며 또한 성령의 놀라운 업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연 질서 안에서는 어떠한 육체라 할지라도 반드시 영혼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41) 그리고 1713년의 교황청 훈령에서도 다음의 문장이 발견된다: “만일 태아가 이성적인 영혼에 의해 생명을 갖게 된다는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면 그 태아에게는 조건부로 세례가 베풀어져야 한다. 그러나 영혼이 주어진다는 합리적인 근거가 없다면 세례는 결코 베풀어질 수 없다.”42)

 

위에서 살펴본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혼의 단계적 주입이론’이 토마스 이후 300년 가까이 가톨릭 교회의 인간 배아의 지위에 대한 인식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지만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의 기록들은 서서히 토마스의 이론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17세기 이후 얀세니즘 사상의 영향은 매우 엄격한 도덕적 성향을 형성시키면서 ‘영혼의 단계적 주입이론’에 대한 논의는 현저하게 사라지고 만다.43)

 

비오 9세가 1854년 선포한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수태’ 교리는 마리아가 처음 수태되는 순간부터 원죄로부터 벗어났다는 가톨릭 신앙을 확인한 것이었고, 이 교리는 적어도 교회가 임신의 순간에 즉각적으로 영혼이 들어간다는 입장을 확인해 주는 주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44) 교회 당국의 입장에서 즉각적으로 영혼이 주입된다는 입장을 채택한 주요 동기는 영혼 주입이 과정 혹은 점진적인 발달일 수가 없다는 확신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인간 영혼은 물질적인 구성 요소를 가지지 않으며, 전체로 있든지 전혀 없든지 하는, 순수 영적 실체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당시 이러한 논의 한가운데에서도 태아에 대한 절대적인 존중 사상은 어떠한 의심도 없었으며, 태아의 생명을 직접 침해할 수 없다는 윤리적 규정에도 전혀 예외가 없었다는 것은 당연하다.45)

 

이렇게 이 시대의 특징으로 드러나는 것은 이제 교회의 법제들이 형성 전후의 배아에 대한 문제나 영혼 주입의 시기와 관련된 문제들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로 1869년 비오 9세 교황은 교회법의 형법을 개정하면서 형태의 형성 전후의 배아나 영혼이 부여된 배아 혹은 영혼이 부여되지 않은 배아에 대한 일절의 구분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46) 당시 교회의 이러한 입장은 영혼이 인간 생명의 가장 초기 시점 즉 수정시에 주입된다는 것을 권위 있게 진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그 확실한 근거가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서술되고 있지는 않지만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가톨릭 교회가 가져온 인간 배아의 지위에 대한 인식이 반영된 결과가 그 이유일 것이다.

 

 

3. 현대의 교회 문헌에 나타난 인간 배아 존중

 

인간 배아의 지위 문제는 현대에 들어서면서 교회 안팎에서 토론의 쟁점이 되었다. 특히 생명공학의 발달은 인간 생명의 시작 시점을 시간대로 나누어 토론하기 시작했으며, 급기야는 생명공학 분야나 시민 단체 등에서 생명의 시점을 합의로 도출하자는 의견도 제시되는 웃지 못할 상황에 이르렀다.47) 그러나 인간 생명의 시작에 관한 문제는 설사 우리가 그 출발점을 아직 잘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올바른 지성과 참된 인식력을 통해 추구해 가는 참된 지식의 탐구에 관한 문제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곧 이 문제는 합의를 통해 결정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그리스도교의 전통에서 인간 배아와 관련된 논쟁은 주로 형법과 참회에 관한 규정의 문제가 주를 이루었는데, 현대에 와서는 그 양상이 매우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는 낙태 문제라든가, 낙태인지 피임인지를 혼동케 하는 다양한 방법의 피임법, 인공 출산과 더 나아가 초기 단계의 인간 배아에 대한 실험이라든가 인간 배아 복제의 문제까지 다양하게 드러나고 있는 인간 배아에 대한 경시 및 파괴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현대의 양상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염려는 더욱 커지게 되었고, 이에 인간 생명의 시작 문제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관심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20세기에 발표된 가톨릭 교회의 문헌은 이전까지와는 달리 인간 배아의 지위 문제를 매우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초대교회에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의 논점이 형태가 형성되었는지 아닌지, 혹은 영혼이 부여되었는지의 여부와 관련되었다고 한다면 현대에 들어서면서 교회의 관심은 그러한 논쟁들을 모두 극복하면서 보다 분명한 태도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3.1. '인공유산반대선언문'(1974년, 신앙교리성)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인간 배아 존중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되면서 인간의 생명은 임신의 순간부터라고 매우 명확하게 가르치기 시작한다. 비오 9세 이후 교회의 법제들에서는 배아의 형태와 관련하여 형벌의 차이가 있다는 과거의 논의가 모두 사라졌고, 인공 유산을 엄격히 단죄하는 비오 12세의 회칙 '정결한 혼인'(Casti connubii, 1930년)은 인간 배아에 언제 영혼이 주입되는가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48)

 

인간 배아의 지위와 관련하여 첫 번째 중요한 문헌은 1974년 교황청 신앙교리성이 반포한 '인공유산반대선언문'이다. 물론 그 이전에 반포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에서도 “생명은 임신의 순간부터 최대의 배려를 받아야 한다”49)고 언급함으로써 배아도 생명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지만, '인공유산반대선언문'은 더욱 체계적이고도 일관된 관점에서 생명 존중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확언하고 있다. 곧 ‘태아(배아 포함)는 모든 인간이 받아야 하는 것과 똑같은 무조건적인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이 문헌에서 강조하는 구절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실제로 인간 생명의 존중은 임신되는 첫 순간부터 요구된다. 난자가 수정되는 순간부터, 아버지의 것도 어머니의 것도 아닌, 한 새로운 사람의 생명이 시작된다. 그것은 그 자신의 성장을 가지는 한 새로운 사람의 생명인 것이다. 만일 그것이 사람의 생명이 아니라면 결코 그것이 사람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영혼이 언제 부여되느냐에 대한 논쟁과 전혀 별도로, 현대 유전학은 이 자명한 불변의 원리를 확인해 준다. 이 생명체가 자라나서 충분히 결정된 독자적인 특성을 지닌 한 사람이 될 프로그램이, 임신되는 첫 순간부터 수립되었다는 사실을 유전학은 증명해 주었다.”50) 이 문헌 역시 영혼 주입의 문제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교도권은 이제 더 이상 영혼 주입의 시기 문제를 인간 생명의 시작 문제와 결부시키려는 의도가 없어 보인다.51) 신앙교리성의 위 문장은 ‘생명은 그 시작에서부터 당연히 존중되어야 한다’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재확인하고 있으며, 적어도 인간 개인의 개체성과 인격성은 임신되는 순간에 출현한다는 사상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러나 신앙교리성의 다음 문장은 위에서 언급되는 ‘인간 생명의 시작’과 관련하여 약간의 토론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언제부터 인간이냐, 혹은 인공유산의 합법성 여부 등에 대한 결정적 판단은 생물학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적' 윤리적 문제이다. 설령 태아가 인간이냐 아니냐에 관해서 아직 의문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감히 살인을 무릅쓴다는 것은 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확실히 객관적으로 중죄이다. 인간이 될 자는 이미 인간이다.”52) 이 문장에 의하면 배아의 본질에 대한 토론은 철학의 영역에 속한다. 영혼의 존재 유무를 확인할 수 있는 자연과학이라든가 실험적인 학문의 방법론으로 확인되고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앙교리성이 이러한 언급을 하게 된 배경에는 과학적 방법론의 인식론적 한계를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과학적 주장들의 그 근거 가치들에 대해 경종을 울리려는 데 있다고 여겨진다.53) 그러나 이 문장에서 논쟁이 되는 것은 초기 배아의 인간 본질에 관한 개연성의 문제이다.54) 이 문장에 따르면 ‘교회는 임신의 순간부터 한 사람의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며, 이때부터 인격체로서의 인간이라고 가르치는데 그 사실에 대해서 비록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는 없는 의심이 남아 있더라도 수정된 난자를 파괴하는 것은 심각한 잘못일 것이다’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고, 이 문제에 대해 교도권조차 확실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논의에 있어서 신앙교리성은 배아의 정체성 문제와 윤리적 문제를 구분하고자 했던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가 있다. 배아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는 아직도 여러 분야에서 논의되고 있기 때문에 비록 그들이 아직은 배아의 정체성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는 따르지 않을 어떠한 근거도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과학적 실험으로 영혼의 존재 유무를 확인할 수 있는 장치는 없지만 생명에 대한 개연성은 그러한 실증이 없어도 누구나 다 인정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개연성만으로도 인간의 초기 생명은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55) 따라서 우리는 위의 문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겠다. “인간 배아는 당연히 인간 생명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만일 이에 대한 가톨릭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이 미심쩍다 하더라도, 곧 난자가 수정되는 순간이 인간 생명의 시작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 때문에 인간 배아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 배아가 아직 사람이 아니라는 확실성도 없는 상태에서 그 배아를 해치는 행위는 언제나 윤리적으로 정당하지 못하다. 이는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위험을 초래하는, 객관적으로 중대한 죄이다.”

 

3.2. '생명의 선물'(1987년, 신앙교리성 훈령)56)

 

이 훈령은 인간 생명의 시작에 관한 교도권의 가르침을 재확인하면서 모든 인간 생명은 임신되는 순간부터 철저하게 존중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부 생명과학의 분야에서 인간의 초기 생명에 대한 실험과 조작이 이루어지면서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나아가 파괴하는 현실에 대한 교도권의 염려가 이미 이 문헌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인공 수정과 유전자 조작 기술의 발달은 결국 생명으로서의 인간 배아를 단순히 생물학적 재료의 수준으로 격하시켰고, 이에 따르는 여러 행위들, 예컨대 사람과 동물 생식세포 사이의 수정이라든가 인간 배아를 동물 자궁에 착상시키는 일에 대한 시도, 체외에서 얻은 배아에 대해 부당한 위험을 초래케 하는 행위들에 대해 신앙교리성은 그러한 모든 행위가 생명의 존엄성을 거스르는 일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선물'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임신되는 순간부터 모든 인간 생명은 철저하게 존중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그 자신을 위해 바라셨고 개개인의 영성이 하느님에 의해서 직접 창조됨으로써 그 전체가 창조주의 모습을 간직한 지상의 유일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인간 생명은 성스럽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생성 초기에서부터 하느님의 창조 행위에 연결되며 또한 모든 생명의 목적이기도 한 창조주와의 특별한 관계로 영원히 남게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만이 그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어떤 경우에도 그 스스로 무죄한 인간을 직접 파괴할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다.”57) 신앙교리성은 생명 존중의 의무를 생명 시작의 관점에서 끌어내지는 않는다. 곧 생명에는 창조주 하느님의 모습이 담겨 있고 그 시작부터 창조주와의 특별한 관계가 계속되기 때문에 생명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58) 훈령은 또한 초기 생명을 보살펴야 하는 근본 이유도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에서 찾고 있다. 모든 인간은 똑같이 창조주 하느님과 영원히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존중되어야 하며, 따라서 비록 초기 생명으로서의 배아라고 하더라도 완전한 성인이 될 때까지의 성장과 발달에 관련된 이론적 인식론적 의문들에 관계없이 언제나 그 존엄성을 존중받아야 하는 ‘인간’이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선물'이 이렇게 인간 생명의 기원에 대한 존엄성을 언급하는 것은 '인공유산반대선언문'과 비교할 때 일보 진전을 이룬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생명의 선물'이 언급하고 있는 하나의 중요한 문장은 “인간은 그 존재의 첫 순간부터 인격체로서 존중되어야 한다”59)는 것이다. 이는 인간 배아에 대한 윤리적 의무에 관해 하나의 공식으로 제시된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공식화는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드러나는 숱한 문제들과 관련하여 한층 더 중요해졌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태아에 대한 심각한 위협은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낙태뿐이었으나 출산 보조 기술, 유전공학, 재생의학 등의 발전으로 인간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새로운 분야들이 많이 생겨났다. 불임을 극복하기 위해 체외수정을 시도하고, 미래 의학을 위해 배아로부터 줄기세포를 추출해 내는 등의 행위들에 비록 직접적으로 생명을 파괴할 의도가 개입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 과정과 결과는 결국 생명의 파괴이며 생명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행위임에는 틀림이 없다. 훈령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응답하기 위해 인간 생명의 불가침성을 직접 위협하지는 않는 상황들도 허용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하는 원칙을 공식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훈령은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특성을 지닌 주체는 분명히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에 속하며, 따라서 윤리적 관점에서 인간으로 여겨지고 또 그렇게 대접받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따라서 인간 생식의 결실인 생명은 그 존재의 시작, 즉 남녀 생식세포 접합체의 형성 시기부터 육체와 정신의 합일체인 인간 존재로서 무조건의 존경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수정되는 순간부터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경받고 대접받아야 한다.”60) '생명의 선물'이 서술하는 문장의 형식은 새롭지만 그 내용의 본질은 과거 이천 년 동안 그리스도교가 일관되게 가르쳐 온 전통과 일치한다.61)

 

3.3. 회칙 '생명의 복음'(1995년, 요한 바오로 2세) 

 

“무고한 인간 생명을, 특히 그 시작과 마지막 단계에서 직접적으로 죽이는 것은 절대적이고 심각한 도덕적 불법이다.”62) 회칙 '생명의 복음'은 교회 역사를 통해서 끊임없이 인간 생명의 존중을 강조해 왔던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가르침을 재확인하면서 동시에 위 문장과 같은 생명 존중의 일반 원칙이 교도권의 무류권적 가르침이라는 것을 강조한다.63)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낙태와 관련된 윤리성을 인간 배아에 대해 행해지는 최근의 여러 조작 형태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고 언급하면서, 오늘날 복잡한 논쟁의 양상으로 진행되는 인간 생명의 시작 문제에 대해 결코 무관심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힌다. 이에 대해 '생명의 복음'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배아나 태아를 실험의 대상으로 이용하는 것은 그들이 인간으로서 지닌 존엄성을 침해하는 범죄가 된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출생한 아기들을 존중해야 하는 것과 똑같이,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존중되어야 합니다.”64)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생명의 복음'을 통해 이전의 두 문헌 즉 '인공유산반대선언문'과 '생명의 선물'에서 가르치는 생명 존중에 대한 확고한 윤리적 원칙을 재천명하고 있지만,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지금까지의 생명 존중 문제에 대한 접근법이 변화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곧 이전까지의 문헌들이 과학적 자료와 철학적 성찰에 관심을 두었다고 한다면65) '생명의 복음'은 신학적 반성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인간 이해는 무엇보다도 성서의 인간 이해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복음'이 태아를 논할 때 성서 본문을 여러 차례 언급한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66) 특히 이 회칙의 매우 인상적인 점은 하느님께서 태중에 있는 인간 생명도 당신 눈에 얼마나 소중한지를 우리에게 명백하게 드러내 보여 주셨다는 것을 지적한 부분이다. 회칙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모든 인간은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부터 하느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을 자세히 꿰뚫어 보시고, 그들을 아시며, 당신 손수 그들을 빚으시고 엮으셨으며, 그들이 형상조차 생기지 않은 작은 태아일 때 그들을 바라보시며, 그 태아들 안에서 이미 장차 성인이 될 그들을 보십니다. 그들의 날들은 이미 정해지고, 그들의 소명은 지금 이미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시편 139,1.13~16). 성서의 많은 대목들이 증언하고 있듯이, 그들이 아직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 이미 그들은 그곳에서도 하느님의 자비롭고 아버지다운 섭리의 인격적인 대상입니다.”67)

 

'생명의 복음'은 인간 생명의 시작이라는 이론적인 문제를 공공연하게 단언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문제에 대한 신학적, 성서해석학적, 인간학적인 성찰이 좀더 심도 있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68)

 

 

마치는 글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 생명, 특히 출생 전 인간의 초기 생명의 존중에 관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통해 살펴보았다. 첫 부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간 생명은 창조주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하느님의 가장 위대한 선물이며,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생명일지라도 스스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어떠한 권한도 갖지 못한다. 인간 생명의 주인은 창조주 하느님이며, 인간은 단지 그 생명을 보호하고 가꾸어 나가는 생명의 관리자라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기본적인 생명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생명은 이처럼 하느님의 고귀한 선물이며, 하느님의 숨결이 살아 움직이는 고유한 창조물이기 때문에 당연히 언제나 소중하게 다루어져야 하며 존중되어야 한다. 생명의 존엄성 사상의 기초는 무엇보다도 성서가 제공해 주고 있으며, 성서는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을 섬기듯이 인간 생명도 그만큼 존중해야 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으로부터 기원하며,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표지인 동시에 창조물이기 때문에 항상 존엄성을 지닌다는 생명 존중 사상은 그리스도교 역사 전체를 통해 언제나 변함없이 강조되어 왔으며, 따라서 초기 생명의 살해인 낙태 등의 행위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한 형벌 기준을 마련하여 시행해 왔던 것이다.

 

본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초기 생명의 존중에 관한 가르침들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는 주로 성서를 기초로 하여 여러 교부들의 사상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는데, 시대가 지나면서 생명 존중의 문제는 낙태와도 같은 초기 생명에 대한 다양한 공격과 파괴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주로 교회법 분야에서 형벌의 차원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낙태죄에 대한 엄격한 규정들이 교회법의 차원에서 논의되기 시작하였고, 그 규정들이 세분화되면서 인간 생명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형벌 체계가 논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해 인간 생명을 논했던 기준은 주로 다음의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형태학적 기준인데, 이는 본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출애굽기 21장 22~25절의 70인역 번역으로부터 생겨난 태아의 구분을 성 예로니모와 성 아우구스티노가 받아들임으로써 그 후 매우 오랜 시기 동안 그리스도교의 형벌 체계에 큰 영향을 끼쳤던 기준이다. 즉 형태학적 기준에서 인간으로서의 외관을 갖춘 존재가 형성된 존재이고, 이때부터 신체적인 차원에서 인간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낙태죄도 형성 전과 후가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다. 둘째는 시간적 기준인데 고대 희랍의 사상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에서부터 연유한다. 그는 남아와 여아의 영혼 존재 여부는 각각 수정 후 40일, 90일이 지나야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시기 이전의 태아는 아직 형성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사상에서부터 영혼은 수정 후 40일이 지나면서 단계적으로 주입되기 시작한다는 주장이 17세기까지는 교회의 기준적 관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시간적 기준이 영혼주입이론과 맞물리면서 세 번째 기준으로서의 존재론적 기준이 생겨난다. 곧 ‘형성된 배아’ / ‘형성 전 배아’ ‘영혼이 주입된 배아’ / ‘영혼이 주입되기 전의 배아’는 존재론적 차이가 있다는 주장이다. 영혼주입이론은 19세기까지 인간 배아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역사 안에서 이 세 가지 기준은 단지 형벌 체계에서 논의된 것이지 그 기준에 따라 인간이다, 아니다를 결정했던 것은 아니다. 이 세 가지 기준은 인간 생명의 시작 문제를 풀어 가는데 귀중한 도움을 주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이 세 기준의 조화는 사실상 역사적으로 볼 때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인간 생명에 대한 각각의 기준에 대해 인식론적 이해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곧 인간 생명을 단순히 생물학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순수하게 영적인 차원에서만 접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 생명의 시작에 관한 논의는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지금까지의 논의 방식과는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그 전까지의 논의의 쟁점이 영혼의 주입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면 이제부터의 접근은 지금까지의 방법론을 벗어나 보다 직접적으로 인간 배아의 지위와 본질에 대해 강조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인간 생명의 시작에 관해 그것이 생물학의 문제가 아니고 철학적, 윤리적 및 신학적 문제라고 강조하면서도 생물학의 차원을 절대로 간과하지 않는다. 신앙교리성의 '인공유산반대선언문'이 인간 생명의 시작을 발생학과 유전학을 통해 설명하려 한 것도 인간 생명에 대한 이해는 절대로 생물학적 관점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수용한 것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 배아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성찰까지 더한 것이다. 인간이 될 자는 이미 인간이며, 생명은 그 시작에서부터 당연히 존중되어야 한다는 그리스도교의 전통과 함께, 인간 개인의 본질적 특성으로서의 인격성과 개체성은 이미 그 존재의 처음부터 발생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신앙교리성의 훈령 '생명의 선물'이 명확하게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인간 배아는 명백한 인격체라는 사실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인격체’라는 용어 자체를 일상적인 어법으로 이해할 때, 그것은 이성을 지니고 자유로운 의사 선택을 할 수 있고, 감각' 경험' 감정' 의지' 행동 등에 있어서 논리적이며 연속적이고 자율적인 중심을 지니는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지만 신앙교리성이 사용하고 있는 이 용어는 배아의 순간에서부터 이미 인격적인 능력이 주어지고 인격적 활동의 충분 조건으로서의 유기체적 발달 단계가 진행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비록 감각' 경험' 의지 등의 활동이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한 활동의 조건으로서의 인격체적 자질을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충분히 ‘인격체’의 의미가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69)

 

오늘날 인간 생명의 시작에 관해 이미 수많은 이론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70) 특히 생명공학의 발달은 이 논쟁을 더욱 가속화시킨다. 배아 복제 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간 생명의 시점 문제는 점점 더 세분화되어 논란거리가 되고 있지만,71) 대부분의 주장은 인간 생명을 생물학적인 관점에서만 이해하려고 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 인간 생명의 시작 문제는 비록 생물학적, 육체적인 것에서부터 시작되지만 그 본질을 인식하고 정의하는 것은 존재론적 인식의 차원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요한 바오로 2세가 회칙 '생명의 복음'을 통해 강조하는 것처럼 인간은 하느님께서 손수 빚으시고 엮으신 소중한 존재이다. 인간 존재가 아직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라도 그들을 이미 하느님의 자비롭고 아버지다운 섭리의 인격적인 대상이라고 받아들이는 성서적' 존재론적 시각을 인간 생명의 근본 문제로 인식할 때, 우리의 생명 시작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72)

 

인간 생명의 이해 문제와 함께 생명의 시작에 관한 다양한 의견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제기되면서 나타나는 한가지 시도는 소위 합의라는 형식으로 의견 일치를 이루고자 하는 것인데 인간 생명의 출발점 문제는 본질적으로 합의 형식으로 도출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곧 생명의 출발점이라는 인간 생명의 본질의 문제는 함께 풀어 가야 하는 탐구의 영역이며, 이를 위해 생물학적 · 철학적 · 존재론적 · 신학적 · 윤리적 인식을 모두 충족시켜야 하는 진리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의 문제는 올바른 지혜와 인식력으로 도달해야 하는 영역이지 합의라는 이름으로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스도교의 생명 존중에 관한 가르침의 역사는 인간 생명의 영역을 가능한 대로 밝혀 내고 이를 철저히 보호하려고 노력했던, 인간 생명의 존중에 대한 도덕적 진리 추구의 역사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제 이 시대에 요구되는 것은 지금까지 추구해 온 이 도덕적 진리를 계속해서 밝혀 가는 가운데 이를 실천하는 일이다. 도덕적 진리란 인간 존재의 존엄과 가치, 궁극성을 알려 주는 진리이며, 생명 존중을 요구하고 또 명령하는 진리이다.73)

 

인간의 초기 생명에 대해 가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도덕적 진리의 내용을 명확히 표현하는 신앙교리성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이 글을 끝마친다.

 

“난자가 수정되는 순간부터, 아버지의 것도 어머니의 것도 아닌, 한 새로운 사람의 생명이 시작된다. 그것은 그 자신의 성장을 가지는 한 새로운 사람의 생명이다. 만일 그것이 사람의 생명이 아니라면 결국 그것이 사람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74) “인간은 그 존재의 첫 순간부터 인격체로서 존중되어야 한다.”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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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조: 이동익 편, '개정판:생명의 관리자', 가톨릭대학교출판부, 1995, 22~25쪽.

2) 하이임은 창세 2,7과 욥기 24,22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생명, 숨을 의미하며, 네페쉬는 일차적으로 숨이나 음식을 넘기는 목구멍, 목이라는 신체기관을 지칭하면서 동시에 생명의 의미로도 사용된다(참조: 잠언 8,35; 시편 30,4; 신명 12,23; 레위 17,11). 그리고 루아흐의 본래 뜻은 ‘바람’ ‘영’이 갖고 있는 힘으로서 ‘숨’이라는 의미와 연결되어 생명을 의미하기도 한다(참조: 창세 6,17; 7,15; 이사 42,5). 마지막으로 너샤마는 숨결을 의미하며 ‘루아흐’와 동의어로 쓰이기도 한다. 참조: 김영남, '그리스도교의 생명 이해','가톨릭 신학과 사상' 20(1997/여름), 가톨릭대학교출판부, 65~66쪽.

3) 참조: 같은 글, 65~74쪽; 조규만, '신학적 관점에서 본 생명', 한국생명윤리학회, '생명윤리' 제2권 2호(2001/12), 85~90쪽; 한스 발터 볼프, '구약성서의 인간학', 신학총서 10, 분도출판사, 1976, 117~123쪽

4) 참조: 이동익 편, 앞의 책, 26~27쪽.

5) Cfr. B.Haring, Etica medica, Ed. Paoline, Roma, 1979(5ed.), pp.119~126.

6) 참조: 유명종, '중국사상사(1)', 이문출판사, 1983; 김충렬, '중국철학산고',온누리, 1990.

7) 넓은 의미로 ‘개념’을 포함하는 라틴어 단어 ‘natura’는 ‘태어나게 한다’는 의미를 지닌 ‘nascor’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고, 같은 의미의 희랍어 명사 ‘φυσιs’(physis)는 ‘φυω’ (phyo)라는 동사에서 비롯하는데 역시 ‘존재하도록 만들다, 발생시키다, 성장시키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렇게 볼 때 라틴문화권, 희랍문화권의 두 문화권의 생명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는 외부의 어떤 제공자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고 볼 수 있다. Cfr. W.Brede Kristensen, The Meaning of Religion, The Hague, 1971(2ed.), p.194; 참조: 박일영, '원시종교의 생명관 - 한국 무속과의 비교연구', '가톨릭 신학과 사상'(1992/ 6), 103쪽.

8) 이동익 편, 앞의 책, 27~33쪽.

9) Cfr. E.Nardi, Procurato aborto nel mondo greco-romano, Giuffre, Milano, 1971.

10) 예를 들어 플라톤(BC.427~347년)은 이상적인 국가에서는 자녀만 출산하지 않는다면 55세 이상의 남자와 40세 이상의 여자는 자유롭게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의거하여 필요할 경우에는 낙태수술과 심지어는 유아 살해까지도 감행할 수 있을 것이다.(Cfr. The Republic 4, 460)

11) Cfr. E.Nardi, op.cit., p.65; S.Spinsanti(ed.), Documenti di deontologia e etica medica, Paoline, Milano, 1985, p.19.

12) Cfr. Ignacio Carrasco de Paula, op.cit., p.49.

13) Cfr. Ibid., p.50.

14) Cfr. B.Ha?ring, op.cit., pp.70~72; Cfr. Ignacio Carrasco de Paula, op.cit., pp.50~51.

15) 루가 18,15: “사람들이 어린 아기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기를 청하였다.” 여기서 사용되는 ‘어린 아기’ 단어는 루가 1,44에서의 ‘뱃속의 아기’와 동일한 단어이다.

16) 갈라 5,19~21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일을 일삼으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없기 때문에” 멀리해야 할 비도덕적인 행동으로서 “육정이 빚어 내는 몇 가지 일”을 열거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보통 ‘마술’(witchcraft)이라고 번역되는 ‘독약 살해’도 포함된다. 그런데 이 표현이 낙태약의 사용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 타당한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AD.81년에 반포된 '암살자와 마법사에 관한 코르넬리아 법전'(Lex Cornelia de sicaris et veneficis)에서는 이미 그 내용에 있어서 태아의 죽음을 야기할 수 있는 독약이나 물약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오로 사도가 열거하고 있는 내용들 가운데 우상숭배 다음에 독약 살해를 꼽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 단어를 반드시 마술에만 국한시켜 해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낙태약의 복용은 일반적으로 마술 또는 미신 의식과 결합되어 있었으며, 마술사나 거짓 의사가 주로 낙태를 시술했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본다면 이러한 주장은 더욱 신빙성이 있다. 요한 묵시록을 보아도 살인과 음행 같은 다른 죄들을 이야기하면서 마술(φαρμακων: pharmakon, 9, 20~21)을 한 번 언급하고 있으며, 이러한 약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마술쟁이’(φαρμακοι: pharmakoi, 21,8; 22,15)라는 표현이 두 번 사용되고 있다(Cfr. Ignacio Carrasco de Paula, op.cit., p.50).

17) 참조: 정양모 역,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디다케' 교부문헌총서 7, 분도출판사, 1993, 1-2. 21쪽.

18) 같은 책, 2-2, 31쪽.

19) 같은 책, 5,1-2, 51쪽: “죽음의 길은 이렇다.[…]자신들을 만드신 분을 모르는 자들, 유아 살해자들, 하느님의 작품을 낙태시키는 자들[…]아들들아, 이 모든 자들을 멀리하여라.”

20) Paedagogus, 2,10(PG 8, 514).

21) 비슷한 시기에 로마의 법률가 미누키우스 펠릭스(Minucius Felix)는 이교도들이 약으로 태아를 죽이는 것은 자기 아이를 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삼켜 먹은 사탄의 행동과도 같다고 말하였다. 이 경우 근친살해라는 용어가 적절하겠다. 당시 로마법을 따르면 근친살해는 매우 중대한 죄이므로, 낙태는 살인보다도 더 무거운 죄라는 해석도 가능하다[Legatio Pro Christianis, 35(PG 6, 970); Cfr. Ignacio Carrasco de Paula, op.cit., p.52].

22) 이 네 문헌은 호교학 관련 저술인 Ad Nationes와 Apologeticum 그리고 금욕주의적이고 윤리적 특성을 가진 De Exhortationem Castitatis와 De Virginibus Velandis이다.

23) Apologeticum, 9, 8(PL 1, 319~320).

24) Cfr. Ignacio Carrasco de Paula, op.cit., p.54.

25) 엘비라 공의회 이후 314년 안키라에서 소집된 공의회는 낙태에 관한 엄격한 처벌을 상당 부분 완화시켰다. 21조에서는 종신파문 대신 10년간의 보속을 규정하고 있다. 이 처벌은 안키라 공의회가 규정하고 있는 고의적인 살인에 대한 종신파문과 고의적이지 않은 살인에 대한 5년간의 교회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의 중간 정도 되는 처벌이었다. 이 규정들은 524년 레리다(Lerida) 공의회에서는 좀더 완화된 형태로 변화된다. 보속은 7년형으로 줄어들었지만 참회는 평생 지속되었고, 성직자들의 직위는 정지되었으며, 낙태약을 처방했던 사람들은 죽기 전에야 용서받을 수 있었다(Cfr. Ignacio Carrasco de Paula, op.cit., pp.54~56).

26) Epistola 188, 2(PG 32, 671).

27) Cfr. De nuptius et concupiscentia, 1, 15, 17(PL, 44, 424). Cfr. Ignacio Carrasco de Paula, op.cit., pp.57~58.

28) 새 불가타 성서의 번역에서는 두 사람이 다투다 임신한 여자를 우연히 밀쳐서 낙태시킨 경우를 이야기한다. 이 경우 제시된 법적 해결은 다음과 같다. 아이만 잃은 것이면 잘못을 저지른 쪽에서 그 여자의 남편이 요구하는 만큼 또는 공정한 재판관이 규정하는 만큼 배상해야 한다. 그러나 손해가 그 이상이면 ‘눈에는 눈’ 법칙이 적용되어야 한다(Nova Vulgata, Libreria Editrice Vaticana, 1986): 그러나 70인역 그리스어 성서의 번역은 본래의 마소라 본문에 없던 새로운 면이 보이는데, 그것은 바로 형성된 태아와 형성되지 않은 태아 사이의 구분이다[A.Rahlfs(ed.), Rivilegierte Wurttembergische Bibelanstalt, vol.I., Stuttgart 6 ed., s.d.]. 수세기 동안 70인역 성서를 그리스어 성서의 대명사로 생각해 온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이 성서 번역이 지니는 권위 때문에, 이 구절은 교회법과 형벌의 개정에서 특히 염두에 둔 구절이었으며, 태아가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영혼을 가진다는 이론을 주장했던 신학자들의 논거로 쓰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근거 위에 낙태에 대한 윤리적 판단에도 변화가 생겼는데, 태아가 이미 인간의 특징을 갖추고 있을 때에만 살인으로 판단한다는 주장이었다(Ignacio Carrasco de Paula, op.cit., pp.56~57).

29) Cfr. Decretum 10, 56~58; PL 161, 706~707.

30) Cfr. Panormia 8,12~14: PL 161, 1307~1308.

31) 참조: 2.1.3의 각주 28.

32) Cfr. Quaestiones in Heptateuchum 2, 80(PL 34, 626).

33) Epistola 121, 4(PL 22, 1015), St. Ivo, Decretum 10, 58(PL 161, 707); Cfr. Ignacio Carrasco de Paula, op.cit., pp.56~57. 60~61.

34) Decretum Gratiani, causa 32, q.2. cap.8.

35) Cfr. Ignacio Carrasco de Paula, op.cit., pp.60~61.

36) 토마스는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남자아이의 경우 첫 번째 움직임은 보통 자궁의 우측에서 약 40일째에 발생하지만, 여자아이의 경우에는 자궁의 왼쪽에서 약 90일째에 발생한다.[…]이 기간 동안 그 이전까지는 살덩이와 같이 어떤 형체의 구분 없이 물체로 이루어졌던 배아가 이때부터 구별된 부분들로 분해되기 시작한다. 유출(effluxion)이라 불리는 것은 1주일 내에 배아가 파괴되는 것이고, 낙태는 40일쯤에 이르러 파괴되는 것이다.[…]40일쯤 낙태되는 남자 배아의 경우 만약 냉수에 담가지면 막과 같은 것 안에서 합쳐지지만, 다른 유체 안에 담가진다면 용해되어 사라진다. 큰 개미 정도의 크기로서, 배아를 억제하며 당기던 이 막이 벗겨진다면 성기(性器)를 포함해서 다른 동물들에서도 볼 수 있는 크기가 큰 눈 등의 모든 지체를 더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 배아는 첫 3개월 동안 낙태된다면 대개 별다른 차이가 없다. 만약 4개월에 다다른다면 그 지체들은 분리되고 나아가 차별성은 더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한다”[Historia animalium, VIII, 3; 583b.

37) Cfr. Thomas Aquinas, In III Sententiarum, dist.3, q.5, art.2.

38) Thomas Aquinas, De Anima, art.11.

39) Cfr. John Mahoney, Bioethics and Belief, London, 1988(3ed.), pp.58~59; 그러나 이 시대가 전적으로 ‘영혼의 단계적 주입이론’만 지지되던 시기라고는 말할 수 없다. 같은 시대의 신학자 알베르토 막뉴스(1200?~1280)는 태아에게 있어서 영혼은 한순간에 즉각적으로 주어진다고 주장하면서 ‘영혼의 단계적 주입이론’을 반대한다(Cfr. B.Ha?ring, op.cit., pp.70~72).

40) Cfr. Ignacio Carrasco de Paula, op.cit., pp.64~65.

41) Joseph Dunceel, S.J., “Immediate Animation and Delayed Hominization”, TS 31(1970), p.89, in Carol A.Tauer, “The tradition of Probabilism and the Moral Status of the Early Embryo”, Patricia Beattie Jung &Thomas A.Shannon(ed.), Abortion Catholicism, The American Debate, New York, 1988, p.77.

42) Joseph Dunceel, S.J., op.cit., p.77.

43) Cfr. Ignacio Carrasco de Paula, op.cit., p.66.

44) Cfr. John Mahoney, op.cit., pp.59~60.

45) 직접 낙태와 간접 낙태에 대한 구분은 이미 15세기의 기록에서 발견된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프란치스코회 신학자인 안토니오 데 코르도바(Antonio de Cordoba, 1485~1578)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는 태아의 죽음을 야기할 수도 있는 약을 산모에게 처방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허용 가능한가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검토하였다. 그는 답변에서 공격자를 죽일 수 있는 자기 방어 행위의 합법성을 주장할 때 성 토마스가 이미 사용했던, 직접적-고의적인 행위와 간접적-고의적 행위 사이의 구분을 적용하였다. 여기서 그는 사용되는 약이 산모의 건강에 직접적으로 중요한 도움이 된다면 간접적으로나 우발적으로 태아의죽음이 따라온다 하더라도 그 사용이 합법적이지만, 반대로 형성된 생명을 파기하려는 것이 직접적이고 의도된 것이라면 그 약의 사용은 절대로 합법적이지 못하다고 밝히고 있다. (Cfr. Ihnatius Carrasco de Paula, op.cit., pp.63-64)

46) Cfr. Acta Pio IX, 12 Oct. 1869, vol.V, pp.55~72.

47) 실제로 1999년 9월 10~13일, 생명복제기술합의회의 시민 패널에서는 모두 16명이 참가하여 인간 생명의 시작 문제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토의하였다. 이 16명의 패널 중 2명은 수정 후 14일이 되면 원시선이 형성되고 이때부터 개체의 기본 단위라고 할 수 있는 배아 발생과 장기 발생이 시작되기 때문에 수정 후 14일을 생명의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14명은 수정란에서부터 이미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내포한 세포 분열이 시작되기 때문에 수정란이 형성된 직후부터 인간 생명이 시작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 합의회의에서는 인간 생명의 출발점을 수정란에서부터라고 합의하여 결론을 내리고 있다.

48) Cfr. Pio XI, Lett. enc. Casti connubii, 31 dec. 1930, in AAS 22(1930), pp.539~592.

49) '사목헌장' 51항.

50) 교황청 신앙교리성, '인공유산반대선언문' 12~13항, '사목'42(1975/11),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27쪽.

51) 그러나 교도권이 이 문제를 이제 더 이상 다루지 않겠다고 선언한 적도 없다. 교도권이 이 문제와 관련한 판단을 내리는 것을 보류한 데에는 아마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일치된 전통 없이 학자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보이고 있다는 점과 또한 윤리적 가르침은 영혼 주입의 시기에 따라 좌우되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52) '인공유산반대선언문', 앞의 책, 127쪽.

53) Cfr. Ignacio Carrasco de Paula, op.cit., pp.68~69.

54) Cfr. Patricia Beattie Jung &Thomas A.Shannon(ed.), op.cit., pp.63~69.

55) 이는 의심이 있을 때에는 결코 행동하지 않는다는 가톨릭 윤리신학의 전통적 관점이다. 곧 실제적 의심이 있을 때에는 그 의심이 해소될 때까지는 행동을 금한다는 것이다. 만일 의심이 있는데 행동한다면 그것은 잘못될 수도 있는 행동을 자발적으로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오류에 대한 책임은 행위자에게 있다(참조: K.H.페쉬케, '그리스도교 윤리학',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의한 가톨릭 윤리신학 제1권, 분도출판사, 1990, 309~320쪽).

56) 이 훈령은 교황청 신앙교리성이 1987년 2월 22일 반포하였으며 이 문헌의 전문은 '인간 생명의 기원과 출산의 존엄성'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발간 '사목'112(1987/7), 119~144쪽에 번역 소개되었다.

57) '생명의 선물', '사목'112(1987/7), 서론.

58)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연설에서도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문장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의 기원에는 하느님의 창조 행위가 있다. 어떤 인간도 우연히 존재하게 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 사랑의 산물이다”[‘책임 있는 출산’ 세미나에 참석한 사제들에게 행하신 연설(1983.9.17), Insegnamenti di Giovanni Paolo II, VI, 2(1983), p.562].

59) '생명의 선물', '사목'112(1987/7), I

60) '생명의 선물', '사목'112(1987/7), I

61) Cfr. Ignacio Carrasco de Paula, op.cit., pp.68~72.

62) '생명의 복음' 57항.

63)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회칙 5항에서 세계 모든 나라 주교단의 협력 결과로서 회칙 '생명의 복음'이 작성되었다고 밝힌다. 곧 이 회칙은 세계 교회 주교단의 단체성의 정신에 따라 작성된 것으로서 “인간 생명과 그 불가침성에 대한 분명하고 단호한 재천명이며 […] 동시에 절박한 호소”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적어도 인간 생명의 절대적 존중은 가톨릭 교회의 무류권적 가르침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64) '생명의 복음' 63항.

65) '인공유산반대선언문' 12~13항은 인간 생명의 시작 문제를 발생학과 유전학의 방법론으로 풀어 가고 있으며, 생명의 선물

66) 참조: '생명의 복음' 44~45항. 특히 44항의 다음 문장은 성서의 인간관을 매우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내가 너를 점지해 주기 전에 나는 너를 뽑아 세웠다. 네가 세상에 떨어지기 전에 나는 너를 만방에 내 말을 전할 나의 예언자로 삼았다’(예레 1,5). 모든 사람의 생명은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하느님 계획의 한 부분입니다.”

67) '생명의 복음' 61항.

68) Cfr. Ignacio Carrasco de Paula, op.cit., pp.71~73.

69) John Mahoney, op.cit., pp.52~54.

70) 인간 생명의 시작에 관한 여러 이론들은 다음과 같다. 1) 분할의 시기: 이 이론은 하나의 수정란이 2개의 똑같은 개체로 나타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인간 생명의 시작을 수정란이 분할' 재결합되는 시기인 수정 후 14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주장에 대해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예외적인 일에 대해 일반적인 논리를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는 점과 두 개체로의 분할 가능성 때문에 수정란이 개체가 아니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는 점이다. 2) 착상의 시기: 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착상된 수정란이 출생까지 자연 손실될 확률이 10~20%가 된다고 하고, 수정란에서 착상까지는 30~50%의 손실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불멸하는 인간 영혼이라면 그 손실이 최소화되는 시점, 곧 착상부터 인간 생명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3) 인간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근거를 뇌의 활동으로 간주한다면 뇌가 형성되는 최초 시기인 대뇌피질의 초기 발달 시기 곧 수정 후 15~40일을 인간 생명의 시작 시기로 간주해야 한다는 주장이다(Cfr. B.Haring, op.cit., pp.70~79).

71) 수정 후 14일이 되면 ‘원시선’이 형성되는데, ‘원시선’이 생기면 개체의 기본 단위인 배아 발생과 함께 장기 발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원시선’이 생기기 이전은 개체성을 인정할 수 없는 세포덩이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 많은 생명공학자들에 의해 공감대를 얻고 있지만 이는 인간 생명을 순전히 물질적인 것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참조: '유네스코 시민 패널 보고서', 생명복제기술합의회의(1999.9.10~13)].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최근 발생학 분야의 한 연구 자료는 인간이 어떤 모습으로 성장하는가 하는 청사진은 이미 수정 후 몇 시간 내에 즉시 결정되기 때문에 인간 생명의 시작은 수정 후 즉시 이루어진다는 조사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원시선’이 인간 생명의 시작 근거라는 주장은 이 보고서의 논리를 그대로 적용한다면 수정 후 즉시 인간 생명이 시작되는 것으로 고쳐져야 할 것이다[cfr. Helen Pearson, “Your desting, from one day”, in Nature, vol.418(4 July 2002), pp.14~15].

72) 참조: '생명의 복음' 61항.

73) Cfr. Mauro Cozzoli, “The Human Embryo: Ethical and Normative Aspect”, in Juan De Dios Vial Correa &Elio Sgreccia(ed.), Identity and Statute of Human Embryo, Vatican City, 1998, p.260.

74) '인공유산반대선언문' 12항.

75) '생명의 선물', '사목'112(1987/7), II

 

[이동익(가톨릭대학교 윤리신학 교수, 신부)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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