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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선교사들의 우리말 익히기 - 선교사가 만든 한국어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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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8 ㅣ No.119

한국교회사 열두 장면 - 선교사들의 우리말 익히기


선교사가 만든 한국어 사전

 

 

외국어를 배울 때 가장 필요한 도구는 사전이다. 그러나 이 사전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는 없다. 사람들은 우선 외국어 단어들을 모아 자국어로 풀이한 간단한 단어장 내지는 어휘집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점차 발전하여 하나의 사전을 이루게 된다. 17세기에 들어와서 한국어는 서양인들에게도 단편적으로나마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때 조선왕국에 표착했던 서양인들은 그들의 항해기에 한국어 어휘를 수집하고 자국어로 대역해서 제시해 주었다. 이로써 한국어 단어들이 서양인에게 알려지다가 한국어에 대한 본격적 연구와 이를 활용하고자 하던 시도는 19세기 후반 서양인 선교사들에 의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사전 편찬의 배경

 

19세기 프랑스인 선교사들은 선교를 위해 조선에 입국했다. 그들은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각종 성사를 집전하기 위해 조선어에 대한 이해를 요청받고 이를 연구해갔다. 이에 그들은 조선어와 프랑스어를 연결시켜 주는 사전을 만들고자 했다. 또한 파리 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은 조선에서도 그 선교회의 목적에 따라 현지인 사제들을 양성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학생들에게 신학을 가르치고 전례를 이해시키고자 라틴어를 가르쳤고 사전을 마련해야 했다. 이 때문에 선교사들과 조선교회는 조선어와 관련된 프랑스어와 라틴어 사전을 절실히 요청하고 있었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1835년 이후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초기에 입국했던 선교사들은 1839년의 박해 때에 순교하게 되었고, 이들은 사전편찬을 위한 구체적 노력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는 아마도 이들이 입국하여 활동하던 시기가 프랑스에서도 사전 편찬이 본격적으로 거론되던 시기가 아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그러다가 1845년,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가 조선에 들어왔다. 1856년에는 베르뇌 주교와 프티니콜라 신부, 페롱 신부가 입국했고, 1861년에 리델 신부도 도착했다. 이들은 프랑스어 또는 라틴어와 조선어를 연결시켜 주는 사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자신들이 직접 이 사전편찬 작업에 뛰어들었다.

 

이때는 프랑스 본국에서도 새로운 프랑스어 사전이 편찬 간행되기 시작한 때이다. 우리나라 교회에서 사전을 편찬하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프랑스 학계의 분위기와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던 조선에 대한 선교의 열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편, 1860년대를 전후한 시기는 우리나라 교회에서 새로운 문화가 왕성하게 일어나던 때였다. 이 기간 동안 서울에는 천주교 서적을 인쇄하는 목판인쇄소가 설치되었고, 적지 않은 책들이 한글로 간행되었다. 그리고 신학교육기관이 배론에 설립되었고, 서울에 일반인을 교육하는 학교가 세워져 새로운 교육운동이 시작되려던 참이었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선교를 효율적으로 할 방안을 연구한 끝에 이러한 문화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사전을 편찬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사전의 편찬

 

사전 편찬은 문화사업의 꽂이다. 이 꽃이 열매를 맺고 씨앗이 되어 다시 파종되면 몇 백 배의 수확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1860년대를 전후하여 조선 천주교회에서는 사전 편찬 작업이 세 갈래로 나뉘어 진행되고 있었다.

 

그 첫 번째는 선교열에 불타던 다블뤼 신부가 1854년에 착수한 “한문 · 한글 · 프랑스어사전” 편찬 작업이었다. 다블뤼는 특히 어학에 남다른 재능이 있어 사전 편찬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1866년의 박해로 큰 좌절을 겪게 되었다. 그는 1866년에 체포된 다음에도 조선말을 잘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천주교의 도리를 길게 이야기했으므로 다른 선교사들보다도 더욱 혹독한 형벌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의 죽음은 사전 편찬에도 커다란 손실이었다.

 

두 번째 갈래로는 배론신학교 교장이었던 푸르티에 신부 등이 진행한 “라틴어 · 한글사전”(羅韓辭典)의 편찬 사업을 들 수 있다. 1856년에 입국하여 배론신학교에서 주로 조선인 신학생 양성에 힘쓰던 그는 10여 년에 걸친 작업 끝에 자세한 한국어 문법서와 ‘라틴어 · 한글사전’의 원고를 거의 탈고했다. 그의 이 작업은 프티니콜라 신부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도 순교하였기에 라틴어 · 한글 사전의 출현은 몇 십 년이 더 늦어졌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페롱 신부 등이 추진한 “프랑스어 · 한글사전”(佛韓辭典)이다. 1866년의 박해를 피해서 중국으로 건너갈 수 있었던 그는 아마도 이때 자신이 진행하고 있던 사전의 원고를 가지고 간 듯하다. 그리하여 그는 중국 상하이에서 피신해 함께 있던 ‘리델’과 ‘칼레’ 선교사와 함께 사전 편찬 작업에 다시 뛰어들었다. 사전 편찬이라는 방대한 작업이 몇 개월 만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이미 조선에서 작성했던 원고의 전부나 일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판단된다.

 

한편, 리델은 “한글 · 프랑스어사전”(韓佛辭典)의 편찬에 투신하고 있었다. 함께 상하이에 있던 페롱은 1868년 2월 17일자 편지에서 “리델 주교가 ‘한글 · 프랑스어사전’ 편찬 작업을 마치는 큰일을 해냈다.”고 밝히고 있다. 세 명의 선교사들은 박해를 피해 안전지대에 들어가 있었지만 조선교회의 재건과 선교를 향한 열정은 오히려 전보다 더 강해졌다. 그들의 뜨거운 마음은 사전의 단어들이 되어 하나씩 쌓여나갔다. 그리하여 리델 신부는 1868년 2월에는 “한글 · 프랑스어사전” 원고의 초고본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리델 신부는 상하이에서 다시 만주 차코우로 옮겨가서 조선입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에서 그는 조선인 신자 김 프란치스코, 최지혁 요한, 권 타데오 등을 거느리고 한불자전과 문법서의 편찬에 전념하였다.

 

그가 직접 작성한 최종원고는 1873년 11월에 햇빛을 볼 수 있었다. 이후 리델 주교를 비롯하여 여러 선교사들이 이를 꾸준히 보강하여 ‘프랑스인 선교사들’이라는 공동저자의 이름으로 1880년 요코하마에서 “한불자전”(한불자뎐, 韓佛字典)이 간행되었다. 여기에서 사용된 한글자모는 최지혁이 쓴 글씨를 기본으로 하였다.

 

 

남은 말

 

19세기는 선교의 세기라고 한다. 당시 조선에 파견된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은 자신의 뼈를 묻을 각오로 조선에 왔으며, 실제로 그렇게 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미래에 대한 밝은 전망과 열정 그리고 도전정신이 사전편찬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하여 “한국어 · 프랑스어사전”을 비롯하여 “프랑스어 · 한국어사전”, “라틴어 · 한국어사전”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 저술되었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편찬한 이 사전들은 근대 한국어 연구에도 적지 않은 자극이 되었다. 특히 “한불자전”은 개항기 이후 간행된 몇몇 외국어를 한국어로 대역한 사전 편찬의 밑바탕을 이루었다.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던 종교적 열정은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와 문화 안으로 한발 더 깊게 내딛을 수 있는 힘을 준 것이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5년 12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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