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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박해시대의 그리스도론 - 박해시대의 예수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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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6 ㅣ No.105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박해시대의 그리스도론

 

박해시대의 예수 체험

 

 

박해시대 조선에서도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에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가 우뚝 서있었다. 박해시대 천주교 신앙을 고백했던 신도들은 자신들을 ‘그리스당’으로 불렀다. 이는 오늘날 영어의 ‘크리스찬’의 어원에 해당하는 ‘크리스티아노’라는 라틴어를 조선식으로 발음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 단어가 토박이 조선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당(黨)’이라는 말로 여겨졌으리라 생각된다. 사실 박해시대의 신도들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黨]들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들은 믿음살이의 여정에서 예수를 체험했다. 예수는 그들의 삶에서 ‘북두’나 ‘태산’보다 더 큰 지표가 되었던 분이다. 박해시대 신도들이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고 체험했는지 아는 것은 당시 교회의 신앙적 특성을 이해하는 데에도 주요한 요소가 된다.

 

 

신도들의 예수 이해

 

예수는 누구인가?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세상에 태어나 인류를 구원한 구세주이다. 예수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서서 그 관계를 성립시키고 화해를 가져오는 중보자였다. 원래 우리나라 사상에는 중보자의 개념이 없었으므로 초기의 신도들이 예수를 마음으로 맞이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법도 하다. 그러나 그들 대다수는 예수에 대한 신앙을 완벽하게 고백했고 마음속에 그를 영접했다. 그들은 예수를 믿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의 믿음을 ‘천주학’이라는 용어와 함께 ‘예수교’라고까지 부르기도 했다.

 

박해시대의 신도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보자’라는 개념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따라 그들은 호교론을 전개하던 과정에서 삼위일체의 ‘아들 하느님’인 예수에 대해 논하기보다는 ‘아버지 하느님’을 주로 설명해 왔다. 따라서 박해시대 신문기록이나 신앙의 반대자들을 향한 호교론에서 예수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약하게 나타난다. 반면에 초기교회의 교리서와 신도들의 믿음살이에서는 예수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신앙고백이 이어져 내려왔다.

 

박해시대 초기의 교리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순교자 정약종이 지은 “주교요지”이다. 이 책의 상권은 하느님의 존재와 특성을 깨우쳐주고 있다. 그리고 최후심판과 상선벌악의 가르침을 말한다. 이어서 하권에서는 천지창조, 그리고 아담과 하와의 탄생과 타락을 먼저 서술하고 있다. 이 부분의 서술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태어나 사람들을 구원해야 했던 과정을 설명하려고 제시되어 있다. 뒤이어 예수의 강생과 수난을 설명하고 부활과 승천에 관한 사실을 전해준다.

 

정약종은 “주교요지” 하권을 통해 예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고, 예수에 대한 체험을 정리해 주었다. 그러기에 이 책은 다른 이들의 마음에도 큰 울림을 남겨주었고 오래도록 신도들 사이에서 읽히고 있었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당시 동양에서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론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박해시대의 신자들은 “첨례날에는 벽장 가운데 예수의 상을 걸어 놓고 장막을 드리우고 방석을 깐 다음, 여러 사람들이 앉아서” 교회서적을 강습했다. 신자들은 예수의 상본을 구해서 아끼며 받들었다. 평시에도 그들은 “예수 마리아”라는 말을 입에 달고 지냈다. 박해 때 순교자들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고통을 참아 받았고, 배교자들은 예수의 이름을 욕되게 함으로써 자신의 배교를 확인시켜 주었다.

 

 

예수를 선포한 사람들

 

박해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직접 고백했던 대표적 인물로는 홍교만을 들 수 있다. 홍교만은 예수학을 공부했고 ‘예수교’를 믿었으며, 예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렸다.

 

1801년의 박해 때에 체포되어 신문당하던 과정에서 신문관은 그에게 예수학이 그릇된 가르침[邪學]임을 강변하면서 “예수가 강생하였다는 설에 가탁하여 세상을 미혹하게 했다.”고 추궁했다. 이에 대해 홍교만은 예수학은 ‘그릇된 가르침’이 아니라 ‘올바른 가르침’ 곧 정학(正學)임을 주장했다.

 

1801년에 순교한 홍낙민도 예수에 대한 신앙을 분명히 고백했다. 신문관이 홍낙민에게 말하기를 “예수학을 도리어 옳다 여기며, 흘려서 고칠 줄을 모른다면 나라의 법을 받아야 할 것이고, 만일 마음을 고쳐 먹을 수 있다면 살 길이 있을 터이니 하나씩 지목하여 고하라.”고 다그쳤다.

 

이에 대해 홍낙민은 “나는 이 학이 옳은 줄을 마음 속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일 마지못해 그르다고 한다면 이는 혹시 살 길이 있을까 해서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중형을 받아 죽을 것인데, 하필 옳은 것을 가지고 그르다고 하며 교를 배반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신문관은 다시 그의 생존본능을 자극하는 탈콤한 말을 던졌다. “네가 만일 예수학을 사학이라 한다면 죽음에 이르지 않을 터이니 그것이 사학임을 분명히 말하라.” 홍낙민은 이에 “어찌 감히 예수를 욕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현세에서 죽음으로써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택했다. 중견관료를 지냈던 그는 자신의 동료였을 신문관을 배반했지만, 하느님의 아틀 예수에 대한 신의를 이렇게 지켰다.

 

신도들의 예수에 대한 체험은 그 뒤에도 박해 과정의 신앙고백으로 나타났다. 1815년 경상도 지방의 박해 때에 김시우 알렉시오는 자신을 신문하던 경상감사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영혼을 구하시려고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이렇듯 은혜를 베푸신 이를 섬기지 않는 자가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니 감사님도 예수께 감사드리고, 그분을 흠숭하고 천주교에 들어오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감사는 성이 발끈 나서 그의 턱을 부수어 말을 못하게 만들었지만 그의 믿음을 앗아갈 수는 없었다.

 

1839년에 순교한 박종원 아우구스티노는 가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말하기를 “우리 주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셨으니, 불쌍한 죄인인 나도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마땅하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니, 나도 그분을 위해 괴로움을 받고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남은 말

 

박해시대의 신도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온전히 수용했고, 자신에게 참 삶을 일깨우는 복음으로 이해했다. 이렇듯 굳게 예수를 믿고 하느님을 믿었으므로 그들은 세상에서의 삶을 향한 달콤한 유혹에 의연히 맞설 수 있었다.

 

올바른 가르침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위해 죽어간 박해시대 신자들의 죽음에서 누가 광신의 흔적이라도 발견할 수 있겠는가? ‘예수교’를 믿었던 그들의 그리스도론은 완벽했고, 예수에 대한 신앙은 죽음의 공포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그 마음들 안에 심어주었다. 그들의 의연한 죽음을 통해 이제 오늘의 우리들은 ‘예수 만세, 순교자 만세’를 부를 수 있는 양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를 만끽하게 되었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4년 12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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