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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생명의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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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5 ㅣ No.499

생명의 복음

 

 

1. 시작하면서

 

곳곳에서 생명의 기운을 감지하는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하지만 생명을 둘러싼 우리의 현실은 암울합니다. 생명의 흐름이 왜곡되고 뒤틀려가고 있습니다. 생명이 무너지고 파괴되고 있습니다. 생명의 존엄성과 외경심을 입에 올리기조차 부끄러운 상황 속에서, 생명은 거룩하고 신성한 것이라는 보편적인 가치가 제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과학과 기술의 이름으로 생명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생명을 상품화시키고 도구화시키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결코 사고파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지켜온 믿음이었습니다. 생명은 결코 실험의 대상이 아니라는 믿음으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마저도 무너져내리고 있습니다.

 

 

2. 생명의 존엄성 회복

 

온갖 형태의 반생명 문화, 죽음의 문화 그리고 생명 경시 풍조에 저항하면서 생명의 존엄성을 되찾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생명의 존엄성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요구가 절박합니다. 생명에 대한 깊은 애정과 사랑 그리고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섬세한 감각을 키움으로써 나의 생명뿐만 아니라 너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외경심을 키우는 것이 무엇보다도 절실합니다.

 

생명은 결코 소유의 대상이 아닙니다. 생명이 인간의 부질없는 탐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습니다. 생명 그 자체는 목적이어야 합니다. 한자에서 사람 인(人)이라는 글자는 사람은 결코 홀로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회적인 존재이고, 공존해서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 되려면 나 이외에 또 다른 사람이 필요합니다. 여러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사람의 참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사람은 여럿이 더불어 공존하는 것을 운명으로 여기고 태어납니다. 생명 역시 근원적으로 공생명입니다. 다양한 생명들과의 협력을 통해 존재합니다. 생명은 근원적으로 다른 생명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이 때로는 그들의 목숨일 때도 있습니다. 생명은 경쟁의 대상이 아닙니다. 서로 꺾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아끼고 섬기며 나의 목숨을 다해 사랑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자신을 죽여 너를 살리는 존재 방식이 생명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지름길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정신이고 영성입니다.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 영성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3. 생명의 주님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핵심은 생명의 복음입니다. 생명의 복음이 바로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습니다.”(요한 10,10)라고 당신 사명의 핵심을 요약하십니다.

 

그분은 생명의 하느님이시고, 인간을 죽이려고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살리려고 오셨습니다. 그분은 생명 자체이시고 모든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생명에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는 것을 의미하고,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명의 근원은 하늘에 닿아있습니다. 하늘의 명이 없으면 생명은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유한한 인간의 생명이 무한하고 영원한 하느님의 생명에 동참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인간의 생명은 거룩하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그 시작에서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한 순간이라도 거룩하지 않은 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복음, 인간 존엄의 복음, 생명의 복음이고, 이 셋은 하나이며 분리할 수 없는 복음입니다.

 

하느님은 생명이십니다(요한 1,4 참조). 하느님은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에 죽음 대신 삶을 본질로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만 고집하지 않으시고 나누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나누어 주시는 생명은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것이 아니라 현세의 세상이 좇고 있는 허망한 꿈을 부수어버리는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세상이 안고 있는 번뇌와 슬픔을 극복하게 해주는 것은 하느님께서 나누어 주시는 생명입니다. 우리가 신앙하는 하느님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역사를 넘어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하는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인간에게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주시려고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시어 사람의 몸이 되셨습니다. 이로써 생명은 생명을 필요로 하고, 생명이 생명을 살린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생명을 위해 또 다른 생명을 헌신하는 것은 하느님의 존재 방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아 인간의 생명을 살리시는 존재 방식을 보여주심으로써 교회가 세상을 향해 선포해야 할 희망의 근거를 마련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생명에 대해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는 하느님의 존재 방식을 선포해 왔습니다. 생명은 하느님께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 거룩한 생명에 대해서마저도 과학 기술의 이름으로 개입하여 생명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생명을 파괴하고 심지어는 생명을 상품화시키고 있습니다. 생명을 목적으로 삼지 아니하고 수단화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곳곳에서 생명이 경시되고 무시되는 현상을 만나게 되는 것이 일상화되어 버린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상화는 점점 더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시도들이 증가되고 있습니다. 생명을 거스르는 일련의 범죄 행위들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범죄를 처벌하지 않으려는 입법화 또는 합법화의 모색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생명을 보호하고 돌보아야 할 사명을 지닌 의료계의 일부 분야에서조차 생명을 훼손하는 행위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생명으로 인정하지 아니하고 생명을 부정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지켜야 하는 책무를 지니고 있는 정부도 자신의 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생명을 훼손하고 파괴하는 시도는 그것이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든 생명의 하느님에 대한 극도의 모욕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누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거부하는 세상은 참된 희망에 대한 꿈을 거부하고 배척합니다. 무엇이든 원하기만 하면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젖어있는 과학은 생명을 마음대로 재단하는 교만에 젖어있습니다. 그 결과는 번뇌와 슬픔입니다. 그리고 죽음입니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나누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선포하고 나눔으로써 이 세상에 희망을 주는 존재 이유와 사명을 깊이 인식하고, 생명의 소중한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세심한 감각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죽음의 문화와 반생명의 물결에 저항하면서 생명의 회복에 투신해야 합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거부하고 배척하고서는 어떠한 행복도 희망도 꿈꿀 수 없다는 사실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러한 선포는 생명에 대한 사랑을 전제합니다.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려면 생명을 내어놓아야 한다는 하느님의 존재 방식을 교회의 존재 방식으로 구현해야 합니다. 생명은 생명에 기대어 서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살리시고자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신 하느님의 존재 방식을 교회가 자신의 존재 방식으로 삼을 때 세상은 비로소 교회가 세상의 희망임을 인정하고 교회가 선포하는 기쁜 소식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4. 마치면서

 

과학 기술의 목적은 인간의 생명에 봉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인간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미명 아래 인간을 그 수단으로 오용해서는 안 됩니다. 과학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범위에서 자유와 자율성을 담보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자유와 자율성을 담보 받으려면 건전한 양식과 건강한 성숙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공명심이나 상업성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한 건전한 양식과 건강한 성숙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과학과 기술이 인간의 존엄성을 목표로 삼을 때 그 도덕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말살하는 과학 기술에 결코 지지를 보낼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인간을 위해 인간을 수단으로 삼는 과학 기술을 더 이상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과학 기술은 진보해 왔고 앞으로도 진보할 것입니다. 과학 기술은 지금까지 자신이 이루어놓은 업적과 결과에 자만하지 말고 자신의 정체성을 거듭거듭 확인하는 고뇌를 절실하게 필요로 합니다. 할 수 있다고 아무것이나 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음’에도 그 ‘할 수 있음’을 스스로 자제하고 통제하는 자제력과 통제력을 키워낼 때, 그리고 그 ‘할 수 있음’을 필요하다면 기꺼이 포기하는 용단과 결단을 내릴 때 과학은 도덕성과 신뢰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과학 기술이라는 이름으로 생명에 인위적으로 그리고 작위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그만두어야 합니다.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개입은 자칫 폭력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거만하고 오만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불러일으키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어냅니다. 과학 기술도 이제는 겸손하게 제자리를 찾아나서야 합니다.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고 가꾸는 거룩한 소명에 헌신하는 것이 과학 기술에 위임된 본래의 자리일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을 억압하고 존엄성을 침해하는 사회의 구조와 제도 등을 거부합니다. 자본의 논리에 따라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을 생명공학적 차원에서 규정하려는 결정론도 거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입니다. 국가 경쟁력은 반드시 경제적인 부의 축적에만 달려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생명을 존중하는 도덕성 역시 경제적인 부 못지않게 국가 경쟁력을 확보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적으로 조금 가난하게 살더라도 정신과 의식이 건전하고 건강한 국민은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날 우리는 이른바 환란 사태를 겪으면서 이러한 체험을 축적했습니다. 경제적인 부를 쫓아다닌 결과는 인간의 생명을 무시하고 경시하는 물질만능주의의 발로입니다. 물질 앞에 우리는 여지없이 무너져내렸고 자존까지도 잃었습니다.

 

되돌아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삶을 살아왔다는 자괴감뿐입니다. 우리는 결실을 맺으리라는 희망 속에 열심히 씨앗을 뿌렸습니다. 하지만 결실을 보지 못하는 불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생명을 사랑하지 않고 생명의 소중함을 망각한 결과입니다. 곳곳에 생명경시 풍조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생명을 무시하고 생명을 죽이면서 살아온 삶의 방식을 중지해야 합니다. 생명의 소중함을 존중하고 생명을 사랑하고 살리는 삶의 방식을 선택해야 합니다. 나의 생명이 소중하다면 너의 생명 역시 소중할 것입니다. 내가 살고 싶은 생명 의지를 지니고 있다면 너 역시 같은 생명 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살아갈 권리는 너에게 있는 삶의 권리를 존중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이 가능성을 인정할 때 나는 우리 모두와 모든 생명체와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생명 안에 새겨진 존엄성이 확보되기를 기대합니다. 21세기는 인간의 존엄성 그리고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영원하고 보편적인 가치를 펼쳐 보이는 세기가 되었으면 하고 기대해 봅니다.

 

[사목, 2005년 2월호, 안명옥(마산교구장, 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 위원장,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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