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의학윤리에서의 몇몇 쟁점적 사례 연구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262

의학윤리에서의 몇몇 쟁점적 사례 연구

 

 

1994년 7월 1일 서울대교구의 사회사목부 담당 주교인 최 창무 주교는 가톨릭 교회의 계열 병원에서 당면했던, 의학윤리와 관계되는 몇 가지 사례들을 검토하여 이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과 신학적으로 통일된 견해를 마련하기 위하여 가톨릭계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신부들을 비롯해서 윤리신학과 교회법을 전공한 신부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를 마련하였었다. 

 

병원의 실무자들은 각각의 사례들에 대하여 서로 상반되는 의견을 가지기도 하였고, 이에 따르는 여러가지 어려움도 있었기 때문에 절실히 요구되었던 것은 각각의 사례에 있어서 인간생명의 존엄성이 지켜지고 동시에 인간 생명에 관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 정확한 판단이었고, 따라서 다음에 소개되는 10가지 사례들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표명하게 된 것이다. 사실 각각의 사례에서의 윤리적 판단을 위한 규정을 문서화시키는 데에 있어서 자칫 구체적 상황을 간과할 수도 있는 위험이 따르기는 하지만 단지 의료계에서 종사하고 있는 실무자들의 보다 정확한 판단을 도와줄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써 이러한 시도를 해 본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톨릭 교회 병원의 실무자들과 윤리신학, 교회법을 전공한 신부들이 자리를 함께한 결과 각 사례들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입각한 견해가 마련되어 국내의 가톨릭 계열 병원 실무자들과 몇몇 사목자들에게 소개되기는 하였지만 필자는 이미 발표된 문건에 대한 좀 더 상세한 해설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교회의 가르침과 윤리신학적 견해를 중심으로하여 각 사례들에 대한 해설을 덧 붙이게 되었다. 의학 분야에서의 전문적인 용어에 대해서는 최 주교님께서 배부해준 참고자료를 인용하게될 것이며, 이 해설이 보다 많은 사목자들과 병원 실무자들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최 주교님이 발표한 문건은 가톨릭 대학교 신학대학 출판부에서 발간되는 '가톨릭 신학과 사상' 12호(1994/12월)에 전문이 실려있다. 

 

 

사례 1 

 

27세의 부인이 불임으로 오래 전부터 여러 병원을 찾아 다니며 원인과 해결 방법을 찾아왔으나 별 효과가 없어서, 한 가톨릭 계열 병원 산부인과에 와서 검사받던 중, 자궁을 통하여 색소를 넣어 난관 협착 여부를 X-ray로 촬영하는 검사를 시도했다. 그런데 검사 전에 이 부인에게 먼저 임신 반응 검사를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것을 간과하고 (오랜 기간 불임이었다는 부인의 말만 듣고), 색소를 자궁에 주입하고 X-ray촬영 도중 자궁 안에 12주된 태아가 보였고, 태낭이 파열되어 그 안에 조영제가 들어가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의료진은 임신 중에 자궁 안에 색소가 들어가면 수 일 내로 감염이 되고, 결과적으로 자궁 적출 수술을 해야 되므로 이를 방지하는 최선의 치료 방법으로는 자궁의 내부를 소파수술(Curettage) 해야 하며 이렇게 하는 과정에서 태아는 죽게 된다고 한다. 

 

이 사례에서는 먼저 의료진들의 의료 태만이 문제가 된다. 의료진들은 X-ray 촬영 이전에 반드시 이 부인이 임신 중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임신 반응 검사를 했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부인의 말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여 자신들의 의무에 대한 의료태만의 윤리적 과실을 범하고만 것이다. 이 과실에 대한 윤리적 책임은 물론 담당 의료진들에게 있다. 

 

의료직업에서 요구되는 측면은 당연히 윤리적 측면과 함께 과학적 측면이다. 곧 과학적 측면이란 의료직업이라는 전문직 안에서 요구되는 지성과 기술이며, 이는 그들에게 맡겨진 환자의 건강 및 생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의사이면서도 그에게 맡겨진 환자에 대한 진단이나 치료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한다면 어떻게 환자들이 생명을 내어 맡길 수 있겠는가? 만일 어떤 의사가 죽음을 판정해야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그의 의사로서의 전문적 지식에 조금이라도 허점이 있다면 한 사람의 생명에 관한 책임은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지는 자명한 일이다. 위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단순한 하나의 실수가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고 이는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이라는 과학적 측면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해준다. 의사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전문적인 과학적 측면의 중요성과 더불어 윤리적 측면 역시 과학적 측면과 분리해서 생각될 수 없다. 교황청 인간 계발 위원회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지식과 기술의 발전이 의사에게 새로운 기구들과 새로운 요법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면, 흔히는 그 직접적인 결과인즉 의사가 갈수록 더 복잡한 윤리적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의사들은 환자를 치료하는데 요구되는 판단기준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배워야하며, 그 판단기준들을 특수한 개개의 경우에 적용할 수 있도록 훈련이 되어야만 한다. 만일 임종을 앞두고 있는 어느 환자의 경우 그 환자에게 의학적 지식과 기술을 모두 사용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죽음을 회피할 수 없다고 할 때, 그 환자의 불확실하고도 고통스러운 생명의 연장만을 가지고 오는 치료법을 거부할 수 있는 결정이 의사의 양심에 맡겨져 있다면 의사들에게 있어서 객관적인 윤리적 판단을 위한 교육은 필수적일 수 밖에 없다. 

 

이제 태아의 문제를 다루기로 하자. 결국 의료진의 실수로 색소가 태낭 안에 들어가게 되었고, 따라서 태아는 태낭의 보호를 더 이상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미 감염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되었을 때 그러한 상태를 그대로 방치해둘 경우 산모의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위험이 따르게 된다. 따라서 자궁의 내부를 소파수술하는 방법이 최선의 치료방법이며, 이러한 치료 방법의 한 결과로서 태아가 죽게 된다 하더라도, 이러한 경우 자궁 내부의 소파수술은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으며, 이 경우에 적용되는 윤리신학의 한 원리가 이중효과의 원리 (The Principle of Double Effect)라고 문건은 밝히고 있다. 

 

'이중 효과의 원리'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당방위의 논제'에서 비롯되는데, 즉 여기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의 행위는 두가지 결과, 즉 의도된 결과와 의도되지 않은 두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윤리적 행위들은 의도된 결과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지, 우유적인 요소로써(遇有的, per accidens), 의도되지 않은 결과에 의해서 구성되지는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누구든지 악한 결과가 행위에서 우연히 (물리적인 필연성 없이) 생길 경우에만 그런 악한 결과를 허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이러한 논제에서 비롯되는 이중 효과의 원리의 요점은 어떤 정당한 목적 달성을 위해 결코 수단이 될 수 없는 물리적 악이 인간적 행위에서 생기는 경우에는 상응하는 중대한 이유가 있으면 그 원인에 의해서 선과 악의 두 결과가 나온다 해도 그 자체가 선인 원인을 추구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윤리신학자들은 이 원리가 적용되기 위한 다음의 네 가지의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1) 행위 그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야 하며, 2) 악한 결과와 선한 결과가 적어도 동시에 그 행위에서부터 직접 나와야 하며, 3) 행위자의 지향이 선해야 한다. 즉 행위자는 악한 결과를 의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4) 간접적인 결과로 악을 허용하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중대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시민들의 생활에 있어서 차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거나 모든 교통 수단은 사고의 위험을 안고 있고, 또한 거대한 기술의 이익은 건강의 위험과 환경 오염을 동반 하는데 만일 이러한 일들에 있어서 간접적으로 의도된 악한 결과를 허용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모든 모험적인 일들은 대부분 선한 결과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허용되지 못할 것이다. 

 

위의 사례의 경우 태낭이 파열되어 그 안에 조영제가 들어간 결과 태아는 감염이 되고, 결국 산모의 생명까지도 치명적인 위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산모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자궁 내부를 소파 수술함으로써 산모가 감염됨으로써 처하게될 생명의 위험을 피하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태아의 생명은 불가피하게 희생되고 만다. 이 과정에는 결국 자궁내부의 소파수술이라는 하나의 행위를 통해 선한 결과와 악한 결과라는 두 가지 결과 즉 산모가 생명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결과와 태아의 죽음이라는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이 행위의 지향은 물론 선하며, 비록 태아가 죽게 된다 하더라도 그 악한 결과에 상응하는, 산모의 생명을 살리게 되는 선한 결과가 자궁내부의 소파수술이라는 행위의 중대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위의 사례의 경우에는 '이중 효과의 원리'가 적용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상황을 세밀히 분석해볼 때 논란의 여지는 남아 있다. 가톨릭 교회가 인공유산을 허용하고 있는 근거로서의 '이중 효과의 원리'는 치료의 방법으로서의 낙태 중에서도 간접적인 치료 낙태만 허용할 뿐, 직접적인 치료 낙태는 허용하고 있지 않는데, 위의 사례의 경우는 직접적인 치료 낙태로 인식될 소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만일 파열된 태낭 속에 들어있는 태아가 아직 감염되지 않았고, 또한 태아가 감염되었다고 하더라도 태아에게 다가올 죽음의 위험이 상당히 높기는 하지만 절대적은 아니라고 가정할 때 자궁내부의 소파수술은 산모의 생명을 구하는 행위이기 보다는 직접적으로는 자궁 적출을 방지하기 위한 치료 수단이 되며, 이로써 태아를 죽게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곧 직접적 치료의 낙태 방법이라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이중 효과의 원리'는 옳은 결과가 나쁜 결과에 앞서거나 적어도 동시에 일어나야할 것을 요구하는데 위의 가정은 이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은 의료계에서 빈번히 발생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며, 이러한 문제에 직면해서 현대의 많은 윤리신학자들은 '이중 효과의 원리'의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곧 '직접 치료 낙태'와 '간접 치료 낙태'에 대한 구분에서 이 원리의 어려운 문제가 야기된다는 것이다. 

 

헤링(B.Haring) 신부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의 법' (La Legge di Cristo)에서 '직접 낙태'와 '간접 낙태'라는 두 가지 상황에서 판단을 내려야만 했던 어느 의사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나는 과거에 자궁내 심한 출혈 증세를 보이고 있는 임신 4개월된 산모의 수술을 요청받았다. 자궁 위에는 엄청난 양의 출혈을 보이고 있는 여러 개의 가늘고 약한 정맥류의 혈관이 있었고, 그 혈관들을 봉합하려던 시도들은 출혈만 더욱 악화시킬 뿐이었다. 따라서 출혈로 인한 사망에서 그 산모를 구하기 위해 나는 자궁을 열고 태아를 제거하였다. 태아를 제거하자 자궁은 수축되었고, 출혈은 멈추었으며, 그리고 그 산모는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한 일에 대해 자랑스러웠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아이를 가져보지 않았던 그 산모의 자궁은 손상을 입지 않았고, 따라서 앞으로 임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된 일이었지만, 비록 그 당시 내가 한 일이 선한 의도와 믿음으로써 행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 명망높은 윤리신학자의 눈에는 객관적으로 악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내가 태아를 보호하고 있는, 출혈 중의 자궁을 제거하는 것은 허용이 되었었지만 태아를 제거하면서까지 자궁을 손상시키지 않고 임신이 가능하도록 한 일은 내게 허용된 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시행한 수술이 비록 그 산모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행위는 중대한 직접 낙태를 의도한 것이고, 따라서 비윤리적이라는 것이었다". 

 

성 알퐁소 (S. Alfonso de' Liguori)는 만일 어떤 행위가 윤리규범을 통해서 볼 때 철저하게 비윤리적이거나 혹은 그러한 비윤리성의 뿌리에서부터 비롯되는 의도된 악한 행위가 아니라면 에피케이아 (epikeia)가 자연법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 알퐁소의 이러한 관점을 따른다면 그는 적어도 죽음의 절박한 위험 속에서 산모의 생명을 구할 필요성에 의한 치료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기는 하지만 직접적인 의도를 지닌 낙태를 언급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인다. 그렇지만 그 역시 이러한 문제에 대해 '태아를 간접적으로 축출하는 것은 합법적으로 충분한 근거가 있는데, 왜 그것을 직접적으로 행하는가?'라는 질문을 두 번씩이나 반복함으로써 간접 및 직접 치료 낙태의 구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기도 하다. 

 

사실 '간접 낙태'를 정당화하는 지난 세기의 윤리신학자들은 이 가르침을 어머니의 생명과도 같은 또 하나의 중요한 선을 지향하는 결정적인 의도들이 포함되는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대로 적용하거나 또는 더 확대하여 적용해 왔었다. 태아에게서 생명을 빼앗는 것은 단지 의도와 행위에서 따라오는 부차적인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서 부차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그 자체로 직접 의도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이중 효과의 원리'에 따라, 태아의 생명에 위험을 끼치는 행위와 그 행위를 정당화하는 동기 사이에는 매우 분명한 균형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직접적 치료 낙태에 대한 비오 11세와 비오 12세의 사목적 입장은 강력한 단죄였고, 나아가 직접 낙태에 관해서는 어떠한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의 고수가 가져다 준 긍정적인 측면들 중의 하나는 가톨릭 산부인과 의사들이 산모와 태아의 생명 둘 다를 구하는 데에 특별한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직접 낙태와 간접 낙태의 구분에 대해서 가톨릭 윤리신학자들에게 있어서는 아직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자궁 외 임신과 자궁암과 같은 경우에는 대다수의 가톨릭 윤리신학자들은 직접적 치료 낙태를 허용하는 입장이다. 그렇지만 의사들에게는 비록 의학적인 이유가 잘 발견되지 않는 간접적인 결과로 태아의 생명에 명백한 위험을 가져온다고 할 때, 산모의 생명에 대한 긴박성과 산모의 병적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의학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술들이 허용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의사들에게 있어서도 그러한 상황은 항상 그들이 추구하는 가능성이 산모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생명을 모두 한꺼번에 구할 수 없는 상황임이 전제된다. 

 

그런데 위의 사례를 '이중효과의 원리'로써 적용시킬 수 있다면 이 원리에서 말하고 있는 '간접적'이라는 의미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회 회원 피터 크나우어 (Peter Knauer)는 '이중 효과의 원리'에서 말하듯이 '악한 결과는 선한 결과보다 앞서지 못한다'는 것과 '선한 결과 뒤에 따라오는 악한 결과는 상당한 이유가 있어야만 허용될 수 있다'는 해석이 논점을 회피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악이 물리적으로 직접적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이중효과의 원리'를 적용하는 데에 있어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고, 물리적인 악이 윤리적인 악이 되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를 밝히는 것에 '이중효과의 원리'가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할 것은 어떤 한 행위에 있어서 '행위의 목적' (finis operis)과 '행위자의 목적' (finis operantis) 사이의 구분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총으로 사람을 쏘아 죽인다고 할 때, 총알을 재는 물리적인 행위와 살인은 그것이 법적으로는 구분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윤리적으로는 분리될 수 없다. 이 행위 안에는 몇 가지의 물리적 행위가 함께 들어가 있다 하더라도 단 하나의 윤리 행위가 있을 뿐이며, 이 하나의 행위가 그 행위들 전체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크나우어는 또한 '이중효과의 원리'가 가져다 준 업적으로서 '상당한 이유'라는 개념을 끄집어낸다. 이 개념은 윤리신학자들이 명령적인 자연법과 금령적 (禁令的)인 자연법을 구별할 때 사용한다. 자연법에 있어서 금령적인 법은 항상 구속한다 (예, 살인하지 말라), 그러나 상당한 이유는 상대되는 명령적인 법 (예, 생명을 보호하라)에 직접으로 복종하는 것 (예,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살인)을 허용한다. 명령적인 법은 금령적인 법보다 범위가 더 넓다. 예를 들어 악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선에 대한 열망이 더 우위에 있는 것이다. 

 

곧 '상당한 이유'라는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이중효과의 원리'에서 말하는 '직접적', '간접적'이라는 말의 참된 의미를 알 수 있게 된다. 즉 악한 결과란 상당한 이유가 있고 없음에 따라서 간접적 혹은 직접적이 되며, 크나우스의 견해에 의하면 어떤 한 행위에 있어서 나타나는 악한 결과는 상당한 이유의 유무에 따라, 그리고 의도 안에 포함되었는가 아닌가에 따라 간접적이거나 직접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행위의 이유가 상당한 것인가 아닌가는 행위가 참으로 행위의 목적에 상응하느냐 아니냐 하는 순수한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야 하며 이런 의미에서 이중효과의 원리에서 말하는 '간접적'이라는 개념의 의미를 이해할 때 위의 사례는 별무리 없이 '이중효과의 원리'를 적용시킬 수 있는 사례라고 본다. 

 

 

사례 2 

 

급성 복막염으로 수술 받아야 하는 35세의 부인이 집도 외과 의사에게 수술 도중 난관을 결찰하여 불임이 되게 하는 처치도 함께 해달라고 부탁해 왔다. 이것은 두 번의 수술로 처치하지 않고 환자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되는데 교회의 병원에서는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불임수술이란 남자나 여자에게 있어서 생식 능력을 일시적, 혹은 영구적으로 상실케하는 의료적 관여이다. 여자에게 있어서는 난관 결찰, 난소 절제, 그리고 자궁 제거 등의 방법이 있고, 남자에게 있어서는 정관 수술이나 고환의 제거 등의 방법이 있다. 이러한 방법들은 피임을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직접 불임) 경우에 따라서는 치료를 목적으로 하기도 한다 (간접 불임). 

 

가톨릭의 전통 윤리신학은 일시적이거나 혹은 돌이킬 수 없는 불임을 유발시키는 직접적인 의도를 가진 모든 피임 방법은 명백히 비윤리적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교황 비오 11세는 그의 회칙 '정결한 혼인' (1930)에서 "인간 자신들은 개인적으로 그의 신체의 지체에 대해서 어떠한 주권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의 자연적 목적에 속하는 것을 파괴하거나 변경할 수 없으며, 다른 방법을 통해서 자연적 기능을 부적당하게 만들 수도 없다. 단, 전 신체의 선을 위해서 다른 방법으로 달리 예견할 수 없는 경우에는 예외이다"라고 언급하면서 혼인의 자연적 목적인 출산력을 인위적으로 방해할 수 없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교황 바오로 6세도 회칙 '인간 생명'에서 "교회의 교도권이 여러 번 가르친 대로, 남자이건 여자이건 영구적이건 일시적이건 직접 단종시키는 것은 단죄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교회법에서도 역시 "부부의 선익과 자녀의 출산 및 교육을 지향하는 평생 공동 운명체를 이루는 것"이 혼인의 목적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기 때문에 그 목적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직접적인 불임술에 대해 가톨릭 교회는 단호한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실상 피임 방법의 선택에 있어서 실재하는 비윤리성이란 남편과 아내,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에 대해 무책임하게 거절하는 데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불임 수술을 받을 의도를 가지고 부부로서, 그리고 부모로서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다는 착각은 반드시 거부되어야만 할 것이다. 위의 사례에서 나타나는 불임 수술은 복막염 수술과는 전혀 별개의 수술로 온전히 피임을 목적으로 하는 직접적 의도로서의 수술이다. 단지 복막염 수술을 하는 중에 경제적 효과나 편의성의 이유로써 불임 수술을 한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병리학적인 상황에서 병의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간접적 불임 수술은 허용된다. 이에 대해 바오로 6세의 회칙 '인간 생명'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교회는 육신의 병을 고치는 데에 필요한 치료 방법을 부당하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비록 그로 말미암아 출산장애가 초래되더라도 또 그것을 미리 알았더라도 이런 장애를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직접 목적하지만 않았다면 언제나 타당한 것이다". 곧 교회는 직접적 불임수술을 단죄하는 것이지 더 큰 효과의 치료를 목적으로 한 간접적 불임수술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간접적 불임수술은 결과적으로 불임의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이는 중요한 신체를 살리기 위해 따르는 2차적 결과이지 불임 자체를 목적으로 지향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대한 신경과민이나 중증의 심장병, 당뇨병 등의 중요한 병리학적 상황에 직면하여 의사의 처방이나 조언은 불임수술을 정당화할 수 있는 동기를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임신으로 인해 산모의 건강, 생명에 심각한 위험이 예상 되거나 태아의 생명에도 위험이 있을 경우에도 의사의 양심적인 조언에 따라 불임 수술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가톨릭 교회가 인정하고 있는 자연 주기법에 의한 피임 방법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교회가 인위적 방법의 피임이나 위에서 언급한 불임수술을 반대하는 주된 이유는 생명에로 개방되어야만하는 부부행위를 그러한 인위적인 방법들이 생명에의 개방을 적극적으로 거부케 한다는 것이다. 결국 성의 본질적 목적과 가치가 의도적으로 억압, 상실되며, 자주 부부중의 한사람이 단순한 육체적 쾌락의 도구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신의 자연적 조절은 부부행위를 생명에로 개방시켜 놓고 있으며, 부부로 하여금 부부행위의 의미에 대한 충실한 존중을 통해서 그들 자신만의 풍성한 부부애를 통하여 상호책임감과 자유를 강하게 체험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자연 주기법이란 여성의 생리 주기 안에서 임신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수, 배란 전 혹은 후의 불임기간을 알아내어 임신을 피하는 방법으로서 이 방법은 절대적으로 여성의 점액 관찰을 통해 가능하다. 곧 여성의 점액은 단순한 하나의 표징으로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임신에 있어서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이며 원동력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여성에게 있어서 임신의 가능성은 여성의 주기 중에 불과 며칠에 한정되어 있으며, 남자와 여자는 그 주기를 인식함으로써 그들 부부생활 중에서 임신과 불임의 과정들을 잘 인식할 수 있도록 준비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그들 상호간과 자녀들의 선을 위한 그들 사랑의 표현으로서의 부부관계를 잘 조화시킬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자연적 방법이 단순하게 사용의 규칙들을 알고 따르는 것만으로 충분한 하나의 기술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방법의 가치는 동시에 삶의 형태를 미리 준비하고 향상시킨다는 데에 있으며, 또한 서로의 관계 형성을 위한 하나의 특별한 방식으로서 사랑과 자유, 그리고 공동의 책임감의 발전을 위한 교육이 된다는 점이다. 

 

이외에도 이 방법은 출산의 조정을 더욱 용이하게 한다. 창조주가 여성의 몸을 통하여 부여하신 출산력의 생물학적 리듬과 더불어 그 리듬 안에서 생명력이 진행되는 경이스러운 과정들을 알게함으로써 여성은 자신의 고유한 육체에 대한 인식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게될 것이다. 또한 자연적 방법의 선택은 하느님으로부터 세워진 윤리적 질서를 존중하면서 자기 고유의 출산을 조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고, 남성으로 하여금 "여성의 주기를 받아들이고 따라서 대화, 상호 존중, 책임의 나눔과 자제를 받아들임으로서" 책임성있는 부성(父性)의 충만하고도 자유로운 수용을 도와줄 것이다. 부인의 주기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남자를 위해서는 자신의 부인을 알 수 있도록 도와주며, 부인의 출산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끔 배우게 하며,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의 전존재 이해를 위해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고유한 출산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인식하고 그것을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상호 동의로써 그 힘을 사용한다는 것은 부부사이의 대화를 요구한다. 따라서 자연적 방법의 사용은 부부 상호간의 사랑과 이해를 위해 작은 걸음에서부터 도와주는 대화의 교육학에로 이끌려지게 된다. 즉 삶의 한 형태로서 부부상호간의 전적인 자기증여의 한 행위로서의 부부행위를 가능하게할 것이다. 

 

주기적인 절제는 이외에도 육체적인 해를 끼치지 않으며, 오히려 자기 존재의 전체성 안에서 개성의 긍정적인 효과를 부여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기적인 절제는 욕망의 노예로부터 자유를 줄 것이며, 이로 인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심을 더욱 크게 증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본능에 대한 의지의 지배는 명백히 수덕의 한 방법이며, 이는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인간 생명'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부부 사랑에 있어서 가장 높은 인간적 가치라고 말할 수 있다. 계속 요구되는 이러한 부부의 노력은 그들의 영성적 가치를 더욱 증가 시키고, 그들의 인격을 더욱 완전하게 발전시키면서 그들에게 엄청난 축복에의 길을 열어줄 것이다. 

 

 

사례 3 

 

임신 5개월 된 부인의 태아 진단 결과 태아가 몽고리즘의 기형아로 발견되었다. 이것을 안 산모와 그 남편은 이 태아를 인공유산 시켜 달라고 주치의에게 부탁했다. 

 

한국 주교단은 형법 개정안 제 135조 폐지 서명 운동 참여를 위한 성명 서 (1992.7.13)에서 다음과 같이 강경한 어조로 우생학적, 유전학적 이유의 낙태를 반대하고 있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우생학적, 유전학적 이유로도 낙태를 허용할 수 없습니다. 만일 이를 허용한다면 생명의 질(質)을 위해 생명 자체를 희생시키는 결과가 되며, 의사의 오판에 의한 정상 태아의 살해는 물론 성감별에 의한 무차별 낙태와 더 나아가 적자생존에 입각한 살인 행위를 부채질하고 말 것입니다". 모체 안에 있는 태아는 임신의 순간부터 인간 생명을 지닌 개별적 인격체이므로 그 태아를 고의로 죽이는 것은 분명한 살인이라는 가톨릭 교회의 일관된 가르침을 다시 한 번 확인해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현대의학의 발달로 출생 이전의 태아에 대해 여러가지 진단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이 의료 기술에 의하여 출생 이전에 정상아인지 혹은 비정상아 (유전학절 질환, 기형아...)를 구별해 낼 수 있게된 것이다. 이러한 구별과 함께 미래에 태어날 아이와 그 부모가 받게될 고통을 생각하여 미리 낙태를 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점점 더 사회 깊숙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는 분명 태아의 존재 자체에 가치와 존엄성을 두는 것이 아니라 기능적 가치와 미래의 삶의 질에 그 가치와 존엄성을 두는 오류를 범한다. 사회에 필요한 존재만이 살 권리가 있고 병들고 약한 노인이나 아이들은 공익을 위해서 죽어주어야 한다는 이론은 인간은 그 자체로 존엄성을 지니는 존재라는 그리스도교의 윤리에 명백히 모순된다. 

 

히틀러는 수백만의 인명을 살상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히틀러로부터 단순히 '무용한 삶'을 살고 있다는 판단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 히틀러는 자신의 그러한 행위의 유일한 기준은 자신이 이룩하고자 했던 경제적 및 정치적인 사회 유형에 대한 인간의 유용성이었던 것이다. 그는 인간의 고통과 또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사랑의 보살핌이 전 인류를 풍요롭게 할 수 있다는 점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한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유익한 사람, 혹은 그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구분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명은 어떤 경우, 어떤 상황이든지 항상 거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법적으로 정당하다고 말하는 낙태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할 때는 이미 우리의 사회 안에 거짓문화, 폭력문화가 침투하리라는 것을 예상해야만 할 것이다. 사회의 폭력과 테러리즘에 대항하기 위하여 무장된 군인을 풀어 진압한다고 가상할 때, 이는 실상 아주 졸렬하고 악마적인 처방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여인의 뱃 속에서 태어나려고 하는 생명에 대해 폭력을 가하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어떠한 시도라도 이는 분명 폭력이요, 사기이며 거짓임에 분명하다. 

 

자신이 기형아를 잉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는 산모가 겪게될 정신적 고통은 실로 형언할 수 없을 것이다. 기형으로 세상에 태어나 일생 기형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자식이 겪게될 고통과 불행, 부모와 가족으로서의 수치심과 경제적 및 정신적 어려움,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 등의 요인들이 산모나 그 가족으로 하여금 낙태를 강요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들이 하나의 무죄한 생명을 앗아버릴 수 있는 정당한 이유는 절대로 될 수 없다. 어느 누구도 심각한 불구나 비참한 유전적 특성을 가진 태아가 죽음의 선고를 받아야 한다고 판결을 내릴 수 없다. 각 개인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의학 분야와 부모의 결정에서 전적으로 존중되어야할 것이다. 심한 불구이고 또 비정상적인 어린이의 생명이 불행하게 단순히 식물적인 존재로 여겨진다 하더라도, 현대 의학은 모든 수단을 다해서라도 그들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의학은 교통 및 산업 재해, 개인과 집단에 가해지는 폭력 및 테러, 무서운 가난, 사회적 태만, 어리석음이나 불공평 등에 의해 협박받는 생명을 구할 의무와 소명을 지닌다. 완전하다고 하는 법과 세속화된 사회의 공적 의견들에 의해 철저하게 무시되는 수많은 비극적 상황에 대해서 의사들은 자신들의 일상적 경험 안에서 생명의 보호를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강구함으로써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 철저하게 지켜지는 사회를 만들고, 더 나아가 생명이 위협받는 사회를 앞장서서 경고하는 데에서 그들의 참된 소명을 찾아야 할 것이다. 

 

최 주교님이 발표한 문건에는 위와 비슷한 사례로 대부분의 뇌가 형성되지 않았으면서도 산모의 자궁에서 자라고 있는 '무뇌아'의 경우도 언급하고 있다. 현대의학의 발전과 함께 밝혀지고 있는 죽음의 정의에 있어서 뇌사를 죽음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때 무뇌아는 사실상 인간 생명인지 아닌지 그 자체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무뇌아의 경우 인간 생명의 생물학적 기초가 전혀 없기 때문에 인간성의 최소한의 표현도 있을 수 없고 따라서 무뇌아와 같은 완전한 기형이라면 임신 중단에 간섭하는 것이 윤리적인 의미에서 완전한 낙태가 아니라고 보는 윤리신학자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비록 현대 의학에서 무뇌아는 거의 100% 출산 후 즉시 사망한다고 보고 있지만, 그 태아가 비록 외형상의 뇌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숨을 쉬고 살아있는 것으로 보아야 되지 않을까? 비록 한 인간이 자신의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 고통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축복된 인간적 체험이될 수 있을 것이다. 뇌를 갖지 않은 태아도 분명 인간 생명이라고 할 때 무뇌아의 장기적출은 절대로 인정될 수 없다. 그렇지만 성인이나 어린이가 의식을 회복하거나 어떠한 인간적 표현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더 이상 없다면 그들의 생물학적 생명을 며칠이나 몇 달 동안 인위적으로 유지시키려는 노력은 필요가 없다고 본다. 

 

 

사례 4 

 

산부인과에서는 자궁외 임신 환자가 난관 파열로 인한 심한 출혈시에 난관절제를 함으로써 환자의 생명을 구하지만 그 결과로 난관에서 자라나는 태아의 생명은 죽는다고 한다. 이것은 인공유산을 반대하는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된다. 

 

문건에서 말하고 있듯이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다. 자궁 외 임신 중인 산모에게 난관 파열이 될 경우 산모의 생명은 위독하게 되며, 따라서 위독한 어머니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치료나 수술로 태아의 희생이 따르게 된다 하더라도 허용이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국 천주교 주교단에서도 이러한 문제에 대해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예외적으로 임신과 관련되지 않는 병이나 자궁 외 임신으로 인하여 위독한 어머니가 자기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치료나 수술로 태아의 희생을 묵인할 수밖에 없는 긴급 조치는 있을 수 있다". 이 사례는 앞의 사례 1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중효과의 원리가 적용되는 사례이다. 

 

 

사례 5 

 

19세된 여자가 백혈병(AML)으로 진단받고 방사선 치료를 받기 위해 입원하여 검사 도중 임신 6주가 되었음이 발견되었다. 의료진에서는 임신 중인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태아가 기형이 될 수 있고, 또 산모가 위험하게 될 우려가 있으므로 방사선 치료 전에 먼저 인공 유산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먼저 백혈병이 어떠한 병인가를 발표된 문건을 통해서 살펴보자. 인체의 뼈 속에는 조혈을 담당하는 골수라는 조직이 있는데 이 골수는 조혈 (造血) 모세포와 조형 (造形) 모세포로부터 성장과 분화가 이루어진 여러 단계의 조혈원조세포들, 그리고 이러한 세포들로부터 유래되어 혈액을 구성하고 있는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 등의 혈액 세포들, 또한 이들의 환경을 구성하고 있는 결합조직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백혈병이란 조혈모세포의 성장과 분화의 단계에서 분화 이상으로 조혈모세포가 암세포화한 것이다. 백혈병은 모든 분화 단계에서 발생할 수 있으며, 각 백혈병들은 그 형태, 특징, 치료 방법, 예후 등이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분류는 형태 및 특징을 근거로 급성 골수성 백혈병, 만성 골수성 백혈병, 급성 임파성 백혈병, 만성 임파선 백혈병 등으로 구분된다. 이중 급성 골수성 백혈병은 어른에게 가장 많이 나타나는 백혈병이다. 백혈병의 원인은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바이러스, 방사선, 화학물질, 유전적 요인 등이 원인과 관련된 요인이라고 한다. 

 

백혈병이 진행되면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이 만들어지지 않는 등 정상적인 조혈기능이 안되어 이로 인한 면역 기능의 저하, 빈혈의 발생, 지혈 기능의 저하 등의 증세가 나타나며, 또한 암세포들은 혈액을 통하여 온 몸의 장기로 퍼져 장기 종대 및 장기 부전증 등이 나타난다고 한다. 이 병의 치료 방법으로는 주로 항암제 치료나 골수 이식술이 행해지는데 먼저 항암제 치료는 부작용이 상당히 심하며, 심지어는 치료받다가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골수 이식술은 가장 확실한 치료 방법이라고는 하지만 완벽한 치료는 아니라고 한다. 골수 이식을 위한 대상이 한정되어 있고, 또 이와 관련된 여러가지 부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골수이식의 조건은 골수 공여자의 면역학적 항원이 일치되는 젊은 사람 (대개 40세 이하)으로서 완전관해 상태가 이루어져야 하며, 또한 경제적으로 상당히 많은 부담을 요구한다.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경우는 대개 환자의 30%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부작용으로 인한 실패 확률도 상당히 높다. 

 

백혈병의 예후로는 치료를 받지 않으면 3개월 내에 100% 사망하게 되고, 항암제 치료가 잘되면 장기 생존율이 약 30%, 골수 이식술이 잘되면 장기 생존율이 약 40-80% 정도라고 보고되어 있다고 한다. 

 

위의 사례를 분석하자면 다음과 같다. 19세된 여자라면 미혼모일 가능성이 많다. 임신 중인줄 모르고 몸에 이상을 느껴 병원을 찾아 진단을 받아본 결과 백혈병이라는 진단이 나왔고, 이 백혈병의 치료를 위해 입원하여 그 치료 방법으로 항암치료로서의 방사선 치료를 하기로 결정한 후 방사선 치료를 위한 검사 도중에 임신 6주가 되었다는 또 하나의 의외의 진단이 나온 것이다. 

 

의료진에게 있어서 치료의 일차적인 관심은 백혈병에 걸린 산모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 최선의 방법으로 방사선 치료가 필수적인 치료 방법이 된다. 그러나 의료진은 산모에게 방사선 치료의 방법을 사용할 때 임신 6주의 태아가 방사선에 감염이 될 것이 예상되며, 태아가 감염이 되면 기형이 되거나 죽게될 것이며, 그렇게될 때 산모의 생명도 위험하게 되리라는 예상을 한다. 따라서 태아의 감염, 산모의 감염, 나아가 산모 생명의 위험이라는 위험부담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방사선 치료 전에 태아를 인공 유산하는 것이 산모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의료진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례에서 우선 보아야 할 것은 학계에 보고된 백혈병의 예후가 산모의 생명을 살리는 데에 그다지 큰 확실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과 또한 방사선 치료의 결과로 태아가 반드시 사망하게 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다만 임신중인 산모에 가해지는 방사선 치료로 인해 태아가 기형이될 가능성이 있고, 태아의 감염에 의해 산모의 생명까지도 위험하리라는 예상을 하는 것이다. 만일의 경우에 백혈병에 걸린 산모에 대한 방사선 치료의 결과가 거의 확실하게 완쾌되리라는 가능성과 함께 태아의 감염 때문에 태아가 죽게 되고 따라서 산모에게 치명적인 위험 부담이 따르게 된다면 이미 살펴본 사례 1의 경우가 적용될 여지가 있다고는 보지만 위의 사례에 있어서는 비록 백혈병의 치료와 낙태와는 치료상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낙태가 산모의 생명을 구하는 데에 직접적인 효과를 미친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따르며, 따라서 이중 효과의 원리나 예외적인 긴급조치가 적용되기는 어렵다. 

 

교황청 신앙교리성의 '인공유산 반대 선언문' (1974. 11.18)은 인간의 생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생명의 여러 단계에 따른 어떠한 차별도 다른 차별과 마찬가지로 결코 정당화시킬 수 없다. 생명권은 몹시 허약한 노인도 완전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며 불치병 환자도 생명권을 박탈당할 수 없다. 이 생명권은 인간 생명의 존중이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요구되는 것이다. 난자가 수정되는 순간부터, 아버지의 것도 어머니의 것도 아닌, 한 새로운 사람의 생명이 시작된다. 그것은 그 자신의 성장을 가지는 한 새로운 사람의 생명인 것이다. 만일 그것이 사람의 생명이 아니라면 결코 그것이 사람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1987년의 교황청 신앙교리성서의 훈령 '생명의 선물' 역시 이와 꼭 같은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1992년의 한국 주교단 성명서에서도 이를 재천명한다. 

 

낙태의 문제에 있어서 항상 고려되어야할 기본 가치는 무엇보다도 먼저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과 생명 그 자체에 대한 각 인간 존재의 권리에 대한 인식과 함께 생존권에 대한 권리의 보호, 모성애에 대한 올바른 이해, 나아가서 의사는 인간생명을 보호하고 보살피는 사람이지 결코 그 생명을 파괴하는 자가 아니라는 의식에서 나타나는 의사들의 윤리 의식일 것이다. 

 

 

사례 6 

 

최근에 신부전증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의 수가 늘어서 신장이식술이 하나의 치료 방법으로 발전함에 따라 장기를 매매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가톨릭 계열 병원에서는 이런 매매에 의한 이식수술은 거부하고 있으나, 어떤 의사들은 인간은 자기의 장기에 대한 권리가 있으므로 자신의 판단과 의지에 따라 건강에 크게 해가 안되는 한 팔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돈이 있는 환자가 필요한 장기를 구입함은 타당하며, 한편 가난한 사람을 돕는 방법이라고 본다. 

 

장기이식의 문제는 특별히 뇌사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뇌의 기능이 완전히 정지된 후에도 장기들은 물리적, 의료적인 수단들에 의해 몇 시간 혹은 며칠 동안, 심지어 더 오랫동안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의학계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뇌사자에게서 장기를 떼어 이를 필요로하는 환자에게 이식하는 의술을 오래 전부터 베풀고 있다. 실상 죽음의 정의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어느 정도 뇌사를 인정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교황 비오 12세는 죽음의 순간을 결정하는 일은 교회의 권한 밖에 놓여진 문제로서 '죽음'과 '죽음 순간'의 명쾌한 정의를 내리고 확인하는 일은 의사들에게 맡겨져 있다고 언급함으로써 뇌사를 죽음의 순간으로 보는 의학계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뇌사에 대한 판단은 사실상 대단히 엄격하다. 장기이식을 실시하는 팀보다 다른 팀에 의해 뇌사가 확인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성공 가능한 이식을 위해서 사체로부터 얻어진 장기들의 생물학적 생명을 잃지 않아야 함은 절대적이다. 뇌사가 죽음의 정의로서 확실하다면 뇌사후 얼마간 살아 있는 장기들을 유용하게 활용하기 위해 기계적으로 장기들과 세포조직들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에 역행한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방법이 조작의 방법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으나 그들은 살아있는 사람으로서의 지위를 가지지 않는, 오직 인간 육체의 한 부분으로 작용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언제나 인간 특성에 대한 이해로부터 나온다. 

 

사람의 한 생애 동안 건강과 생명 자체는 이웃에 대한 봉사를 실행하는 데 있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타인의 장기를 가지는 것이 인간의 대화적 특성에 맞는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은 후에라도 생명은 이식된 장기의 형태로 타인을 위한 봉사에 계속해서 헌신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죽은 후 자신의 장기를 제공할 수 있는 자유의 존중, 장기의 유용성, 그리고 가족들의 권리와 그와 관련된 법적인 문제들은 해결되어야 하지만, 윤리적인 견해에서 우리 지상 생활의 마지막이 올바르게 끝을 맺어야 한다면 우리의 장기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데 사용되는 것을 반대할 만한 어떠한 장애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사례는 죽음의 순간과 관련된 장기이식의 문제는 아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장기 이식에 관한 문제로서 필요한 경우 매매까지도 허용되어야 하지 않는가?의 문제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살아 있는 사람의 장기를 이식하는 문제 역시 순수한 차원에서는 윤리적으로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현대 의학이 오늘날처럼 발달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하고 부당한 모험으로 여겨지던 신장이식도 거의 완벽한 성공을 이루어내고 있으며 해마다 수백, 수천 명의 목숨이 구해지고 있다. 본래 면역학적인 문제들은 극복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졌고, 따라서 오직 모체나 쌍동이의 신장만이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보았었지만 그러한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고, 장기 이식의 외과적 발달은 이미 다른 장기에까지 확대되었다. 사체(死體)의 눈에서 이식된 각막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빛을 주었고, 현재로서는 간 이식까지도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생명과 활동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 신장의 희생은 위대한 사랑의 계명 안에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행동 판단의 전체적인 지향이 선할 때에만 한정된다. 지향이 선하지 않을 때의 지체 절단은 윤리적 악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모든 장기 이식 수술들은 자유로이 수여를 결정하는 수여자와 사랑이라는 명제 하에 받아들이는 수령자 모두에게 선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랑으로 비추어진 응답은 장기 수여자의 타인을 향한 그의 은의(恩義)를 근본적으로 위태롭게 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해치지 않는 고유한 한계 안에서 장기의 일부분을 조심스럽게 제공하게끔 여건을 마련해 주게될 것이다. 의사는 장기 수여자가 부딪히게 될 위험에 관하여 의학 지식을 알려줄 의무가 있으며, 현명한 결정을 하도록 그를 도와 주어야 한다. 장기 이식을 위한 중요한 결정 기준은 인간 자유의 진전과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존경을 지니고 있는 외과 의사의 양심과 지성에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윤리는 직접적으로나 혹은 간접적으로나 자신의 신체의 기능을 장애하거나 제거시키지 못한다고 가르친다. 만일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전체성의 원리가 적용되는 경우 뿐이다. 그 이유는 인간 자신은 자신의 신체에 대해 무제한적 권리를 갖는 것이 결코 아니며, 윤리적으로 정당한 범위에서만 한정된 권리를 갖기 때문이다. 생명이나 그와 관련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경우에 따라서 지체를 절단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장기를 꼭 필요로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매매의 방법을 정당화시킨다는 것은 당연히 비윤리적이다. 사람의 신체가 매매됨으로써 상품화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인간의 비인간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페쉬케 신부는 장기 매매의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의학의 발달로 인하여 죽어가는 제공자의 신장만을 이식하던 것이 차츰 살아있는 제공자로부터의 신장이식으로 바뀌어져 가고 있다. 이것은 다른 장기이식에 있어서도 그것이 가능해져 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죽어가는 제공자보다 살아 있는 제공 지원자의 수가 아주 적다. 그래서 신장이나 피부나 혈액도 살아 있는 사람으로부터 돈을 주고 사서 이식하는 일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제공자들은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어떤 아버지는 위독한 병에 걸린 딸에게 신장을 제공한 사람에게 그 값을 지불하기를 원한다. 제공자는 돈을 받음으로써 소녀의 생명도 구하고 자기 가정의 경제적 사정에도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이 양쪽의 행동을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나무라지는 못할 것이다. 문제는 인간의 지체를 가지고 암거래하는 식으로 상거래하는 풍토가 성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막기 위하여 어떤 나라들은 장기 제공자가 값을 받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으며 다만 애덕으로 제공하는 것만을 허용하고 있다. 이것이 불가능하게 된다면 장기 거래는 지하로 숨어 제공자나 제공받는 자가 모두 의료적인 위험을 당하게 되므로 정부는 장기 제공에 대해서 엄격한 감시와 심사를 해야할 필요가 있다". 

 

 

사례 7 

 

얼마 전에 파킨스씨 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유산될 태아의 부신의 일부를 환자의 뇌에 이식하는 치료법이 개발되어 많은 의사들이 여기에 관심을 갖고 시술해 보고자 한다. 

 

이는 인체실험에 대한 윤리문제이다. 고통받고 있는 환자의 치료를 위해 곧 죽게될 태아를 이용한다고는 하지만 비록 유산될 태아라고 하더라도 이는 분명 살아있는 생명체이며, 이러한 생명체에 대한 인체실험의 윤리성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교황청 신앙교리성의 훈령 '생명의 선물'은 인간 배아와 태아에 대한 연구나 실험에 대한 윤리적 평가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살아 있는 배아에 대한 의학적 연구는 그 일이 태아나 어머니의 생명과 온전성을 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도덕적 확신이 없는 한, 그리고 그 조작에 대한 부모의 자유스럽고 충분히 이해된 상태의 동의가 없는 한 실시되는 것을 중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연구는, 그것이 아무리 인간 배아를 관찰하는 정도의 간단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 방법이나 그로 인한 영향 때문에 배아의 생명이나 형태에 해를 준다면 그것은 부당한 것이 된다. 실험이라든지, 그 실험의 목적이 치료적인지 아닌지에 대한 구분을 함에 있어서는 또 한 가지 그 실험이 살아 있는 배아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죽은 것에 대한 것인지를 구분하는 일도 중요하다. 만일 배아가 살아 있는 경우라면 그것의 생존 능력 여하를 불문하고 다른 인격체와 마찬가지로 존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자면 직접적으로 치료적이 아닌 배아에 대한 실험은 부당한 일이다". 

 

사실상 실험은 과학 기술의 발전이나 나아가서 의학의 발전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에 있어서 지켜져야 할 원칙은, 특별히 의학 분야에 있어서는 반드시 치료의 목적을 벗어나서는 안되며, 살아 있는 인간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져오는 방법은 더욱이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치료 행위라 하더라도 그 수단이 악한 일이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파킨스씨 병을 고치기 위한 치료의 방법으로 살아 있는 태아 (비록 유산될 처지에 놓여 있는 태아라 하더라도)를 살해하는 방법을 통해서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도 있다고 해야되지 않겠는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가정권리 헌장'에서도 "인간 존엄성의 존중은 태아에 대한 어떤 실험 조작이나 이용을 배제한다"는 점을 확실히 하고 있다. 비록 유산될 가능성이 있는 태아라 하더라도 생명체임이 분명하며 침해될 수 없는 생명의 권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체에 대한 임상실험에 있어서 기본 원칙과 의사들의 의무에 대한 권위있는 지침은 헬싱키 선언에 잘 드러나 있다. 인체에 가해지는 임상실험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지켜져야 할 것은 그러한 실험이 정당화될 수 있는 학문적 및 윤리적 원칙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며, 실험을 하는 동안 실험 대상자나 그 보호자는 언제라도 그 실험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하며, 나아가서 의사들 역시 실험을 계속하는 것이 실험 대상자에게 해롭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그 실험을 중단해야 할 의무가 항상 남아 있다는 점이다. 

 

 

사례 8 

 

현재 우리나라의 종합 병원에서는 불임을 극복하기 위하여 체외수정 (시험관아기) 시술로 임신을 가능하게 하여 불임부부를 돕고 있는데 가톨릭 계열 병원에서는 왜 이를 금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발표된 문건에서는 시험관 아기의 비윤리성을 다음의 다섯 가지로 요약하여 지적하고 있다. 이 다섯 가지에 대해 보다 상세한 해설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체외에서 수정된 수정란의 생명성 논란 : 법의학과 윤리학에서는 일단 수정된 수정란일지라도 인간 생명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법적으로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체외수정의 과정에서 가장 먼저 지적되는 비윤리성은 수정란 손실의 문제이다. 체외수정 (In Virto Fertilization)이란 여성의 난자를 외과적 시술을 통하여 체취하고 체취된 난자에 남성의 정자를 유리 접시에서 수정시키고, 그런 다음 성공적인 세포 분열이 발견될 때까지 배양한 후에 이 수정란을 여성의 자궁 안에 주입하는 의료 기술인데, 이러한 과정에서 착상에 성공하기란 확률상 그리 높지 않을 뿐 아니라, 많은 경우에는 확률을 높이기 위하여 여러 개의 수정란을 한꺼번에 여성의 자궁에 주입하고 나중에 착상된 하나의 수정란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흡출하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으로는 인간생명은 수정란에서부터 시작되며, 따라서 수정란의 손실은 인간생명의 손실과도 같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 생명의 시작에 관한 문제는 특별히 생명윤리의 분야에서 매우 중요하다. 낙태라든가 체외수정의 문제에 있어서 인간생명이 언제부터 시작되는가에 따라 각 행위에 대한 윤리적 평가는 상당히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간생명의 시작을 수정란의 자궁내 착상에서부터라고 가정한다면 착상 이전의 수정란에 대한 실험이나 연구, 혹은 실험으로 인간 수정란 상실 등의 문제는 윤리적으로 그리 큰 문제를 야기시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론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가톨릭 교회 안에서 볼 수 있는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은 성 알베르또 막뉴스 (Albertus Magnus: 1193-1280) 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인간생명의 시작에 관한 이론에 있어서의 중심은 인간에게 언제 영혼이 주입되는가?의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해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오랫동안 토론하였고, 아직도 보편적인 합의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가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하는 성서 텍스트는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언제 영혼이 주입되는지에 대한 성서적 언급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학자 및 철학자들은 생명에 대한 불멸의 원리는 임신 행위를 통한 수정의 순간에 이루어진다는 생물학자들의 주장을 수용하였고, 과거 수세기 동안 태아에게 있어서 영혼의 주입은 임신의 순간에 일어나며 생명은 그 즉시 시작된다는 것이 가톨릭 교회 안에서 점차적으로 하나의 확신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인간생명의 시작에 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에 잘 드러나 있는데, 그 가르침은 낙태와 유아살해가 중대한 죄이기 때문에 인간생명은 임신의 순간부터 각별히 보호를 받아 마땅하다는 시각이며, 이는 생명 현상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보호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교황청 신앙교리성의 훈령 '생명의 선물' 역시 공의회의 입장을 재확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난자가 수정되는 순간부터, 아버지의 것도 어머니의 것도 아닌, 한 새로운 사람의 생명이 시작된다. 그것은 그 자신의 성장을 가지는 한 새로운 사람의 생명인 것이다... 현대유전학은 이 자명한 불변의 진리를 확인해 준다. 이 생명체가 자라나서 충분히 독자적인 특징을 지닌 한 사람이 될 프로그램이 임신되는 첫 순간부터 수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유전학은 증명해 주었다". 

 

이러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가장 확실하게 지지해 주는 분야는 현대발생학이다. 현대발생학은 어느 분야보다도 가장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인간생명의 시작에 관한 이론으로서 인간의 새 생명이 탄생하는 최초의 결정적인 순간은 난자의 수정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며, 이 순간에 유일하고도 반복되어질 수 없는 유전인자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생명과는 구별되는 새 생명이 주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정확하게 일치되는 이론이다. 

 

이들의 연구에 의하면 난자가 수정됨으로써 유전인자는 결정되고, 이미 이 유전인자로써 새 생명이 가지는 개성과 타고난 잠재력이 주어진다. 이렇게 결정된 유전인자는 자신의 생명을 역동적으로 전개해 가면서, 아버지, 어머니의 것과는 구분되는 자신만의 고유한 모습을 갖게 된다. 나팔관 속에서 세포 분열이 시작되고 5-7일 후에 수정란은 자궁을 향하고 있는 자신의 길을 발견하게 되고 자궁은 수정란이 더욱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적합한 환경을 만들어주기 때문에 이때부터 수정란의 빠른 움직임이 시작된다. 이때부터 수정란은 자기 복제력과 함께 경이로운 생명력을 보여준다. 배아(胚兒)는 착상 전에 이미 자신이 기생하게 될 어머니의 기생 기관에 호르몬에 관한 정보를 전달할 고유한 의사 소통망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배아는 어머니의 기생 기관에 앞으로 9개월 동안 공동생활을 위한 준비를 요청하게 된다. 의사 소통의 전체적인 체계를 포함한 이 모든 신비스런 생명은 그 자체가 결국 완전히 발달된 아이와 어른으로 드러내고 있음을 명백히 하는 생명 원리를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발생학의 자료는 인간 생명의 유전 안에서 수정이 인간 생명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주장하는 윤리학자, 생물학자, 철학자들의 위치를 지지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인간생명의 시작을 수정되는 순간부터라고 보는 현대발생학의 자료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반박하여 인간생명의 시작은 수정란 분할의 최초 시기, 착상의 시기, 대뇌피질이 발달하는 최초의 시기 등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설득력은 미약하다. 

 

(2) 부부 결합의 침대와 시험관은 동일할 수 없다. 

 

시험관 아기에 관한 윤리적 문제의 관심은 또한 출생의 인간적 의미와 깊이 관련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언급대로 "출산력은 부부애의 결실이고 징표이며, 아울러 부부 상호간의 완전한 자기 봉헌의 산 증거이다". 즉 인간의 출산은 부부애(夫婦愛), 부부 상호간의 완전한 자기 봉헌에 대한 해석과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부부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육화(肉化)된 영(靈), 즉 육체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는 영혼이요, 불멸의 영을 부여받은 육체이기에 통일된 전체로서 사랑할 소명을 받았다. 사랑은 인간의 육체를 포함하고 육체는 정신적 사랑의 참여자가 되었다... 남자와 여자가 부부에게만 정당한 행동을 통하여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성(性)은 결코 생물학적인 것만은 아니고 인간의 가장 깊은 존재와 관련된다". 

 

이렇듯이 부부애와 부부행위 사이에는 부부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친밀감과 생동감이 자리하며, 특수한 방법을 통하여 부부애를 실현시키고 표현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부부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부행위는 부부들에게 있어서 '고유하고도 배타적인 행위'인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3년 그의 담화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부부애를 표현하는 행위를 통해서 부부는 서로에게 자신을 선물로 주기 위하여 불리움을 받았다. 그들이 그들 자신의 아름다움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상호증여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인간을 통해서 인간을'이라는 단순한 말이 표현하는 것은 부부애의 완전한 진리, 인간의 내적 사랑이다. 인간에게, 그리고 인간의 선을 위해 온전히 집중되는 사랑, 인간 존재의 선 위에 집중되는 사랑인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부부가 서로를 자유롭게 서로를 내어주는 (善)선이다" 

 

부부가 서로 자신을 내어준다는 의미는 곧 그들 서로를 완전하고도 친밀하게 결합시키면서 자녀들에게 자신들을 내어주는 존재가 된다는 의미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부부 상호간의 자기 증여와 내적 친밀감의 결과가 곧 자녀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녀'는 부부에게 있어서 부부애, 부부 상호간의 전적인 자기 증여, 전적인 헌신, 그리고 내적 친밀감의 결과로서 선물로 주어지는 하나의 독립된 생명이며, '자녀' 역시 그의 부모로부터 그러한 관계를 통해 이 세상에 태어날 권리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험관을 통한 출산은 어떠한가? 사실 시험관 아기의 수태를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종류의 행위들이 요구된다. 정자와 난자라는 생식세포의 추출, 그 세포들의 융합과 시험관 내부에서의 배양, 그리고 수정된 배아의 자궁에로의 이전 등의 복잡한 과정이 부부가 아닌 제 3자로서의 의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 안에서 현재로서는 부부애의 고유한 역동성처럼 개별적이든 전체적이든 부부 상호간의 자기 증여, 내적 친밀감을 주는 인격적 관계를 드러내고 완성한다고 주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시험관 아기의 출산 과정과 결과를 볼 때 시험관 안에서의 잉태가 부부에게 인격적 품위를 제공해 줄 수 없다는 점과, 또 일정한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이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의 물건 생산을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3) 체외에서 수정된 수정란의 처리문제 

 

앞에서 언급한 체외수정의 과정을 통해서 실제로 임신이 성립되는 확률은 약 20-25% 정도 밖에 안된다고 한다. 유리 접시 위에서 배양되고 발달된 수정란은 의료적인 기술에 의해 어머니의 자궁에로 옮겨지게 되며, 이 과정에서 우리는 수정란의 손실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착상의 성공율을 높이기 위해 여러 개의 수정란을 배양하여 복수 다수이식을 시도하게 되고, 다태(多胎) 임신이 되었을 경우 선택적 흡출에 의한 감수 유산이 불가피하게 된다. 비록 새로운 기술들이 발달하여 수정란의 손실을 최소화하고, 단 한 개의 수정란으로써도 착상이 보다 쉽게 가능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수정란에서부터 인간생명의 시작으로 보는 입장에서 온전한 인간생명의 존엄성을 가지는 배아에게 가해지는 살인적 폭력은 너무나 심각하다. 신앙교리성은 이 점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한 번 쓰고 버리는 생물학적 물질로 인간의 배아를 만들어내는 일은 부도덕하다. 여기에는 두 가지 도덕적 문제들이 관여한다. 첫째는 인간을 하나의 수단으로 격하시키는 것에 대한 금지이며, 둘째는 체외수정으로 얻어진 배아에 대한 의도적인 유기의 문제이다. 연구를 위하여 의도적으로 만들어졌거나 체외수정 시술 과정에서 남은 잉여 배아들은 당연히 생존을 위한 안전한 수단에 제공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수정란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의학계의 노력으로 이제 인위적인 수정란 증식의 방법이 성공하였으며, 따라서 인조 복제 인간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고 한다. 교황청 신앙교리성서에서도 이미 인공수정 기술의 발달과 관련된 다른 형태의 생물학적 및 유전조작적 기술들이 가능하게된 것을 심각하게 우려하면서 복제인간의 가능성까지도 예견하였던 것이고, 그러한 예견은 이미 미국의 조지 워싱턴 대학의 메디컬센터 연구 팀의 수정란 증식 방법의 성공과 함께 그 현실화의 시기만을 남겨놓고 있는 상황이다. 생명의 관리자로서의 인간이 인간생명을 지배하고 조작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고 동양이나 서양 할 것없이 전통적으로 인간생명은 하늘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의 선물이라는 개념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수정란 증식의 성공결과로 이제 대량생산에 의한 소모품 인간이 전혀 불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전쟁의 소모품으로서의 인간, 우주인이라든가 핵무기 취급자와도 같은 생명을 내걸어야만 하는 직종에 씌여질 인간의 양산(量産), 의학실험 재료의 공급을 위한 인간 배아의 증식 뿐만 아닐, 수정란 증식을 통해 양산된 인간 배아로써 장기이식을 위한 장기제공자들을 만들어 내면서 이제 인간의 존엄성은 철저하게 외면당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신앙교리성은 이렇게 말한다: "순전히 연구를 목적으로 실험 실적으로 얻은 인간 배아를 의도적으로 파괴하는 중대한 잘못에 대해서 이를 비난하는 것은 우리의 마땅한 의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연구자는 하느님의 자리를 빼앗게 되는 것이며, 설사 그 자신이 이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는 멋대로 어떤 사람은 살리고 또 어떤 힘 없는 사람은 죽여버리는 등 결국은 다른 사람의 운명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는 주인 행세를 하게되는 것이다". 

 

(4) 우생학적으로 우세한 인물들의 정자나 난자를 제공하거나 그를 보관하는 은행 설치로 인간 비인간적이고 무책임한 방임 

 

체외수정은 이제 또 다른 형태의 도덕적 딜렘마에 봉착한다. 비배우자간의 체외수정의 형태에서부터 정자은행, 난자은행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나게 되었고, 이왕이면 우생학적으로 우수한 생식세포로써 임신하고자하는 의도가 현실화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는 간과하지 못할 중대한 비인간화의 모습이 도사리고 있다. 인간의 생식세포가 시장에서 매매되는 일종의 상품처럼 취급됨으로써 인간 자신을 철저하게 비인간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며, 이러한 적용으로써 혈통 개념이 혼란해지며, 전통적인 가족 개념을 파괴함은 물론 인간의 출산을 비인간화시키는 심각한 위험을 초래하게 된다. 정자은행이나 난자은행을 통한 체외수정은 체외수정에 관여하지 않은 배우자에게 따르는 심리적인 상처, 의사(擬似) 간통, 아기의 유전적 계승의 혼란 등과 같은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시킨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5) 대리모의 문제 

 

이제 우리는 더욱 부정적인 단어에 직면하게 된다. 대리모 수정의 형태를 가능하게 하는 수정란 이식과 난자 은행이라는 단어이다. 난자 은행 혹은 수정란 은행과 연결된 수정란 이식은 다양한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건강한 난소를 가지고 있으나 아기를 임신할 수 없는 여성의 경우, 그 여성에게서 난자를 체취하여 체외에서 수정을 시킨 후 다른 여성의 자궁에 이식하게되는 대리모 수정의 방법이 사용된다. 계약이나 혹은 친지 관계에 의해서 자궁을 빌려주는 대리모는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게 되고 출산 후에는 유전적인 부모에게 넘겨지게 된다. 또 이와는 다른 경우로 건강한 자궁은 가지고 있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자신의 난자를 수정시킬 수 없는 여성은 난자 은행 등 익명의 제공자에 의해 주어진 난자에 자신의 남편의 정자를 수정시켜 자기 자신의 자궁에 이식하는 방법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이 경우는 익명의 정자 제공자에 의한 체외수정과 매우 비슷하다. 

 

가계 (家系)의 고유한 혈통을 간절히 원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정당화시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돈으로 고용된 임산부와 모성애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겠는가? 대리모와 출산된 아기와의 관계가 사랑없이 돈으로 고용된 단순한 관계라면 그 사태의 심각성은 크다. 태어나게될 아기에게는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생겨나게될 내적 친밀감의 연대가 전혀 없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만일 고용된 대리모가 참된 모성애를 지니고 있는 여인이라면 아기와의 내적 친밀감은 난자를 제공한 어머니보다는 오히려 그 대리모와 더 깊이 연결될 것이며, 그보다 더 근본적인 점은 대리모가 자궁을 대신 빌려준다는 결정을 한다는 것 자체에서부터 이미 그와같은 내적 친밀감이 생길 가능성은 매우 높은 것으로 보여진다. 아기는 두 가지 상황 사이에서 무척 방황할 것이다. 

 

또 한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대리모가 원래의 부부에게 유전병이나 연약한 염색체를 지니고 태어나는 아기를 낳아 준다면 어떤 일이 생겨 나겠는가?하는 점이다. 더 나아가 대리모가 난자를 제공한 여인의 어머니이거나 여동생과 같은 가족관계 안에서 선택될 경우 야기되는 법적, 윤리적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건전하지 못하고, 또 많은 상처를 주는 수많은 문제들이 야기될 것이고 그에 따라 자연적이지 못한 여러 과정들이 생겨날 것은 명백하다. 

 

신앙교리성은 이 문제에 대한 윤리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리모는 모성적 사랑의 의무와 부부간의 정결, 그리고 책임있는 모성으로서의 의무를 객관적으로 다하지 못한 것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가 자기 어머니 자궁 속에서 임신되고 발달되며 바로 그 부모에 의해 세상에 나와 성장되어야하는 권리와 아이들의 존엄성을 해치는 일인 동시에 가정에도 피해를 주어 가족의 기본 구성 단위인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도덕적 요소의 분열을 초래하기도 한다". 

 

 

사례 9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뇌사에 의한 죽음의 판정이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여러 병원에서 뇌사에 의한 죽음을 판정하고 이들 환자의 장기를 이식하고 있는데 얼마 전 가톨릭 계열 병원에서도 한 젊은 의사가 교통사고로 뇌사의 판정을 받았을 때 그의 부모의 동의를 얻어 간의 이식을 수행하였다. 이 행위는 교회의 가르침과 윤리적으로 어떻게 해석되고 알아들어야 하는가? 

 

죽음의 정확한 순간에 대한 정의는 인류 역사를 통하여 중대한 관심사로 다루어져 왔다. 과거에는 죽음의 통상적인 표징이 있은 후 죽음이라고 간주되었던 것이 이제는 인간 소생의 기술 발달로 '죽음의 순간'에 대한 총체적인 질문은 새로운 과제로 등장하였다. 그것은 첫번째, 심장 이식에서 대두되었던 문제로, 사실 전통적인 연구 방법에 대 변혁을 초래하는 것이 되었다. 이제 심장에 대한 신화적인 분위기는 없어졌다. 심장은 방금 죽은 사람의 심장이나 플라스틱 심장으로 대치될 수 있는 중요한 펌프 기능인 것이다. 심장에 대한 이런 의식들로 인해 일반 대중들은 죽음 순간에 대한 정의가 즉시 내려질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 죽음의 생물학적 기초가 재규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하게 대두되는 새로운 연구들을 통해 인간 생명의 시작과 끝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가고 있다. 

 

소생에 대한 문제가 처음으로 대두되었을 때 교황 비오 12세는 로마의 가톨릭 의사들의 모임에서 다음과 같은 단언을 내렸다: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는 환자의 '죽음'과 '죽음 순간'의 명쾌한 정의를 내리고 확인하는 일은 의사들의 영역(사명)이다... 우리는 육체로부터 영혼의 분리라는 죽음의 통상적인 개념을 언급할 수는 있으나, 실제적인 차원에 있어서는 '육체'와 '분리'의 단어 속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에 깊이 유의할 필요가 있다. 어떤 특별한 경우, 죽음의 개념에 대한 대답은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원칙들에 의해 지배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교회의 권한 밖에 놓여진 문제이다". 

 

비오 12세의 이러한 언급과 함께 가톨릭 윤리신학자들도 대체로 의학계의 의견을 수용하면서 뇌사를 죽음의 정의로 받아들이고 있다. 의학계에서는 뇌사 상태는 어떤 의학적인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회복이 불가능한 사실상의 사체 상태라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은 또한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장기 이식이 활발해지려면 뇌사가 공식적인 죽음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다. 뇌 활동의 불가역적 정지 상태의 뇌사 환자에게 주사하는 것은 사체에 주사하는 것과 같이 비윤리적이며, 뇌사가 죽음으로 인정될 때 환자의 가족이 당하는 정신적 고통 및 경제적 부담을 덜어 주며, 안락사에 관계되는 중요한 도덕적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으며, 뇌사가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양시켜 준다고 보는 것이다. 

 

죽음 순간의 실제적인 정의를 내리는데 있어서, 특별히 장기의 절단이 요구되는 장기 이식에 있어서, 의학계는 가장 안전한 방법을 선택한다. 곧 전체 뇌의 죽음, 즉 육체의 생물학적 기능을 조정하는 뇌(연수)의 파괴를 뇌사라고 주장하면서 이 뇌사가 곧 죽음의 기준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1966년 런던에서 성직계, 법조계, 외과 의사계 사이에서 새로운 외과적 진료에 대한 윤리적 연구를 토의하기 위한 회의가 있었는데 이 회의에서 분류되어진 어느 한 장기 기증자의 경우가 죽음의 기준에 대한 권위 있는 모범으로 제시되었다. 모두 다섯 가지의 기준인데 첫째, 빛에 대한 무반사와 동공의 완전한 확대, 둘째, 정상적 자극에 대한 신경과 힘줄의 무반응, 셋째, 호흡기가 제거된 후 5분 이상의 자발적인 호흡 중지, 넷째, 혈압 증진제의 대량 사용에도 지속되는 혈압 저하와 몇분 동안의 EEG 상의 편평, 다섯째, 심장 박동의 완전한 정지 등이며, 이제는 더 이상 이 조건들만이 죽음의 증거로 제시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버드 대학 팀은 후에 장기 이식 문제를 전적으로 연구하여 자신들의 판정 명제들을 제시했는데, 그들은 알렉산더 팀에 의해 제안된 "혈압 저하"에 대한 기준을 빼 버리면서 그 밖의 다른 기준들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즉 하버드 위원회는 뇌사라고 판정되어지기 위한 상태는 첫째, 회복 가능성이 없는 깊은 혼수 상태, 둘째, 외부의 큰 자극에 대한 무반응, 셋째, 자율 세포의 움직임 없는 무반사, 넷째, 빛에 대한 동공의 무반사, 확대 다섯째, EEG 무반응 여섯째, 위의 다섯 가지 상태의 24시간 지속 등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연구의 진행 과정을 통해서 볼 때, 과거 수여자의 장기가 타인의 생명을 구하는 봉사에 제공되지 않았을 때 행하여진 연구들 보다 죽음의 기준에 대한 고도의 정확성이 요구되고 있음은 다소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 논의들은 결국은 생명을 연장시키거나 정지하기 위한 결정을 위해서는 숱한 과정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결론 만을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회복 불가능한 뇌사 판정은 대단히 엄격하다. 이식을 실시하는 팀보다 다른 팀들에 의해 뇌사가 확인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성공 가능한 이식을 위해서 사체로부터 얻어진 장기들이 생물학적 생명을 잃지 않아야 함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죽음의 과정이 확실하다 하더라도 인간의 전체적인 죽음이 뇌사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심은 남아 있다. 

 

그러므로 이 경우 장기 절단이 전체적인 죽음을 촉진시키는 것인지, 혹은 살인의 성격이 그대로 남아 있는지의 의문이 남게 된다. 이러한 예상에도 불구하고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전통적인 해석은 죽음의 새로운 원인이 아직 명확하게 소개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죽음의 전체 과정을 통해서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 완전한 죽음의 순간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어쨌든 뇌사가 참된 인격적 생명의 끝이라는 의미에서 인간 존재의 역사를 결코 짧게 만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뇌사가 의학계에서는 죽음의 정의로 받아들여지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실정법은 아직 뇌사를 죽음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그러기에 뇌사에 입각하여 장기를 적출하는 시도는 현행 실정법의 명백한 위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뇌사와 장기이식과는 물론 밀접한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전혀 별개의 문제로 취급되어야 한다. 

 

뇌사와는 다른 주제이기는 하지만 한 가지 더 언급할 것은 뇌사는 이른바 식물인간과는 명백히 다르다는 점이다. 그 차이점만 간단히 언급하기로 한다. 뇌사의 경우, 뇌간을 포함한 뇌 전체가 손상되어 심장 박동 외의 모든 기능이 정지되고 몸을 굽히거나 전혀 움직일 수 없으며, 인공호흡기가 없으면 호흡이 불가능하고 어떠한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수일 내에 반드시 심장사에 이르게 되는 반면, 식물 인간 상태는 대뇌만이 손상되어 기억, 사고, 감각 능력 등은 없으나 손발을 조금은 움직일 수도 있을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회복도 가능한 상태를 말한다. 뇌사가 식물 인간처럼 장기간 살 수 없는 이유는 생명의 기본적인 기관을 관장하는 뇌간 (호흡, 체온 조절, 혈압 조절, 심장 조절 등을 담당)까지 죽었기 때문이다. 

 

 

사례 10 

 

22세의 여자가 뇌 손상을 입고 식물 인간 상태로 2년 3개월을 병원 중환자실에서 유동식과 산소 호흡기의 도움으로 연명해 오고 있다. 가족들은 환자 간호에도 지쳤고 무의미한 삶의 지속보다는 환자의 생명은 하느님이 주관하시는 것이므로 하느님께 맡기고 산소 호흡기를 제거해 줄 것을 주치의에게 요구했다. 그런데 주치의는 산호 호흡기의 제거는 곧 환자를 소극적 안락사 시키는 것이므로 반대한다고 했으나, 병원 원목 신부는 이 조치를 안락사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먼저 안락사에 대한 정의(定義)를 내려보자. 교황청 신앙교리성이 1980년에 반포한 '안락사에 관한 선언'에서는 "안락사는 모든 고통을 제거하기 위하여, 저절로 혹은 고의로 죽음을 초래하는 행위 또는 부작위(不作爲)"만을 안락사로 이해한다. 곧 이러한 방법은 적극적인 방법과 소극적인 방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자는 물리적 혹은 화학적 방법으로 직접 죽음을 초래하는 것이고, 후자는 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일반 주지(周知)의 의료를 환자에게 시행하지 않아서 죽게하는 방법이다. 

 

소극적 안락사는 죽음을 촉진시키기 위한 노골적인 행동은 하지 않으나 적극적인 치료를 중지함으로써 초래되는 죽음을 말하는데, 만일 환자가 죽게되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을 경우, 더 이상 적극적인 치료를 하지 않는 것은 소극적 안락사라고 정의하기 보다는 의료 집착의 포기라는 측면에서 치료의 중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안락사에 있어서 그것이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모두를 반대한다. 

 

의학의 급속한 발달로 인해 과거에는 사망했을 환자들이 비록 의식이 없는 가운데서도 계속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인공호흡 장치와 심폐 기능 장치 등의 최신 의학 기기의 도움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식물 인간이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상태에서 생명의 연장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최근에 제기되고 있는 의학 윤리적 문제들 가운데 소위 '의료 집착'이라는 문제가 있다. 의학의 엄청난 진보와 함께 죽어가는 생명을 다시 생기있게 해주거나, 생명을 인공적인 방법으로 더 연장 시키거나 하면서, 단순하게 생명을 길게만 연장시키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환자의 상태가 거의 죽어가거나,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상황에서라도 생명을 더 연장시키기 위한 집착이 가능해진 것이다. 

 

신앙교리성은 이러한 문제에 당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남용될 위험을 안고 있는 기술 위주의 태도에서, 임종의 순간에 그리스도교적 삶의 개념과 인간의 존엄성 모두를 수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죽을 권리'를 말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의 손에 의하여 혹은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서 죽음을 획득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그리고 그리스도교적인 존엄성을 지니고 평화롭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치료 수단의 사용은 가끔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다". 

 

문제는 인간적 죽음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이다. 죽음이란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의 "피할 수 없는 사건"이다: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만 하고 따라서 인간은 이러한 피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죽음으로 운명지워진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은 운명에 처해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존재이며, 또한 그 "죽음" 속에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피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인간은 "인격적 존재"로서 불리움을 받았으며, 또한 양심을 가지고, 자유롭게, 또한 책임감을 가지면서 인간임을 실현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살기 위한 (죽음까지도 살기 위한) 존재로 불리움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적 품위"를 지니고 죽는다는 것은 인간 존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고 거절할 수 없는 요소이며, 전체로서의 인간생명의 요약이고 완전하게 되는 순간으로서의 평화로움과 용기를 가지고 죽음을 맞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죽음은 책임성있는 자유와 의식 안에서 참여되고 받아들여지며, 또한 각자의 고유한 삶을 통해서 생활 되어지기를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앙 교리 성성의 문헌은 정당하게 다음의 문장을 덧붙임으로써 본래의 문장을 완성하는 것이다: 즉,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 품위를 지닌 죽음. 사실, 신자들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비에의 참여, 지상의 삶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가는 과정, 그리고 인간들의 집에서 성부의 집으로의 이동을 죽음 안에서 발견하고 있다: 이는 죽음에 대해 순응하면서 살아가기를 요구하는 하나의 신앙인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어떤 환자가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그와 유사한 상황에 있는 환자들에게 부과되고 있는 정상적인 치료를 중단하지 않으면서도, 단순히 생명의 고통스럽고 불안한 연장을 위해서 시도되는 방법들에 대해서 거절하기로 양심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합법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의사는 위험에 처해 있는 어떤 사람이 적절한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걱정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소위 '의료 집착'이라는 문제를 결정하는 데 객관적 기준이 되는 것들 중에서 다음의 몇 가지는 꼭 기억해야만 한다. 

 

1) 치료의 측면에서의 무용성 혹은 무익성 (실제적으로 이러한 기준은 회복 불가능한 경우, 혹은 뇌사의 경우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기준의 조명 하에 이미 "의료 집착"이라는 표현은 결과적으로 모순이 되는 표현이다. 왜냐하면, 정확하게는 "의료 집착"은 치료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 마지막 고통이라는 상황에 있으면서 위험을 겪고 있는 환자의 측면에서의 고통스러움 혹은 중병(重病). 이러한 기준에서 볼 때, "의료적 집착"이라는 용어는 질병 자체에 대한 집착이라기 보다는 환자에 대한 집착을 보여 주는 비극적인 현실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것을 의료적 "폭력"이라고까지 비판하고 있다. 3) 중재하는 사람들 혹은 (그리고) 의료적 수단들의 예외성: 이러한 의료적 수단들을 과거의 윤리 신학자들은 "특수한 방법"이라고들 말했지만 오늘날에는 "불공평한 방법"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세번째 기준은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서 일종의 획기적인 주제가 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한 방법들은 어떤 시대, 어떤 불균형을 이루는 국가들 안에서, 또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 어떤 균형을 이루는 방법들로 변화되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여하튼 이러한 기준은 유익성이 없는 방법이라는 것을 더 잘 표현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방법들이 비록 예외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유익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소위 "의료 집착"이라는 것에 대해서 정의를 했고, 이제는 구체적 경우에 있어서 적용될 수 있는 객관적 기준들을 적용하는 면에서 살펴 보도록 하자. 이러한 적용은 항상 수월한 것은 아니다. 유능한 의료진들로부터 "지식과 양심" 안에서 적용되어야만 하는 문제인 것이다 : "어떤 의료행위가 언제 유익하고 또 언제 무익한가?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과, 또한 의료 행위가 언제부터 의료적 집착이라고 정의되어지는 순간으로 변화되는가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의사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점은 확실히 어려운 문제이다. 나는 의사들이 그들의 의료 행위 안에서 유용성, 혹은 무익성에 대해 결정해야만 할 때나 치료를 계속 한다거나 중지 한다는 결정을 해야만 할 때, '지식과 양심' 안에서 진실되게 행동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개별 환자에게 지금까지 이야기한 객관적 기준들을 적용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있을 때, 의사는 전문가들의 가르침과 인간적인 지혜를 따라야 할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진단이나 의학적 판단에 있어서 실수가 있을 수도 있다는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환자에게 무익하고 고통을 줄 수 있는 수단들을 일시 중지하는 임의적 결정이 환자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환자들에게는 분명히 일상적인 보살핌이 지속되어야만 하며, 또한 환자가 느끼고 있는 죽음이나 번민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확실한 느낌을 환자에게 줄 수 있어야만 한다. 

 

이제 치료수단의 중지에 대한 윤리성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는 위의 사례에 대해서 살펴보자. 

 

가톨릭 윤리신학의 가르침은 비오 12세의 교도권이 강조하는 것처럼, 건강을 지키기 위하여 일반적인 치료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의무적이지만, 특수한 수단의 사용은 정당하나 의무는 아니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치료방법을 (일반적 치료수단에 의한) 정상적 치료 방법과 (특수한 치료 수단에 의한) 예외적 치료방법으로 구분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신학자들은 결코 적용할 의무가 존재하지 않는 그런 방법에다 "예외적"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정상적 요법과 예외적 요법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은 매우 여러가지가 있다. 이 기준들은 각기 구체적인 경우에 따라서 적용되어야 한다. 그중의 일부는 객관적 기준이다 : 예컨대 주어진 요법의 관용이 얼마나 되느냐, 그런 요법을 이용하는 것이 적당하냐, 그런 요법을 이용하는 문제에 있어서 정의의 대안은 무엇이냐 등, 요법의 본성에 관한 것들이다. 그밖의 기준은 주관적 기준이다. 예컨대 어떤 환자에게는 심리적 충격이나 불안이나 불편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 등이다. 치료방법을 결정할 때에 어느 정도로까지 그 수단을 사용하고 그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적정한가를 확정한다는 것은 언제나 문제가 된다. 

 

모든 판단기준 중에서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되어야 할 것은 치료에 의하여 건져지고 살아나가게 될 생명의 성질이다. 가톨릭 의사협회의 국제연맹총회에 보낸 빌로 추기경의 서한은 이 문제에 관하여 매우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의사가 사람을 죽이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며 동시에 의사에게는 죽음과 싸우기 위하여 자기 의술의 모든 수단을 다 이용할 의무가 있다는 것은 생명의 神聖性에서 연유한다는 것이 강조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의사에게 과학의 끊임없는 창의적 활동에 의하여 주어지고 있는 생명유지 기술을 모두 사용할 의무가 지워져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불치병의 마지막 단계 동안에 식물적 생명을 거듭 되살릴 의무가 부과된다면 그것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무용한 하나의 고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생명의 성질이라는 기준이란 반드시 고려되어야만 할 유일한 기준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주관적인 고려사항들을 참작해서 무슨 치료를 시행하고 무슨 치료를 시행하지 않을 지에 관해서 적절하게 신중히 판단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기본요점은 가족에게 어떠한 결과가 미치게 될 것인가를 포함하여 여러가지로 다양한 상황의 제측면들을 충분히 고려한 합리적인 근거에 따라서 결정이 내려져야 한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따라야 할 원칙은 예외적 요법을 실시할 윤리적 의무가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의사는 환자가 그런 요법을 거부할 경우에 환자의 소망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이른바 '최소한'이라고 부르는 그런 치료수단을 적용할 의무는 언제나 엄격히 남아있다. 즉 생명의 유지를 위하여 정상적이며 습관적으로 사용되는 그런 수단(영양공급, 수혈, 주사 등)은 언제나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최소한의 처치마저 중단해 버린다는 것은 사실상 환자의 생명이 끝나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아울러, 교회는 이러한 일반원칙의 적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다음의 설명을 추가한다. 

 

- 여타의 충분한 치료법이 없다면 그러한 수단이 아직 실험 단계에 있고 어떤 위험이 없지 않다 하더라도, 가장 진보된 의학기술에 의하여 제공된 수단들을, 환자의 동의 하에 사용하는 것은 허용된다. 그 수단들을 받아들일 때, 환자는 인간성에 대한 봉사 안에서 아량까지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 또한 그 결과가 기대에 너무 미치지 못할 때, 환자의 동의 하에 그러한 수단들을 중단하는 것은 허용된다. 그러나 그러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그 방면에 특히 유능한 의사들의 조언은 물론, 환자와 환자 가족들의 온당한 소망을 참작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전문의사들은 설비 및 인적 투자가, 예상되는 결과에 비해 균형을 잃느냐는 문제를 판단할 수 있고; 적용되는 기술이 그러한 시술에서 환자가 가질 수 있는 이해에 상반되는 고통이나 노고를 환자에게 강요하느냐는 것을 판단할 수 있다. 

 

- 또한 의학이 제공할 수 있는 정상적인 수단으로 대용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위험을 수반하는 난사(難事)만 될 뿐인 기용(旣用)의 기술에 의지해야 할 의무를 어느 누구에게도 강요할 수 없다. 이에 대한 거부는 자살과 같지 않다; 그와는 반대로, 인간조건의 수용으로서 간주되어야 하며, 기대할 수 있는 결과와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의학적 가료를 회피하려는 원의나 가족 혹은 공동체에 과도한 부담을 강요하지 않으려는 원의로 간주되어야 한다. 

 

- 사용되는 수단에도 불구하고 회피할 수 없는 죽음이 임박할 때, 불확실하고 고통스러운 생명의 연장을 보호해 줄뿐인 치료법을 거부할 수 있는 결정은 양심 안에서 허용된다. 단, 유사한 병증의 환자에게 요구되는 정상적인 간호는 중단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상황 안에서, 위험 중에 있는 사람을 돕지 못한 일로 의사가 자책할 이유는 없다. 

 

이상의 교회 가르침을 토대로 위의 사례를 볼 때 산소 호흡기는 특수한 치료 행위라고 말할 수 있겠다. 가족들의 엄청난 정신적 및 경제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예상되는 결과도 희망적이지 못하다. 이 경우에서의 산소 호흡기 제거는 소극적 안락사와는 구별되는 행위로 보아야 한다. 

 

[사목연구 창간호(1994년, 가톨릭대학교 사목연구소), 이동익(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 윤리신학) / 이동익 신부님 홈페이지에서]



370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