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장기이식에서의 추정 동의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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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259

장기이식의 한계에 관한 윤리신학적 고찰

 

 

서론

 

가톨릭 교회가 장기이식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밝힌 것은 1956년 교황 비오 12세 때이다. 비오 12세는 이탈리아 각막 기증자 협회 대표자들을 접견한 자리에서 그들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치료를 위해서나 학문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사체로부터 장기나 인체 조직을 떼어낼 수 있다는 원칙에 기본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살아있는 사람으로부터의 장기나 조직이식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지만 가톨릭 교회는 윤리적, 의학적 차원에서 장기이식을 원칙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학 및 과학 기술의 놀라운 발전과 함께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는 장기이식의 긍정적 측면보다는 오히려 부정적 측면임은 부정할 수 없다. 존엄성을 지닌 인간이 일종의 사물로 취급되고, 단순히 실험을 위한 한 대상으로 전락되는 인간성의 상실위기와 함께 장기이식과 관련되어 돈과 권력의 횡포라든가 폭력까지도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대의 상황에서 "장기이식에는 어떤 한계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사람들의 입에 무척 자주 오르내린다. 문제의 심각성과 함께 자주 제기되는 이러한 질문은 바로 엊그제까지만 해도 과학-기술의 놀라운 진보조차도 이 문제 있어서는 도저히 어떤 정확한 해답을 줄 수 없을 정도로 장벽에 부딪혀온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질문은 매우 일반적인 질문이기는 하지만 장기이식과 관련하여 인간의 가치를 보호하도록 촉구하는 지혜가 전혀 담겨져 있지 않은 질문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장기이식에 있어서 인간은 기증자 혹은 수혜자로서 원인이며 동시에 목적이며, 주인공이며 집행자가 된다. "장기이식에는 어떤 한계가 있는가?"라는 질문은 일반 대중들뿐만 아니라 의학과 윤리를 공부하는 사람들, 나아가서 인간의 본성으로서 책임을 수반하는 자유를 행사하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본고에서는 장기이식 분야에서 특히 심하게 도전을 받고 있는 윤리적 도전들에 대해 인간으로서의 참된 모습이라는 윤리성의 근본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문제의 핵심을 {인간으로서의 인간}에로 촛점을 맞추게될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발전과 존중이 장기이식에 대한 사고를 떠받치는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기이식과 관련된 의학 및 과학기술은 명백히 인간 생명에의 봉사를 지향해야 하며, 이러한 전제와 관련하여 기증자와 수혜자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다루고나서 인간의 건강과 생명을 위한 의료계획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할 몇 가지 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새로운 한계와 윤리적 도전 

 

인간 삶에 있어서의 실제적 상황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져 있지만 특별히 인간 장기이식 분야는 항상 더 넓게 그 영역을 펼쳐가고 그에 따르는 새로운 한계는 끊임없이 새롭게 대두된다. 각막, 골수, 간, 신장, 췌장, 폐, 심장 등의 이식 수술은 이미 널리 시행되어 왔으며, DNA 유전자 일부의 이식, 호르몬과 같은 유전적 특성을 전달하는 내분비선의 이식, 성인 혹은 태아로부터의 신경 조직의 이식 등에 대해서도 이미 활발한 연구가 진행 중인 실정이다. 이렇게 우리는 '이식 의학'의 심한 도전을 받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특별히 동기와 효과의 교차선에서 "이식적 의식" 안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현실에 살고 있다면 이러한 오늘날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과학-기술의 멈출 줄 모르는 발전에서부터, 특별히 장기이식의 거부 반응을 조절할 수 있는 의약품의 발견은 분명히 장기이식의 새로운 장을 열어 놓았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또한 동시에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인간 생명에 대해서 매우 급진적이고도 때로는 마치 심판관과도 같은 인간 생명의 지배자의 위치에 과학-기술을 올려 놓고 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기술의 힘과 인간적 혹은 인격적 힘 사이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용기를 요구하는 윤리적 도전이 생겨난다. 심각한 문제는 말할 것도 없이 육체적 가능성과 윤리적 가능성 사이의 구분과 관련된 문제이다. 더 정확하게는 기술적 인간(Homo technologicus)와 이성적 인간(Homo rationalis) 사이의 구분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와 문화에 만연되어 있는 풍조는 자주 "과학적 기술주의"라고 불리우는 철학 사조이다. 이러한 사조의 기본 원리는 인간 생명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현실에 대한 절대적 조작이다. 그 논리적 결론은 기술적으로 실행 가능한 것이 곧 윤리적으로 허용되는 것이며, 이 둘 사이의 완전한 등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여기에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들이 말하는 기술적으로 가능한 모든 것이란 단순히 '할 수 있는 것' 뿐만이 아니라 '해야되는 것' 까지도 포함함으로써 과학주의적 가능성과 윤리적 가치 및 정당성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전제로 하여 기술 자체가 기준이 될 때 바로 그것이 윤리적 척도를 구성하는 내용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및 문화적 시각 안에서 장기이식에는 어떠한 한계도 있을 수 없으며, 기술적 능력과 인간적/이성적 능력 사이에는 어떠한 경계도 존재하지 않게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대적 사조를 통해서 보여지는 "내가 원하고 또 할 수 있기 때문에 행한다"라는 행위의 기준이 현대인의 의식과 습관을 형성해 주는 판단과 선택의 기초를 제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준이 곧 '기술적으로 할 수 있는 것'과 이성의 요구를 일깨우고 강화하도록 '윤리적으로 허용하는 것' 양자를 동일화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성적 인간(Homo rationalis)는 기술적 인간(Homo technologicus) 안에서 전적으로 변화되거나 소멸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기술이라는 것은 인간을 발전시키는 선에로 이끌 수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까지 할 수 있는 악에로 끌어들이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핵기술이 인간의 삶에 있어서 질적인 향상을 가져다준 것은 명백하지만 동시에 핵기술에 따라온 핵무기의 출현은 인간과 세상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음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동일화는 받아들일 수 없으며, 기술적 발전이 갖는 인간적 의미에 대한 판단 기준이 무엇보다도 시급히 요청된다. 또한 그 기준이 참된 인간으로서의 인간 발전과 존중을 지향하지 않는다면 무의미하다. 

 

절대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과학-기술에 대해 분명히 긍정적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전제가 있다면 그것이 인간에게 봉사하는 한에서이다. 안식일에 대한 예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술을 위해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기술이 있을 뿐이다". 

 

장기이식 분야에서 윤리적 기준은 어떤 특별한 모양을 갖추어야만 한다. 곧 인간의 신체와 인간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하는 구분이다. 분명히 우리는 장기 및 신체 조직의 이식에 대해, 즉 인간의 신체와 관련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 '인간적' 육체와 관련되며 이는 단순히 장기와 신체 조직들의 혼합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라는 분명한 형상(形相)을 통해서 인간을 드러내는 하나의 '표지'일 뿐만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장기이식은 인간 육체의 구성 요소와 연관될 뿐 아니라 인간의 정서적이고도 영성적인 요소와도 불가분의 관련을 갖는다. 곧 이는 분명히, 항상 인간 인격과 관련되는 사건인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장기이식에 관한 윤리적 측면과 끊임없이 만날 수밖에 없는 두 가지 기본적인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 첫째는 우리가 '방법론적'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방향으로서 기술과 윤리 사이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숙고케하는 방향이며, 두 번째는 '내용적인' 측면에서 평가하는 방향으로서 인간과 육체 사이의 관계를 숙고케하는 방향이다. 이렇게 우리는 장기이식에 대한 윤리적 질문의 핵심에 와 있다. 육체성과 인격의 만남, 기술과 윤리의 만남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의 문제이다. 이탈리아의 가톨릭대학교 생명윤리문제 연구소장 스그레치아(E.Sgreccia) 주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윤리적 가치라는 수직선과 기술적 개입이라는 수평선은 서로 교차하면서 하나의 십자가 모양을 이룬다. 이 십자가는 수직선과 수평선이 서로 맞물림으로써 서로를 지탱해주고 그럼으로써 두 선이 더 튼튼하게 유지될 수 있게 된다. 생물학적 특성과 인격과의 관계, 기술과 윤리 사이의 관계와도 같은 중요한 인간학적 주제들이 생명윤리와 관련되는 모든 문제 안에 자리잡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일종의 윤리적 구조를 발견할 수 있게 되는데, 곧 학문적인 근거와 엄격한 이성적 사고에 의해 나타날 수 있는 극단적인 편견을 피할 수 있는 능력과 장기이식의 다양한 형태에서 제기되는 복합적인 문제에 직면하면서 서로의 조화를 꾀하고 일치점을 찾아갈 수 있는 윤리적 접근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2. 인간으로서의 인간: 윤리성의 근본 기준 

 

장기이식의 윤리성에 대한 가치를 제공해주는 근본 기준, 확실한 의미에서의 건설적인 원리는 이미 제시되었다. 곧 인간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발전과 존중이 그것이다. 이러한 공식화는 이미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완전한 의미에서의 일반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는 특별한 방법으로 장기이식에서 제기되는 여러가지 복잡하고도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제시해 준다. 문제의 핵심은 인간이란 인격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점에서부터 나타나는 다양한 결과들을 집중적으로 파악하는 일이다. 

 

분석에 앞서 우선 강조되어야할 점은 인간성의 발전과 존중이라는 것이 인간의 장기나 신체조직들을 단순하게 '고치고' '보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의 차원을 넘어서 인간 자체의 육체적 및 정신적 조건들을 참되고도 고유한 의미에서 더 나은 상태로 만든다는 의무까지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분석을 통해서 계속 주시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인격으로서의 고유함에 대한 강조이며, 곧 이는 인간이 항상 그 자체로 목적이어야지 수단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모든 의학적 개입은 인간의 선(善)에로 향해야 하며, 인간의 유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또한 그 반대로 의학적 개입은 한 사람의 인간을 또 다른 인간을 위한 도구로 삼아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이다. 실상 의료 기술의 도구화는 각각의 구체적 인간의 고유한 인격으로서의 품위와 정체성이라든지 절대적 평등까지도 직접적이고도 근본적으로 뒤바꾸어 버리고 만다. 만일 그러한 사고 방식 안에서 태아의 장기나 조직을 이식하는 일은 중대한 불법이 되고 만다. 

 

1983년 10월 22일 교황청에서 반포한 가정권리헌장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품위에 대한 존중은 인간 배아에 대한 실험이나 인위적 조작을 거부한다. 인간의 유전적 특성에 대한 모든 인위적 개입은 (비정상적인 것을 고치는 치료의 목적이 아니라면) 신체적 온전성에 대한 직접적인 폭력이며, 가정의 선(善)을 해치는 것이다"(4항). 

 

우리는 인간이 일치된 전체성 혹은 개체로서의 '나' 안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이 결합되어 있는 통합된 인간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장기이식에 대한 윤리적 질문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즉 인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인간의 정신적, 영성적 측면을 무시한 채 순전히 인간의 육체성에만 관심을 갖는 것은 정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인간 이해는 장기이식에 대한 윤리성을 논하는 데 있어서 필연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 윤리적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는 일반적 성격의 문제이고, 두번째는 특수한 성격의 문제이다. 인간의 일치된 통합성에 대한 존중에서부터 제기되는 첫번째 문제는 장기이식이 심리적 측면과 매우 깊숙이 관련되던가 혹은 장기이식이 정신 및 경험 세계 안에서 아예 자취를 감추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결과를 예상케 한다는 것이다. 곧 장기 적출이나 이식을 통해서 변형된 육체 (혹은 전혀 새롭게된 육체)를 갖게 되고, 결과적으로 기증자이든지 수혜자이든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심리적인 문제를 안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심리적인 측면 역시 인간의 불가분성 및 통합성에 예속되며, 이런 의미에서 심리적 측면 역시 윤리적 가치 안에서 다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장기가 없어졌다거나 혹은 없었던 장기가 새롭게 이식됨으로써 놀랍게 변화된 삶의 형태에 대해 의식적이고도 자유로운, 그리고 책임감있는 수용이라는 심리적 조화 차원에서의 적절한 준비가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특수한 성질의 문제로서, 뇌 이식과 같은 장기이식의 형태와 관련된다. 이러한 성격의 장기이식의 결과는 인격의 파괴 또는 변형이다. 여기서 이러한 문제가 야기하는 윤리적 문제에 대해 상세하게 다룰 수는 없다. 뇌 세포의 수여뿐만 아니라 접목까지도 포함한 뇌이식에로 범위를 좁히면서 내릴 수 있는 판단은 윤리적으로 결코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형태의 이식은 사실상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식 전후의 정신적 일치라든가 과거라는 '기억'으로부터 이미 형성되어 있는 현재와의 일치는 전혀 존중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격으로서의 인간 존재에 대한 반성은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의 본질로서의 이성적 범주를 강조한다. 인간-인격은 '너'에게 열려져 있는 '나'이며, 타인을 위한 존재이며 동시에 타인과 함께하는 존재이다. 장기이식에서 고려되어야 할 첫번째 특성으로서의 일반적 성격은 무엇보다도 개별 인간의 내부에 자리 잡는다. 총체적이고도 일체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임을 고려할 때 피부이식과도 같은 자기 조직 이식은 윤리적으로 볼 때에도 아무런 무리도 없다. 사실 한 유기체에 있어서 각각의 지체들은 그 유기체 전체를 위한 것이고 한 인간에게 있어서 각 지체들 또한 그 인간 전체를 위한 것이다 (전체성의 원리). 그러나 인간의 육체란 한 인간의 개인적인 육체로서 뿐만 아니라 사회성을 갖는 육체로서의 의미까지도 갖는다. 곧 하나의 사회란 개별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라는 개념을 좀 더 풍성하고도 의미있는 개념으로 표현하자면 하나의 공동체라고도 말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인간들의 친교라는 개념으로까지 확대하여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여기서 장기이식의 주관적 공간이 마련된다. 곧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도, 사회-공동체의 한 구성원에게서 또 다른 구성원에게로 이식하는 동종(同種)이식으로서의 장기이식을 위한 공간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전체성과 일치의 원리에 의해 '사회적 육체'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주관적 공간 안에서 결국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살아 있는 사람에게도, 죽은 사람에게서 살아있는 사람에게로의 장기이식이 가능하게 된다. 단 죽음이 장기이식의 수혜자와 기증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친교와 봉사의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지 않아야만 한다. 

 

 

3. 인간 생명에 봉사 

 

따라서 장기이식에 있어서 윤리성의 가장 기본적인 기준은 인격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존중과 인간성의 촉진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장기이식은 생명을 보호하고 생명에 유익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생명에의 봉사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장기이식수술이 발전되기 시작한 최근 30년 간의 엄청난 발전을 통해서 이끌어낸 긍정적 최종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이러한 결론은 의료진들로 하여금 장기이식 수술을 위한 몇 가지 조건들을 매우 엄격하게 지키도록 촉구한다. 장기이식 수술을 담당하는 의료진들이 자신들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기 위하여 과학-기술적인 측면에서 빈틈없는 전문성이 요구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기억하는 몇 가지 원리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장기이식 수술을 해야만 하는 당위성에 대한 충분한 인식, 곧 '장기이식의 지침'; 2) 기증자와 그의 동의; 3) 장기이식 수술의 구체적인 조건, 상황에서의 수술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위험성; 4) 수혜자와 그의 동의, 그리고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가능성과 한계, 곧 수술 후의 인간적 삶의 내용에 대해서; 5) 수술 비용과 수술 후의 건강 유지를 위한 비용. 

 

생명에의 봉사는 무엇보다도 기증자와 수혜자 양 측의 생명 자체에 대한 '존중'으로 표현된다. 예를 들어 심장이식 수술과 관련하여 수혜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러한 이식 수술은 수혜자의 육체적 온전성에 일종의 중대한 상해를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에 다음의 몇 가지 조건이 지켜질 때 윤리적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 수혜자에게 있어서 이러한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전혀 가능하지 않다는 필요성의 이유; 2) 심장외과 전문의사의 판단뿐만 아니라 그 심장병 환자의 상태까지도 고려하여 공정하고도 합법적인 근거 아래 수술의 성공 가능성이 어느 정도 예상되어야 하며; 3) 수혜자가 자기 자신이 어떠한 수술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서 정확하고도 의식적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 수혜자 자신이 생각할 때 큰 위험이 있다고 판단된다면 그의 수술 거부 의사도 존중되어야 한다. 

 

 

4. 심장이식 수술과 기증자의 죽음 

 

장기 기증자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이식 희망자는 갈수록 늘어 이식수술 대기자의 목록이 해마다 길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어쩌면 뉴스 보도의 교통사고 소식이 일부 사람들에게는 희소식으로 들릴런지도 모른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와도 같은 뇌사가 죽음의 정의로 합법화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교통사고 = 뇌사자 발생 = 장기이식'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는 상황이라면 인간 생명의 죽음이라는 판정에 따르는 심각한 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심장이식 수술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생명에의 존중이라는 논리는 기증자가 의학적으로 죽은 사람이어야만 한다. 윤리적 조건은 명백하다: 심장은 반드시 죽은 사람에게서만 합법적으로 적출해 낼 수 있다. 

 

윤리학자의 임무는 이러한 가장 기초적이고도 결코 변경될 수 없는 윤리적 원칙이 정당한 것임을 증명하는 일이며 또한 반드시 지켜지도록 촉구하는 일이다. 판단은 신속해야 한다. 만일 기증자가 죽지 않았다면 심장의 적출은 그의 직접적인 죽음을 야기시키는 일이 될 것이여, 결국 이는 살아있는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살리는 모순을 범하면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게 되는 것이다. 최상의 가치로서의 인간 생명은 어떤 의심이라든가 개연성 안에서 다루어져서는 안되며, 언제나 확실성 안에서 취급되어야 한다. 

 

윤리학자는 인간의 죽음은 신비이며, 더욱이 죽음은 신비로서의 인간 생명과 완전한 방법으로 결합되어 있음을 안다. 인간 관계들 안에서 죽음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이해도 무척 중요하다. 이 점에 관해서 '존재론적' 죽음이 어떠한 것이고, 혹은 육체에서 영혼이 분리되는 정확한 순간이 언제인가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확인되지 못하고 있음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의학적' 죽음이 언제인가에 대해서는 보다 정확하고도 명료한 지식이 요구되며, 그와 함께 철학적 및 신학적으로 인간의 죽음으로 이해되는 육체에서 영혼이 분리되는 시기라고 추정할 수 있는 어떤 징표가 보여진다면 보다 정확한 '죽음' 확인에 접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의학적 죽음 혹은 기증자의 죽음에 대한 확인이라든가, 진단을 위한 기준들에 대해 정의하는 것이 윤리학자의 임무는 아니다. 이러한 임무는 의학과 그 연구 기술 분야에 속한다. 이점에 관해서는 1985년 10월 21일 교황청 과학 아카데미가 생명의 인위적인 {연장과 죽음의 정확한 순간 결정}이라는 주제로 주최한 세미나에서 내린 죽음의 순간에 관한 정의는 우리에게 매우 큰 도움을 준다: "인간 신체의 육체적 및 정신적 기능들을 조절하고 통합할 수 있는 모든 능력에 불가역적 상실이 있을 때 사람은 죽었다고 한다. 다음과 같은 경우 죽었다고 말할 수 있다: 1) 심폐 기능의 결정적인 중지; 2) 뇌의 모든 기능이 전혀 회복될 수 없는 상태의 정지가 증명되는 경우". 곧 뇌사가 죽음의 참된 기준이 되며, 결국 뇌사에서부터 매우 빠른 속도로 심폐 기능의 결정적인 정지가 야기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세미나에 참석한 그룹은 따라서 뇌 기능의 이러한 불가역적인 정지를 증명할 수 있는 다양한 의학적 방법과 장치에 대해서도 상세히 분석하였다. "뇌의 활동이 정지되었고, 말하자면 뇌파의 움직임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하기 위해 최소한 6시간의 간격을 두고 2회에 걸쳐 검사하는 것이 필요하다". 

 

위의 세미나는 "인간 신체의 육체적 및 정신적 기능을 조절하고 통합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의 불가역적인 상실", "뇌의 전 기능의 불가역적인 정지"가 곧 죽음의 순간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이런 의미에서 의학적 죽음의 정의를 받아들일 때 '깊은 혼수 상태' 때문에 나타나는 의식불명이라든가 뇌파의 정지만으로 죽음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그러한 징후들은 단순히 뇌 외부의 활동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뇌의 중심적 활동, 뇌의 구조적 기능들의 일치를 담당하는 중심 기능이 전혀 없어야 한다는 측면이다. 이런 경우를 일컬어 신경외과 전문의들은 '이미 지나간 혼수상태' (Coma depasse)라고 말하는데, 이 경우는 비록 호흡이나 심장 박동과도 같은 신체의 기능들이 계속 움직인다 하더라도 의식을 되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는 전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위의 세미나에 참석하였던 스그레치아(E. Sgreccia) 주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시간 동안 대뇌피질의 활동뿐만 아니라 호흡이라든가 심폐 기능, 신경 반사 작용 등과 같은 신체 기능과 연결된 뇌의 중심적 활동이 불가역적으로 정지될 때 의학적으로 죽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까지 우리는 죽음 (의학적 죽음)의 정확한 순간에 대한 정의 기준과 그에 따르는 최종적 요구에 이르기까지 인간 생명의 절대적 존중에 대한 윤리적 원칙에 관한 공식 입장을 정리해 보았다. 그러나 구체적인 상황들 안에서 그러한 원칙과 기준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는 많은 의심과 두려움마저 없지 않다. 특별히 심장이식의 분야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기증자의 의학적 죽음이 결정되자마자 매우 민첩하고도 신속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데에 따르는 위험 부담은 전혀 사실무근인가? 수술 후 회복 과정 중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어떤 의심에 좀 더 신중을 기울여야 한다는 일종의 두려움은 지나친 기우인가? 심장이식 수술 대상자가 젊은 사람이라면 수술을 행하고, 노인일 경우에는 다른 사람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서라도 수술을 실시하지 않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몇 가지 의문점들은 "지성과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의사 개인에게 있어서나 (장기이식과 관련되는 의사와 장기적출과 관련되는 의사 사이에서 서로 다르게 제기될 수도 있는 식별의 문제이다) 회복 과정에서 보여지는 장기 기능상의 문제에 대해서 공적으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라도 해결되어야 하는 의문점들이고 두려움들이다. 

 

마지막으로 몇몇 윤리학자들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 곧 의학적 죽음의 결정에 대한 즉각적 반응을 잠시 유보할 수도 있다는 입장이 필요하다. 이는 곧 인간의 죽음과 인간적 죽음 사이의 구분과 관련되는 문제이다. 통교의 외적 표지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사람에게서 그 사람이 현재 '어떤 상태'의 의식이며 또한 '어떠한' 의식인가를 알아낸다는 것은 실천적인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며, 이는 곧 개인의 생명과 인간적 생명 사이에서의 구분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어떠한 합리성도 찾아볼 수 없다. "사실 인간 개인에게는 비록 정신적 삶이 실제적인 삶 안에서 방해받는다 하더라도 '존재론적' 행위만 있으며, 그것은 곧 정신의 고유한 존재론적 행위이다. 그러한 행위는 모든 생명적 기능, 생장 기능, 감각적 및 정신적 기능까지도 활발하게 만들어 주며, 지탱해 줄 수도 있다. 따라서 인간적 생명이 존재하는 한 그는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신체 안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생명적 기능들이 그 기능을 멈추게 될 때, 육체적 인간 생명이 끝났다고 볼 수 있으며, 또한 영혼과 육신이 서로 분리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들의 견해로서는 뇌의 생명력으로써 인간의 생명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은 육체의 생명과 정신의 생명 사이의 이원론적 구분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5. 동의 : 자유롭고 책임이 따르는 기증 

 

가장 쟁점이 되는 문제는 무엇보다도 장기 적출에 대한 동의와 관련된 문제이다. 최근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사실상 장기이식이 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의학적 환경은 장기이식의 거부 반응이 없는 환경이어야하며, 이러한 환경을 위해서는 가족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장기 수여와 이식이 성공률을 가장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형제들 사이의 장기 수여와 이식, 부모와 자녀 사이의 장기 수여와 이식이라고 가정할 때, 어떤 경우 가족의 압력, 주위의 눈초리 때문에 마지못해 장기를 수여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기증자에게 요청할 수 있는 동의의 형태, 곧 공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기증'이라는 표현에 대해 엄격하고도 신중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장기의 기증'이란 정확하게 어떠한 의미인가? 

 

'기증'은 몇몇 나라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장기 '매매'의 거부를 의미한다. 또한 '기증'이라는 의미는 어떤 이득을 취한다는 논리를 떠나서 장기를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증'에 있어서는 커다란 지혜가 요구되기도 한다. 

 

'기증'은 자유로운 기증이어야 한다. 즉 긍정적인 의미에서 기증자의 자유가 요구된다. 기증자 자신이 이미 자신의 행위가 어떠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으면서 자유로운 동의를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기증'의 의미가 '기꺼이 베풀어지는 선물'의 반대 개념은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교황청 학술 아카데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장기 기증은 어떠한 경우라도 기증자의 최종 의지가 존중되어야 하며, 가족이 있다면 그 가족의 동의도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 

 

그렇다. '기증'은 그 본성상 전적으로 자유로와야 하며, 자유를 요구하며, 자유를 증거한다. 그러나 자유는 본질적으로 책임감을 요구하며, 구조적으로 인간적 가치를 고양시킨다. 자유는 인간의 자아 실현을 위해 인간에게 맡겨진 하나의 능력이며, 이는 가치에 의해서, 가치를 존중함으로써만 획득된다. 

 

장기 기증이란 인간 육체의 올바른 이해에서부터 출발하여 책임감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인간 육체를 올바로 이해할 때 장기라든가 신체 기능은 인간에 있어서 탁월한 위상을 차지하게 된다. 인간 육체를 단순하게 인간 자체의 정신적 및 영성적 범주와는 전혀 무관한 장기나 조직의 복합물이나 덩어리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현대의 인간학은 인간 육체를 특수한 방법으로 인간 실현에 도달케하는 중요한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한다. 또한 인간의 '정체성'은 (특별히 창조주 하느님의 선물인 사랑의 표지이며 열매로서의) 살아 움직이는 '선물'이 된다는 것에 있으며, 또한 인간의 궁극적 목표는 스스로를 타인에게 내어줌을 지향하기 때문에 인간 육체는 정확히 말해서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는 선물로서 스스로를 탁월하게 하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실현시킬 수 있는 '공간'이 되며 따라서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시간, 온갖 정열, 자기 자신의 고유한 생명을 내어주면서까지 '선물'로서의 정체성을 살아가며, 여러가지 다양한 방법, 곧 장기나 신체 조직의 기증이라는 방법을 통해서까지도 자신에게 맡겨진 삶의 목표를 추구하기도 한다. 인간의 이러한 정체성의 표현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자기 자신의 육체 (장기나 신체 조직)를 내어주는 것으로 표현되며, 죽은 후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렇듯이 자유롭고도 책임감있는 결정을 통한 '기증'을 촉구하기 위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생명, 나아가서는 인간 육체에 대한 본질적이고도 기본적인 의미로서의 '선물-기증'의 의미에 대한 끊임없는 교육일 것이다. 이러한 교육은 연대성의 인간적 의미를 더욱 풍요롭게 해 줄 것이다. 삶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시각은 교육적 측면에서의 모험을 당연히 수반하고 또 수반하여야 한다. 살아 있는 동안, 혹은 죽은 다음에라도 장기 기증은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하나의 구체적 방법이며, 예수의 삶을 구체적으로 따르는 하나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13). 

 

동의에 있어서는 추정되는 동의를 따르지 않는 측면과 따르는 측면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가능한 방법으로써 인간 생명을 살리는 일과, 공동체에 위임된 죽은 사람에 대한 존중이라는 이중적 측면에서 어떤 측면이 존중되어야 하는가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 사체(死體)는 죽음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한 부검이나 해부 그리고 의학적인 이유 등에 의해서 씌여질 수도 있다면 인간 생명의 구제의 측면은 공공 이익을 위한 위의 이유들보다도 더 기본적이고 상위의 선(善)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추정된 동의를 지탱해주는 또 다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느 정도 인간성을 갖추고 잘 교육된 사람에 대해 존경심을 갖는다. 죽음 후에 자신의 신체에서 어떤 장기를 떼어내는 것 (그럼으로써 자신의 장기를 다른 사람에게 기증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의사들에게 허용할 수 있다는 결정을 내리는 것도 고유한 의미에서의 윤리적 상위 가치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측면 외에 사실 또 다른 매우 어려운 측면이 있는데 곧 심리적 측면으로서 그 어렵고도 고통스러운 결정의 순간에 가족들이 함께 참여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사고를 당한 한 젊은이의 부모에게 장기 적출의 정확한 시기를 놓쳐버릴 수도 있다는 긴박함을 느끼게 하면서 장기 적출의 동의를 요구한다는 것은 사실상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공동체의 시민이나 가족이 불쾌감이나 거부감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동의의 요구는 재고되어야 하며, 이에 따르는 각 개인의 자유는 충분히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체로부터 장기들을 적출해 내는 일에 대한 추정된 동의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은 또 다른 측면에서의 자유의 요구가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사체를 공동체에 맡겨진 것으로만 생각함으로써 사체에 대한 존경심을 크게 상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죽은 사람의 친지와 사체 사이의 정서적 연결 고리는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법적인 해결 방법을 제시하기보다는 우선적으로 장기 이식의 윤리적 의미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교육을 더 크게 확대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만일 이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선행된다면 비생산적인 명령이나 규정들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며 이에 대한 문제는 더욱 쉽게 해결될 것이다. 따라서 법적으로 대응하는 것보다는 자유로운 기증 기회를 가장 극대화시킬 수 있도록 끊임없이 교육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자유로운 동의로써 장기 기증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꼭 필요한 때에 장기이식의 혜택이 성공적으로 행해질 가능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6. 사회, 사회구조, 건강을 위한 의료 계획 

 

일반적인 장기이식, 혹은 심장이식과도 같은 특수한 형태의 장기이식에 관한 개인적이고도 사회적인 측면에 대한 최종적 강조는 잠시 유보한다 하더라도 장기이식의 윤리성에 대해 논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간에 대한 존중과 발전이라는 기본적 원리가 유효하다면 이는 도저히 회피할 수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 사실 인간에 대한 존중과 발전은 개별 인간이든 전체 인간이든 모든 인간에게 해당된다. 바로 여기서 장기이식에 관한 문제는 몇몇 사람에게 뿐만이 아니고 사회 전체의 관심을 요구한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장기이식 실행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를 통해서 볼 때 매우 심각한 문제는 장기이식의 방법들과 구조들이 불균형하게 이루어져 왔다는 점이다. 어떤 지역에서는 장기가 충분히 공급되기도 하였지만 또 어떤 지역에서는 공급이 전혀 없거나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불균형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문제는 아직까지도 매우 심각한 문제로 남아 있다. 의학 기술의 실천, 혜택이라는 특수한 환경 아래 부유한 나라들과 가난한 나라들이 함께 분포되어 있는 이 세상 안에서 나타나고 있는 문제이다. 실제로 이 세계에는 매우 발달된 의료 혜택이 베풀어지고 있는 나라들이 있는가 하면, 가장 기본적인 의료 혜택조차도 누리지 못하고 있는 나라들도 많다. 

 

심장이식이라는 특수한 경우에 대해서는 잠시 뒤로하면서, 장기이식의 사회적 측면 (국내적 및 국제적)에 대한 관심은 매우 복합적인 분야와 함께 얽혀 있다. 이 복합적인 사회 구조 안에서 서로 상반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매우 다양한 요구들이 서로 충돌되며, 또한 이러한 요구들이 모두 그리고 항상 조화되면서 수용되기는 매우 어렵다. 특별히 우리는 전체 민족들을 위한 발전의 요구와 건강의 요구를 함께 고려한다. 발전의 요구라는 측면에서 볼 때, 만일 심장이식 수술이 극히 '예외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발전'의 도움으로 '정상적인' 일이 되어 버렸다면, 심장이식 수술이라는 것이 극소수의 사람에게 뿐만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의 생명에 희망을 주는 하나의 응답이 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떤 특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뿐만이 아니고 저개발 국가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건강 증진과 보호라는 요구는 엄연히 존재한다. 여기서 생존 자체를 위하여 매우 절박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매우 단순한 차원에서의 건강에 대한 요구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들이 결코 과잉 반응이거나 무의미한 의문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의문은 실제의 상황에서 그리고 국제적으로 제기되는 질문으로서 심장이식 분야에서는 개인의 능력과 경제적인 수단이 함께 얽혀서 제기된다. 과연 명백한 우선권이 부여되는 공공의 건강에 대한 요구를 무시한 채 극소수에게 혜택을 베푼다는 인상을 지워버릴 수 있겠는가? 

 

이렇게 제기되는 의문은 어떠한 선동적인 의미도 담겨져 있지 않다. 다만 공동체성의 강조와 사회정의의 긴박함을 호소하는 것뿐이다. 분명히 알고 있듯이 올바른 해결은 어느 한 쪽만을 선택하는 길이어서는 안되고, 양쪽을 모두 포용하여 조화를 이루는 길이다. 여러가지 다양한 요구를 어떻게 수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의학 분야가 사회정의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경제와 정치가 공동으로 협력하는 기반 위에 자리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 긴급하게 요구되는 것은 보조성의 원리가 살아 움직이는 국제적 연대감, 국가간의 협력이다. 이러한 국제적 연대감을 통해 결국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도움을 필요로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균등한 방법으로 여러가지 혜택이 베풀어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스그레치아 주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의 현실적인 구조들을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 올려 변화를 시도한다는 것은 심장이식 수술의 성공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러기 위해서는 법과 시민들의 의식이 먼저 바뀌어야하기 때문이다". 

 

 

결론 

 

우리가 맨 처음 제기했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자: "장기이식 수술에는 어떤 한계가 있는가?". '한계'라는 용어는 사실상 애매모호하지만 이 한계는 분명히 인정해야할 것이다. 인간에게 어떠한 제한도 없이 시도되고 있는 과학-기술적 능력에 제동을 걸 수 있을 때 이 '한계'라는 개념은 긍정적 의미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장기이식 수술의 윤리적 측면을 충분히 고려하고 존중하는 사람은 '한계'라는 용어 안에서 매우 긍정적이고도 발전적인 의미를 발견하는데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으면서 '한계'라는 용어에 '그렇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 대답할 수 있는 이유가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을 보호하고, 발전시키고, 돌보기 위해서라는 이유일 것이다. 

 

이 용어가 결코 인간 자유에 더 이상 제동을 걸거나 장애물이 될 수 없다. 인간의 자유가 책임을 통해서 행사될 수 있게 하는 구체적이고도 효과적인 도움인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곧 장기이식의 분야에서도 과학과 의료기술은 절대적이고도 확정적인 '절대 군주'는 아니라는 것이다. 과학과 의료 기술은 다만 인간에게 봉사하려는 선한 의도와 임무를 통해서 존중되며 그 품위를 갖게되며, 이는 전적으로 인간에 대한 봉사를 위해서이다. 참된 지혜에 따라 행해지는 과학-기술만이 인간에게 참되게 봉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목연구 제2집(1995년, 가톨릭대학교 사목연구소), 이동익(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 윤리신학) / 이동익 신부님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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