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윤리] 죄의 경중 구분에 대한 윤리신학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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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258

죄의 경중 구분에 대한 윤리신학적 고찰

 

 

머리글 

 

대죄, 중죄, 소죄 등의 구분은 성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학적 구분이기는 하지만 성서에서도 죄가 어떤 등급의 죄인가는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예를 들어 루가 복음사가는 "성령에 대해서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받지 못한다."(루가 12,10, 마태 12,31-32 참조)는 예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이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라든가 용서받을 수 있는 죄와 같은, 죄의 구분이 있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등급은 고백되어져야 하는 죄들과 고백될 수 있는 죄들 사이의 어떤 구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서가 죄에 대해서 말할 때, 그 내용은 항상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이거나, 혹은 악의 세력에 의한 소외로부터 벗어나라고 촉구하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성서도 가벼운 죄와 중한 죄 그리고 죽어야 할 죄, 하느님 나라에서 제외되는 죄, 용서받지 못하는 죄 등에 대한 죄의 구분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교회의 신학적 전통도 죄의 경중에 대해 오랜 기간 동안 가르쳐 왔다. 본고에서는 죄의 경중에 대한 구분에 있어서 성서가 어떻게 언급하고 있으며, 또한 신학적 설명에 있어서는 어떻게 설명해 왔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1. 성서에서의 죄의 구분 

 

먼저 성서에서 죄를 언급하는 대목을 살펴보기로 한다. 구약성서에서 어떤 죄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파괴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상실토록 한다고 언급한다. 신명기 27장 15절 이하는 저주받을 죄에 대해서 열거하고 있으며, 에제키엘 예언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가 어떠한 것들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살인강도, 남의 아내를 범한 자, 천하고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자, 우상숭배자 등등의 죄. (에제 18,10-13 참조) 

 

신약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가장 중대한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 사랑의 충만한 현현(顯現)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계약을 거부하는 이스라엘로부터 범해지는 죄이다: "하느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계약의 피를 속되게 다루고, 은총의 영을 무례하게 대한 사람은 얼마나 더 엄한 벌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히브 10, 29). 이 텍스트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특별히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한 다음에 그분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멀리 떨어져 나간 사람들을 겨냥하는 말이다. 그러나 배교 뿐만 아니라 고백한 신앙을 끊임없이 거부하는 삶도 역시 분명히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죄이다. 단순히 입으로만 하느님을 섬기면서 하느님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결국 엄한 심판을 받게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범법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고 선언할 것입니다."(마태 7,23) 신약성서는 마땅히 죽어야 할 죄,(로마 1,28-32; 1요한 3,14; 5,16-17) 하느님 나라에서 제외되는 죄에 대해서도 지적한다.(1고린 6,9-10; 갈라 5,19-21; 에페 5,3-5) 그러나 이외에도 성서는 가벼운 죄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저지르는 작은 잘못들을 뜻한다. 

 

여기에 또 anomia의 죄와 같은 종류라고 할 수 있는 '이단적인 정설'로서의 죄인 바리새이들의 죄가 있다. "이처럼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이지만 속으로는 위선과 범법이 가득 차 있구나!"(마태 23,28). 이런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의 고유한 삶에 대한 근본 선택으로써 계약의 법을 멀리하는 사람이며, 또한 하느님의 나라를 거슬러 반그리스도적인 것에 대한 절대적인 선택에 기꺼이 자기 자신을 맡기는 사람이다.(마태 24,12 참조). 

 

요한계 문헌에서 anomia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길을 결정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이웃에 대한 불의와 사랑의 결핍으로 드러난다.(1요한 3,4 참조). 그러나 사도 요한은 참된 그리스도 신자는 anomia의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요한 1서의 이러한 텍스트에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작은 결론을 이끌어 낼 수가 있다. 즉 죄에 떨어졌다 하더라도 실망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찾아나서고 사랑하는 신자들의 죄는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다. 또 한편 하느님을 모르는, 하느님으로부터 완전하게 자기 자신을 소외시킨 죄인들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 면전에서 자기 자신이 죄인이며, 용서받아야 한다고 겸손하게 고백하면서 불경의 죄를 전혀 범하지 않는 신자들도 있다.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우리 안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한다면 그분은 진실하시고 의로우시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온갖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것이며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는 계시지 않습니다."(1요한 1,8-10). 

 

신약성서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요한은 낙관적으로 언급한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이는 누구나 죄를 짓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분이 그를 지켜 주시니 악한 자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1요한 5,18) 신자들은 하느님께서는 자신들의 죄와 연약함을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라고 매일 매순간 고백하고 기도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범하는 죄는 비록 그 죄들이 그들을 그리스도로부터 완전하게 격리시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다. "누가 혹시 자기 형제가 죽을 정도는 아닌 죄를 짓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께 청하시오.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 그 죽을죄는 짓지 않은 이들에게 말입니다. 그러나 죽을죄도 있습니다. 그런 죄에 대해서 청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불의는 죄입니다. 그러나 죽을 정도는 아닌 죄가 있습니다" (1요한 5,16-17). 

 

야고버 사도는 그리스도의 사랑 위에서만 기초가 될 수 있는 그리스도적 낙관론을 결코 감소시키지 않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 우리 모두가 많은 실수를 범합니다. 누가 말에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그는 완전한 사람이라 온 몸도 다스릴 줄 압니다." (야고 3,2). 우리 모두는 서로 용서하고 치유하는 상호간의 도움이 필요하며, 또한 매일같이 기도하는 거룩한 속죄자들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진 이들을 용서하듯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마태 6,12; 루가 11,4). 

 

성서는 또한 죄의 등급 중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죄로서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언급하는데, 이 죄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로 분류된다.(마태 12,31-33 참조).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마음은 그리스도의 은총 앞에서조차 회개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회복 불가능한 무딘 마음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으뜸이 되는 죄는 매일 매일의 무기력함이다. 이렇게 성서가 죄를 구분하는 기준은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에 대한 인간 자신의 수용 여부라고 볼 수 있다. 곧 성서가 언급하는 죽을 죄라든가 큰 죄는 하느님의 법을 어김으로써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하느님 사랑을 파괴하고, 결국은 인간의 최종 목적이며 참 행복이신 하느님께 등을 돌리게 만드는 것이고, 작은 잘못들, 곧 소죄는 하느님 사랑을 어기고 해치기는 하지만 완전히 그 사랑이 사라지게 하지는 않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성서에서는 죽음에 이르는 죄와 가벼운 죄 사이의 한계를 구분할 수 있는 어떤 양적인 기준을 나타내는 최소한의 지시도 찾아볼 수 없다. 성서적 시각은 항상 회개에로의 초대이다. 성서는 모든 중죄를 죽을 죄로 간주하지 않을 뿐더러, 또한 모든 가벼운 죄를 중죄가 아니라고 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죄들을 대죄, 소죄라는 두 가지 범주에서만 이해하는 것은 성서적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2. 죄 구분에 대한 역사적 고찰 

 

2.1. 우리가 죄에 대해 논할 때 가져야 하는 기본적 시각은 죄 그 자체보다는 그 죄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지, 즉 회개는 항상 가능하다는 것, 따라서 주님의 기쁜 소식이 가장 효과적으로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회개에로의 요청을 스스로부터 받았다면, 그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저지른 중대한 죄가 대죄가 되는지 혹은 그보다 가벼운 죄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는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다. 고대 교회는 어떤 중대한 죄들의 경우, 즉 배교, 살인, 낙태, 공개된 간음 등의 죄들에 대해서 긴 시간의 법적 보속을 부여했다. 그러한 보속의 부여에 관해 첫 번째 기준이 되었던 것은 이미 드러난 스캔들의 중대성이었으며, 따라서 하나의 법적 보속이 필요했던 것이다. 고대 교회는 법적 보속에 처해진 죄들만을 가리켜 대죄라고 선언하지는 않았다. 고대 교회는 항상 하느님의 나라를 반대하는 죄들에 대해서 성서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강조했다.(마태 25,41-46; 1고린 6,9-10; 갈라 5,19-21; 로마 1,24-32; 13,13; 1베드 4,3; 2베드 2,12-22; 사도 21,27; 22,15 참조). 이는 단순히 대죄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를 구분할 척도로 삼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니었고, 단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 항상 머물기를 바란다면 그들 마음 안에서, 그리고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모든 것에 대항해서 확고하고도 중단없는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2.2. 약 4세기 경, 법적 보속 제도가 쇠퇴했었을 때,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겔틱 교회에서는 또 하나의 새로운 형태의 보속이 나타났으며, 이는 중부 및 서부 유럽 전체에 급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사죄경이 일생에 단 한 번 밖에 주어질 수 없었던 고대의 규범은 폐지가 되었으며, 그 당시부터는 진정한 회개와 보속을 할 의도가 있는 경우에는 항상 화해의 성사를 받을 수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제에게 고백해야만 했었던 죄들의 목록은 현저하게 많이 늘어나게 되었으며, 고백해야 하는 죄들이 비록 대죄가 아니라 하더라도 고백을 해야만 하게 되었던 것이다. 목록은 명확하고도 완전했었으며, 또한 각각의 죄와 관련된 보속의 정도에 따라 죄의 등급이 매겨졌었던 것이다. 당시의 이러한 모습은 주관적인 죄가 아닌 객관적인 위반에 대해 부과된 죄를 강조했었던 것이기 때문에 대죄와 소죄 사이의 경계 구분에 대한 문제를 다루기에는 그 필요성이 절박하지는 않았으며, 각자는 성사적인 고백 안에서 사제에게 드러내 보여야만 했던 죄들의 목록이 대죄인지 혹은 그보다 덜 한 죄인지를 잘 알 수 있었던 것이다. 

 

2.3. 8세기와 9세기, 고해성사에 대한 아이리쉬-스코티쉬 실천 방법이 대륙의 대부분의 지역에 퍼져 나가면서, 이러한 실천방법은 카를로스 막뉴스 (Carlo Magno: 742-814)의 영향 아래 전개된 신학적 개혁 시대에 이미 명확하게 드러났었던 하나의 경향인 내면성의 문제로 발전되어 계속 이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경향과 함께 특별히 Abelardo (1079-1142)와 같은 신학자는 죄의 양적인 면과 보속 행위에 대한 순수한 의미에서의 외적 기준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주장을 한다. 

 

과거의 이러한 사상과 함께 보속에 관한 신학적 특징에 대한 작업은 실천해야 할 객관적 보속들의 실천 문제에 많은 혼란을 주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마음의 회개를 요청하게 된다. 마음의 근본 선택에 관해 커다란 의미를 부여했던 토마스 아퀴나스, 보나벤투라나 그밖의 많은 위대한 신학자들의 시각은 인간 마음의 내면적 행위에 대한 분별력보다는 하나의 정확한 외적 조정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교회법 학자들의 접근 방법에 더 긴밀하게 밀착되어 있었다. 고해성사와 그 정당성에 관한 트리엔트 공의회의 규정들은 신학자들의 숱한 노고의 한 결실이며, 또한 그 기본적인 전망으로서 내면적 신앙으로부터 나타나게 되는 전적인 소외로부터의 근본적이고도 끊임없는 회개에 관한 교회의 시각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하나의 건전한 발전을 위한 모든 기회를 신학에 제공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율법주의와 엄격주의 그리고 후기 얀세니즘과의 충돌, 객관화의 으뜸 수단으로서의 양적인 면만을 고려하는 경험주의적 학문의 영향으로 17-18세기의 윤리신학자들은 단순히 객관적이고 양적인 면에서의 결정에만 치중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이 죄와 보속에 관한 윤리신학의 역사적 발전을 인식하면서, 최근의 전통에 대한 변화를 시도해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죄에 대해 너무 양적인 면에만 치중하는 것에 대한 반론은 실상 지난 세기의 보수주의자들보다도 윤리신학자들 사이에서 드물지 않게 제기 되었던 것이다. 

 

중세의 위대한 신학자들에게서는 결코 죄의 양적인 면에 대한 강조를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들은 하느님의 시각에서부터 문제들에 접근했었기 때문에, 실상 그들에게는 하느님께서는 어떤 정해진 일정한 등급에서부터 차례대로 당신의 의도와 계명들을 엄격하게 적용하신다는 것은 허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소죄의 역사에 관한 연구에 아주 커다란 공헌을 한 신학자 중의 한사람인 아더 란드그라프(Arthur Landgraf)는 성 베르나르도 이후에 "스콜라 학파의 어느 누구도 감히 하느님의 계명에 반대되는 모든 것이 중대한 죄를 구성한다는 기본원리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확신한다. 스콜라학파의 신학자들은 그 횟수가 몇 번이든 간에 한 계명에 대한 명확하고도 자유로운 거부는 원칙적으로 하느님의 의도에 대한 전적인 거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가를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위와 같은 원리는 소죄의 가능성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그들을 아주 어렵게 만들었다. 몇몇 학자들은 소죄는 어떤 충고를 소홀히 하는 것으로도 가능해지는 반면에 어떤 계명을 위반하는 것은 항상 대죄를 구성한다고 가르치면서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를 따랐다. 그러나 중세의 위대한 신학자들 중 어느 누구도, "각각의 죄는 대죄이다. 왜냐하면 이는 필연적으로 하느님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하느님의 의도를 거스르는 하나의 반역이기 때문"이라고 가르치던 캘빈이나 그 외의 엄격주의자들의 주장을 결론으로 이끌어 내지는 않았다. 

 

중세의 여러 신학자들이나 캘빈의 근본 의도는 하느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각자는 온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완전한 회개에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차근차근 가르치려는데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죄에 대한 양적인 사고는 즉시 실천에 옮겨지지 않았으며, 율법주의적인 엄격주의는 신학적 전망을 흐리게 만든 결과가 되고 말았다. 

 

캘빈을 지지하던 한 가톨릭 신학자였던 죠반니(Giovanni Major)는 어떤 부자의 창고에서 밀 다섯 이삭을 훔치는 것은 죄가 아니고, 열 개의 이삭까지는 소죄이며, 그 이상은 대죄라고 가르쳤다. 수많은 윤리신학자들은 자그마한 양적인 차이가 대죄와 소죄 사이의 질적인 차이를 어떻게 설득력있게 설명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숱한 노력을 하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 클라우디오(Claudio Lacrox)의 예가 자주 사용되곤 하였다. 즉 그는 알코올의 한 방울 한 방울이 한 인간을 차츰차츰 만취하게 만들 수 있는 것처럼, 그 알코올 한 방울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대죄를 짓게 만들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처럼 수학적 공식이 인간의 위대함과 연약함에 대한 인식보다 우위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스콜라 학파의 위대한 신학자들의 시각은 우리들의 연구를 위해 큰 도움을 준다. 즉, 하느님의 뜻은 그분의 전체성 안에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불완전성과 심리학적 반성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인간의 행동과 행위가 그 전체성 안에서 인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죄는 단지 양심과 자유의 깊은 내면에서부터 드러나게 되는 하나의 근본 선택이거나, 혹은 인간과 그의 자유를 극심하게 해치면서 잘못 사용되는 남용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죄스런 결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근본 선택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며, 자기 고유의 근본 실존 안에서 자기 자신을 결정짓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행위의 대상이 지니는 중요성, 혹은 질료의 경중을 부정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행위의 경중, 혹은 질료의 중대함은 한 인간의 인식력과 자유의 실제적인 발전과 비례하여 의미를 갖게 되며, 또한 우리가 근본 선택이라고 부르는 자기 자신의 내면적 결정의 척도 안에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어디에서부터 대죄이고 또 어디까지가 소죄인지에 대한 양적인 면에서의 정확한 구분을 짓는다는 것은 가능하지가 않다. 인간의 심리학적 구조와 윤리적, 종교적 경향 안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고, 또한 상황에 따라서도 큰 차이도 고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죄의 가능성에 대한 최종적 근거라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에 대한 해결은 단지 사목적 해결 방법밖에 없다고 본다. 그 해결은 은총의 법을 충만하게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이 은총의 법안에서 달란트와 카리스마, 그리고 현재라는 기회와 이웃의 요구가 서로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라도 하느님의 뜻에 대해 결코 수학적인 계산을 하려는 유혹에 떨어져서는 안될 것이며, 결국 이는 대죄로부터 피해가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자기 자신의 책임감을 민감하게 만들어 주는 윤리적 가르침과 심리학에 대한 보다 나은 지식으로써 완전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비록 회개에로의 요청을 받은 사람의 깊은 내면에서부터 나타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방법이 결코 자기 자신을 엄격주의에로 이끌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의 성숙과 주위의 많은 영향, 즉 인간 삶의 근본 선택들을 완성하는 장소인 내면에서부터 나타난다고만은 할 수 없는 수많은 죄스런 행위들이 설명되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의 영향들은 점진성을 띠고 있다는 점을 항상 고려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3. 교회 전통에서의 죄의 구분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대죄와 소죄에 대한 명백한 구분은 그리 쉽지 않지만 교회 공동체는 언제나 중대한 죄와 사소한 죄를 구분해온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가 대죄(大罪, peccatum mortale), 소죄(小罪, peccatum veniale)라고 하는 죄의 구분은 트리엔트 공의회의 가르침에서부터 유래한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대죄를 범한 사람들은 고해성사 때에 대죄의 종류와 숫자대로 일일이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만 하는 죄가 있다는 것도 인정했으며, 소죄도 함께 고백하는 일도 바람직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의 지위는 없애지 않는다고 언명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대죄가 최종 목적을 거스르기 때문에 인간이 하느님과 맺고 있던 관계를 단절할 정도로 심하게 질서를 교란할 정도라면, 인간 측에서 볼 때 그 자체로는 치료 불가능하며, 따라서 치명적이라고 언급한 반면에, 소죄는 최종 목적이 아닌 다른 수단들의 무질서이기 때문에 치료될 수 있으며, 또 용서된다고 언급하면서 이 둘 사이의 구분을 밝힌다. 곧 그에 의하면 대죄는 애덕과 성화 은총을 추방하는 인간적 행위이고, 소죄는 같은 은총의 생명에 어떤 모양으로든지 어긋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없애버릴 만큼 어긋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대죄와 소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혼이 범죄함으로써 자기 최종 목표인 하느님과 사랑으로 맺고 있던 관계를 단절할 정도로 심하게 질서를 교란시키면, 이때의 죄는 대죄에 해당된다. 한편, 이때 질서 교란의 정도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데에까지 이르지 않았으면 이는 소죄에 해당된다." 

 

스콜라 시대 이후 교회 전통 윤리신학 교과서나 교리서들이 대죄에 대해 공통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내용을 보면 먼저 대죄란 그 내용 면에서 실제적으로나 혹은 적어도 행위자의 판단 속에 엄격히 명령되었거나 금지된 내용 - 이를 흔히 '중대(重大)한 일' (materia gravis) -이어야 하며, 둘째로, 명령 및 법의 중요성에 대해서 양심이 인식해야 한다는 점, 곧 완전한 인식이 있어야 하며, 셋째로 의지의 자유로운 결단 내지는 완전한 동의가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중 그 어느 것이라도 온전히, 혹은 부분적으로 결여된 경우에는 대죄가 성립된 것이 아니고 소죄가 된다는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황 권고 {화해와 참회}에서도 대죄란 그 내용에 있어서 그 자체로서 언제나 중대하면서 충분한 의식과 함께 자유로이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중대하고 치명적이라고 언급한다. 또한 {화해와 참회}는 소죄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인간이 현세에서 하느님께 대한 인식과 사랑을 향해 나아가고, 영원의 나라에서 그분과 완전한 일치에 이르기 위한 신앙과 정의의 길목에서, 하느님께로 통하는 그 길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서도,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거나 길을 잃고 헤매는 경우 소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과소평가해서 그것이 마치 무시해도 좋은 것이라거나 별 중요성을 띠지 못하는 죄 정도로 생각해서는 결코 안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죄' (peccatum grave)의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자. '대죄', '소죄'의 구분은 성서라든가 교회 전통에서 가르치는 바에 의해 그 개념과 구분이 명확하여졌지만 '중죄'는 어떠한 측면에서 이해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화해와 참회]에서는 중죄(重罪, peccatum grave)는 교리나 사목 실천에 있어서 사실상 대죄와 같은 것으로 간주하면서도, 위에서 살펴본 대로 소죄 역시 그것을 과소평가해서 무시해도 좋은 것이라거나 별 중요성을 띠지 못하는 죄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죄이기 때문에 소죄를 중죄의 범주에서 완전히 제외시키지는 않고 있는 둣하다. 

 

현대 윤리신학의 경향에는 죄에 대한 전통적인 구분인 대죄, 소죄의 구분을 더욱 세분화하여 대죄, 중죄, 소죄의 세 가지 범주로 구분하려는 시도가 있다. 곧 대죄란 하느님으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는 것이며, 중죄는 가치 감각의 부족이나 윤리적 능력의 결여 등 어떤 나약성에서 오는 중대한 위법이며, 소죄는 중요하지 않은 일에 대한 잘못으로 구분하려는 시도이다. 

 

페쉬케 신부는 그의 윤리 교과서에서 다음과 같이 죄의 구분을 설명한다. 즉 대죄와 소죄는 죄인의 주관적 상태에서 본 죄의 구분이라고 설명한다. 즉 범죄 행위로 인하여 자신을 하느님으로부터 갈라놓음으로써 은총의 신적 생명을 상실했느냐, 아니면 신적 생명을 상실한 것은 아니지만 다만 그 생명의 힘을 감소시켰느냐에 따라서 대죄와 소죄를 구분한다. 중죄와 가벼운 죄는 궁극 목적의 실현을 위한 객관적 질서에 대한 방해의 정도에 따르는 구분으로서 윤리 질서에 대한 객관적인 중대한 방해는 일반적으로 대죄가 되지만, 인식이나 자유 의지의 부족으로 인하여 대죄가 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마찬가지로 객관적 윤리 질서에 대한 가벼운 위반은 일반적으로 소죄가 되지만, 객관적으로 가벼운 위반이라도 때로는 하느님께 대한 고의적인 반역의 기회가 될 수 있으므로 대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4. 근본 선택 

 

'근본 선택' 개념은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대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였다. 이미 2항에서 살펴본 것처럼 근본 선택에 의한 양심과 자유의 깊은 내면의 죄스런 결정이 대죄라는 데에는 스콜라 학파의 신학자들 이후 어느 윤리신학자들도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다만 근본 선택이 인간의 개별 행위와 갖는 관련성에 대한 이견이 나타남으로써 대죄에 대한 개념이 모호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가톨릭 윤리신학이 가르치는 근본 선택의 의미가 무엇이며, 또한 개별 행위와 갖는 관련성은 어떠한 것인지를 찾아보려고 한다. 특별히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회칙 {진리의 광채}는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해준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인간 행위에 있어서 근본 선택의 중요성을 회칙 {진리의 광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교의 윤리적 가르침이, 그 성서적 근거에서도, 근본 선택의 특수한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 근본 선택은 윤리 생활을 규정하며, 하느님 앞에서의 자유를 원초적인 차원에까지 끌어들입니다." 

 

근본 선택이 가지는 의미는 이 선택을 통해서 자신에 대한 결정과 '선'과 '진리'를 향하거나 혹은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을 향하거나 하는 삶의 방향을 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곧 인간의 자유에 있어서 선택의 중요성이 강조된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윤리적 가르침이나 성서적 근거는 이 근본 선택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이 근본 선택은 윤리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며 하느님 앞에서의 인간 자유를 원초적인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리기 때문에, 이는 곧 신앙의 결정(結晶)이며 신앙의 복종(로마 16,26 참조)의 문제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진리의 광채}가 언급하듯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도 이 근본 선택은 십계명의 첫 구절인 "나는 너희 주 하느님이다."(출애 20,2)라는 기본 계명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맺는 '새 계약'의 윤리도 당신을 따르라는 예수의 근본 요청으로 이루어진다. 예수의 이 요청에 대한 결단은 근본적이고도 무조건적인 성격을 갖는다. "나를 따라 오너라"라는 예수의 부르심은 진리와 신앙 행위의 의무와 근본 선택이라 할 수 있는 결정들을 의무로 부과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도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자유를 주시려고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갈라 5,13)라고 말하면서 즉시 "그러나 그 자유를 여러분의 육정을 만족시키는 기회로 삼지 마십시오."라고 경고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에 의해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언제든지 종의 멍에를 질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오로가 경고하는 종살이는 분명 근본 선택이라는 의미에서의 신앙 행위가 개별적인 행위들의 선택으로부터 분리되는 경우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개별 행위들이 근본 선택과는 전혀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성서는 근본 선택을 인간 자유의 참되고 확실한 선택으로 보고 그 선택을 개별적인 행위들과 깊이 연결시킨다. 곧 근본 선택은 매 행위에 대한 개별적인 선택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며, 이 개별 행위들을 통해 인간은 하느님의 뜻과 지혜와 법에 자신을 일치시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근본 선택은 항상 의식적이고 자유로운 결정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근본 선택을 구체적인 행위들과 분리시키는 것은 육체와 정신 안에서 윤리적 행위를 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통일성 또는 인격의 단일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의 한 경향으로 보여지는 근본 선택에 대한 몰이해, 곧 개인의 어떤 특수한 행위가 교회가 가르치는 하느님의 계명과 중대하게 반대되는 것일지라도, 개인은 사랑을 위한 근본 선택에 의하여 계속해서 윤리적으로 선할 수 있고 하느님의 은총 속에 머물며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조는 명백하게 거부되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근본 선택이란 한 번 선택을 하고 나면 그것이 바뀌기 전에는 윤리적으로 중대한 어떠한 행위도 행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선하거나 악한 선택을 철저한 방법으로 반복하고 새롭게 하는 행위들은 아주 선한 행위가 되든지 아니면 대죄가 되는 것이다. 

 

삶의 근본적인 방향은 개별 행위를 통해서도 바뀔 수 있다는 사상은 가톨릭 교회가 지금까지 가르쳐 왔던 대죄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하다. 일부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일상적 삶의 개별 행위들이 근본적인 삶의 방향을 결코 바꾸어 놓을 수 없다는 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회칙 {진리의 광채}에서 "근본 선택을 악한 개별 행위의 임의적인 선택과 분리시키는 것은 대죄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교리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치는 글 

 

이제 결론적으로 대죄, 소죄, 중죄를 구분하도록 하자. 회칙 {진리의 광채}는 우리에게 트리엔트 공의회의 가르침을 상기시킨다. 곧 대죄는 중대한 내용을 그 대상으로 하면서, 동시에 그 필요 조건으로 '온전히 알고 자유로운 동의'가 온전히 포함된 행위를 대상으로 한다. {화해와 참회}에서는 또한 대죄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대죄는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든지 분명히 알고 의도적으로 어떤 중대하게 무질서한 것을 선택할 때에도 성립되는 것입니다. 실상 그런 선택 속에는 하느님의 법을 경멸하는 태도와, 인간과 창조계 전체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자세가 이미 들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께로부터 돌아서고 사랑을 잃게 됩니다." 

 

죄의 구분은 전통적으로 범죄 행위의 적극성 여부와 그 내용의 중요성에 따라 구분되어 왔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곧 윤리적으로 악한 결단에 의한 범죄의 적극성이 그 범죄 행위에 따르는 결과에 대한 불충분한 의식 등 명확한 인식의 부족이나 의지의 불충분한 동의로 인하여 약화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할 때 그 죄는 소죄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또한 범죄 내용의 중요성도 대죄, 소죄의 구분을 위한 중요한 기준이 된다. 곧 죄에 있어서 중요한 내용이란 하느님이 객관적 질서로 정해 주신 인생의 목적과 인간의 순수한 사명의 실현을 중대하게 거스르고 방해하는 것이며, 따라서 사람이 그러한 중대한 죄에 충분한 인식과 완전한 자유의지로 동의한다면 그는 근본 선택에 의한 대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반성을 바탕으로 우리는 대죄와 소죄의 본질과 조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먼저, 대죄란 인간이 자유를 가지고 의식적으로 하느님과 그분의 법, 또 그분이 제공하시는 사랑의 계약 등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이나 어떤 유한한 피조물 등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것을 선택하는 행위로서 애덕과 초자연적 생명을 파괴하는 죄이며, 결국 이는 하느님께 중대한 모욕이 되면서 자기의 생명 원리와 자신을 연결시켜 주던 끈을 끊어버리는 행위이다. 이에 비해서 소죄란 일반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있어 하느님의 법에 불순종하거나, 중요한 일에 있어서 하느님의 법에 불완전한 인식이나 불완전한 동의로 불순종함으로써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한 신앙과 정의의 길목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거나 길을 잃고 헤매게 되는 경우를 말하는데 이 경우 애덕과 초자연적 생명까지는 파괴되지 않는다. 이렇게 대죄와 소죄를 구분하면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이 둘 사이의 또 다른 범주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 바오로 2세가 {화해와 참회}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생명과 죽음 사이에 어떤 중간 상태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죄와 소죄의 구분과 함께 중죄(重罪, peccatum grave)에 대해서도 정의하자면 우선 중죄는 대죄와 소죄의 구분 기준에서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이 대죄와 소죄의 구분이 신적 생명을 상실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르는 구분이라면 중죄는 초자연적 목적의 실현을 위한 객관적 질서에 대해 어느 정도 방해가 되었느냐에 따르는 구분이기 때문이다. 곧 객관적으로 볼 때 대죄가 될 수 있는 죄라고 하더라도 대죄가 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며, 그 반대로 객관적으로 소죄가 되리라고 보는 죄가 때로는 대죄가 될 수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들에 있어서 각각 소죄가 되는 중죄, 대죄가 되는 중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윤리신학에서 어떤 죄의 경중을 다룰 때에는 궁극 목적의 실현에 미치는 객관적 방해, 즉 그 방해의 크고 적은 정도만을 다루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학과 사상, 제26호(1998년 겨울,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이동익(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 윤리신학) / 이동익 신부님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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