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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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윤리]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자율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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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257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자율에 관한 윤리신학적 연구

 

 

머리글 

 

"일부의 현대 사조는 자유를 절대적인 것으로까지 격상시켜, 모든 가치의 원천이 되게 하였습니다. […] 진리의 필수불가결한 조건들은 사라지고, 성실성과 진실성, 그리고 편한 마음이라는 기준에 그 자리를 양보함으로써 일부 진리는 윤리적 판단의 주관적 사고에 적응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회칙 [진리의 광채]에서 현대 사회가 겪고 있는 진리의 위기 상황을 언급하고 있는 대목이다. 이미 현대 사회의 문화에서는 진리와 참된 가치, 그리고 자유 사이의 본질적인 유대는 사라져가고 있고, 그 결과 인간 삶에 있어서의 윤리적 가치들은 점차 상대적인 가치로 변화하게 되면서 진리의 절대성과 진리 안에서의 구원이라는 확신은 점차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염려하고 있는 것처럼 자유와 진리 사이의 본질적인 결합이 존중되지 않는다면 모든 형태의 전통이나 권위에서 벗어나려는 개인의 욕망이 자유의 자리를 대신하면서 인간 자신이 모든 선택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기준으로 등장하게 되고 말 것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이미 그 길에 들어섰다고 해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이는 실로 인간 삶에 있어서 심한 왜곡의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생명이 인간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 죽음으로 선고되고 또 선택될 수 있다는 적지 않은 사람들의 인식은 이미 가치 질서의 붕괴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고, 왜곡된 자유에 의해서 "모든 것이 협상 가능하고, 모든 것에 대해서 흥정할 수 있는" 현실이 기정사실화 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오래 지속되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 곧 안락사가 마치 인간의 품위를 유지해 줄 수 있다는 생각, 소위 삶의 질이나 경제적 효율성 때문에 낙태는 불가피하다는 생각 등 현대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죽음의 문화는 실제로는 거짓된 자유의 결과이며 참된 인간성을 기만하는 행위일 뿐이다. 그런 식의 자유는 곧 타인 위에 군림하는 자유이며, 이는 참된 자유의 죽음일 수밖에 없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처럼 현대 사회에서 현대인들로부터 행사되고 있는 자유는 필연적으로 죽음의 문화를 가져오는 오염된 자유이며, 이 오염된 자유에 의해서 선과 악의 결정권한이 참된 진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한 개인이나 사회적 집단에 부여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자유는 어떤 가치나 선까지도 창조할 수 있고 여기서 진리보다도 더 윗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곧 진리 자체가 인간의 자유로부터 파생된 것쯤으로 생각하게 되고, 여기서 자유는 윤리적 자율성을 주장하면서 이 윤리적 자율성이 인간 삶의 질서를 가늠하는 가장 큰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오염된 자유, 거짓된 자유, 참된 자유의 죽음, 윤리적 자율성이라는 이 거창한 개념들이 주도하고 있는 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유의 이름으로 신이 거부되며, 자율권의 행사라는 미명으로 하느님보다는 인간 이성이 윤리적 진리의 원천으로 간주되는 현대 사회는 실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염려하듯이 진리-선-자유 사이에 있는 본질적인 유대는 사라져 버리고 말았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는 현대 인간의 자아 파괴, 사회의 질서 붕괴라는 비극적 상황으로 빠져 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시급하게 요청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진리와 선, 그리고 자유 사이의 본질적인 유대를 찾는 일이다. 하느님이 중심이 되는 윤리적 가치의 변함없는 절대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요청되는 시기이다. 인간 자유의 참된 의미가 무엇이며, 무엇이 인간의 자율성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는가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시대이다. 

 

본고는 현대 사회에서 요구되는 참된 의미의 자유와 윤리적 자율성의 의미를 숙고함으로써 죽음의 문화라고도 불리는 이 사회의 비극적 현실을 극복하고 사회가 나아갈 올바른 방향의 기초를 제시하려고 한다. 윤리적 자율성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윤리적 제안이라고도 할 수 있는 회칙 [진리의 광채]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1. 자유: 인간을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로서의 자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현대의 일부 사조가 인간의 자유를 절대화시킴으로써 초월자에 대한 감각을 상실케 하고 있다는 점을 심각하게 염려한다. 윤리적 판단을 위한 기준에 있어서도 인간의 자유는 절대화되어 결국 선악의 기준을 독자적으로 결정하고, 이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특권을 개인의 양심에 허용하려는 경향이 이미 윤리 분야에까지 침투해 들어온 현실이다. 이러한 오늘의 현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인간 자유의 올바른 이해이다. 칸트는 자유를 이해하기를 자유의 인과성을 인정하고 이성이 자기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라고 정의했지만 과연 인간 이성에게 그 모든 권한을 넘겨줄 수 있는가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인간의 자유를 단순히 외적 강제나 외적 구속으로부터 독립된 상태로서 자기의 이성이나 본성에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때, 실상 자유는 윤리적 판단에 있어서까지도 독자적인 영역을 차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는 이렇게 단순하게만 이해되어서는 매우 위험하다. 자유는 인간 실재의 한 영역을 차지하는 매우 함축적이고도 풍부한 개념이다. 따라서 자유는 매우 복합적인 개념이다. 또한 자유는 인간의 행동 안에서 특별한 양식으로 경험되고 대두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곧 자유는 인간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듯이 인간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로서의 자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이 자유가 가지는 윤리적 차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 상세하게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1.1. 자유: 인간 실존의 양식 

 

자유는 서로 긴장 관계에 있는 몇 가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자유란 이 긴장의 요소들 가운데 어느 하나만으로 정의되어질 수 없는 개념이며, 따라서 자유는 다음의 삼중적 긴장관계 안으로 들어갈 때 그 이해가 가능하다. 

 

(가) 자유를 갖는다는 것과 자유로운 것 사이의 긴장관계: 자유를 갖는다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결정적인 것은 자유로운가 하는 점이다. 자유란 무엇보다도, 인간 실존에 있어서 하나의 존재 양식이며, 인간적으로 살아가는 귀중한 한 양식이다. 자유롭다는 사실은 '자유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물음을 우선적으로 제기한다. 예를 들면, 종교의 자유, 윤리적 삶의 자유, 사상의 자유, 경제적 자유, 정치적 자유 등. 그렇지만 역으로 말하자면, 자유롭다는 것은 또한 하나의 추상적 개념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나) 또한 자유란 외부에서부터 주어지는 어떤 선물이나 개념으로 이해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즉 어떤 사회에서 특별히 허가하는 형태로서 따라오는 것으로서 자유가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곧 자유란 고유한 의미로서의 자유가 지니고 있는, 인간의 내면에서부터 솟아나는 어떠한 요구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즉 사회 안에서 그 사회가 요구하는 책임감과 함께 나타나는 자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존재의 구조로서의 자유는 무한하다. 그렇지만 그 자유는 제한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인정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유는 여러 가지 다양한 자유들을 포함하고 있는 한 세계 안에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다) 자유란 선물이며 동시에 과제이다. 자유란 일종의 인간적 선물이며 또한 그리스도적 선물이다. 그렇지만 자유란 동시에 의무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둘을 다 포함하는 의미에서의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자유란 자유롭게 되는 것이며, 끊임없이 자유로워질 의무를 부여한다. 

 

자유의 이러한 두 가지 범주는 스콜라 학자들이 자유에 대해서 내렸던, 즉 "외부의 강요로부터의 자유"(libertas a coactione)와 "내적인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libertas a necessitate)라는 정의에서 다시 취할 수 있다. 다시 정의하자면, 1) 어떠한 것으로부터도 속박될 수 없는 것, 2) 자율적으로 결정 할 수 있는 것, 즉 정체되어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닌, 활발한 움직임, 따라서 결정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며, 결정하는데 있어서 그것을 초월하거나 혹은 극복하면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유란 어떤 행동 이상으로 행동을 하도록 하는 일종의 행동 양식이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서 그리고 동시에 자유를 가지고 어떤 것을 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라) 자유에는 '무엇의 자유' '무엇을 위한 자유', 그리고 '무엇으로부터의 자유'가 있다. 이는 곧 어떤 동일한 현실에 대해서 변증법적인 동기를 갖는 것을 말한다. 소유격으로서의 자유가 지니는 의미는 실존적 양식의 철학에서 하나의 커다란 수용을 의미하며, 여격으로서의 자유가 지니는 의미는 막시즘적 철학에서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 

 

1.2. 자유: 인간됨의 구성 요소 

 

인간은 내면 안에 자유라고 하는 구조를 갖는다. "자유는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의 본질적인 소유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자유는 인간적 행위나 의지를 특징지을 뿐만 아니라 이 자유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인간 본성은 반드시 자유로워야 한다는 당위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자유는 인간에게 실존적인 힘을 부여하며, 인간의 자유는 인간됨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된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을 가능하게 하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자의식으로써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할 수도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에 관한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자유를 실존적인 개방이라고도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자유에 관한 정의를 통해서 자유란 매여 있는 것들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점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으며, 동시에 자유란 결정의 측면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개방성'이라는 자유의 개념은 그 자체로 책임감과 자율성의 개념을 함께 끌어들인다. 따라서 자유의 이러한 개념과 함께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유라는 일종의 무한성으로 특성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나'라는 구조적 특징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한 구조로서의 자유는 인간 조건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며 인간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다. 여기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조건을 분석해 보는 일일 것이다. 특별히 이 부분은 심리학에서 인간의 심리 분석적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다음 몇 가지 점에 있어서 인간의 조건을 분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가) 인간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실재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 인간 실존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유로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자유는 인간실존을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이며, 인간이 지니고 있는 자의식과 자신에게 독립적으로 부여된 자유의 개념의 차이에 따라 인간 실존은 다양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다) 자유는 또한 발전적인 경향을 가진다. 그렇지만 동시에 자유는 자유로움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될 때 퇴보의 경향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자유의 이러한 경향들 사이의 긴장을 통해서 인간적 삶이 체계화된다. 

 

1.3. 자유: 그리스도교적 개념 

 

자유는 또한 그리스도교적 개념이다. 자유의 인간적 개념은 그리스도인에게 맡겨진 메시지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고 있으며, 곧 자유는 그리스도인들의 본질을 구성하는 기본적 요소이다. 

 

"신학적 의미에서의 자유란 신약성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하느님의 구원 행위의 효과를 조명하고 설명하는 여러 개념들 중의 하나이다. 믿는 자들, 곧 자유를 누리도록 조건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의 자유는 어떤 특별한 전망으로부터 나타나는 구원의 실제적인 소유의 상태 안에서 드러나는 자유이다.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하나의 구원론적인 의미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인간,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인간은 자유가 없은 노예의 상태에 있었고 또 현재 그러한 상태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개념의 자유는 신학적 의미로 자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신약성서의 모든 저자들에게 공통적이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자유 안에서 사는 생활로 정의한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에로 불리움을 받았습니다"(갈라 5,13). 바오로는 자유를 구원론-그리스도론적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바오로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죄의 종살이(로마 6,11.18.22; 8,2), 죽음의 속박(로마 6,16-23), 율법의 굴레(갈라 4,21-31)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는 모든 피조물에게 퍼져 나가는 자유이다: "그것은 피조물 자신도 부패의 종살이로부터 하느님 자녀들의 영광과 자유를 위해 해방되리라는 희망입니다"(로마 8,21). 그렇지만 사도 바오로에게 자유란 어떤 절대적인 가치는 아니다. 사랑 때문에, 스캔들을 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복음으로 모든 이를 수용하기 위해서라도 경우에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도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또 한편으로 자유는 사도 바오로가 의도하는 바와 같이, 자유방임이나 한계 없는 자유의지도 아니다(갈라 5,3; 1고린 6,12-14; 10,23-25; 로마 6,15). 자유란 로마서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새로운 끈을 맺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차원에서의 자유이다(참조: 로마 6,16-23). 곧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또 하나의 다른 위대한 가치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곧 그 위대한 가치는 사랑이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이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말고 오히려 여러분은 서로 사랑으로 남을 섬기시오. 실상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한마디 말씀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으려 한다면 피차 멸망하게 될 것이니 조심하시오"(갈라 5,13).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종이 되는 자유인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율법은 바로 '네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한마디 계명으로 요약되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사가도 역시 자유에 관해 심오한 가르침을 제공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 8,33). 예수께서 유대인들과 대화하는 내용에서 요한 복음사가는 유대인들이 고집하는 자유는 참된 자유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유만이 진실된 자유라는 것을 가르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요한에 의하면 이 자유의 획득을 위한 기본적인 자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요한 8,31). 이러한 진리를 아는 사람만이 진리에 의해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요한 8,32). 불신의 죄가 유대인들로 하여금 진정한 자유에 도달하지 못하게 가로막은 장애가 되었고, 그들은 결국 종의 상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요한 복음사가의 가르침인 것이다. 

 

야고보서는 또한 '자유의 완전한 법'에 대해서 말한다(야고보 1,25; 2,12). 이 표현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복음의 법에 따라 생활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베드로 전서 2,16은 그리스도 신자들을 자유에로 불린 사람으로 언급하면서 악을 행하는 구실로 자유가 남용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기도 하다(2,13-16). 

 

이상과 같이 살펴본 인간의 자유는 어떠한 속박이나 제한도 인정하지 않는 의미에서의 자유 개념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유한한 존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분명히 어떤 제약을 받고 있는 존재이며 또한 상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도 절대적인 자유가 아니라, 상대적이고 조건 지워진 자유이며, 인간의 유한한 본질에 의해 그리고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에 의해 제약을 받고 있는 인간의 자유는 이미 제한된 자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곧 인간의 행위는 구체적인 각각의 상황에서 제한된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결단을 내리는 행위이며, 따라서 인간의 자유는 그러한 결단에 이미 가치의 규범이 미리 주어져 있다는 의미에서 제한된 자유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는 가치와 선을 추구함으로써 발생하는 자기 발전을 향해 나아가며, 이런 의미에서 자유는 궁극적으로 선과 가치의 최종 목적인 신에 예속되면서 참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2. 자율(自律, Autonomia) 

 

본고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인간의 자유가 진리보다 우위에 놓이게 되는 현대 사조에서는 진리가 인간 자유의 창조물처럼 여겨지면서 인간의 자유는 윤리적 절대성을 주장하게 되고, 이 윤리적 자율성은 절대주권에 이르게 된다는 점을 심각하게 염려한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윤리 규범과 인간의 자율성의 관계에 관한 확고한 시각은 그것이 인간의 완전한 자치권에 맡겨질 성질의 것은 아니라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곧 인간 이성은 명백하게 신적 지혜에 대한 의존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 이성과 윤리적 진리를 위한 효과적 수단으로서의 하느님의 계시는 서로 긴밀하게 밀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선 자율이 어떠한 의미를 가진 개념인지를 살펴본 다음에 그리스도인들의 행위를 최후 목적에로 이끌어 주는 윤리규범과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2.1. 자율의 의미

 

이 개념은 칸트 윤리학의 중심개념이다. 칸트에 의하면 종래의 윤리학은 도덕률을 신의 의지나 행복을 구하는 자연적 충동이나, 이타적인 도덕적 감각, 그리고 자기의 완전성에의 요구 등을 근거로 하고 있으며 의지를 규정하는 법칙을 의욕의 대상에서 주어지는 타율이라고 한 것에 대하여 자율이라는 것은 의지 그 자체가 자기 자신에 대한 법칙인 의지의 성질이며 구조라고 한다. 따라서 칸트는 그의 {실천이성비판}에서 "의지의 자율은 모든 도덕률과 여기에 따르는 모든 의무의 유일한 원리가 되며[…] 그러므로 도덕률이란 순수 실천 이성의 자율성, 즉 자유의 자율성을 표현할 뿐이며, 자율은 그 자체로 모든 준칙의 형식적 조건이고, 이 준칙에 의거하여 자율은 오로지 최상의 실천 법칙과 일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자율에 관한 칸트의 이러한 주장은 사실상 윤리적인 의지를 하느님께 맡기는 가톨릭 교회의 윤리적 가르침과는 상반된다. 그가 말하는 것처럼 의지의 자율이 모든 도덕률의 유일한 원리가 된다면 절대성을 요구하는 모든 윤리적 자율성은 결국 허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율(Autonomia) 개념은 희랍어의 '자아'를 의미하는 Auto(self)와 '다스리다'의 nomos(rule 혹은 law)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자율, 자치, 자결 등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이 개념의 핵심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주인이 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가 법의 주인이 되며, 규칙의 주인이 되면서 타인에게 예속되지 않을 뿐더러, 타인에 의해 조정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곧 자율적으로 행위한다는 것은 외적 제약으로부터의 자유와 함께 자신의 의지대로 행위하고, 스스로 선택한 목표에 따라 행위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의 자율 개념에 의해 이루어지는 자율적 행위란 결국 어떠한 외적 강제도 개입되지 않는 행위자 스스로의 결정에 의한 행위가 되며, 행위자 자신의 욕망이나 충동까지도 전혀 개입되지 않는,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행위가 된다. 곧 자율적 행위자는 자신의 행위를 위해 스스로 법을 처방하는 입법자가 되며, 따라서 타자에 의한 강요에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행위이어야만 자율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2. 자율의 한계 

 

위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자율 개념에 있어서 중요하게 대두되는 것은 독립성, 선택의 자유, 외적 강제로부터의 자유 등의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자율성의 존중이라는 의미는 타자로부터의 절대 독립을 의미하며, 이 의미에 있어서 타자란 자기 자신을 제외한 모든 외적 요인을 총칭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율적으로 행위한다는 의미를 과연 자발적이고 독립적이며, 외적 강제로부터 자유롭고, 또한 온전히 행위자 스스로에 의해 결정된 행위이며, 순수하게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행위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인간의 행위는 그 행위의 주체자가 속해 있는 사회와 인간 관계에 결코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주변 환경이나 여건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 인간의 행위이기 때문에 인간 행위를 순수 이성적이고 의지적인 순수성에 입각하여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행위 안에는 비합리적 영역이 반드시 함께 자리잡고 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 행위는 어떠한 측면으로든 직て간접으로 사회와의 연관성을 드러내고 있기에 사회와 결코 독립적일 수 없고, 따라서 행위자의 결정은 그 사회와의 연관성 때문에라도 사회적 통제가 필요하다. 인간은 사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유기적 존재이며, 이는 구조적 및 기능적으로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유기적 실재란 그 실재 안에 포함되어 있는 여러 요소들이 전체 실재와 긴밀한 연관을 갖고 있으며, 또한 전체 실재 역시 각각의 요소들과 상호 긴밀한 협조 관계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인간 행위에 있어서의 자유의 제한은 이따금 불가피할 수밖에 없으며, 인간의 행위가 자율에 맡겨져 있다하더라도 그 행위가 반드시 자발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2.3. 윤리 규범과 윤리적 자율성 

 

윤리적 자율성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윤리 규범의 문제와 관련된다. 페쉬케(K.H.Peschke) 신부에 의하면 그리스도교 윤리학에서 가르치는 윤리 규범 역시 인간의 이성에 의지하면서 이를 기초로하여 설명되어 왔고, 따라서 윤리 규범 역시 이성적 정당성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 인정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성적 정당성의 문제는 사실상 오해의 여지가 많이 있다. 페쉬케 신부가 이 문제에 관해 알폰스 아우어(A.Auer) 교수의 {윤리의 자율성과 그리스도교 신앙}이라는 책을 인용하는데 이 책에서 언급되는 윤리 규범에 있어서의 자율성의 문제는 규범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규범의 적용에 관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윤리 규범을 구체적으로 사회 윤리에 적용하려고 할 때 신학적 인식 자체는 사회 윤리와 관련된, 사회적 혹은 경제적 윤리의 어떤 구체적 지침을 연역해 낼 수 없고, 오히려 이를 위해서는 사실에 관한 인식과 경험과 판단 능력, 그리고 상상력이 요구된다는 점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윤리 규범에 있어서의 이성적 정당성이라는 말 자체는 윤리적 자율성이라는 개념보다는 오히려 윤리적 제 문제들에 관해 서로 다른 세계관을 다른 여러 단체들이 갖는 최소한의 합의의 차원이라든가 혹은 신앙인들을 통해서 더 넓게, 그리고 더 깊게 고찰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페쉬케 신부는 협의의 의미에서 윤리적 자율성이란 "인간이 하느님의 법과 뜻을 포함하여 인간에게 외적으로 부과되는 모든 도덕률에서 독립한다"는 뜻이며, 이런 뜻에서 자율적인 인간은 자기 자신의 권위에 따라 도덕률을 만들어 내고 자신의 인격과 가치에 대해서만 책임을 갖는다면 이러한 의미의 윤리적 자율성은 결코 그리스도교 윤리의 가르침이 될 수 없다고 단정한다. 그 이유에 대해 페쉬케 신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은 어떤 점에서 자기 존재의 창조자로서 자신의 윤리 규범의 자율적 창조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창조된 구조와 목적에 따라야 한다. 윤리 원칙은 인간의 실재성과 목적이 요구하는 것이므로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서 윤리 규범이라든가 윤리 원칙은 인간에게 임무와 목적을 맡기신 최고의 실재에게로 종속될 수밖에 없으며,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교 윤리학에서 말하는 윤리 규범은 인간적 자율에 맡겨져 있다기보다는 신율(神律, Autonomia teonoma)에 맡겨져 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3. 윤리적 자율성과 회칙 [진리의 광채] 

 

이제 우리는 보다 직접적으로 윤리 분야에서 자율의 문제는 어떻게 이해되는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현대 사조에서 드러나는 현대인들의 자유의 행사와 관련하여 염려하는 것처럼 현대 윤리신학의 어떤 주장들은 윤리법과 인간 본성과 양심에 대한 자유의 관계에 있어서 진리에 대한 그 의존성을 약화시키거나 심지어 부정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세상 사물에 대한 윤리적 질문은 사실상 인간의 자유 문제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문제이며, 이 자유는 절대적으로 진리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강조하는 핵심인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렇게 진리에 의존해야만 하는 인간의 자유가 윤리적 자율성을 주장하는 현대 사조의 모습임을 염려한다. 

 

3.1. 인간적 가치와 객관적 윤리질서 

 

회칙 [진리의 광채]는 인간 행위에 대한 윤리적 결정, 좀더 구체적으로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입각한 윤리적 결정에 대해 다음의 몇 가지 측면을 강조한다. 

 

첫째, 윤리적 결정은 인간적 가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느님께 그 기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곧 하느님의 계명이나 명령에 의해 윤리적 결정이 이루어져야지 순수하게 인간적인 판단에서 윤리적 결정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진리의 광채]는 이렇게 언급한다: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인지 결정하는 권한은 인간에게 속하지 않고 하느님에게만 속한 것입니다." 윤리적 행위가 윤리적 가치나 선을 추구하는 행위라고 할 때 그 판단의 근거에 대한 물음은 오직 하느님에게서만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회칙 [진리의 광채]가 언급하는 것처럼 "홀로 선하신 한 분 하느님만이 인간에게 무엇이 선한지를 완전히 아시고, 당신 사랑 때문에 이 선을 사람에게 계명으로 제시하시기" 때문이다. 

 

둘째, 하느님의 계명이나 명령에 기원을 둔 이 윤리 질서가 부여되는 상대자는 본성적 조건으로서 자유를 지닌 인간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신적 명령을 받아들이는 상대는 인간적 자유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윤리적 판단에 있어서 그 행위를 하는 주체로서의 자유와 하느님의 명령 사이에는 끊임없이 긴장이 생겨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회칙 [진리의 광채]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하느님의 법은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배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유를 보호하고 촉진합니다." 곧 회칙 [진리의 광채]가 바라보는 시각은 인간 행위에 대한 윤리적 판단은 오히려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의 법을 통해 보호되며, 따라서 윤리적 판단에 관한 문제는 "자유와 법" 사이의 긴장이라는 틀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문제 제기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추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1) 윤리적 자율성(Autonomia moralis)에 대한 재고: 윤리적 자율성이 "절대 주권"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염려하는 것처럼 윤리적 가치들을 창조할 수 있고, "개인이나 사회적 집단에게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결정할 권한을 부여하는" 윤리적 혹은 철학적 지침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윤리적 자율성은 윤리신학의 영역에서도 그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다. 2) 이성과 신앙의 관계로서 이는 좁게는 신학의 영역에서 드러나는 문제이고, 신학적 및 윤리적 반성에서는 다시 중요한 주제로 부각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회칙 [진리의 광채]는 이렇게 언급한다: "가톨릭 윤리신학이 신법을 거슬러 인간 자유를 확립하려 하거나 윤리 규범에 궁극적인 종교적 토대의 존재에 이의를 제기하려고 시도한 적은 없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상황은 이 문제에 대해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면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물질세계 곧 '세상사'에 대한 윤리규범을 확립하는 데 있어서 이성과 신앙의 역할을 완전히 재고하는 입장"에 까지 이르고만 것이다. 

 

셋째, 회칙 [진리의 광채]가 강조하는 또 하나의 문제는 그리스도교 윤리의 고유성에 대한 것이다. 회칙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하여 모두에게 유효하고 한결같은 특수하고도 결정적인 윤리적 내용이 하느님의 계시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일종의 권고나 잔소리에 불과하며 자율적인 이성만이 역사적 상황에 적용하여 참으로 객관적인 규범적 지침을 마련할 수 있는 과업을 맡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들은 자율성은, 이른바 인간적 선에 관한 특별한 윤리 규범들에 대해 교회와 그 교도권이 갖는 고유한 교리적 권한을 자연스럽게 부정하게 됩니다." 

 

사실상 상당수의 가톨릭 윤리신학자들은 하느님의 계시가 그리스도교 윤리의 초월적인 동인(動因)을 제공하고 인간 이성은 단순히 중개 역할만 한다고 생각하면서 교도권의 윤리적 권한이라든가 객관적 윤리 규범에 대한 오해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신앙과 이성이라는 이 두 요소는 함께 그리스도교 윤리의 내용을 구성한다. 곧 계시는 신앙의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전달 방법에 있어서는 항상 인간적 이성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또 한편으로 계시 안에는 인간 이성이 따를 수 있는 구체적인 규범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윤리 규범의 내용은 그리스도교적 초월의 형태와 인간적 이성이 함께 하는 신앙의 중개 형태를 함께 유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윤리 규범은 이러한 고유의 구조가 반드시 고려되면서 해석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윤리 분야에서 교회와 교도권이 갖는 권한에 대해서 간단한 언급을 할 수 있겠다. 윤리적 자율성이 절대적 자율성의 개념으로 드러나고, 또 그것이 구원 질서와의 관계에 있어서 윤리 질서로부터의 전적인 해방으로 이해된다면 그것은 자연히 회칙 [진리의 광채]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른바 인간적 선에 관한 특별한 윤리 규범들에 대해 교회와 그 교도권이 갖는 고유한 교리적 권한을 자연스럽게 부정하게 된다. 그러한 규범이 계시의 고유한 내용의 일부일 수도 없고, 그 자체로 구원에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여기서 논쟁이 되는 것은 교도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입하는가 보다는 신자들에게 얼마만큼의 의무를 부과하느냐의 문제이다. 곧 의무 부과의 정도에 따라 규범에 대해 교도권의 요구에 대한 부정으로 드러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윤리 규범이 그것을 언급하는 교도권의 성격이나 형태, 또한 복음의 내용에 얼마만큼이나 근접하는가에 따라 다양한 등급의 의무가 부과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신학자들 사이의 공통된 의견들 중의 하나는 무류성으로부터 주어지는 신자들의 의무는 전적으로 세속적인 현실과 밀착되어 있는 윤리의 구체적 내용들의 구석구석을 따지면서 부과된다거나 혹은 인간 이성에 기초를 둔 인간적 합리성에 종속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윤리적 판단의 기초에 관한 언급에서 윤리는 하느님의 "금지"(참조: 창세 2,16-17)로부터 생겨난다는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으며, 타율(他律)이라는 이러한 흔적은 인간 행위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완성되고, 그리고 인간 측의 자유롭고도 의식적인 실천으로부터 취해져야만 하는 현실로부터 주어진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극복되어야만 할 것이다. 

 

3.2. 동참적인 신율(tenomia partecipata)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 이성의 자율성이 지니는 의미와 또 그것이 윤리 규범과 가지는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제부터 살펴볼 것은 회칙 [진리의 광채], 38항~41항을 중심으로 "윤리적 자율성" "이성의 자율" 등이 의미하는 내용이 인간적 조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윤리적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용하는가의 문제에 대해서이다. 

 

첫째, 회칙 [진리의 광채]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인용하면서 자율성의 개념을 언급하는 가운데 다음의 두 가지 지평, 곧 "지상 사물의 자율성"과 "인간 자체도 스스로의 보살핌과 책임에 맡겨져 있다"는 의미로서의 "인간의 자율성"에 대해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우리는 공의회의 [사목헌장]과 회칙 [진리의 광채]가 서로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보다는 이 단어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그 관점이 다르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곧 [사목헌장]은 자율성의 개념을 긍정적인 의미의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는 반면에, 회칙 [진리의 광채]는 "자율성의 잘못된 개념"은 결국 "인간 자신과 관련한 해로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부각시킴으로써 자율성 개념이 잘못 사용됨으로써 나타날 수 있는 부정적인 현상에 대한 조심스런 표현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둘째, [진리의 광채], 40항은 참된 윤리적 자율성은 인간학적 자율성에서부터 진행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에 대한 설명을 위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인용한다. "윤리 생활은 인격체에서만 해당되는 창조성과 독창성을 요구하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의 원천과 원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성은 영원한 법으로부터 그 진리와 권위를 이끌어 냅니다. 영원한 법이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곧 토마스 아퀴나스가 강조하는 것은 객관적 윤리질서(윤리법 혹은 도덕률)를 위해서는 인간 인격의 자유롭고도 의식적인 행위가 요구된다는 점이며, 이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윤리법은 동시에 인간의 고유한 법이 되며," 따라서 "실천 이성의 올바른 자율성"의 의미가 깊이 숙고되어져야만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셋째, 요한 바오로 2세는 실천 이성의 자율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인간 이성이 객관적 윤리 질서에 열려 있어야 하는데, 그 객관적 윤리질서는 동시에 자율적 조건 안에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서 다음의 두 가지 유혹이 생겨나기 쉬운데 그것은 1) 인간 이성이 객관적 윤리 질서와는 별개의 것으로 머무르면서도 윤리적 가치나 규범을 창조할 수 있다는 유혹 2) 타율의 유혹이다. 

 

넷째,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교 윤리에서 윤리적 자율성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신율적 자율성(Autonomia teonoma)의 범주 안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다. 회칙 [진리의 광채]는 제 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 많은 신학자들의 신학적 및 윤리신학적 반성의 결과로 이끌어낸 신율적 자율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반면에 명사인 "신율"(teonomia)과 형용사인 "동참적인 신율"(teonomia partecipata)이라는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이러한 용어의 사용은 "하느님의 법에 인간이 자유롭게 복종함으로써 인간 이성과 인간 의지가 하느님의 지혜와 섭리에 동참하게 된다는 점에서 테오노미아(theonomia, 神律) 또는 동참적인 테오노미아(theonomia partecipata)라는 말을 사용하는" 몇몇 윤리신학자들의 의견을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진리의 광채], 35~37항에서는 인간적 자율성이 지니는 한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언급되고 있다면, 38~41항에서는 비교적 명백하고도 긍정적으로 언급되면서 적어도 인간학적 자율성이 부분적으로는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회칙 [진리의 광채]가 가르치고 있는 자율성의 개념을 윤리 신학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를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첫째, 교회의 교도권은 '자율' '타율' '신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현대의 윤리적 문화를 표현하는 한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 폐쇄되어 있는 개념으로 단정하지는 않는다. 둘째, 도덕률의 준수를 위해서 인간 인격의 자유롭고도 의식적인 행위가 필수적이라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언급은 여기서도 매우 유익하고 또 유효하다. 왜냐하면 인간 행위에 윤리성을 부여하는 인간적 행위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공헌은 신학적 및 윤리적 전통에서 가장 권위가 있고 또 긍정적인 방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인간적 자율성에서부터 출발하여 윤리법을 수용하는 것, 인간적 합리성을 가지고 신앙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 자체로 윤리적 가치를 갖는 것이며, 이는 인간적 자율성의 존중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셋째, 인간 이성의 자율을 성서적 계시의 측면에서 이해하려고 할 때, 그것은 타율을 명백히 거부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타율은 또한 자율을 그 자체로 일종의 소외나 고립으로 이해하게 된다. 넷째, 요한 바오로 2세가 강조하는 "실천 이성의 자율성"을 수용해야 한다는 의미는 신율의 범주 안에서 이해되는 자율성이다. 

 

 

마치는 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자율의 이해를 위한 윤리신학적 접근이었다. 이러한 시도는 근본적으로 윤리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좀더 구체적으로는 인간 행위가 어떠한 방법으로 가치를 실현하는가에 대한 가능성의 기초로서의 자유와 자율에 대한 고찰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자유의 의미는 단순히 어떠한 외적인 요인으로부터 제한되거나 속박될 수 없는 상태라든가 어떤 사회로부터 특별히 허가되는 형태로서의 자유로움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인간 내면에서부터 솟아나는 인간됨의 요구와 함께 그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가 요구하는 책임감을 함께 드러내는 자유로서, 인간 자신과 인간 삶이 추구하는 가치의 실현을 위한 기초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위대한 가치는 초자연적인 실재로서의 하느님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행위는 최고 가치로서의 하느님을 향하는 행위이며,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을 위한 윤리 규범으로서의 질서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 질서는 물론 참된 진리를 향하고 온갖 거짓과 죄, 율법,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해방을 가져다 주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참된 진리이시며 윤리 질서의 최고 규범이신 하느님과의 통교를 벗어나서는 그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명백히 하느님 안에서의 자유이며, 진리 안에서의 자유일 수밖에 없으며, 이 자유를 통해 인간은 선과 가치의 최종 목적인 하느님과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자유는 칸트 식의 순수 의지의 측면에서의 자율과는 거리가 있다. 곧 자유를 자율과 같이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율 개념이 의미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 스스로의 주인이 되고, 스스로가 법과 규칙의 주인이 되면서, 또한 타인에게 예속되거나 타인에 의해 조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가질 때, 자율적으로 행위한다는 것은 곧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라든가 또 하느님까지도 포함시키는 타율을 철저하게 배격한다는 의미이다. 자율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현대 사회에 들어서면서 윤리 분야에도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고, 이는 즉시 윤리 규범에 있어서 윤리적 가치들을 창조할 수 있는 절대 주권으로서의 윤리적 자율성을 주장하는 형태까지 생겨난다. 

 

가톨릭 윤리신학은 윤리 규범에 있어서 신앙과 이성의 역할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있어서 신앙의 수용은 사실상 인간적 자율성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으며, 인간적 합리성으로써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이 윤리적 가치를 갖는다고 볼 때, 신앙을 위한 인간 이성의 자율성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또한 자율성의 역할은 신앙의 실천적 적용에 있어서도 큰 의미를 갖는다. 곧 그리스도교 신학이나 신앙이 사회의 삶에 적용되기 위해 요구되는 구체적 사실에 대한 인식과 경험, 그리고 판단 능력과도 같은, 신학적 인식 능력과도 같은 이성의 역할은 신앙에 있어서 결코 배제되어서는 안 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교 윤리의 측면에서 인간 이성의 자율을 살펴볼 때 단순히 그것이 타율을 거부하는 것으로만 인식되어서도 안 된다. 신앙과 밀접히 협조하는 또 하나의 요소로서 실천 이성의 자율성은 그리스도교 윤리에서 반드시 수용되어야 하며, 이는 요한 바오로 2세가 언급하는 것처럼 신율(神律, Autonomia teonoma)의 범주 안에서 이해되는 자율성이어야 한다. 따라서 윤리 규범은 정확히 말해서 이성적 자율보다는 신율에 맡겨져 있다. 

 

"A study on freedom and autonomy in moral theology"

 

[가톨릭 신학과 사상, 제24호(1998년 여름, 가톨릭대학교출판부), 이동익(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 윤리신학) / 이동익 신부님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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