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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생명칼럼: 피임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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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10 ㅣ No.565

[생명칼럼] 피임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

 

 

1. 인간 생명을 중심으로

 

① 산아 조절의 그릇된 방법

 

그리스도교적인 이론의 기초적 원칙에 의거하여 직접적인 낙태를 산아 조절의 정당한 방법이라고 하는 의견을 전적으로 배격해야 한다. 특히 직접적 낙태는 비록 치료의 이유라 할지라도 배격하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교도권이 여러 번 가르친 대로, 남자든 여자든 영구적이든 일시적이든 직접 시술을 하는 것은 단죄하여야 한다. 또한 부부 행위에 선행하거나 동반하거나 그 필연적인 결과로써 피임을 목적하거나 방법을 강구하는 모든 행위를 배격하여야 한다. 또는 고의로 피임하는 부부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덜 크다고 생각되는 악을 택해야 한다든지, 부부 행위는 피임할 때의 행위도 그 전후에 임신할 때의 행위와 함께 하나의 행위를 형성하는 것이므로 이 모든 행위가 같은 하나의 윤리적 선에 참여한다는 따위의 이유를 끌어대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물론 더 큰 악을 피하기 위해서나 탁월한 선을 증진하기 위하여 덜 큰 악을 묵인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나, 아무리 중대한 이유가 있다 하여도 선의 결과를 가져오기 위하여 악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곧 본질적으로 윤리 질서를 파괴하는 인간답지 못한 것이라고 판단되는 행위는 비록 개인이나 가정이나 인간 사회의 선을 옹호하고 촉진할 목적을 가졌다 할지라도, 의지의 적극적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고의로 임신을 피함으로써 내적으로 이미 악하게 된 부부 행위도 임신할 수 있는 부부 생활 전체와 함께 선하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은 그릇된 생각이다.

 

② 인공적 산아 조절의 중대한 결과

 

인공적 산아 제한 방법의 결과를 생각한다면 올바른 사람들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진리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이런 행동으로써 얼마나 넓게 또 얼마나 쉽게 부부의 불신과 윤리 생활의 퇴폐의 길이 열리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인간의 나약함을 알고 또 사람들이, 특히 정욕이 강한 젊은이들이 도덕률을 충실히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큰 자극이 필요하며 그들에게 너무 쉬운 범법의 방법을 제공해서는 안 되겠다는 사실들을 깨닫기 위해서는 그리 오랜 경험이 필요 없다. 더욱 통탄할 일은, 피임 방법 사용에 습관 된 남편들이 아내를 존경할 줄 모르며, 아내의 몸과 마음의 균형을 무시하고 아내를 자기 정욕에 봉사하는 도구로 삼아 버려, 아내를 존경과 사랑으로 대해야 할 동료로 생각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마침내 이런 방법으로 자연법에 무관심한 국가 지도자들에게 얼마나 위험한 권리를 부여하게 되는가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가정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부부가 타당하다고 인정하는 방법을 국가의 최고 지도자들이 국가 전체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사용한다고 해서 그들을 책망할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국가 권력이 더욱 효과적인 임신 방지법을 권장하거나 더구나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마다 그런 방법의 사용을 모든 사람에게 강요한다 해도 누가 감히 그것을 저지할 수 있겠는가? 하느님의 법이 내포하고 있는 어려움을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 공동체가 체험한다고 해서 그 어려움을 피하려고 할 때에 사람들은 부부의 가장 고유한 사명의 심장부에까지 국가 권력의 방자한 간섭을 허용하게 될 것이다.- 회칙 <인간생명> 14항, 17항 참조(1968.7.25)

 

  

2. 가정공동체를 중심으로

 

부부가 산아 제한의 방법을 사용해서 창조주 하느님께서 남자와 여자의 됨됨이와 성적 일치의 역동성에 받아 주신 이 두 가지 의미를 분리한다면, 그들은 하느님 계획에 대한 ‘조정자’ 역할을 하고, ‘완전한’ 자기 봉헌의 가치를 변조시킴으로써 인간의 성(性)과 더불어 자신들과 결혼 동반자를 ‘조작하며’ 실추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 상호간의 완전한 자기 봉헌을 표현하는 본래의 언어가 ‘산아 제한’이라는 객관적으로 모순된 언어, 곧 자신을 상대방에게 완전히 바치는 것을 거부하는 언어로 덮어 씌워진다. 이것은 생명에 대한 개방성을 적극 거부함과 아울러 인간 전체를 바치도록 되어 있는 부부애의 내적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와 달리, 부부가 불임 주기법을 사용해서 성행위가 가지는 일치와 출산의 의의 사이에 불가분적 관계를 존중한다면, 그들은 하느님 계획의 ‘집행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조작이나 변조 없이 완전한 자기 봉헌의 본래의 역동성에 따라 성에서 ‘혜택’을 받을 것이다. - 교황권고 <가정공동체>(1981.11.22)

 

 

3. 하느님의 눈에서 본 인간의 성(性)을 중심으로

 

부부들은 출산을 통하여 하느님께 가장 깊이, 가장 가까이 결합될 수 있는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을 빌리자면 “부부들은 생명에 봉사하고 창조주의 첫 축복을 역사 안에서 실현하는 일, 곧 출산을 통해서 하느님 모상을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전달하는 일”(가정공동체, 28항)을 할 수 있다. 모든 자녀는 유일하고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존재이며 하느님 사랑뿐만 아니라 부모의 사랑의 증거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오늘날 특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책임 있는 부모 역할은 생명의 가능성에 문을 활짝 여는 것을 뜻한다. 이는 부부들이 하느님의 은총이 그들의 너그러운 결정을 채워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통하여 내리는 상호의 결정이다. 부부들은 출산 터울이나 횟수에 관하여 강요나 압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결정을 내려야 한다.

 

부부들이 부모가 되기 위한 결정을 내릴 때 겪게 되는 문제들과 어려움을 인정한다. 경제적 안정, 직장, 건강, 자녀 교육, 현재의 책임들을 완수하는 것에 대한 걱정도 고려되어야 하며, 이러한 걱정들 때문에 적어도 당분간만이라도 자녀 출산을 피하고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구 성장에 대한 근거 없는 주장들과 자녀의 가치를 경시하는 문화적 태도가 자녀 한두 명을 더 가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든다는 사실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압력들이 부부들의 자유를 위태롭게 한다. “자녀들은 참으로 혼인의 가장 뛰어난 선물이며, 부모의 행복에 크게 이바지한다.”(사목헌장, 50항)라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을 떠올려 보자. 또한 진심으로 간절히 바라지만 자녀를 갖지 못하는 부부들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동시에, “지혜로운 공동 결정으로 더 많은 자녀들을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여 알맞게 교육하는 부부들을 특별히 상기하여야 한다.”(사목헌장, 50항)

 

- 하느님의 눈에서 본 인간의 성(性) (미국 주교회의 1993.8.12)

 

 

4. 정리

 

성숙한 난자와 정자가 만나는 것을 ‘수정’이라 하고, 수정된 난자를 체내에 보유하고 있는 상태를 ‘임신’이라 하며, 임신이 성립함을 ‘수태’라고 한다. 이러한 수태과정은 양성세포의 생산, 배란, 사정, 수정을 위한 이동, 수정, 수정란의 자궁으로 이동, 착상 등으로 7단계로 이야기 할 수 있다.

 

피임은 엄밀한 의미로 7단계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말하며, 더욱 엄밀한 의미에서는 5단계, 즉 수정 이전까지 정자와 난자가 만나지 못하게 저지하는 방법을 말한다. 예를 들어 가족 계획이나 인구 억제 정책적인 면에서 피임이 주는 효과는 매우 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피임 기술 그 자체가 더 근원적이고 깊은 인간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이 제한된 이익이라는 것은 여전히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모호하고 불분명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위생학상, 우생학상, 미학상으로 볼 때 피임이 완전하다 하더라도 결코 완전한 피임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엄격히 말하면 피임과 낙태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피임과 낙태는 상호 인과 관계로 작용할 위험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피임 상태에서 한 단계 연장한 목적 실현의 방법이 낙태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곧 임부에게 해로운 임신이나 원치 않는 아이의 임신을 없애기 위한 방법으로써 낙태는 어떤 면에서 피임 실패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어쨌든 피임은 어떤 면에서 사람들이 책임 있는 부모로 행동하는 것을 가능하도록 하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비인격적이고 무책임한 성욕을 부추길 수도 있다. 결국 ‘제한된 선’이란 이렇게 항상 ‘남용’되기 쉬운 것이다. 

 

[월간빛, 2003년 2월호, 이창영 바오로 신부(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사무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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