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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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양심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제에 대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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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7 ㅣ No.432

양심적 병역 거부와 대체 복무제에 대한 이해

 

 

1. 병역 거부자들의 실태

 

타인을 살해하는 전투 행위와 그 준비 행위인 군사 훈련을 거부하는 사람을 병역 거부자라고 한다. 이웃집 사람을 총기로 죽이면 살인죄가 되는데 이웃 나라의 청년을 전투에서 살해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일일까? 종교인의 양심상 타인을 살해할 수 없다는 우리의 젊은이가 지금 1,500여 명 정도 교도소에 투옥되어 있다. 같은 이유로 처벌받은 사람은 현재까지 무려 만여 명에 이르며, 대부분이 여호와의 증인이었다. 최근에는 오태양 씨와 같은 불교 신자가 병역을 거부하였으며, 종교적인 이유를 넘어서 널리 윤리적이고 평화주의적 신념에 입각해서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과거에는 병역 거부자들에 대해 국가가 거듭 징집 영장을 발부하여 동일한 죄목으로 거듭 투옥하는 바람에 10년 가까이 감옥을 들락거린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참으로 비정한 처사였다. 정권의 성격에 따라 형량이 증감하다가 최근에 병역 거부자들이 병역법 위반으로 받는 처벌은 징역 1년 6개월로 규격화되었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병역 거부자들에 대해 사면 복권 조치를 취한 적이 없어서 병역 거부의 전력을 가진 사람들은 공직 취임은 말할 것도 없고 의과 대학을 졸업해도 의사가 될 수 없는 실정이라고 한다. 변변한 공직에 취임하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당한 이들은 실로 국가 안의 이방인이다. 병역을 거부하면 사회적으로 매장하겠다는 군사주의적 발상이 사회적 제도로 확실하게 정립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나라와 같이 병역 거부자를 가혹하게 처벌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오죽했으면 국제사면위원회에서 병역 거부를 이유로 투옥된 자를 양심수로 규정하겠는가! 다행스럽게도 지난해 초에 서울 지방 법원 판사 한 분이 '대체 복무를 마련하지 않는 현재의 병역법은 헌법에서 보장된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와 양립할 수 없다'며 위헌 심판을 제청하였다. 아직 이에 대하여 헌법재판소가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지 않았지만, 이를 전후해서 법원도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하여 상당히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학가 청년 학생들이 병역 거부자 지지 운동을 전개하자 김대중 전 대통령이 헌법재판관처럼 양심적 병역 거부는 허용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사법 당국의 법 적용 관행은 일시에 경색되면서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수형자들의 가석방 기준도 엄격해지는 등 씁쓸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를 대하는 판사들의 입장에도 상당한 편차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우려되는 것은 병역 거부권이 양심의 자유의 내용으로 옹호되고 있는 국제적인 인권 관행을 한결같이 도외시한다는 점이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게 단 한 사람의 판사도 무죄 판결을 내리지 못하는 현실을 볼 때 우리나라 법관의 양심이 국가주의적으로 과도하게 획일화되었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우리나라 인권 현실을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오랜 투쟁 끝에 탄생한 국가인권위원회는 국제 인권 동향과 우리 현실을 직시하고 민감하게 대응해야 함에도 이른바 '내부 입장'을 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병역 거부자들의 근본적인 고통에 대해서 책임 있는 해답을 제시하지 않고, 여호와의 증인들도 다른 종파 재소자와 마찬가지로 교도소에서 예배를 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소꿉장난 같은 수준의 권고 의견을 내놓았다. 이제 열린 감수성을 지닌 동료 시민과 동료 신앙인들에게 이 문제의 해결에 나서 주기를 촉구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2. 역사적으로 누가 병역을 거부했는가?

 

병역 거부와 관련해 서양인들이 우리에게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가톨릭과 개신교를 포함해서 기독교 신자들이 그렇게도 많고, 또 동족 간의 골육상쟁을 겪었는데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별 고민 없이 군대를 간다는 점, 그리고 양심적 병역 거부는 이단의 작풍이므로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꽤 있다는 점이다. 서양인들은 아마도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병역을 거부해야 하고, 최소한 병역 거부자들을 앞장서서 옹호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 일로 한국에서 종교와 평화의 관계, 종교와 군대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특히 각 교파들이 군대를 포교의 황금 어장으로 생각하는 사업적 발상 이외에 다른 진지한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 더럭 궁금해졌다.1) 병역 거부는 이단의 작풍이 아니라는 점부터 시작해야 하겠다. 병역 거부는 주로 종교적인 이유에서 시작되었다. 295년 병역을 거부했다가 로마 총독의 명에 따라 처형된 막시밀리아노는 병역 거부로 순교한 최초의 그리스도인이다. 이분은 나중에 성인으로 추대되었다.2) 그러나 종교와 국가가 결합하는 과정에서 불살생의 근본 불교가 호국 불교로 와전되듯이, 서구에서 그리스도교 평화 사상은 구차스러운 정전론(正戰論)으로 변모하였다. 정전론이 정당한 전쟁과 부당한 전쟁을 구분함으로써 전쟁을 제한하는 취지이니 평화를 추구하는 이론으로 평가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최초의 물꼬를 트기가 어렵지 이미 전쟁을 정당화하기 시작한 이상 미끄러운 언덕에서는 끝까지 미끄러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십자군 전쟁, 인디언 학살, 노예 사냥 등 침략 전쟁과 집단 학살마저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기 일쑤였다. 그리스도교 평화 사상은 오히려 기득권 정치 중심에서 소외된 일부 사제들이나 소수 종파들을 통해서 명맥이 유지되었다.

 

근대에 오면서 영국의 청교도 혁명에서 수평파들은 양심적 병역 거부를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로 발전시키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정치적인 대강인 인민 협약(1647년)에는 군복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우리 중 누구에 대해서도 군복무를 강요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에 반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대표자들이 군복무를 강요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제4조 제2항). 이러한 수평파(퀘이커 교도)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지도자 윌리암 펜과 함께 펜실베니아에 정착하였다. 1661년 매사추세츠 그리고 1673년 로드아일랜드 식민주가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하여 비무장 대체 복무를 인정하기 시작하였다.3) 펜실베니아 식민주는 1757년에 퀘이커 교도와 메노나이트파에게 군복무를 면제시키고, 대체 복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1757년 영국의 피트 내각은 병역 대행인에 대한 비용 대납을 조건으로 퀘이커 교도에게 병역을 면제하는 법을 제정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병역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은 19세기 후반에 미국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어떠한 기독교 종파가 현재에도 병역을 거부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히틀러 시대에 비추어 보면 메노나이트파, 여호와의 증인, 퀘이커교도, 왈드교도, 나사렛파, 재림파, 침례교도가 병역을 거부했다. 물론 그들 다수가 군형법 위반으로 가혹하게 탄압 받고 순교하였다는 사실에 이르면 신앙인으로서 저절로 경외심을 갖게 된다.

 

오늘날에는 병역 거부가 종교적인 사유에 국한되지 않는다.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인류의 평화를 진지하게 추구하는 그룹이 세상에는 많이 있다. 그래서 종교적 사유뿐만 아니라 인도적, 평화주의적, 윤리적, 철학적 이유에서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등장했다. 이러한 현상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된 후 국제 연합의 탄생 그리고 침략 전쟁을 부인하는 평화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확산되었다. 최근 자유화된 이후 병역 거부를 법제화한 동유럽 국가들은 병역 거부를 주로 종교적인 차원에 국한하지만, 서유럽 국가들은 앞서 말한 다양한 이유를 병역 거부의 사유로 인정한다. 이러한 차이는 인권의 발전 속도와 연관되지만 우리나라는 안타깝게도 아직 동유럽 국가군의 수준에도 이르지 못했다.

 

흥미로운 것은 모든 전쟁을 거부하는 경우 이외에 특정한 전쟁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는 다르게 취급된다. 온갖 전쟁을 거부하는 경우를 '절대적 거부'라고 한다면 특정한 전쟁만을 거부하는 경우를 '조건부 거부'라고 한다. 1960년대 이후 미국을 요동치게 했던 월남전 징집 거부 운동을 들 수 있다. 부당한 전쟁, 동족간 전쟁, 석유를 위한 전쟁, 핵전쟁 등에는 참여할 수 없다는 경우 등도 조건부 거부에 해당한다. 전통적인 병역 거부는 어떠한 경우에도 징집에 응하지 않겠다는 취지라면, 조건부 거부는 특정한(부당한)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정부에 대한 항의 또는 불복종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행위는 시민 불복종의 틀 안에서 정당화되기도 한다.

 

 

3. 양심이란 무엇인가?

 

작가 마크 트웨인은 미국 헌법에서 세 가지 귀중한 것으로 '언론의 자유', '양심의 자유', 마지막으로 '이를 행사하지 않는 신중함'을 꼽았다. 자유를 행사하지 않는 자에게 자유는 전면적으로 보장되지만, 자유를 진지하게 행사하려는 자가 있다면 법질서는 가만두지 않는다는 역설적인 상황을 재치 있게 표현한 것이다. 인간의 역사 이래로 실정법과 양심의 갈등은 항상 존재했다. 자기 양심의 결정을 지키기 위하여 법을 위반하고 생명을 잃은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며, 오늘날에도 자기 양심을 지키기 위하여 투옥된 자들이 매우 많다. 이를 양심수라고 한다. 그들을 정부가 어떻게 다루는가를 기준으로 그 국가의 문명적 수준을 판정할 수 있다.

 

우선 양심이 무엇인지 규명해 보자. 양심은 선악을 판별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의미한다. 양심은 인간의 표징이기 때문에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양심은 각인각색이어서 '양심 냉장고' 이야기처럼 단숨에 옳고 그름을 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지구상의 사람 수만큼의 많은 양심이 존재하고, 각 개인의 양심이 서로 다르므로 양심적 판단이나 행동에서도 근본적인 개인차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양심적 판단과 행위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병역 거부자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양심적"이라는 말부터 시비 붙는다. 군대 가지 않는 자가 양심적이면, 군대 간 자는 비양심적인가라고 수세적으로 반문한다. 나아가 가고 싶지 않은 이기적인 생각을 떨치고, 적을 살해함으로써 야기될 수 있는 양심상의 고통을 감수하고 군대에 가는 것이야말로 양심적이라며 공세를 취한다. 물론 자신의 양심을 희생하거나 자신의 목숨을 버려 조국을 지키는 것은 윤리적이다. 그러나 타인을 살해하지 않기 위해 병역을 거부하는 행위도 당연히 윤리적이다. 그것은 비겁한 행동이 아니라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형벌을 감수하고, 장래 사회적인 활동에서 발생하게 될 온갖 불이익을 감수하겠다는 결정이야말로 진지한 양심의 발로라고 믿는다.

 

혹자는 양심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은 좋지만 실정법을 위반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 법원도 줄기차게 병역을 거부하는 양심은 헌법이 보호하는 양심의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고 판결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조금 더 분명히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악법에 대한 복종을 설파하고 있지만, 어떤 법이 매우 사악한 경우에는 그 법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 의롭다. 병역법은 이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법이 꼭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법을 모든 사람에게 관철시킴으로써 합당하지 못한 경우가 있다. 병역법은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 병역 거부자의 행위는 당연히 병역법과 저촉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양심적 행위가 겉보기에는 실정법에 위반된다고 할지라도 더 높은 헌법 차원이나 도덕 규범의 차원에서는 정당화될 여지가 많다. 물론 양심만 둘러대면 온갖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유태인을 전멸시키는 것이 인류 평화에 기여한다는 양심적 판단에 따라 유태인을 가스실로 보내는 행위는 아무리 보아도 정당화 가능성이 전혀 없다. 결국 양심적 행위의 정당화 가능성을 판정하는 데에는 양심적 행위의 목적과 행동 방식, 수단이 어떤지를 차분히 따져 보아야 한다. 전쟁에서 타인을 살해하는 행위에 일체 관여하지 않겠다는 목적은 당연히 정당하다. 또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의 행동 방식이나 수단도 어떠한 폭력적인 활동도 수반하지 않고, 소극적인 부작위에 그치므로 그 방식 또한 정당하다고 본다. 따라서 그들의 행위가 군형법이나 병역법에 위반된다고 할지라도 그보다 높은 헌법 차원에서, 국제인권법4)의 차원에서 정당한 행위로 취급되어야 한다. 인간 살해를 목표로 한 군사 훈련을 거부하겠다는 양심이야말로 내용상으로도 보편화 가능한 양심의 단적인 예가 아닐까 생각한다.

 

 

4. 병역 거부자는 아무런 책무도 지지 않는가?

 

양심적 병역 거부 행위가 정당하다면 이제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은 국가나 공동체에 아무런 책무도 지지 않는가? 혹자는 병역 거부자들을 정체 불명의 양심을 핑계 삼아 남들 다하는 군복무를 하지 않으려 하고, 국가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타인의 희생 위에 무임 승차하려는 자들로 비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은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의 진의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병역 거부자들은 국제적으로 보편화된 대체 복무 제도를 도입해 줄 것을 정부에 촉구하고 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양심과 실정법의 갈등을 조화롭게 해소해야 하는데 오히려 양심적 병역 거부자 그룹에서 바람직한 대체 복무법을 모색하고 있으니 역할이 뒤바뀐 것이다.

 

여기서는 모범적인 대체 복무 제도를 운영하는 독일의 사례를 간단히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5) 서독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패전국으로서 헌법전에 침략 전쟁의 부인, 국제 법규의 존중, 양심적 병역 거부권을 명문으로 규정함으로써 평화주의 정신을 폭넓게 구현하였다. 그러나 동서 대결 구도가 강화되면서 서독은 재무장의 길로 접어들었고 징병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헌법상 병역 거부권과 병역 의무의 충돌을 조종하기 위하여 대체 복무법을 제정하면서 군복무 이외의 대체 복무제를 도입하였다. 대체 복무제는 병역 거부자들이 군대 조직 바깥에서 군복무 기간에 상응하는 기간 동안 공공적이고 사회적인 성격을 지닌 업무에 종사하도록 하는 제도이다.6) 독일에서의 대체 복무자들은 주로 환자 운송, 이동 사회 봉사, 병원 근무, 장애인 보호, 장애 아동 보호, 환경 보호 영역에서 복무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공익 근무 요원이나 연구소, 산업체, 해외 봉사 등 각종 전문 요원들도 비슷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래서 국방부는 더러는 우리나라에도 대체 복무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순수한 대체 복무와 국방부식 대체 복무 간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순수한 대체 복무는 어떠한 경우에도 군사 훈련을 배제하고 있다는 부분이다. 단순화시켜서 말하자면 병역 거부자들은 병역법상의 공익 근무나 전문 요원 활동에서 군사 훈련만 배제해 달라는 것이다.7) 정부 당국은 최소한 이 정도의 요구에는 응해 주어야 한다.

 

필자는 현재 병역 거부자 지원 모임에서 대체 복무 법안을 마련하는 일에 관여하고 있는데, 대체 복무 법안 토론회에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전부 대체 복무를 하겠다고 나서면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주변 정세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대체 복무제를 도입하면 군대 갈 사람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병역 의무를 양심상의 이유로 거부하는 사람과 이를 회피하려는 사람을 어떻게 감별할 수 있느냐의 문제도 제기된다. 우선 양심을 감별하려는 시도는 양심의 자유를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처사가 될 것이다. 결국 양심적 결정의 진지성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대체 복무 기간을 어느 정도 장기간으로 설정함으로써 대체 복무 선택의 문턱을 좀 높이는 것이 한 방법이다. 이웃 나라 대만은 최근에 노동 강도가 상당히 센 대체 복무역을 도입하여 병역 의무자로 하여금 정원 범위 내에서 대체 복무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한편 기초 군사 훈련조차 거부하는 이른바 진성 병역 거부자들에게는 더 장기간의 대체 복무를 이행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시행 2년차에 대체 복무 정원을 다 채우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한다.8) 이러한 상황은 우리나라에 적합한 제도를 마련하는 데에 좋은 선례가 될 것이다. 필자는 대체 복무제를 반드시 도입해야 한다고 보며, 한국의 안보에 해를 주지 않는 정도의 합리적인 제도를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국가 안보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에 의존해 어떠한 개선책도 마련하지 않는 것은 대단히 가혹한 처사이다. 독일에 대항하여 제1차 세계 대전을 주도한 영국은 전쟁의 와중에도 대체 복무법을 제정하였다. 국가 안보는 개인의 인권을 극단적으로 침해하지 않는 데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군복무 여부로 공민권을 판정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감옥에 가둔다 해서 국방에 도움이 될 리 없는 병역 거부자를 감옥에 계속 방치하는 전체주의적 작풍은 반드시 시정해야 한다고 본다. 이제는 가톨릭뿐만 아니라 종교계가 연대해서 책임 있는 대안을 밀고 나가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대체 복무법을 앞장서서 만드는 국회 의원이 있으면 낙선시키지 않겠다고 메일을 띄우는 것도 인권의 대의에 동참하는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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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특히 2002년 말에 개정된 병역법에는 양심적 병역 거부와 같은 중차대한 문제에 대해 종교계의 적극적인 입장을 반영해야 하는데도 이제 소수 종단도 군종 장교를 파견함으로써 황금 어장에 배를 띄우는 것으로 그쳤다.

 

2) 김두식, "기독교도 양심적 병역 거부했다", [한겨레 21](2001.7. 25.) 제369호. 이 글은 양심적 병역 거부가 이단 종파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을 교정한다. 그것은 역으로 우리 사회에서 인구의 다수를 점하는 종교들이 국가 종교화되었다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3) 대체 복무 제도의 역사로 보자면 대체 복무는 초기에는 군대 내에서 비무장 복무(간호병 등)를 하다가, 오늘날에는 군대 바깥에서 사회 봉사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4) 유엔인권위원회는 국제자유권규약(ICCPR) 제18조 상의 양심 사상 종교의 자유에 양심적 병역 거부권이 포함된다고 판단하였으며, 병역 거부자에게 형벌 대신에 적절한 대체 복무를 도입하라고 지속적으로 촉구하였다.

 

5) 모범적인 독일의 대체 복무 제도에 대해서는 이재승, "독일에서의 병역 거부와 민간 봉사", 민주주의법학연구회(편), [민주법학] 20호(2001년) 참조.

 

6) 실제로 병역 기간은 9개월이고, 대체 복무 기간은 10개월이다.

 

7) 독일에서는 대체 복무자는 기초 군사 훈련 대신에 대체 복무 학교에서 대체 복무에 필요한 소양 교육을 받는다. 독일에서는 병역 의무 이행 대상자 중 3분의 1 정도가 대체 복무를 수행하고 있다.

 

8) 이에 대해 자세한 것은 한홍구, "타이완 대체 복무 참관 보고서", [황해문화] 32호(2001년 가을 호) 참조.

 

[사목, 2003년 3월호, 이재승(국민대학교 교수, 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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