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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인간 존엄성에 관한 신학적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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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7 ㅣ No.366

인간존엄성에 관한 신학적 성찰


- 생명윤리연구회 제2회 세미나 -

 

 

우리나라 헌법 제10조에 분명하게 인간 존엄성에 대해서 규정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 모든 헌법도 예외는 아니라고 봅니다. 유엔 인권선언도 분명히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존엄성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지만 왜 인간이 존엄한지 그 근거는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타고 태어나는 것(inherent dignity)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헌법학자 김철수는 인간의 존엄성은 천부적(天賦的)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달리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를 제시한 사례를 저로서는 알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다음과 같이 성서를 바탕으로 인간,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제시합니다.

 

 

1)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이기에 인간은 존엄성을 지닌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우선 인간의 존엄성을 창세 1,26-27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근거 두고 있습니다. 구약의 창세기는, 특히 제관계 문헌(1,1 - 2,4a)은 인간을 창조의 절정으로 다루고 있고, 야휘스트계 문헌(2,4b - 2,25)은 인간을 모든 창조의 중심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는 데 매우 신중하셨다는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라는 표현에서 그 신중성을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라는 복수형은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지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데 대다수의 신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당시 근동 지방에서 사안이 중대한 만큼 왕이 홀로 결정하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어전회의를 통해서 결정하였다는 뜻으로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던 형식을 빌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 창조는 신중하게 결정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무엇보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기 때문에 존엄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본디 히브리어는 Selem과 Demut 두 가지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Selem은 조각이나 성상처럼 구체적인 닮은꼴을 드러내는 보통 명사로서 '모습' 또는 '모상'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Demut란 '닮음' '비슷함', 또는 '유사함'으로 번역될 수 있는 추상적 명사입니다. 아담의 아들 셋이 아담을 닮았다고 표현할 때에도 이 두 가지 용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창세 5,3). 그러니까 인간이 하느님을 닮은 것은 마치 아담의 아들 셋이 그의 아버지 아담을 닮은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과연 인간이 하느님의 무엇을 닮았는가에 대해서는 답변이 쉽지 않습니다. 셋이 아버지 아담의 무엇을 닮았는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성서 자체도 인간이 하느님과 닮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신학자들 간에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리스 철학자 Philo(필로)는 인간의 영적 능력이 하느님을 닮은 것이라고 말하였고, 성 아우구스티노는 영혼의 능력들, 즉 기억과 지성과 사랑이야말로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밖에도 인격성과 이해, 자유 의지, 자아 의식, 지성, 영적 실존, 영적 우월성 등을 거론하였습니다. 심지어 H. Gunkel(궁켈)이라는 신학자는 '형상과 외모'에 있어서 하느님을 닮았다고 주장하고, L. Kohler(쾰러)는 직립 보행하는 외양이 하느님과 닮았다고까지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구약성서는 인간을 구체적으로 육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구별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이 비판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오늘날 우리 모두가 수긍할만하고 받아들여야 할 입장은 K. Barth(칼 바르트)의 견해입니다. 그에 의하면, 하느님의 모상이란 "인간이 존재하는 혹은 행하는 그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자신이 바로 그렇게 하느님의 창조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인간은 만일 그가 하느님의 모습, 모상이 아니라면 인간이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바로 그가 인간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모습, 하느님의 모상인 것이다".

 

우리는 이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의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것이 인간의 어떤 특별한 자질을 뜻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자질이 부족하거나 결여된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 부족하거나 결여된 인간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가령 인간의 지성이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정의하면, 지성 뛰어난 사람은 하느님을 뛰어나게 닮은 것이고, 지성의 능력을 잃은 치매 환자나, 식물인간은 인간의 모상을 상실한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도 상실된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과연 어떤 부분에서 하느님을 닮았는지 규정하는 일은 계속 추구되어야할 연구분야입니다만, 인간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존재로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비록 지적 능력이 약하거나 결여되어 있거나, 남자거나 여자거나, 어른이거나 어린이거나 태아거나 모두가 인간인 이상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나고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셋이 비록 장애자거나 정신적인 지진아일지라도 여전히 아담의 아들로서 분명히 그를 닮은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교황청 장애인들의 대희년 준비 위원회는 이와 동일한 입장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존재인 우리 인간은 비록 장애자들일지라도 모든 외적인 모습을 초월하여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영예와 영광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물론 우리는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의 존엄성을 주장하기에 앞서, 그리스 철학가 크세노파네스의 예리한 비판에 우리들의 입장을 성찰해보아야 합니다. 그는 일찍이 신화 속에 나타난 신의 모습을 보고 인간이 말을 할 줄 알고 생각할 줄 아니까 신의 모습을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낸 것이 아니냐, 만일 짐승이 말을 할 줄 알고, 그림을 그릴 줄 알았으면 신의 모습을 짐승처럼 그려냈을 것이 아니냐고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말을 할 줄 아니까 '인간이 존엄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지, 혹 소나 말이 말을 할 줄 알면 '소는 존엄하다' '말은 존엄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성서는 하느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성서신학에서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하느님이 사람처럼 말씀하시고, 걷고, 오른 손을 내밀고, 분노하고, 힘쎈 팔을 펼치시어 도움도 주고 벌도 내리신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성서가 근본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은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고 만져질 수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성서는 이러한 비가시성을 '하느님을 뵙게되면 죽게된다'는 식으로 자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전 신학의 전통은 이러한 하느님의 초월성과 그 초월성으로 인한 인간의 하느님 불가해성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고전신학의 이러한 통찰을 집약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만일 네가 이해했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이해할 수 있었다면 당신은 하느님이 아닌 것을 이해한 것이다. 만일 당신이 부분적으로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면, 당신의 생각에 속았을 뿐이다" 이렇게 비가시성과 초월성을 하느님의 특성으로 주장하면서도, 인간에게 체험된 하느님은 인간의 방식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또 인간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인간동형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창세기는 무엇보다 인간 창조는 "참 좋았다"(창세 1,31)라고 평가되고 있음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참'이라는 부사를 통하여 다른 창조물보다 인간 창조가 하느님에게 더욱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1,27)는 말씀은 오늘날 남자와 여자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해석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에게 있어서 남성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여성은 남상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1고린 11,7-12)고 이해되고 있었지만, 오늘날 여성에게는 하느님의 모습이 전혀 없다거나 또는 여성에게는 남성보다는 하느님의 모상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남성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만큼 여성도 하느님의 모습을 창조된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남녀 구별 없이 어떤 인간도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점을 확인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병자, 불구자, 노인, 어린이를 상관하지 않고, 인간인한 존엄성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존엄성을 지닌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교 인간학은 그리스도교 계시와 가르침의 절정이신 예수님이 이해한 인간과 그 인간의 존엄성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는 철저하게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소중하게 여기셨던 분이셨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는 그분의 탄생도 인간 사랑을 위한 것이고, 그분의 십자가 죽음도 인간 사랑을 위한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1요한 4,9-10). 그의 삶 전체가 인간 사랑으로 일관하셨던 예수님에 의하면,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표현은 창세기의 '하느님의 모상'이란 표현을 더욱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내 줍니다. '자녀'들이란 바로 '아버지'를 닮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역시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존재이며, 하느님이 보시기에 매우 좋게 창조된 존재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마태 19,4-7). 인간의 하느님과의 관계는 단순히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와 자녀라는 친밀한 인격적 관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에게 인간이면 누구나 예외 없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인간 이해가 일차적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의 아버지이시라는 데 옳은 사람, 옳지 못한 사람,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의 구별도 없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남자와 여자의 구별도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창조주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과 또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리라고 하신 말씀을 아직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짝 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하고 대답하셨다"(마태 19,4-6). 오히려 당시 대접받지 못한 여성들에게 극히 이례적인 존경심을 가지고 대하였습니다(루가 7,13-15; 36-50; 8,43-48; 요한 4,7-26 참조). 어린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애정을 가지고 그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마태 11,26; 18,1-5; 마르 10,13-16; 루가 8,42. 49-56; 9,37-42). 병자나 소외된 인간일수록, "병자에게 의사"(마르 2,17)가 필요하듯이 자신은 그들을 위해 필요한 자로 처신하셨습니다. "보잘것없는 사람" 어느 하나라도 업신여기는 일은 간과될 수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하늘에 있는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두어라"(마태 18,10).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라도 악에로 인도하는 잘못은 엄청나고, 그 책임을 모면할 수 없다는 점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나를 믿는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사람을 죄짓게 하는 이 세상은 참으로 불행하다"(마태 18,6-7). 반대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베푼 선행은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한 상급이 약속됩니다(마태 25,34-40 참조). 예수님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 두실 만큼 귀한 존재였습니다(마태 10,30). 예수가 지적한 '보잘것없는 사람'이란 누구를 지시하는 것입니까? 사람으로 취급하기를 꺼려하는 존재들일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으로 규정하고 싶지 않는 존재를 지시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낙태시키고 싶은 태아, 인간으로 규정하고 싶은 배아의 생명도 인간인한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고 봅니다.

 

 

3) 인간이 되신 하느님, 즉 육화(肉化)란 하느님의 인간 긍정이다. 즉 하느님이 인간을 긍정하셨기 때문에 존엄하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으로 고백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핵심 신앙에 속합니다. 나자렛 예수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를 두고 육화, 또는 강생(降生)이라고 합니다. 육화 사건은 그 자체로 바로 하느님이 사람이 되실 만큼 인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셨다는 것을 최고로 입증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인간으로 낮추심은 바로 인간을 하느님의 위치로 높이심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신학자 F. Varillon(프랑수아 바리용)은 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이 "결국 당신은 무엇을 믿는가?"라는 질문에 단 두 줄로 대답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Deus homo factus est ut homo fieret Deus)라는 문장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육화와 인간의 신화(神化)는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합니다. 인간이란 바로 신화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입니다. K. Rahner(칼 라너)에게도 인간은 "초월의 존재"이며, 하느님은 "인간초월의 지향점"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 내지 근본적인 품위는 "인간이 시공의 역사 안에 살면서 정신 능력으로서 자신을 파악하고, 자유를 행사하여 자기를 정립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에 스스로를 - 무한하신 하느님과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상통을 향해서 - 개방할 수 있고 또 개방하여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초월적 존재이신 하느님의 대화 상대자로서 인간을 보았습니다. 최근 교황의 회칙 [생명의 복음]은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기 때문에 인간 생명이 존엄성을 지닌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은 현세적 존재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충만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충만한 생명이란 바로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초자연적 소명이 지닌 숭고함은, 인간 생명이 현세적 측면 안에서까지도 위대함과 측량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게 된 것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신" 무한한 하느님의 사랑에 근거한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4) 인간 생명의 시작에 관하여

 

오늘날 생명을 다루는 과학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언제부터 인간이냐는 질문입니다. 물론 교회 교도권은 '난자가 수정되는 순간부터' 하나의 생명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신학이란 기원의 시점을 묻는 과학과 역사와 다릅니다. 신학은 그 근원과 궁극적 의미를 추구합니다. 생명이 어느 시점에 시작되느냐? 쉽지 않은 질문이고 더욱 쉽지 않은 것이 그 답변입니다만 그 문제는 과학이 규명해야할 과제입니다.

 

김인경 교수는 국내에서 유전공학 관련 학자들이 "인간 복제"라는 목적으로 시행되는 모든 실험은 금지되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생명 복제 기술의 엄청난 의학적 유용성 때문에 수정 이후 14일 이내의 수정란의 연구는 허용되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거론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수정 후 14일 이내의 착상 전 수정란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일부 유전 공학자들은 연구를 위해서 주머니배가 되기 전까지의 접합체는 인간 생명이 아니라고 규정하려는 듯 합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처럼, 의학자들이나 생물학자들이 모여서 단순히 자신들의 연구 목적이나, 실험의 유용성 때문에 민주주의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서 투표로 결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재판의 판결을 통해서 결정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뇌사인지, 심장사인지 투표로 결정할 수 없듯이, 생명의 시작도 수정 후 14일 이후인지 그 이전인지 투표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멈춘 심장마비 이전에는 죽음으로 규정할 수 없고, 수정 후 14일 이전은 생명이 아니라고 법적 선언을 통해서, 혹은 투표의 결과를 통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기 전에는 생명으로 다루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의 권한에 속한 생명을 함부로 다루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수정 후 14일 이전에는 분명히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를 필요로 합니다. 뇌사로써 심장은 뛰고 있어도 그것이 생명체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 줄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필요합니다. 그 확실한 근거가 있기 전에는 우리는 생명을 함부로 다루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교도권은 인간 생명이 생겨나는 첫 순간에 인격이 존재한다는 입장을 거듭 천명합니다. "인간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한 인격으로서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그 순간부터 그가 한 인격체로서 지닌 권리를 인정해야 하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무고한 인간 존재가 지닌 생명에 대해 침해할 수 없는 권리입니다."

 

교도권의 문헌들은 성서가 생명의 그 시점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모든 인간 생명은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부터 하느님께 속한 신성 불가침의 존재임을 표현하는 성서적 표현을 만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너를 점지해 주기 전에 나는 너를 뽑아 세웠다."(예레 1,5) "저는 태중에서부터 당신께 의지하여 왔고, 제 어미 뱃속에서부터 당신은 나의 힘이었으니 나는 언제나 당신을 찬양합니다"(시편 71,6). "당신은 나를 모태에서 나게 하시고 어머니 젖가슴에 안겨 주신 분, 날 때부터 이 몸은 당신께 맡겨진 몸, 당신은 모태에서부터 나의 하느님이시오니 멀리하지 마옵소서"(시편 71,6). "이스라엘 가문에서 살아 남은 자들아, 들어라. 너희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나는 너희를 업고 다녔다. 모태에서 떨어질 때부터 안고 다녔다"(이사 46,3).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받았을 때에 그의 뱃속에 든 아기가 뛰놀았다"(루가 1,41).

 

이런 배경에서 교황청 생명학술원은 [인간 복제에 관한 성찰](1997)에서 배아와 태아에 대한 실험, 인간 복제를 비도덕적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나 그러한 실험은 비도덕적이다. 그것은 인간의 육체를(여러 부품으로 구성된 하나의 기계로 명백히 여기고) 단순한 연구 도구로서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육체는 인간 개인의존엄과 인격적 본질을 구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부분이다. 게다가 복제 실험에 쓸 난자를 얻고자 여성을 이용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복제 인간의 경우에서도 그것이 비도덕적인 까닭은 배아 단계라도 그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입장에서 인간과 그 존엄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하느님의 자녀'이다. 하느님의 대화와 친교의 대상자로서 하느님 친히 인간이 되실 정도로 하느님께로부터 긍정되고 있는 존재이며, 하느님의 육화는 바로 인간의 신화를 목표로 하는 만큼, 인간은 신화의 가능성을 지닌 소중한 존재이다.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 비록 태중의 배아일지라도 사람인한 예외가 아니다."

 

[조규만 신부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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