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윤리] 있는 그대로의 나를: 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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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245

있는 그대로의 나를 - 죄에 대하여

 

 

1. 죄에 대한 성찰

 

사람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사람은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고, 어떻게 해야 그 행복을 놓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복음서의 행복 선언(마태 5,3-12 참조)은 행복의 정의를 물질의 풍요와 교환 정의, 보복 또는 복수 정의에 두지 않고 마음의 평화에 두고 있다. 죄를 짓고 불안해하고 부끄러워하는 상태가 아니라 하느님 말씀에 따라 진리 안에서 진실한 삶을 살아 양심이 평온한 상태가 행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행복이 무엇 때문에 위협을 받고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인가. 바로 죄라는 걸림돌 때문이다. 그러면 도대체 죄는 무엇이고 그 죄를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으며, 용서받은 후 내 삶에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이 문제는 사람이 평생 풀어 가야 할 존재론적 과제이다. 왜냐하면 내 존재와 죄는 떼어놓을 수 없는 숙명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우선 죄의 성격은 인류의 시조(始祖)인 아담과 하와가 처음으로 저지른 원죄에서 찾아야 한다. 곧 자기 분수와 한계를 넘는 데서 비롯하여 그것이 욕심과 오만과 교만과 독선으로 꼬리를 물고 들어와 결국 하느님과 인간 관계의 질서를 훼손시키거나 파괴시키는 것이 바로 죄이다. 죄라는 말 풀이가 그렇듯 죄는 올바로 볼 것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죄란 소극적으로 십계명만을 들추어내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이며 총체적인 차원에서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그 모든 것을 정직하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탓이오'라는 의미를 공동체 안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제까지 나름대로 좋은 일도 많이 해오고 있지만 본의 아니게 이 세상 사람들에게, 피조물에게 피해를 준 것들이 엄연히 남아 있다는 사실을 무릎 꿇고 성찰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더 잘 해보겠다는 겸손한 의지를 키우면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바라볼 수 있고 거기에서 회개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껴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의 준비가 됨으로 해서 내가 누구 앞에서 내 죄를 고백해야 되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고 죄의 고백을 더 효과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죄의 고백은 자비로우신 하느님 무릎에 앉아 나의 존재를 솔직히 털어놓는 것이다. 여기에는 채찍과 공포가 아니라 아버지의 따스한 사랑이 나를 감싸주고 있다. 탕자의 말씀이라든지(루가 15,11-32 참조), 잃었던 어린 양의 비유라든지(루가 15,1-7; 마태 18,12-14 참조), 죄인들과 어울리시면서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해 주시는 주님의 모습 등은 이를 입증하고 있다. 

 

또한 나는 적어도 만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있는 피조물 앞에서 나를 있는 그대로 펼쳐 보여야 한다. 그것은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일도 아니고 나를 창피하게 만드는 부끄러움도 아니다. 오히려 인격을 성숙시킬 수 있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고 백태가 낀 시야를 선명하게 닦아 줌으로써 다른 이를 정성껏 받아들일 수 있는 잔잔한 힘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기꺼이, 철저하게 받아들이는 용기다. 남을 판단하기에 앞서 내 자신의 잘못부터 바라볼 수 있는 넉넉함과 겸허가 필요하다. 나도 잘못할 수 있다는 죄의 가능성, 나도 너도 잘못할 수 있다는 죄의 보편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죄 없는 자가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씩 물러갔다는 내용(요한 8,9 참조)이나 사도 바오로께서 내가 원하지도 않는 죄악이 내 마음속에서 들끓고 있다는 고백(로마 7,23 참조)을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나는 왜 이다지도 비굴하였는가. 무엇이 내 양심에 고삐를 잡고 있었는가. 인간은 그저 한낱 인간일 따름이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덤으로 받고 살아가는 것임을 미처 몰랐더냐. 

 

 

2. 죄의 고백

 

이제 이러한 생각을 차분하게 정리한 다음에 고해소 문을 두드려야 한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이 많다는 바오로 성인의 신앙 체험을 되새기며 말이다(로마 5, 20 참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두렵다는 것은 자신을 그만큼 포장하는 것이며 자신을 그만큼 불행하게 감금하는 행위이다. 잘못을 숨긴다 하여 그 잘못이 증발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삶 전체를 억누르는 것이며 그래서 매사에 짜증과 불만으로 활기를 감소시키는 것은 틀림없다. 우리는 고해소에 들어가서 성호를 그으며 주님께 고백의 용기와 은총을 구해야 한다. 세상 삶 안에서 인간적인 약점으로 저지른 죄에 대해 지나치게 상세한 고백은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억나는 죄는 낱낱이 고백해야 한다. 물론 죄에 대한 충분한 성찰과 죄의 성립 요건이 갖추어진 경우에 말이다. '사는 것이 다 죄'라든지 '알아서 용서해 주십시오.' 등 무성의한 고백은 고해성사의 근본 목적에서 멀다고 볼 수 있다. 고백은 뼈를 깎는 아픔으로 풀어가야 한다. 무지의 성사(?)라는 것이 있다지만 내가 내 죄를 고백한다는 의식이 중요하다. 내가 원고이고 피고라는 고해성사의 기본 틀을 기억해야 한다. 반쪽 웃음으로 고백한다든지 자신의 삶을 한탄하는 식의 고백은 고해성사 후 삶의 변화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고백은 가슴을 치면서 앞으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백을 통하여 나에게 무슨 득이 있는가. 무엇보다 남을 이해하고 남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용서란 망각이 아니라 더욱 함께하는 삶을 의미한다. 손에 손을 다시 잡고 가슴과 가슴을 다시 맞대고 서로의 마음을 쓰다듬는 인간 최고의 엄숙함이다. 그래서 이해와 용서는 서로가 생산적인 삶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눈물겨운 사랑인 것이다. 

 

 

3.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삶

 

이제 실질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고해성사 후에 삶의 변화를 어디에서부터 접근하느냐는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위해서'라기보다는 '함께한다'는 것이 더욱 매력적이다. 함께한다는 것은 눈 높이를 같이 맞춘다는 것이다. 따라서 너와 나의 잘못도 공유한다는 뜻이다. 하루의 삶에서 몇 번쯤은 자신을 돌아보고, 특히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십자고상 앞에서 반성의 시간을 넉넉히 갖도록 하자. 야고보 사도의 말씀, '내게 주어진 시간을 갖고 살아가는 인생인데'(야고 4,15 참조)를 기억하며 말이다. 오늘 하루 내가 잘한 것과 잘못한 것에 대한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보는 것도 바람직하다. 절대 가치를 추구할 결심을 갖고 삶 자체를 긍정적으로 끌어안으며 살고자 하는 의지가 매우 중요하다. 그럼으로써 궂은 일에 특별히 자진해서 찾아다니는 일(연도 바치기, 불우 이웃 돕기, 냉담 신자 찾아보기 등)에 성실할 수 있는 것이고 바로 그것이 죄를 지을 시간과 기회를 줄이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또한 죄의 속성이란 한 번 죄를 짓기 시작하면 반복해서 짓게 되는 것이기에, 나쁜 생각이 들 때에는 얼른 생각을 바꾸어 상대방을 위한 화살 기도를 한다면 죄를 짓지 않는 예방책이 될 것이다. 이렇게 반복되는 삶의 과정에서 사람은 죄스러운 자신의 실존에서 구원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듯이, 진흙 속에 사는 미꾸라지가 자신의 몸에는 진흙을 묻히지 않듯이 혼탁한 이 세상이지만 우리는 얼마든지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께 대한 가슴이 메이는 감격과 감사를, 그리고 나와 만나는 이들과 함께 산다는 공동체 의식을 깨쳐 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서로, 서로의 얼굴을 눈여겨보자. 우리가 한 세상 살면 얼마나 산다고. 사랑만 하다가 죽어도 한스러운 인생인데 괜스레 아웅다웅 미워할 필요가 있을까. 사람은 알고 보면 다 불쌍하고 그래서 더욱 서로 보살펴 주어야 하는 소명 의식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구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 의도적이고 계획적이 아니라면 허공 속에서 그저 감정 대립으로 생기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 다음에는 남에게 탓을 돌리려는 습관을 억제해야 한다. 남녀가 열렬히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고, 신혼 초에는 '당신 없이는 못살겠다.'고 하다가 차츰 시간이 지나면 '당신 때문에 도저히 못살겠다.'며 밀쳐 버리는 예를 얼마나 보아 왔던가. 유행가 가락에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서로의 관계에서 그 사소한 점 하나가 문제가 되어 등을 돌리고 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움, 원한이라는 괴물도 알고 보면 별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토록 나를 괴롭히는 그 점 하나를 용감하게 떼어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내 잣대로 남을 판단하는 습관을 버리고 나도 공범이라는 사실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가 늘 멈칫하는 부분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가 아닌가. 여기서 '용서한다'는 내용을 '잊는다'는 의미와 혼용해서는 안 된다. 용서한다는 것은 상대방과 함께 서로 나은 삶을 살도록 함께 노력하자는 의지 행위이지만, 잊는다는 것은 내 자신이 일방적으로 편안한 마음을 갖기 위한 감정 행위이다. 따라서 용서한다는 것은 나와 너를 포함하는 공동체적 참회 행위이다. 그러므로 내가 마음 평온하게,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 지상에서 죄악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천국으로 함께 가기 위하여 용서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과 상대방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 안에서 조심스레 끌어올려야 할 사랑의 행위이다. 이러한 관점들을 옆에 두고 다음과 같은 말을 떠올려 보자. '죽음을 생각하면 인생이 더욱 소중하고 헤어질 것을 생각하면 만남이 더 소중하다.'는 말은 서로의 만남이 그토록 유일무이한 인연일진대 우리 서로 흐트러지지 않게 살자는 뜻이다. 언젠가는 서로 헤어지는 숙명을 지녔기에 함께 사는 동안 하느님 자비 안에서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며 치유하자는 것이다. 

 

결국 죄 문제는 나를 어떻게 나답게, 곧 하느님 모습을 닮은 나로서 죽음 앞에서 후회 없이 살았다는 인생 고백을 예견하는 것과 직결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답다는 것은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이며,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은 내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행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곧 하느님께서 나를 창조하실 때, 나에게 불어넣어 주신 사랑의 얼을 띠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에서 가치의 우선 순위에 주력해야 되고 선도 행하고 악도 행한다는 이중적, 모순적 논리가 아닌 선행으로 악을 쳐 이길 수 있다는 순수 윤리 논리에 철저히 순응해야 한다. 

 

 

4. 맺는 말

 

죄는 생각과 말과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곧 죄의 성격은 육체와 정신과 영혼의 일체 안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죄를 이러한 합일체인 인격과 분리시켜 논하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육체와 정신을 이원론으로 취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죄란 나와 만나고 대화하는 공동체의 질서와 관계를 맺기 마련이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공동체의 질서를 원하고 바람직하게 유지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죄를 지음으로써 공동체의 질서가 훼손되고 파괴된다는 점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이기에 참고 견디겠다는 인내심이 필요한 것이고, 자그마하게 보이는 인간 관계도 소중히 여기는 심성을 키워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나아가서 나의 인격을 좀더 아름다운 일에 사용하도록 노력하는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보지 못하는 이, 듣지 못하는 이, 서지 못하는 이를 대신해서 감히 나의 한 부분을 채움으로써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모적인 욕심에서 벗어나고, 험담을 피하며 칭찬에 재미를 붙이고 선행에 자신을 길들여야 한다. 죄에 찌들었던 인격보다는 죄를 피하려고 노력했던 인격을 생의 마지막에 내 육신 생명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기증할 수 있다면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아무튼 우리 삶에서 어떻게 하면 죄를 덜 지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우리 인간이 평생 동안 발버둥치며 풀어 나가야 할 과제이다. 여기에는 물론 종말 신앙과 부활 신앙이 밑받침을 해 주고 있지만 그 실천 방안에 대해서는 시대와 문화의 조명 속에서 계속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사목, 1999년 6월호, 정인상(인천교구 송도 천주교회 주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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