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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생명의 문화: 알 권리와 모를 권리 그리고 사생활 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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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4-19 ㅣ No.641

[생명의 문화] 알 권리와 모를 권리 그리고 사생활 보호

 

 

2008년 7월 31일, 헌법재판소는 태아의 성별을 임산부나 가족에게 알려주는 행위를 금지하는 의료법 조항(의료법 제20조 2항)이 헌법에 불합치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판결 이유는 "임신 후반기까지 성감별 금지는 의료인의 직업 활동 자유와 태아 부모의 알권리를 지나치게 제한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 판결에 대해서 의료계는 대체로 환영했고, 종교계와 생명윤리학자들은 이번 헌재결정으로 앞으로 낙태가 더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했다.

 

그 후 보건복지가족부는 대한의사협회 대표와 대한산부인과 의사회 대표, 그리고 종교계 및 생명윤리학계 대표를 초청하여 이 조항개정과 관련한 회의를 개최했다.

 

필자도 이 회의에 초청받고 의견을 제시했다. 이 회의에서 의료계는 알권리를 내세우면서 성감별금지를 임신기간에 관계없이 전면 해제하거나 임신중절수술이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임신 28주 이후에는 성감별을 허용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필자는 태아의 생명보호가 알 권리나 직업의 자유보다 더 고귀한 가치이므로 부모가 원하는 성별이 아니기 때문에 생명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행위가 있어서는 안 되며, 태아의 성감별을 하지 않는 것이 태아의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며, 산부인과 의사로 하여금 '병아리 성감별사'를 연상시키는 인권유린을 자행하는 일이 있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태아 성감별 인권 유린 자행

 

그리고 출산 전 태아의 성을 알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내 질문에 대해, "궁금해서", "호기심에서", "아기의 출산에 대비한 준비물을 마련하기 위해"라는 대답을 들었다. 도대체 호기심을 채우려다가 때로는 사생활을 침범하거나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기도 하고, 심지어 살인을 범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묵과할 수 없다.

 

'유럽생명윤리협약'은 "누구나 자기의 건강과 관련된 정보와 프라이버시 존중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10조 1항)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또 이 협약의 추가의정서에서는 환자의 정보 비밀유지를 회원국들이 법으로 보호할 것을 강화하고 있다(추가의정서 25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알권리 못지않게 '모를 권리'(right not to know)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당사자 권익에 손상을 줄 수도 있는 정보를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본인에게조차 모르게 해야 하는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환자는 자기의 건강과 관련된 정보에 관해서 아는 것을 원하지 않을 이유를 가질 수 있으며, 이러한 소원은 준수돼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태아의 진단결과가 알려지면, 태아의 생명권이 위협을 받을 위험이 있는 정보는 그 부모조차도 모를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배아보호법'이 제정되었고, 한국의료법 20조에서 태아 성감별 고지를 금지한 것도 태아를 보호하기 위해서 제정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얼마 전에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살인혐의자가 검거됐다. 범인이 어떻게 피해자들을 살인했는가를 확증하기 위해 경찰은 검사의 지휘 아래 현장검증을 실시하는 것은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혐의자 또는 범인이 범행 장소에서 구체적으로 그 잔혹한 범행과정을 일일이 다 시연하는 광경을 피해자 가족 뿐만 아니라 수백 명의 관중이 볼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텔레비전으로 전국에 이를 방영함으로써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범행과정을 다 볼 수 있게 하고 심지어 인민재판을 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비윤리적이며, 모방범죄를 조장할 위험도 있다. 범행을 미워해도 범인을 저주하거나 미워할 권리가 우리에겐 없다.

 

 

사생활 보호 받아야 할 권리

 

수사기관원 아닌 사람들이, 그 범행과 무관한 사람들이 범행의 일체과정을 세세하게 알 권리가 있는가? 정신병자의 비상식적 소행을 일일이 알권리가 있는가? 한마디로 몰라도 되는 일이 세상에는 많이 있다. 모든 사람은 사생활보호를 받아야 할 천부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

 

사생활침해는 인권유린이다. 자살방법이나 살인방법에 대해서 우리는 모를 권리를 가지고 있다.

 

공정보도로 정평이 나 있는 모범적 신문인 스위스의 쮜리히 신문, 오스트리아의 디 프레세, 독일의 디 짜이트 등은 모를 권리를 존중하며, 우리를 실망시키는 성직자와 교사의 개인적 실수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않는 훌륭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우중의 엽기심이나 호기심을 자극해 돈벌이를 하는 언론이 이 땅에서 사라질 날이 언제 올까.

 

[평화신문, 2009년 4월 19일, 진교훈 교수(서울대 명예교수,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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