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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 복수가 아닌 사랑이 필요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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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3-01 ㅣ No.634

[20+4]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 - 복수가 아닌 사랑이 필요한 때

 

 

아름다운 용서의 슬픈 결말

 

1991년 10월 18일 토요일 오후 4시 반, 시민들이 한가롭게 산책하거나 어린이들이 자전거와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여의도광장에 프라이드 승용차 한 대가 갑자기 들이닥쳤다. 프라이드는 지그재그로 500미터를 달리며 어린이 2명을 포함 10명을 치고 유아용 전기자동차와 충돌하자 방향을 틀어 다시 8명을 친 뒤 자전거 대여대를 들이받고서야 멈췄다. 주변 시민들이 모여들자 운전자는 등산용 칼을 휘두르며 여학생 1명을 붙잡고 인질극을 벌이다가 여학생 배를 칼로 찔렀다. 그 순간시민들이 달려들어 그를 붙잡았다. 다행히 칼이 허리띠 금속 버클에 닿아 여학생은 무사했지만, 어린이 2명이 죽고 21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죽은 어린이 가운데 하나가 당시 여섯 살이었던 윤신재 어린이였다. 살인범은 스물한 살의 무직자 김용제였다. 다섯 살 때 엄마가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집을 나가버렸고, 아버지도 1983년 농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김용제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집을 나와 타향 객지로 떠돌았다. 공장에 다니는 등 온갖 막일을 했지만 2m 앞도 뿌옇게 보이는 선천성 약시였던 그에게는 그도 쉽지 않았다. 그는 경찰과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들어간 직장마다 눈이 나쁘다고 쫓겨났다. 사장들은 나를 이용만 해먹고 무자비하게 해고했다. 세상은 나를 냉대했다. 죽고 싶었다. 그럴 바에는 세상에 복수나 하고 죽고 싶었다. 광장으로 돌진한 순간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개로 보였다. 처음 차에 누군가 부딪치고 나서는 눈을 감고 달렸다.”

 

김용제의 선고 공판, 재판부가 10분 만에 사형을 선고하고 재판을 끝냈을 때 윤신재의 할머니 서윤범 로사리아 씨는 담당 검사를 찾아가 살인범 김용제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서 할머니를 만난 김용제는 진땀과 눈물을 흘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죄송하다.”는 말만을 되풀이했다. 그 자리에서 서 할머니는 손자를 숨지게 한 살인범이지만 “용서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뒤 남편이 세상을 뜨고 며느리도 암으로 고생하다 끝내 숨지는 불행이 겹치자 서 할머니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용서와 분노 사이를 오갔다. 그러다가 2년 반 만에 다시 그를 찾았고 양자로 받아들이고는 아침마다 그를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김용제는 구치소에서 요셉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 아름다울 수 있었던 이야기의 끝은 슬프다. 서 할머니의 간절한 기도에도 김용제는 1997년 12월 30일 다른 사형수 22명과 함께 사형당하였다.

 

 

슬픈 결말이 되풀이되지 말아야

 

2003년 10월 9일, 누군가가 고정원 씨의 늙으신 어머니, 아내, 3대 독자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그로부터 열 달 뒤인 2004년 7월, 범인 유영철이 붙잡혔다. 고정원 씨가 루치아노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은 지 열흘 만의 일이었다. 고정원 씨는 한 언론사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모를 일이었어요. 막상 범인이 잡히고 난 뒤 저도 알 수 없는 마음의 변화가 일었습니다. 그도 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가족의 죽음을 똑같은 죽음으로 되갚는 게 과연 온당한가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그리고 용서하자는 쪽으로 기울었어요. 유영철에게도 제 딸들의 자식과 비슷한 또래가 있다는 얘길 듣고 그 어린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겠느냐싶기도 했고요. 하느님의 뜻인지 모르나 저도 모르게 용서하는 마음이 생긴 겁니다.”

 

고정원 씨는 유영철을 용서한 데 그치지 않고 사형제도 폐지운동에도 나서고 있다. 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야기도 슬프게 끝이 날까?

 

 

사실상 사형폐지를 넘어 완전 사형폐지로

 

다행히도 슬픈 이야기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다. 우리나라에서 마지막 사형이 집행된 지 꼭 10년이 되던 2007년 12월 30일, 국회 의사당 앞에서는 우리나라가 사실상 사형폐지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선포하는 행사가 있었다. 국제 인권 단체들은 10년 동안 사형이 집행되지 않은 나라를 ‘사실상 사형폐지국’으로 분류한다. 현재 우리나라처럼 사실상 사형폐지국은 모두 35개 나라이다. 모든 범죄에 대한 사형폐지국은 92개 나라, 군법을 제외한 일반 범죄에 대한 사형폐지국은 10개 나라이다.

 

사실상 사형폐지국이 된 이상 국제 사회의 눈을 의식해 사형을 집행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법으로 사형제도를 폐지하지 않는 한 언제라도 사형이 집행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래서 한국 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산하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는 16, 17대 국회에 이어 18대 국회에서도 사형제도를 폐지하고 종신제로 대체하는 입법 촉구 활동을 벌이고 있다. 16, 17대 국회에서 반수가 넘는 국회의원이 사형폐지 입법안에 서명을 했지만 국회 본회의에 상정조차 하지 못하고 자동 폐기되고 말았다. 이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모든 주교와 교황대사가 사형제도 폐지와 종신제 대체 입법을 촉구하는 서명을 하였고, 지난 12월 인권주일을 시작으로 전국 모든 본당에서 서명운동을 펼치고 있다.

 

 

피해자 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복수가 아니라 위로와 관심

 

SBS는 성탄 특집으로 다큐멘터리 ‘용서… 그 먼 길 끝에 당신이 있습니까?’를 방영하였다. 이 다큐멘터리는 살인 사건 피해자 가족들이 어떤 고통 속에 살아가는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사형을 통한 복수가 아니라 따뜻한 관심과 위로와 지원이다. 하지만 우리는 살인범에 대해 분노하고 사형을 주장할 뿐, 피해자 가족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그들을 도우려고도 하지 않는다.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 위원 조성애 수녀는 오래 전부터 피해자 가족을 만나서 위로하고 필요한 도움을 주는 일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조 수녀의 이 같은 활동이 고정원 씨가 세례를 받고 유영철을 용서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2005년부터 정부 차원에서도 범죄피해자지원센터를 통해 피해자 가족 지원에 나서고 있지만 아직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우리 사회에서 분노와 한을 없애고 사형제도 폐지를 이루려면 교회가 피해자 가족을 돕는 일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 박영대 베네딕토 - 우리신학연구소 소장이며, 주교회의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09년 2월호, 박영대 베네딕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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