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윤리신학ㅣ사회윤리

[환경] 스톡홀름에서 요하네스버그까지: 자연과 인간, 공존과 정의를 위하여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30 ㅣ No.670

[문헌 풀어 읽기] “스톡홀름에서 요하네스버그까지” - 자연과 인간, 공존과 정의를 위하여

 

 

스웨덴의 스톡홀름은 1972년에 ‘국제연합 인간환경회의’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는 2002년에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지구정상회의’가 열린 곳이다. “스톡홀름에서 요하네스버그까지 : 역사적으로 살펴본 환경문제에 관한 교황청의 관심”(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 2002. 6. 29.)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1999년까지, 특히 바오로 6세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중심으로, 생태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과 관련 문헌들을 종합, 정리한 책이다. 이 글에서는 생태문제를 둘러싼 우리의 상황 속에서 이 문헌을 살펴봄으로써 그 내용을 더 깊고 구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생태문제의 근본 원인은?

 

오늘날 우리는 지구온난화를 비롯하여 심각한 생태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는 특히 근대 이후, 인간들이 저질러온 무분별한 자연의 개발과 자원의 남용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나라는 서구 사회에 비해 훨씬 짧은 기간에 근대화, 산업화를 이루어 자연의 생태적 질 저하가 상대적으로 더 급격히, 심각히 진행되었다. 이렇듯 무분별한 자연의 개발과 자원의 남용이 발생한 이유는 무엇인가?

 

근본 원인의 하나는 자연에 대한 인간중심적 관점이다. 인간중심적 자연관은 자연과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하고, 자연을 지나치게 인간을 위한 도구적 관점에서 본다. 자연을 유용성의 관점에서 파악하며, 자연의 고유한 본질적 가치는 쉽게 부정되거나 무시된다. 자연은 인간을 위한 자원의 창고일 뿐인 것이다.

 

또 다른 주요 원인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목표와 가치와 행복에 대한 이해를 들 수 있다. 현재의 시장 자본주의 경제와 소비주의 문화는 개인의 행복이 마치 물질적 욕망의 충족에 있다는 듯 이 욕망을 끝없이 채우도록 부추기고 있다. 삶의 수단에 불과한 물질의 소유와 소비가 실제로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목표와 가치로 변질되었다.

 

이렇게 자연에 대한 지나친 도구적 관점과 무분별한 소유와 소비의 부추김은 자연의 조화와 질서를 훼손하는 생태위기를 초래했을 뿐 아니라, 사회정의의 문제도 일으켰다. 철저히 개별화된 인간은 더 많은 물질의 소유와 소비를 위해서 ‘무한 경쟁’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고, 부는 편중되고 가난은 만연하게 되었다.

 

 

자연의 본질적 가치를 인식해야

 

그렇다면 생태위기의 근본 해결책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우리는 인간중심적 자연관을 극복해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모든 피조물의 ‘좋음’을 인정하지만, 그 원천은 인간의 유용성이 아니라 하느님에 있음을 강조한다(창세 1장).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에 바탕을 둔 “그 나름의 권리”(“스톡홀름에서 요하네스버그까지”, “가톨릭교회의 가르침” 제25호, 131쪽, 교회헌장, 36항)와 “고유의 법칙과 가치”(131쪽, 사목헌장, 34.36.37.57.69항)를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창조 신앙은 “자연에 대한 관상적 접근”(149쪽, “전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14항)을 도와줌으로써 자연에 내재한 가치를 인식하게 해준다. 자연이 하느님의 창조라면, 자연을 그저 인간을 위한 자원으로만 여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 그 안의 모든 것은 창조주 하느님을 가리키며 찬양하고 있다(131쪽, 사목헌장, 36항).

 

또한 그리스도교의 강생과 부활 신앙은 인간만이 아닌 모든 피조물의 고유한 가치를 더욱 강화해 준다. 강생(육화)은 성자가 “인간의 전실재와 결합” 하셨음을 뜻하고, 이는 곧 성자가 “모든 ‘육체’, 창조계 전체와” 일치하셨음을 뜻한다. 이러한 “강생의 우주적 의미와 차원”은 자연의 가치를 비할 데 없이 고양시킨다(148쪽, “생명을 주시는 주님”, 50항).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계의 일부이고, 그의 부활이 “당신의 아들, 인간의 아들에 대한 하느님의 결정적인 긍정”이라면, 예수 부활의 의미는 “인류에 대한 긍정”만이 아니라 “창조와 모든 자연에 대한 긍정”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자연의 모든 피조물은 인간과 함께 부활이 미리 보여주는 새 창조의 “공동 운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려준다(156쪽, “플라망어를 쓰는 청소년들에게 한 연설”). 강생과 부활의 우주적 이해는 하느님의 종말의 완성에 인간만이 아니라 창조 전체가 포함됨을 암시하고, 이것은 다시 우리가 ‘지금 여기서’ 자연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우리 사회의 소비주의 문화를 극복해야

 

한편, 생존을 위해서 자연에 의존하는 인간은 자연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연의 도구적 가치는 언제나 자연의 본질적 가치를 존중하는 한계 내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소비주의 문화를 극복해야 한다. 오늘날 만연한 소비주의는 우리가 “존재와 성장보다는 소유와 향락”을 추구해 왔고, 필요 이상으로 “과도하고 무절제하게 지구 자원을 소비”해 왔음을 뜻한다(163쪽, “백주년”, 37항). “무절제한 이익”만을 추구하고, 자연을 “소비할 대상”으로만 여기는 한, 생태위기의 극복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영성적 윤리적 관점”에서 자연의 파괴와 자원의 고갈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이기적 태도와 생활방식”을 버려야 한다(177쪽, “아메리카 교회”, 25항). 이는 특히 부자들에게 해당된다. 부요한 이들이 먼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생활 방식”, 검약과 절제와 영성의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133쪽, “세계 정의”, 제3장).

 

또한 우리는 소비주의 문화를 부추겨온 이른바 지속적인 경제성장 모형을 진지하게 재검토해야 한다. 경제성장이 자연 자원을 바탕으로 한다면, ‘지속적’인 경제성장은 유한한 자원 때문에 애당초 ‘비지속적’ 모형이다. 이를 무시한 채 계속해서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경제성장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개발과 산업화는 자연계의 이용에 대한 한계와 개발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147쪽, “사회적 관심”, 34항)을 고려해야 하며, “참된 발전을 누리려면 환경을 돌보아야 할 필요성이 절박”(147쪽, “사회적 관심”, 26.29.30.34항)하다. 이 점들을 분명히 의식할 때, 우리는 “발전의 요구와 자연 자원의 보존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위하여 필요한 희생”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164쪽, 요한 바오로 2세가 이탈리아 라치오 지역 회의에 한 연설).

 

 

생태문제는 사회정의의 문제이기도

 

생태문제는 사회정의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구는 오직 하나 뿐이며, 지구의 자원은 유한하다. 이 엄연한 한계를 고려하면, 지금처럼 극심하게 불균형한 자원의 사용 자체가 비윤리적 행위이며 사회적 불의에 해당한다. 오늘날 소수의 사람만이 누리고 있는 물질적 풍요는, 아무리 합법적이라 하더라도, 다수의 희생으로 얻어진 ‘착취적 풍요’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비참하게 살아가는데 소수의 사람들이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여 환경을 파괴하거나 자원을 고갈시킬 수 없다”(161쪽). 지상 자원의 “분배가 적절하게 이루어지도록 보장할 절박한 요구”(131쪽, 교회헌장, 36항)가 있으며, 이는 “절대적 정의의 요청”(133쪽, “세계 정의”, 제3장)이다. 이 요구의 근거는 모든 재화가 궁극적으로는 “창조된 재화”, 곧 모든 이를 위한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한 분배의 원리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여야 한다(131쪽, 사목헌장, 69항). 생태문제와 가난문제는 너무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이들과의 “연대”와 피조물의 “존중”은 함께 추구해야 한다(164쪽, “이탈리아 라치오 지역 회의에 한 연설”).

 

가톨릭교회는 생태문제와 관련하여 인간들에게 “모든 피조물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풍성하게 될 수 있도록 마음과 정신을 바꿀 것을 요구한다”(128쪽). 이럴 때에만 우리는 한편으로는 자연과 공존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함께 정의를 구가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 조현철 프란치스코 - 예수회 신부. 조직신학(생태신학)을 공부하였으며,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로 있다.

 

[경향잡지, 2009년 7월호, 조현철 프란치스코]



456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