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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회 양극화, 어떻게 극복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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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29 ㅣ No.667

[경향 돋보기] 교회 양극화, 어떻게 극복할 수 있나?

 

 

국민 2%만을 위한 종합부동산세 완화, 88만 원 세대, 비정규직 문제 등, 풍요를 강조하는 현실 속에서도 우리의 삶은 늘 어떤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하기만 하다. 사회의 양극화 현상은 교회에도 큰 영향을 미쳐 도농 간, 본당 간 그리고 교구 간에 경제적 격차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를 불러온다.

 

경향잡지에서는 지난 8월 14일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제2소회의실에서 가진 춘천교구 사목국장 신호철 토마스 신부와 수원교구 사목국장 문희종 세례자 요한 신부의 대담을 통해 오늘날 우리 사회와 교회의 양극화 현상을 진단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교회의 노력과 대안에 대해서 들어보았다. [정리 박상경 기자]

 

 

지역 안에서 나타난 양극화 현상

 

문희종 : 양극화라는 것이 경제적인 양극화도 있을 수 있고 이념적인 양극화도 있을 수 있는데, 인간 사회를 파고 들어가면 경제적인 요인이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치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념적인 양극화를 초래한 공산주의가 생겨난 것도 경제 때문에 그런 거거든요.

 

신호철 : 세상에는 다양한 개인 ? 공동체 가치가 있습니다. 다양하다는 것은 사회를,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는 요인입니다. 산에 똑같은 나무만 심겨있으면 그 산이 건강하지 않거든요. 사회도 역시 다양한 목소리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할 때 건강하고 올바른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가치가 극단으로 치달아서 각각 서로 다른 하나의 꼭짓점을 만들게 될 때, 거기서 드러나는 분열과 갈등 구조가 인간사회를 힘들게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경제적 ? 물질적 가치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교회마저도 그러한 사회 조류에 휩쓸려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물질적 가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극단의 삶에서 결국 소외가 발생하고, 소외된 부류는 공동체 안에서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을 잃어버릴 것이고, 그것은 큰 도전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문희종 : 춘천교구와 수원교구는 상황과 분위기가 차이가 있습니다. 춘천교구는 수원교구보다는 도시와 농촌 본당 간의 드러나는 편차가 덜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신호철 : 춘천교구는 강원도를 중심으로 한 교구인데, 우리나라가 산업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강원도는 철저하게 소외된 지역이었습니다. 산업화 벨트에서 벗어난, 우리가 볼 때는 소외고 중앙에서 보면 마지막으로 남겨두어야 하는 청정 벨트였죠. 당연히 문화적인 혜택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는 지역입니다. 교회 사정도 비슷해서 복음화율이 굉장히 낮습니다.

 

심각한 양극화 현상은 교구간의 문제도 문제지만 같은 지역 안에서, 같은 본당 안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큰 본당 작은 본당, 도시 본당 시골 본당이 느끼는 차이, 여기서 나눔의 부재를 체험하게 됩니다.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어렵고 소외되고 가난한 계층들과 중산층이 공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요.

 

문희종 : 산업화 이후 인구가 수도권에 집중되면서 수원교구도 커졌습니다. 수원교구 역시 지역이 넓은데, 서울 경기이남 지역을 모두 포함합니다. 교구 안에서도 신도시화가 이루어지는 곳은 안양 수원 등지를 중심으로 합니다. 지금은 동탄 신도시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도시 중심으로 인구집중화 현상이 일어나면서 농촌 본당은 노령화 ?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죠. 그래서 수원교구는 아주 극명하게 대도시 중도시 소도시 시골로 분류가 될 정도입니다.

 

신도시에 들어오는 인구의 10%가 신자라고 하면 거기에 따른 성당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모든 재정이 신도시의 새 성당 짓는 데, 땅 구입하는 데 쓰입니다. 그러다 보니 내부에서는 재정 때문에 허겁지겁하는 현상이 일어나요. 사회구조 안에서 생겨나는 사정입니다.

 

수원교구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사는 공단 지역이 많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사목도 비상입니다. 지역적으로 안정된 도시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도시가 있습니다. 공단 중심의 안산 같은 도시는 인구이동이 많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몇 년 일해서 돈을 모으면 아이들 교육 등을 이유로 다른 도시로 이사하거든요. 이렇게 수원교구는 지역의 특색이 명확하고 양극화가 대도시 본당과 시골 본당에서 극심하게 드러납니다. 물론 본당 안에서도 양극화 현상이 있지만.

 

신호철 : 사회적으로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고 더 심화될 것이 분명하고, 그런 차원에서 교회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 교구는 여섯 개 지역으로 나뉘는데, 홍천 인제 지역이 가장 힘든 지역입니다. 농촌본당의 현실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젊은이는 없고 노인들이 대부분 손자손녀 데리고 사는 조손가정이죠.

 

양극화 문제는 이 사회가 안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왜 그러냐를 따지기보다는, 교회가 이것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을지, 복음화를 해나갈 수 있는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재정과 인적 교류를 해야 한다

 

문희종 : 수원교구는 신자 수가 1만 5천 명쯤 되는 큰 본당도 있고 2백 명쯤 되는 작은 본당도 있습니다. 도농 간에 자매결연을 한 본당이 여덟 곳쯤 되는데, 도농 간 직거래 또는 시골본당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시 본당 신자들이 자매본당으로서 도와주기도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제들 간의 결속력이나 연대감입니다. 물론 평신도 교회를 지향하지만 본당에서 사목을 책임지는 사람은 본당 사제이기 때문에 사제들 간에 연대감이 있으면 얼마든지 본당과 본당 간에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신호철 : 현재 우리나라는 도시 지역은 복음화율이 높고 시골 지역은 낮습니다. 중산층 이상에서는 신자율이 높고 가난하거나 소외 계층에서는 신자율이 낮은 현상이 보입니다. 군대에 별 단 장성들 30%가 신자라고 하고, 국회의원 신자율이 평균 신자율보다 높죠. 교회가 이미 중산층화 되어있다는 거죠.

 

제가 어릴 때는 모두 가난했습니다. 그때 비하면 굉장히 부유한 지금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개인의 행불행은 외적 가치가 아니라 자기 안의 만족에서 오는 것인데, 상대적 박탈감이 그 만족도를 떨어뜨리는 거죠. 본당 간에도 상대적인 박탈감을 심각하게 느끼는데, 이런 상대적인 박탈감 또는 차이를 어떻게 극복해나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결국 자연스럽게 나눔의 문제로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희종 : 수원교구는 지침에 각 본당 예산에서 최소한 10%는 사회복지를 위해서 쓰도록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처음부터 나눔과 사랑을 강조하기 때문에 각 본당과 구역 안에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참 잘해요. 그러나 문제는 신 신부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상대적 박탈감에서 오는, 사회 전체에 스며드는 정신적인 병폐 현상이라고 할까, 우리 사회가 이렇게 경제지상주의로 가면서 윤리적 가치나 도덕적 가치를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는 거죠.

 

신호철 : 정말로 심각한 양극화는 도시에 있습니다. 시골은 대부분 비슷하게 살아요. 다 낮기 때문에 심각한 양극화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저도 경제적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10여 년 전에 본당에서 봉성체를 가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내가 태어나 살고 자란 도시에 그런 곳이 있는 줄 몰랐어요. 정말 조그만 쪽방에 가난한 노부부가 병이 들어서 누워있는데,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이라고는 봉성체하러 오는 신부뿐이었습니다.

 

양극화 문제를 경제적 가치로만 이야기하면 당연히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한테 줘야죠. 그런데 교회 안에서 양극화의 문제는 좀 다른 차원에서, 복음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하기 때문에 다를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교구도 본당 간에 교류를 하고 도움을 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까지 이루어지는 도농 간의 자매결연이나 지원들이 약간의 재정지원을 주는 차원에 머물러 있었고, 그것마저도 제도화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에 본당신부가 바뀌면 끝나버리고 맙니다. 정말로 나눔을 실현하고자 한다면 근본적으로 인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리고 좀 더 제도적인 게 필요합니다.

 

문희종 : 상대적 빈곤은 본당 안에서도 느낍니다. 다른 동네에서 보면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죠. 얼마 전 수원교구에서 언어권별로 외국어봉사자 모집을 했어요. 15명 정도 모집하려고 주보에 공고를 했는데, 다음 날 마감되었고 대기자가 10명 정도나 있었습니다. 도시는 교육적으로 문화적으로 지방과 차이가 많이 나죠.

 

신호철 : 인적 교류로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어쩌면 이것이 재정지원보다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대부분 도시 본당에는 수녀님이 있지요. 그런데 정말로 수녀님들이 필요한 곳은 시골이에요. 시골 신부는 사람이 없어서 혼자서 성당 관리인도 하고 사무장도 하고 주일학교 교사도 하고 예비신자 교리도 하고 제의방 일도 직접 할 때가 많습니다. 정말로 그런 곳에 수녀님들의 손길과 역할이 필요한데 현실적으로 거절당하기 일쑤죠.

 

사제도 그래요. 부족한 교구가 있는 반면, 보좌신부 10년 하고도 본당 못 나가는 교구도 있습니다. 엄청난 불균형이 존재하는데, 사제들의 교류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신자들은 이사를 하면서 이동하고 교류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신부들은 대부분 자기 교구에서 평생 삽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다른 교구 상황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스스로 안주하여 교류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문희종 : 우리 교구는 도농 본당 간에 인적 교류는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교구 신학원이 있어서 예비신자 교리, 견진 교리, 재교육 등을 할 수 있는 분야별 평신도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을 수녀님들이 없는 시골 본당에 파견합니다. 도시에도 큰 본당 같은 경우 신부님들이 요청만 하시면 봉사자들을 파견합니다. 교구 간의 이런 교류는 전국 교구 사목국장 회의 때 거론할 수도 있겠습니다.

 

신호철 : 양극화를 극복하는 것은 복음적 형평성, 하느님 앞에서 동일한 신자 공동체인 동시에 하느님 백성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져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교회의 나눔은 누군가가 우월한 위치에서 약자를 배려하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인 교회 안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구성원으로서 교회 차원에서 실현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자기도 과거에 작은 본당 신부였고 다음 인사이동 때 작은 본당 신부로 갈 수 있는데도 현재 사목하는 큰 본당에서 나누려고 하지 않는 인식의 문제, 같은 교구 안에서도 그런 것부터 개선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눔은 내가 많이 가졌기 때문에 베푸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희종 : 수원교구는 60~70%의 성당이 신설본당으로 성당 건축에 허겁지겁하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다른 교구에서 이미 알기 때문에 도움을 그렇게 요청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올해도 9개 본당이 분할되어 나갔습니다. 교구와 교구 간의 협력 관계, 인적 자원 교류도 앞으로 가능하다고 봅니다. 공식적으로 본당신부가 파견 요청을 하면 저희는 타교구에도 선교사를 파견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가치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

 

문희종 : 얼마 전에 냉담했다가 다시 성당에 나오는 신자 3천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냉담 이유 가운데 가정 문제에서 비롯한 경제 문제가 제일 큰 이유였습니다. 지금 당장 먹고살기 힘들기 때문이라는 거죠. 제가 보기에는 양극화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정신적인 가치를 찾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신호철 : 경제적인 문제로 냉담을 하게 된다는 것은 참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게 현실인 것 같아요. 교회에서 신앙을 갖는 동기부터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과정 자체가 순수하게 영적인 가치나 구원의 가치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에게 편한 상황일 때는 문제없는 것처럼 보이다가 어려움이나 충격이 오면 바로 신앙에서 이탈을 하게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너나할 것 없이 돈 돈 하는데 이제는 교회가 신자들에게 모두가 추구하는 세상의 가치만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신자들에게 충분히 증언하고 보여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교회 스스로 세상의 가치에 함몰되어 교회 안에서조차 능률과 업적, 실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에서 빨리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제일 먼저 변화되어야 하는 게 성직자들의 의식과 투신입니다.

 

문희종 : 우리가 사제라서 우리에게 화살을 돌리게 되는군요.

 

신호철 : 제가 신학교 다니던 80년대 시절에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해방신학에 나오는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이었습니다. 그렇게 치열하게 신학교 시절을 지낸 동료들이 세월이 흘러서 중견사제가 되어 세상 안에서 자기들의 현실적인 안락과 즐거움을 충분히 누릴 줄 아는 아주 멋진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아픈 고백이지만 사제들이 사회적으로 중상류 이상의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사회적으로 중상류 이상의 신자들과 어울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보면 사제들조차 가난한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을 시혜 차원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신부는 가난한 사람과도 어울리고 부자들하고도 어울릴 줄 알아야 해. 그게 사제야.” 그럽니다. 부유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행복해요. 유익하고 즐겁고 기뻐요.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릴 때는 불편하고 괴롭습니다. 해야 하는데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도전이 존재합니다, 실제로. 그렇다고 안할 수 없으니까 그들을 시혜 차원에서 대하게 됩니다. 사회복지 차원에서 생활비를 보태주는 정도로 끝내는 겁니다.

사목은 경영이 아닌데, 사목은 회사를 경영하거나 누구에게 맞는 적당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목은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인간 구원을 위해서 우리 자신이 함께 투신하는 것입니다. 그 부분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양극화를 극복하는 해법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목은 경영이 아니다

 

문희종 : 나름대로 교회는 양극화 문제를 극복하려고 애를 씁니다. 수원교구는 신자들 자체가 배우려는 욕구가 커요. 교구나 본당에서 배려를 많이 하는데, 그럴 때 교육 내용의 중심을 성경으로 합니다. 복음적 삶을 찾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사회에 드러나는 양극화 현상이 교회에까지 침투하여 문제가 되지 않게 하려면 사제는 물론 신자 모두가 순수한 복음적 삶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또한 신 신부님 말씀처럼 사목자들이 이런 면에 확고한 의식을 갖고 살아야할 겁니다. 본당 자체는 공동체거든요. 전체 공동체를 위한 사목을 해야 하는 것이죠. 누구를 위한 사목, 특수한 계층만을 위한 사목이 아니라, 전체 공동체를 아우를 수 있는 사목을 해야 합니다.

 

신호철 : 현대화한 신앙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개인화라고 생각합니다. 개인화 익명화하는 거죠. 본당 공동체와 어울리지 않아요. 본당공동체도 그 사람한테 신경을 쓰지 않아요. 우리가 그 이상의 공동체를 바라보지 않게 된 겁니다. 너나없이 어렵지만 함께 나누던 그런 시대에서 풍요롭지만 개인화된 삶으로 변질되었고, 그 안에서 교회의 여러 문제가 도출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소공동체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이런 개인화된 신앙을 극복하고 주변에 대한 관심과 복음적 나눔을 실현하고 그럼으로써 양극화를 해소하려면 소공동체를 활성화해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소공동체 운동 역시 도시형 모델과 시골형 모델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도시의 큰 본당에서 말하는 소공동체 형태의 모델이 시골에 있는 작은 본당에 적용될 수 없는데, 과연 이것을 어떻게 나름대로 꾸려갈 것인가, 이런 걸 고민하게 됩니다. 어쨌든 신앙의 개인화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소공동체 활성화인데 그 부분에서 많은 고민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문희종 : 그런 면에서 우리 교회가 사회교리를 강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중요성을 인식하고 본당에서 교육을 하는 신부님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약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에서 교회가 해야 될 가치들에 대해서 제구실을 못하는 것이 아닌가, 환경이나 사회정의 차원 특별히 인권 문제 등에서 아직까지 실천적인 노력이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수원교구는 대리구제를 합니다. 대리구에는 대리구청이 있는데 거기서 지역 특성에 맞는 사목을 적용합니다. 대리구 사제단이 논의하고 적용하는 거죠. 평택대리구나 용인대리구는 시골이 많습니다. 성남이나 안양대리구는 도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지역적인 특성이나 정서는 상당히 다릅니다.

 

안산 쪽은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체감할 수 있습니다. 젊은층이 많아서 노동운동도 활발합니다. 이주노동자도 많습니다. 몇몇 본당에서는 노동자들을 위해 밤 10시에 미사를 드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직 비정규직 문제를 사용자들에게 외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신호철 : 사회교리에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는 실천적 지침까지도 잘 들어있습니다. 안타까운 자기 고백이라면 교회 역시 세상 안에서 집단이기주의의 모습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이죠. 사회교리를 이야기하지만 교회에 손해가 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겠다는 인식을 갖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 교회는 사회 이슈가 된 현상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잖아요. 이제는 우리가 이야기할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비정규직 문제, 촛불시위 소고기 문제 등에 대해서, 그것은 교회가 이야기하고 말할 내용이 아니다, 동일한 목소리를 낼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대사회적으로, 교회가 공식적으로 성명을 발표하는 것은 주로 생명에 관계된 내용이고 그 외 부분에서는 교회의 공적인 목소리가 사라진 지 오래됐죠.

 

그런데 민주화 투쟁 시절에 정치문제에 왜 교회가 나섰느냐면 그것이 정치문제만이 아니라 인권의 문제인 동시에 복음적 소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양극화의 문제에 대해서도 교회가 엄정하게 그리고 아주 놀라운 사회교리에 입각해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열어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사회가 혼탁하고 어둡다면 적어도 교회가 “바로 방향이 여기”라고 그쪽을 향해서 작은 촛불 하나쯤은 켜줘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문희종 :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 모든, 특히 젊은이들이 개인주의화되어서 자신의 생각을 최고의 것으로 여기고 다른 이의 생각을 듣지 않는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 어른이 없잖아요. 예전 같으면 추기경님이나 큰스님의 말씀을, 비신자이거나 종교가 달라도 사회의 어른으로 존경하고 경청하였는데, 지금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신호철 : 지난 정권 아래서 우리 사회는 급속도로 탈권위화했습니다. 종교도 상대화하면서 권위도 빠진 거죠. 여기서 긍정적인 대안과 방향을 봐야 할 것 같은데, 저는 양극화를 해소해 나가려면 기본적으로 우리한테 근본적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교회 자체가 정말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에 모든 것의 출발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나눔도 베풂도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갈등의 요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문희종 : 그렇습니다. 회개가 선행되지 않으면 나눈다고 하면서도 그 안에는 갈등과 소외가 증폭되는, 그런 역할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어렵고 힘든 일일 수 있지만, 우리는 하나의 믿음을 가진 이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쉽게 극복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하고 기대합니다.

 

[경향잡지, 2008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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