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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회 안의 양극화와 해법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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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29 ㅣ No.666

[경향 돋보기] 교회 안의 양극화와 해법 제안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사도 4,32.34-35).

 

초대교회 공동체는 이렇게 살았다고 한다.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가진 것을 모두 내놓았다고 하지만 그 시대에도 이미 재산을 빼돌리다가 걸려서 죽은 사람이 있었고(5,1-11), 푸대접 받는 그리스계 유다인 과부들의 항의로 식탁 봉사를 전담하는 부제를 뽑기도 했다(6,1-6). 이스라엘에는 빚진 것을 다 탕감해 주는 희년이 있었다지만 진짜로 완벽하게 실행된 적이 있었을까? 과연 세상 사람 모두가 똑같은 조건에서 살 수가 있을까? 사람 사는 곳에는 어디나 조건의 차이가 존재한다. 그 차이는 계층, 연령, 성별, 지식수준 등 다양한 면에서 드러난다. 차이가 더 벌어지면 양극화의 양상을 띠는데 이러한 현상은 교회 안에서도 볼 수 있다.

 

 

1. 당장 해결하기 힘든 교구 간의 차이

 

한국 교회의 양극화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교구 간 격차를 지적한다. 수도권을 비롯한 도시 지역은 사목자는 많지만 대형화된 본당을 운영하느라 힘들고, 농촌 지역은 본당과 사제 수, 예산이 부족해 힘들다. 도농 간의 괴리감도 자주 거론되어, 어떤 이들은 사제들을 다른 교구에 파견하는 이른바 ‘교환사목’을 제안하기도 한다.

 

간혹 교우들이 묻는다. 사제들이 다른 교구에서 올 수는 없냐고. 일이 많아 힘들어하는 본당신부가 측은한가 보다. 참 착한 교우들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물론 교회법에도 다른 교구에 가서 사목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고 또 시도되고 있다. 사제 수가 여유가 있는 교구에서 비교적 부족한 교구로 사제를 파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제로 사는 것이 단순히 어느 본당에서 사목을 맡는 것만이 아니라 사제공동체 안에 들어가야 하는 것임을 감안하면 다른 교구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 유학 시절 이탈리아 사제단에 혼자 끼여 성유축성미사를 봉헌할 때 얼마나 어색했던지…. 그때의 나는 함께하기에는 2% 부족한, 오리들 사이에 낀 미운 오리새끼가 아니었을까? 다른 교구에서의 삶은 결혼한 사람이 가족과 떨어져 다른 집안에서 사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2. 본당 안에서의 차이 : 융합하지 못하는 신자들

 

같은 본당에 다녀도 신자들이 처한 상황은 저마다 다르다. 나이나 성별, 학력, 직업뿐 아니라 신앙생활 경력이나 신앙심, 성당에 머물러 함께하고 봉사할 수 있는 시간과 능력도 차이가 난다. 모두가 이러한 다름을 인정하며 기쁘게 어울려 신앙생활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어딘가 찜찜하다. 누군가는 그 차이 때문에 신앙생활을 쉬고 있으니…. 개신교는 권사, 집사, 장로 등 여러 층으로 나뉘어있어 신도들 간에 승진경쟁을 하는 인상을 준다. 우린 가톨릭, 곧 보편적인 종교라서 총회장부터 반장까지 계층이 아니라고 하지만 때로는 말만 그런 것 같다.

 

간간이 결재서류가 제때에 올라오지 않았다고, 결재선이 흔들렸다고 결재를 못 해주겠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한번 결재를 받으려면 참을 인(忍)자를 세 번 써야 하고, 누군가 결재판을 던졌다는 연속극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나 자신이 사목자인지 회사 사장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1) 사목자와 신자들

 

새 본당에 부임할 때마다 나는 ‘여기서는 정말 잘해봐야지.’ 하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양들을 잘 아시고 양들도 예수님을 잘 알았듯이, 사목자와 신자는 공생 관계이니만큼 모든 신자를 다 알아야겠다고 결심한다. 이 다짐은 신자 수가 많건 적건 아직 성공하지 못하였다. 지금도 신자 수가 2천 명 정도인 본당에서 성전 건축을 하며 3년째 지내고 있지만 주일미사 때면 잘 알지 못하는 신자들이 눈에 많이 들어온다. 그때마다 이름은 못 외워도 얼굴은 알고 낯이 익다고 스스로 위안을 한다. 처음 나온 사람에게 처음 왔냐고 물어보면 얼마나 감동하던지. 사실 우연히 맞힌 경우도 많은데….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따로 봉사자 주소록도 만들고, 사진을 걷거나 직접 찍어보기도 하고, 주일미사를 캠코더로 촬영하여 한 사람씩 사진을 만들기도 하였다. 초등학생들은 사진과 출석부를 예쁘게 꾸며 성당 뒷면에 붙여놓고 자주 보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새 몇몇 잘 아는 교우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주일학교 어린이가 학교에서 상 받은 것은 축하해 주면서도 다른 교우들은 이름조차 모르니…. 참, 축구를 같이하는 형제들은 이름과 세례명을 쉽게 외우게 되니 신기하다. 아마 패스를 하거나 공을 달라고 부를 때 필요해서겠지만.

 

2) 교우들 사이

 

때로는 교우들끼리 잘 모른다는 사실에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저 교우를 모르면 간첩인데…. 같은 본당에서 신앙생활을 하지만 교우들도 자신이 속한 공동체, 자신이 알고 지내던 사람과만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모습을 본다. 잘못하면 서로 싸움이 나서 사목자가 말려야 하는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본당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교중미사 후에는 구역마다 돌아가며 차를 끓인다. 성당 앞마당에 천막을 치고 공짜 차를 마시며 서로 이야기 좀 하고 가라고 한다. 조금씩 나아지긴 해도 친교의 공동체라 하기에는 갈 길이 멀다. 이름표를 붙여보자는 제안도 서류더미 속에 묻혀버렸다. 영화에 출연시켜 준다는 제안도 해보았다. 한 가정씩 인터뷰를 하고 사진을 찍은 다음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은 알리는 영화 필름(?)을 만들어 주일미사 때 상영하겠다고 하자 난리가 났다. 부끄러워서 전부 반대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 제안도 제안만으로 끝났다. 나만 신앙생활을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굳어있는 것인지, 아니면 순교자의 후손이기에 박해시대에 숨어살던 익명의 전통을 지금도 고수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3) 봉사자와 일반 신자

 

정보를 가진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한다. 본당 공동체도 비슷해 보인다. 봉사자들만 정보를 소유한다. 그 정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알고 있다는 것과 알기 어렵다는 것은 많은 차이를 만든다.

 

봉사자들은 많은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다. 오랫동안 계획을 세워오는 봉사자들은 자신들이 아는 것을 신자들도 다 알고 있을 것이라는 함정에 빠지곤 한다. 그래서 일반 신자가 무엇을 물으면 건성으로 대답하기 쉽다. 주보에 난 지가 언젠데 그것도 모르냐는 듯. 봉사자끼리의 모임 날짜나 회의 내용을 당일에 통보받을 때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정보는 홍보로 바뀌어야 한다. 홍보는 외부보다 먼저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공동체 내부에 정보가 잘 흐를 때 많은 신자들이 소속감을 느끼고 함께하려 하지 않을까? 내가 아는 것을 남들도 알고 있을 것이라는 착각이 다른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들고 본당 공동체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아닐까?

 

신자들의 소속감을 저하시키는 또 다른 요인으로, 본당 일들이 소수의 봉사자에 의해 결정되는 관행을 들 수 있다. 사소한 일이야 그렇다 쳐도, 모든 교우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중대사에 교우들이 선택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무시당한다면 어떨까? 일례로 내가 있는 본당에서 성전을 건축하면서 업체 선정에 교우들을 참여시켰다. 먼저 전문가들이 심사한 뒤 봉사자들이 몇몇 업체를 추려내었다. 그런 다음 주일미사 때 설명을 하고 교우들이 투표하였다. 그런데 봉사자들이 매긴 순위와 신자들이 매긴 순위가 달랐다. 만약 봉사자들만의 결정을 따랐다면 많은 신자들의 의견은 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3. 본당 간의 차이 : 양적, 지리적 여건에 따라

 

어떤 본당이 좋은 본당인지는 모르겠고 그냥 파견되는 곳에 가서 여기가 최고의 본당이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하려 하지만, 여러 곳을 다녀보니 본당마다 고유한 특색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1) 규모의 차이

 

신자 수가 4천 명이 넘는 본당에서는 신자들을 안다는 것이 어려웠다. 봉사자들과 함께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때도 있고, 과중한 일로 지치고, 각각의 교우들을 안다는 것은 처음부터 포기해야 하는 아픔을 느낀다. 작은 본당에서는 신자들을 더 깊이 알고 사목할 수 있어 좋지만 어려움도 많다. 일단 성전을 짓고 운영하는 데 따르는 경제적 부담이 대단히 크다. 특히 짧은 시간에 큰돈(보통 몇 십억)을 빌려야 할 때는 하얀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또 사람이 적다보니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가를 찾는 것이 쉽지 않고, 한 명의 봉사자가 여러 일을 맡을 수밖에 없다. 큰 본당에서는 한 사람이 한 가지 봉사만을 해도 되지만 작은 본당은 5관왕, 6관왕들이 있다. 한 사람이 5-6가지 책임을 맡아야 한다는 말이다.

 

2) 본당 간 지리적 상황 차이

 

도시 본당과 시골 본당 간에도 차이가 많겠지만, 같은 도시에서도 교구나 본당 관할구역의 여건에 따라 확연한 차이가 난다. 지금 내가 거주하는 안산시에는 2개의 지구에 8개씩의 본당, 총 16개의 본당이 있다. 같은 시, 같은 문화권에 인접해 있으면서도 본당마다 여건이 다르다. 어떤 본당은 안정적인 상태에 있고, 성전 건축이 끝나서 이제 조금 편안하게 생활할 만한 곳이 있는가 하면, 신축 중이거나 신축을 준비하는 본당도 있다. 지구에서 주일학교나 청년 교육, 지구행사 등을 함께 준비할 때면 경비를 본당마다 나누는데, 본당마다 상황이 다르니 어떻게 부담을 나눌지 고민이 된다. 신자 수에 비례하여 나누기도 하고 본당의 경제적 차이를 감안하기도 하지만, 회의에 들어갈 때는 걱정이 되어 가슴이 쪼그라든다. 어떻게 짜더라도 돌아서면 뭔가 허전하고 누군가는 손해를 보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다.

 

3) 관할구역의 주거형태 등에 따른 차이

 

어떤 본당은 아파트만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떤 곳은 단독주택 위주로 이루어져 있다. 이에 따라 경제적 여건이나 생활방식의 차이가 크다. 어떤 본당은 사회복지사업을 하려 해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기가 어려운 반면, 다른 본당은 도와주어야 할 사람은 많은데 자금이나 방법을 찾지 못해 힘들어한다. 어떤 동네에서는 가장 어려운 사람이라도 다른 동네에 가면 여유 있는 축에 드는 경우도 있다. 과연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4. ‘사랑나눔’의 예로 생각해 본 격차 줄이기

 

1) 양극화 해결의 첫걸음은 권한 분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보조성의 원리’를 주창하였다. 중앙에서 독점하던 권한을 아래에 나눠주어 공동체 전체가 잘 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언뜻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보조를 잘 맞추자는 의미로 들리겠지만, 그 본뜻은 윗사람이 자신의 권한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그에 따른 책임도 지도록 하는 것이므로 ‘권한 분배’ 또는 ‘권력 분산’의 원리라고 번역하면 더 좋을 듯싶다. 이 원리에 따라 예전에는 교황청에 속했던 권한이 지금은 각 교구에까지 넘어올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권한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주는 것은 대단히 용기 있고 믿음을 주는 행위가 아닐까?

 

얼마 전부터 여러 교구에서 다양한 모습의 대리구 제도를 도입하였다. 교구를 작은 공동체로 나누고 대리구장(보통은 교구장 대리)에게 권한을 주어 각 공동체의 특성에 따라 발전시키려는 것이다. 교구 전체가 같은 문화를 향유할 수도 있고, 각 대리구가 별개의 문화를 발전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한 대리구 안에서도 각기 다른 문화권을 형성할 수 있다. 뭉쳐서 좋은 것이 있는가 하면 흩어지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 가톨릭의 장점인 조직력이 살아나려면 뭉치는 것이 좋은지, 흩어지는 것이 좋은지를 잘 보고 일관된 정책을 세워야 한다.

 

2) 또 다른 해법은 일치와 협력

 

그동안 각 본당에서 양극화 해소와 모든 신자들의 행복을 위해 사회복지사업에 나섰지만 본당 간의 현실적 차이를 해결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책임자들의 역할도 수동적이었다. 김장김치를 나누어 준다거나 장학금을 준다고 하면 받을 사람을 본당 내에서 찾는 정도였다. 그러나 시야를 더 넓혀서 시나 지구에 어떤 사회복지사업이 필요한지, 도움이 필요한 곳이나 사람이 어느 본당에 있는지를 알고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지난 7월에 ‘사랑나눔’ 천주교 노인 무료 급식소를 안산2지구에서 열었다. 지구 가정의 해를 맞이해서 지구 전 본당이 함께하는 가족 기차 성지순례(4천 명 정도 신청), 안산시 천주교 신자들이 모두모여 하는 가정대회(8천~1만 명 참석 예상) 등 여러 기획을 하다가 지구 사제들 사이에서 사회복지사업 이야기가 나왔고, 의견을 나누던 중 함께 대형사고(?)를 치기로 합의했다. 자세한 내용은 이러하다.

 

지금은 먼저 무료 급식소와 도시락 배달사업을 운영한다. 지구 관할지역에 있는 한 상가를 빌려서 걸어올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 거주하시는 어려운 어르신들께 매일 점심을 대접한다.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도시락 배달사업은 거리상의 한계가 있지만, 우리는 각 본당을 분점 삼아 급식소에서 각 본당으로, 각 본당에서 수혜자에게 배달을 한다. 이렇게 하면 급식소의 위치와 상관없이 지구 안의 모든 본당이 혜택을 볼 수 있다. 처음에 이야기된 것은 이렇지만 다른 사업도 구상하고 있다. 같은 장소에 아동 증진 센터도 운영하여 저소득층 학생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나아가 인력시장을 찾을 수밖에 없는 안산시내의 어려운 근로자들에게 따뜻한 차나 간단한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사업도 구상 중이다. 각 본당에서는 성미항아리를 놓고 쌀을 모으는데, 이따금 쌀이 넘쳐서 다른 복지시설에 기부하기도 한다. ‘사랑나눔’이 지구 사회복지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있는 힘은 일치에서 나온다. 혼자서는 마음만 앞서지 발을 뗄 수조차 없는 일도 지구의 8개 본당이 뭉치면 무한대의 힘이 생긴다. 투명하게 운영하고, 봉사는 돌아가면서 한다. 급식소가 순서만 정하면 각 본당에서 자신들이 맡은 주간에 훌륭하게 봉사를 해낸다. 천주교 신자들은 봉사를 하면 깔끔하게 잘 하기로 정평이 나있지 않은가. 물론 걱정도 있다. 지금 있는 사제들이 이동하면 어떻게 될지. 그러나 우리 가톨릭이 그렇게 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현재 있는 사제들이 일치한다면 하느님께서 힘을 주실 것이고, 이후의 문제는 또 풀어갈 방법이 충분히 있을 것이다.

 

3) ‘내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자

 

본당 안의 차이, 각 본당 간의 차이, 여러 공동체 간의 차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많을 것이다. 어떤 방법을 택하든 먼저 기준을 잘 잡고 자기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는 데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너무 자기 본당 중심적인 사고에 젖어있는 것 같다. 현재 우리 교회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사목지가 바뀌는데도 사제가 한 곳에만 영영 머물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현재의 직분에 충실하려다가 생기는 과욕이리라.

 

교회는 영원하지만 사람은 영원하지 않다. 사목자뿐만 아니라 신자들도 떠난다. 놓고 떠날 것이라는 생각이 우리의 시야를 더욱 넓혀주지 않을까? 높이 멀리 보면 각 본당, 지구나 대리구, 나아가 교구나 한국 교회가 할 일들이 보이지 않을까? 각 공동체마다 할 수 있는 일의 경계를 정하고 전체적으로 조율하는 사목정책을 먼저 세운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은 사목이 이루어질 것이라 낙관한다. ‘사랑나눔’처럼 여럿이 뭉칠 수 있다면, 자기 본당과 공동체 사정만 생각하지 않고 울타리 너머의 일에도 마음 쓰려 한다면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가톨릭은 언제나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추구하였고 이 일치는 또 다른 다양성을 낳아 우리에게 풍요로움을 선사하였음을 기억하자.

 

* 김길민 크리스토포로 - 교회법 박사이며 수원교구 서부, 포일, 호평성당 주임과 수원교구 사법대리를 지냈다. 지금은 안산 성 마리아 성당 주임신부 겸 안산2지구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08년 9월호, 김길민 크리스토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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