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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우리 교회의 외형주의, 성장주의에 대한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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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29 ㅣ No.665

[경향 돋보기] 우리 교회의 외형주의, 성장주의에 대한 반성

 

 

사회 전반에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양극화(빈부격차, 계층 간 괴리와 갈등 심화)는 교회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외형적 성과 위주의 교회 발전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따돌리게 마련입니다. 이는 이웃사랑과 하느님 사랑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한국 교회에 알게 모르게 숨어있는 성장 제일주의의 모습을 성찰함으로써, 신자 개인과 교회 공동체에 각성(?)의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외형주의와 성장주의에 대한 반성

 

아마도 제게 이런 글을 부탁한 이유가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장을 맡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도 교구장으로서 돈 걱정을 많이 하고 삽니다. 때로는 ‘왜 그래야 하는가?’ 반문하면서도 복음화의 과업을 완수하려면 학교를 세워야 하고 본당을 신설해야 하고, 효과적으로 사목을 하려면 피정의 집이나 병원도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많은 재원이 요구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한 일들에 얼마나 많은 재원을 투입하고 있는가?’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인천교구가 노동자들을 위한 일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고, 사회사목국에서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한 사업을 많이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을 쓰면서 먼저 나 자신을 반성하고 외형주의와 성장주의 때문에 잃어버릴 수 있는 귀한 것들을 가슴 깊이 새기고자 합니다.

 

아마도 교회가 잘 성장하려면 균형 있게 발전을 해야 할 것입니다. 자칫 외적인 성장을 핑계 삼아 가난한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 자신도 교구 전체를 생각할 때 섬이나 농촌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곳 신자들을 위한 배려는 얼마나 했는지를 헤아려봅니다. 성장주의에 묻혀 소외된 사람들을 보살피는 데 부족했다면 반성해야 하겠지요.

 

 

영적인 의미의 외형주의와 성장주의

 

잘 훈련된 군인들이라야 나라를 지킵니다. 엉성하게 훈련된 군인들은 나라가 위험에 빠지면 자기 몸 살리려고 도망치기에 바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엉성하게 훈련시킨 신자들을 많이 양산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반성하게 됩니다. 세례를 받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냉담하는 신자들이 너무 많아서 일 년에 수백 명 세례를 주는 본당에서도 실제 수계신자의 수는 증가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보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전체 신자 수는 폭발적으로 늘어 2005년 정부가조사한 종교 인구 센서스에 따르면 천주교 신자 수가 500만 명을 넘었습니다. 그러나 속사정을 보면 이 화려한 숫자 위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우고 있습니다. 성장은 많이 했으나 참신자의 수는 오히려 감소했다고나 할까요.

 

우리 선조들의 신앙을 이어받은 주님의 용사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놓으려는 결의에 찬 신자, 주님의 뜻이라면 내게 손해가 나더라도 주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마음을 가진 신자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형편입니다. 신앙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기보다는 두 번째 세 번째의 가치로 여기는 신자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 예로 주일에 자녀들을 성당에 보내지 않고 학교나 학원에 먼저 보내는 부모가 많다고 합니다. 하느님은 후순위로 밀려난 것입니다.

 

내가 할 것 다 하고 나서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은 올바른 신앙의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최우선의 가치로 하느님을 생각하고 모든 일에 하느님의 뜻을 최우선으로 두는 것이야말로 참신앙의 자세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왜 이렇게 초라한 신자들을 많이 만들어내고 있는 것일까요? 외형적 성장에 관심이 쏠려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준 탓은 아닐까요?

 

예전에 어떤 본당에 외국인 선교사가 본당신부로 있을 때 일입니다. 10명의 전교회장이 예비신자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서로 경쟁을 하다보니 어떤 사람은 세례를 받은 다음 사무실에 가서 “내가 세례를 받아줬으니 차비를 내라.”고 말할 정도였답니다.

 

어쨌든 우리는 외형적인 신자 수에 얽매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말 세례 받기 전에 자신의 입으로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그리고 해방주로 고백하고, 그분을 살아계신 분으로 체험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을 때, 곧 주님과 대화하는 상황이 됐을 때 세례를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신자가 된다는 것은, 하느님을 몸과 마음을 다해 죽기까지 사랑하겠다는 결심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며 아울러 이웃을 특히 나보다 못한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사랑하겠다는 결심이 선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많은 사람을 영세시켰다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참신자가 많아지게 해야 하겠지요.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 되는 교회

 

교회가 가난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편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너무 화려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주눅이 들 것입니다. 과거서구 교회는 부유했고 국민 대부분이 신자가 되었습니다. 성당이나 학교, 은행 등등 어디를 가든 신앙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앙이 삶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권위와 힘이 많았으며 큰 세력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어찌 보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힘이고 권세였습니다. 그 때문에 교회에서 가난하신 예수님의 진면목을 볼 수 없게 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습니다.

 

캐나다 세계 성체대회에서 만난 새스커툰 교구의 알버트 리갓 주교는 퀘벡 주의 많은 성당들에서 5%의 신자들만이 수계생활을 하고 있으며 심지어 2%만 수계생활을 하는 성당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과거에 교회에 너무 권위와 힘이 있었기 때문에 신자들이 자유를 찾아 나갔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의무적으로 세례 받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결과, 이 지경이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현재 우리 교회는 어떠한가요? 가난한 교회라고 말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힘없는 교회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 사회에 큰 영향력이 있는 세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자칫 많은 문제들을 동반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공동체가 크면 성직자나 수도자도 많은 신자들 가운데 숨어 있는 또는 가려진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배려하려고 그들을 방문하고 위로하고 힘을 북돋우려는 시간을 내기가 힘들어집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신자들을 위한 봉사에만 힘을 쏟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게 태어나셨고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파견되셨습니다(루카 4,18 참조). 예수님은 그들을 행복한 사람들이라 선언하시고 하늘나라는 그들의 것(마태 5,3 참조)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유에서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참여하셨으며, 그분은 배고픔과 목마름, 궁핍을 겪으셨으며, 더 나아가 가난한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시고, 그들에 대한 실천적 사랑을 당신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삼으셨습니다(마태 25,31-46; “가톨릭 교회 교리서”, 544항 참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제3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 개막연설에서 “재화의 보편 목적의 원칙은 가난한 이들, 소외받는 이들, 어느 모로든 자신의 올바른 성장을 방해하는 생활조건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아야 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다시 한 번 강력히 확언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간추린 사회교리”, 182항 참조).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라고 여겨져야 합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의 친구라고 여겨져야 합니다. 부유한 사람들의 모임터가 교회라면 가난한 이들은 교회의 언저리에서 눈물짓고 돌아설 것입니다.

 

 

주님을 더욱더 닮겠다는 새로운 각오

 

우리 교회는 그동안 사회복지를 위해서 많이 일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교회를 부유한 사람들의 모임체라고 비난하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닐 것입니다.

 

각 본당에서 예산의 10분의 1을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쓰고 있는지를 살피고 있으며 집행하고 있습니다. 각 단체들, 예를 들면 레지오나 빈첸시오회에서는 병들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음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 곧 우리의 주님께서 가지셨던 마음을 더욱 닮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무엇이었을까요? “가난한 사람, 소경, 절름발이, 앓는 사람, 중풍병자, 나병환자, 거지,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 불쌍한 사람, 죄인, 창녀, 세리, 과부, 귀신들린 사람, 박해받는 사람, 억눌린 사람, 포로, 수고하고 짐 진 사람, 율법을 모르는 무리, 군중, 작은 사람, 지극히 작은 사람, 말째, 철부지, 어린이, 길 잃은 사람, 말하자면 하류 계급의 사람들 또는 피압박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알버트 놀런,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

 

오늘날 우리 사회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점점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대도시 교회와 소도시 교회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더구나 농촌이나 섬 지역의 교회와 대도시 교회의 빈부격차 현상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인천의 경우 가장 큰 성당의 헌금액이 서울의 변두리 성당보다 못합니다. 이런 상황이고 보면 소도시나 농촌의 경우는 어떠하겠습니까?

 

우리는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입니다. 성체를 통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가진 것을 나눔으로써 양극화를 헤쳐 나가는 데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적극적으로 농촌의 생산품이나 섬에서 나오는 물품을 이용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도시와 농촌, 도시와 섬 본당들이 자매결연을 통해 인적교류를 하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 교회는 빈부의 문제를 함께 풀어나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하는 시점에 서있습니다. 주님께 지혜를 구하고 우리도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 최기산 보니파시오 - 주교. 인천교구장으로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08년 9월호, 최기산 보니파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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