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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서 여성의 존엄: 여성의 존엄성을 말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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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29 ㅣ No.664

[문헌 풀어 읽기] “여성의 존엄” - 여성의 존엄성을 말하기 위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황 교서 “여성의 존엄”(1988. 8. 15.) 이 올해로 반포 20주년을 맞았다. 교회에서 여성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문헌인 “여성의 존엄”을 바탕으로 남성과 여성의 문제, 교회 안 여성의 역할과 소명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다른 어떤 종교들 안에서보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여성들은 처음부터 특별한 존엄성을 가졌다. 이 여성의 존엄에 관한 여러 가지 중요한 측면들은 신약성경에 잘 나타나 있다. 여성들은 분명히 그리스도교의 일상적이고 실제적인 제도 안에서 매우 중대한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지만 그들의 온갖 잠재적 역량이 아직 선명하게 부각되지 못했다.” - 바오로 6세, “여성의 존엄”, 1항

 

 

‘곁에서’, ‘더불어’, ‘위하여’의 관계인 남녀

 

여성-남성을 음-양, 또는 여성성-남성성으로 이분하여 범주화하는 것은 편리하고도 명쾌한 분류법이기는 하지만 실재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남성이라고 모두 다 남성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며 또 여성이라고 해서 모두 여성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남자보다 더 억세고 힘센 여자가 있는가 하면 여자보다 더 섬세하고 부드러운 성향을 가진 남자도 있다. 복잡한 정체성을 가진 인간을 두개의 큰 범주로 분류하여 우열로 이분하는 것은 실제로는 그렇게 될 수도,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되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성, 남성을 둘로 나누고 그것을 우와 열의 관계로 파악하곤 한다. 그래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분리된 자의식을 가지기 어렵다. 여성은 남성보다 자존감이 낮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자신의 노력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성은 남성보다 소극적이다. 여성은….”이라고 쉽게 말한다. 떠돌아다니는 잡지, 대중서적들에서 이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우리의 심기는 불편해진다.

 

이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여성의 남성에 대한 종속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선포하고, 그것을 굳은 믿음 체계로 이해하면서 하나의 도그마로 만들어버린다. 또 드러내놓고 억압을 말하지는 않더라도 하느님과 하느님에 대한 인간관계의 편파적인 단일 성 상징주의(one-sex symbolism)를 말함으로써 쉽게 여성에 대한 외적 억압을 정당화해 버린다. 물론 이러한 작업은 어느 한 순간에 어느 한사람의 머릿속에서 구상되지는 않는다. 여러 신학자와 사상가를 통해 아주 오랫동안 공공연하거나 또는 은밀한 방법으로 이루어져 오면서 여성들은 남성보다 열등하며 부차적인 존재라는 왜곡된 믿음을 만들어내고 확산시킨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참조)보다는 “주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깊게 잠들게 하신 다음 아담의 갈빗대를 뽑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시고는 그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셨다.”(창세 2,18-25 참조)는 이야기에 더 익숙하다.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 여자를 지으셨다는 이야기는 결국 여자를 남자의 부속물로 간주하는 근거로 이용된다. 갈비뼈 담론의 위력은 실로 대단하다. 그래서 아담의 갈비뼈 이야기를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조차도 그 이야기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래. 남자들은 고작 진흙으로 만들었지만 우리 여자들은 하느님의 위대한 창조물인 아담의 갈비뼈에서 나온 존재지. 그러니 더 존귀한 존재 아니겠는가.”라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들은 “남녀 모두 하느님의 모상과 닮은꼴로 창조되었다”(창세 1,27)는 성경의 진리를 배반하는 것이다. 여자가 남자의 동반자, 협조자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왜 “여자는 남자의 부속물이다.”의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또한 “그가 너를 지배할 것이다.”(창세 3,16)라는 표현에 대한 여성들의 반발이 왜 곧바로 ‘여성의 남성화’ 또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우월’로 이어져야 하는가(“여성의 존엄”, 10항 참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하느님의 진정한 뜻은 분명 “남자든 여자든 하느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는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에 있을 것이다. 남녀 둘의 합일체에서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 ‘곁에서’, ‘더불어’, ‘위하여’ 살도록 창조된 존재들이며 그러기에 그들 모두는 똑같이 존엄하다(7항 참조).

 

 

교회 안의 여성 존엄과 소명

 

여성은 요리를 잘한다고 간주되면서도 호텔의 제일 높은 주방장은 언제나 남성이다. 여성은 바느질을 잘한다고 생각되지만 유명한 여성 외과의는 흔치 않다. 또 여성은 언어 능력이 뛰어나다고 과학적으로 증명되지만 유능한 아나운서 중에는 남성의 수가 더 많다. 종교단체에 가보면 여성 신자 수가 남성 신자 수보다 많지만 중요한 단체장은 남성들이 맡고 있다. 전례, 단체 활동, 본당 내 주요 행사에 참가하는 여성 신자는 많지만 의사 결정 과정이나 여성 지도력의 계발 등의 리더십 관련 영역에서 여성의 참여는 극히 저조하다.

 

여성을 폄하하는 발언은 종교적 가르침 속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오, 주여, 당신이 나를 여자로 창조하시지 않은 것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나이다.”라는 정통 유다인의 일상적 기도나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신 그는 너에게 너희들 가운데 너를 번성시키라고 아내들과 그리고 황소와 암소를 주신다. 아무것도 그와 비교될 수 없다.”는 코란 경전의 구절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빌려 여성을 남성에 귀속시키고 차별하는 대표적인 예이다. 또 많은 사람들은 성경의 많은 대목이 하느님의 사랑을 신랑, 아버지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 ‘남성 하느님’을 떠올린다.

 

그렇지만 이 같은 성경의 표현이 남성의 육체적 특징들과 동일하게 이해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성경에는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이사 66,13), “어미 품에 안긴 젖 뗀 아기 같습니다. 저에게 제 영혼은 젖 뗀 아기 같습니다.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시편 131, 2-3)와 같은 언설들도 동시에 존재하며, 이는 하느님의 사랑이 여성성으로 표현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사실 하느님은 남성성, 여성성 모두를 지닌 분이시며,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생겨났다(8항 참조). 하느님을 의인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성별을 둘러싼 문제는 각각의 상황에 맞는 방식에 의거하여 설명하기 위함이며, 애초에 하느님은 아버지임과 동시에 어머니로서 육체적인 남성/여성으로 분류될 수 없는 분이시다. 그리고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우리가 남성성, 여성성, 부성, 모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는 말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의 눈으로 인간의 존엄, 곧 인간의 가치를 보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만났던 수많은 여자들 - 십팔 년 동안이나 병마에 사로잡혀 허리가 굽어 몸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여자(루카 13,11), 열병으로 누워있는 시몬의 장모(마르 1,30),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인(마르 5,25-34), 과부(루카 7,13), 간음하다 들킨 여자(요한 8,3-11), 야곱의 우물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요한 4,10) - 모두는 더럽거나 죄인으로 취급되지 않고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을 반영한다. 여성 개개인은 “지상에서 하느님께서 그 자체를 위해 원하신 유일한 피조물”이라고 이해된다. 이 때문에 여성 개개인의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교회 안에서 확인되고 상기되어야 하며, 복음 선포와 구원 사업의 일부로 삼아야 한다. 나아가 파스카 신비의 차원으로 흡수되어야 한다(13항 참조).

 

* 김 세시리아 체칠리아 - 성균관대학교 유교문화연구소의 수석연구원. 동 대학에서 동양철학, 여성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주교회의 여성소위원회 위원,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동양여성 철학 에세이”, “철학을 만나면 즐겁다”, “동양철학”, “여성주의 철학”(공역)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는 “가톨릭의 ‘믿음적’ 가족 개념을 통한 한국 가족의 전망” 외 다수가 있다.

 

[경향잡지, 2008년 8월호, r김세시리아 체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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