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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이 세상, 어떻게 바꿀 것인가? - 회칙 진리 안의 사랑으로 진단하는 한국 사회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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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10-18 ㅣ No.695

[경향 돋보기 -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회칙 “진리 안의 사랑”] 이 세상, 어떻게 바꿀 것인가?


회칙 “진리 안의 사랑”으로 진단하는 한국 사회 현실

 

 

1.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반포하신 “진리 안의 사랑”은 레오 13세 이후 사회 문제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최근에 나온 것이다. 현 교황님께서 “현대의 새로운 사태”라고 평가하며, 이 문헌에서 거의 출발점으로 삼다시피 하는 바오로 6세의 “민족들의 발전”과 그 20년 후에 반포된 요한 바오로 2세의 “사회적 관심” 이후, 다시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같은 주제를 두고 또 하나의 문헌을 발표하지 않을 수 없는 정황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날로 더욱 줄기차게 그리고 전폭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와 그것이 교회에 던지는 도전”(9항)이다. 지난 20-30년 동안 세계는 그 이전에 경험한 적이 없는 깊이와 넓이로 빠른 변화를 거듭해 왔다. 정치적으로 가장 큰 변화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상징되는 마르크스식 공산주의 세계의 와해와 소련의 지배하에 있던 여러 나라들의 독립이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이념으로 분단된 마지막 국가로 남아있지만 세계의 큰 흐름은 이미 그 단계를 한참 넘어서, 과학기술을 앞세운 엄청난 변화가 온 세계 전 인류의 삶을 구석구석 파고들어 사람들의 삶과 의식을 바꾸고 있다.

 

 

2. 세계의 변화라고 했지만, 이 글의 취지에 비추어, 눈길을 우리나라에 국한시켜 보더라도, 이 문헌에서 언급하고 있는 거의 모든 변화와 문제는 고스란히 우리 사회의 그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을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나라만큼 그 모든 변화와 문제의 크기를 종합적으로 또 첨예하게 느낄 수 있는 곳도 세상에 드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과학기술이나 경제 분야에서 전혀 눈길을 끌지 못했던 우리나라가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몇 가지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첨단을 달리고 있고, 경제적으로도 세계 10대 교역국이 될 만큼 성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이 문헌이 지적하는 대로(21항) 성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수많은 사람들을 곤궁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경제성장과 과학기술의 진보에 따른 역기능과 문제의 심각성(21항) 또한 세계 어느 지역보다도 우리 사회에서 두드러진다는 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의 부가 절대량에 있어서는 증가하고 있지만 불평등이 점점 커가고 있다.”(22항)는 이 문헌의 지적은,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서 더욱 심각한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회복지제도와 조세정책 등 최근의 경제정책까지 가세하여 양극화 추세는 점점 더 속도를 내고 있다. 이렇게 가다가는 지금까지 가난한 지역에서나 볼 수 있었던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불평등”(22항)이 우리 사회에도 확산되고 고착될 가능성마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과학기술을 앞세운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삶의 양식이 갑자기 바뀌고, 생활 구석구석 파고든 현대적 생활용품들에 둘러싸여, 사람들은 미처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과학기술에 대해 맹목적 신뢰를 두며 그 절대적인 영향과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의 정신적, 영적 깊이가 가려지고, 과학기술이 뚫고 들어가고 설명할 수 있는 깊이까지만 인정하는 경향이 생겨, 사람의 삶이 “참을 수 없이 가볍게” 되어버리는 결과를 낳고 있다. 물질생활이 윤택해진 만큼, 그 정신이 사막화할 위험이 나타난 것이다.

 

 

3. 세계화의 물결 또한 거의 최소한의 방파제도 없이 그대로 우리나라를 강타하고 있다. 그 가장 쓰라린 예 중의 하나를 우리는 이른바 국제구제금융사태를 계기로 겪었다. 당시 단기 외채나 주식에 관한 우리나라의 제도적 허점을 이용하여, 도박하듯이 대규모로 투자했다가 바로 한꺼번에 빼가는 식으로 우리의 금융질서를 교란시킨 국제투기자본의 농간에 온 나라가 뿌리째 흔들렸다. “다분히 투기적인 성격의 악질적 금융운용이 실물경제에 미치는 치명적 폐해”(21항)를 우리가 혹독하게 겪은 것이다.

 

세계화의 물결이 우리 사회에 가져온 또 하나의 현상은 대규모 이민(62항)의 유입이다. 이민 가운데에서도 결혼 이민은 우리의 현재나 미래에 예측할 수 없는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비교적 오랜 기간에 걸쳐서 서서히 진행되어 온 다른 많은 나라들과는 달리, 우리는 갑자기 한꺼번에 대량의 이민이 국내로 유입됨으로써, 고국을 떠난 이들을 적절히 맞이할 제도적 장치나 국민의 의식에 결함이 많아 양쪽 당사자들이 큰 불편을 겪고 있다.

 

세계화의 또 다른 결과의 하나는 문화의 교류이다.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현대의 통신기술과 교통수단 때문에, 미국에서 유행하는 노래가 며칠 후에는 한국에서도 유행하고, 외국인의 대량 이주와 함께 그들의 문화도 따라 들어와, 먼 이야기로만 들리던 세계 여러 지역의 생활 풍습과 다양한 문화가 우리에게 익숙해지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이질적 문화들이 만나면서 생기는 여러 가지 형태의 반응이 나타난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문화들 간에 참된 대화가 이루어져서 서로를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것을 잘 지키며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화절충주의가 나타나 이질적 문화들이 원칙 없이 뒤섞임으로써 어떤 것도 제대로 살아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문화상대주의에 빠져 전통을 잊고 자신의 신원을 망각하는 현상도 생겨난다. 이런 점에서도 우리나라는 가장 대표적인 예의 하나일 것이다. 특히 인터넷 등 잘 발달된 현대 매체를 타고 밀물처럼 밀려오는 외국 문화, 그 가운데에서도 질이 나쁜 것들이 더 극성스럽게 들어와 우리의 전통 문화를 휩쓸어버리고 정신풍토를 황폐시키고 있다.

 

문화현상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종교에 관해서도 세계화의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여러 가지 형태의 반응을 보인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종교 광신주의, 무차별주의, 근본주의에 뿌리를 두는 테러는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지만, 다행히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현상들이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아마 우리나라는 여러 종교들이 비교적 평화로운 공존의 상태를 유지하는 점에서 세계에서도 드문 예의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물질주의의 거대한 풍조를 타고 종교가 현세 기복주의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강해져서 그 본래의 역할과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점은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밖에도, 환경문제, 노동의 유동성, 고용의 불안정, 실업, 문제를 사회와 구조에만 돌리고 개인은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경향, 인구의 정체 내지 감소 현상, 외로움 등등 대내적인 문제들과, 국제사회에서 더 어려운 나라를 돕기 위한 개발협력을 더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일 등의 과제가 있다. 요컨대 이 문헌에서 언급하고 있는 문제와 과제치고 우리와 무관한 것은 거의 없다고 할 것이다.

 

 

4. 문제는 이렇게 광범위하고 복잡한 과제를 어떻게 접근하고 해결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먼저, 이 모든 문제의 배경이라 할 수 있는 세계화에 대한 생각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여기에 대한 이 문헌의 가르침을 보자.

 

“세계화라는 현상의 원인을 꼭 짚어낼 수도 없고 사람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작동하는 어떤 힘이나 구조라고 생각하여, 그것을 큰 재앙인 것처럼 말하는 일이 더러 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을 하나의 사회-경제적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것만이 세계화의 유일한 차원은 아니다. 이 눈에 띄는 흐름의 저변에서는 인류자체가 점점 더 서로 긴밀히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개인과 백성들이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 각기의 책임을 수행하기만 한다면, 세계화는 많은 혜택과 발전의 기회를 줄 수 있다. (…) 한 과정으로서 세계화가 지니는 진리와 그 근본적 윤리성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모든 인류가 하나의 가족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 세계화가 지니고 있는 몇 가지 구조적 요인을 부인하거나 과장할 일은 아니지만, ‘그것은 자체로 볼 때,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그것을 선이나 악으로 만들어 가는 것은 사람이다’(요한 바오로 2세).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그냥 당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그것을 조정하고 사랑과 진리로 바로잡아 그것이 선을 향해 가도록 만들어야 한다. 맹목적으로 반대만 하면, 그런 잘못된 태도 때문에, 그 과정이 지니는 긍정적인 측면을 깨닫지 못하여, 발전을 위해서 그것이 줄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는 결과를 낳고 말 것이다. 세계화 과정은 제대로 이해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기만 하면 전 세계적 차원에서 광범위하게 부를 재분배할 수 있는 기회로서 인류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러나 방향을 잘못 잡으면 가난과 불평등을 증대시키고 전 지구적 위기를 몰고 올 수도 있다”(42항).

 

우리는 여기에서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세계화를 주제로 교황청 사회학술원에서 하신 말씀의 한 대목을 인용할 필요를 느낀다. “회칙 ‘백주년’에서 저는 시장경제가 사람들의 자유로운 주도권을 존중하면서 그들의 경제적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적합한 방법임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것은 그 사회적 집단이 지니는 공동선을 고려하며, 해당 공동체의 통제를 받아야만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상업과 통교가 국경선의 제약을 받지 않게 된 오늘날에 와서는, 전 인류적 관점에서 본 공동선이 시장 고유의 논리를 규제하는 통제 장치를 요구합니다. 모든 사회적 관계를 경제적 요인으로 축소시켜버리려는 경향을 피하고, 새로운 형태의 배제와 소외에 갇혀버린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5. 그런데 이 모든 문제와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구체적으로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크게 보면 두 가지 방향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세계의 부를 거의 다 차지하고 있는 소수의 개인과 집단으로부터 강제로 그것을 빼앗아 대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방법이다. 또 하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고 연대의식을 고취시켜 여유가 있는 개인이나 집단이 그 재산을 가난한 이들과 기꺼이 나누어 모두 함께 살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첫 번째 방법 가운데 가장 대규모적이고 조직적인 실험을 인류는 지금 끝내가고 있다. 우리의 문헌에서도 언급한(23항)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상징되는 마르크스식 공산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그 직전까지도 밖에서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던 일이 벌어져 공산주의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외부의 침략이 아니라 자체 내부에 숨어있던 어떤 문제, 한마디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체제였기 때문에, 세월이 가면서 그 모순이 점점 더 크게 드러나 그 엄청난 체제가 자멸의 길로 들어선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두 번째 길인데, 이것이 바로 교회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확산과 함께 그 문제가 크게 부각되면서 줄기차게 제시해 온 가르침으로서, ‘교회의 사회교리’로 알려진 노선이다. 그 가운데 가장 최근에 나온 베네딕토 16세의 “진리 안의 사랑”도 그동안의 핵심적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는데,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진리가 그것이다. 그것을 요약하면 다시 두 가지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된 존재로서 초월적 특성을 지닌다는 점, 두 번째는 인간 본성이 고장나 있다는 점이다. 이 두 번째 진리를 감안하지 않으면, 공산주의처럼, 천사들에게나 가능할 이상향만을 그리며(14항) 추진한 일이 결국은 자유를 박탈하고 생활 전반을 철저히 통제하여 말 그대로 철의 장막을 치고서만 유지되는 거대 수용소를 만드는 결과를 빚고 만다. 첫 번째 진리를 부정하면, 인간을 하나의 경제 동물, 빵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대상으로 착각하여 만든 세상에서 온갖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사람마저 그 정신이 황폐해지고 삶의 목적을 잃어 방황하게 되며 심하면 스스로 생명을 끊는 일까지 자주 일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남은 길은 분명하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진리와 인간 본성이 고장나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현실적인 해결의 방안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방법이 사람 하나하나의 마음이 바뀌는 것을 전제로 해서만 통한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거의 목숨만큼이나 아끼는 재산을 나누라는 요구이니 그것이 실현 불가능한 길이라는 반론에 부딪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반론 앞에 우선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진퇴양난의 궁지에 서서 우리는 이 문제를 들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분께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복음서에 보면 다행이 우리를 대신해서 비슷한 문제를 들고 그분께 달려간 사람이 있었다. 그 장면을 보자.

 

 

6.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마르 10,17) 예수님의 명성을 듣고도 망설였든지, 아니면 겨우 마지막 순간에야 들었든지, 자기가 사는 고장을 이제 막 떠나시려는 주님 앞에 황급히 나타나 무릎을 꿇고 평소에 품고 있던 가장 중요한 문제를 꺼내고 있는 이 사람에게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두고 어떤 형태로든 끊임없이 자문하며 진지하게 찾고 있는 우리 자신을 만난다. 누가 아니겠는가? 그에게 익숙한 표현은 “영원한 생명”이지만, 말마디야 어떻든, 우리는 누구나 참삶의 길을 두고 열병인 듯 속으로 앓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예수님의 일차 답변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당당하게 말한다. “선생님, 그 모든 것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

 

그가 주변사회에서 인간관계의 규범으로 제시된 모든 것을 성실하게 지켜온 사람으로서 보통 의미의 선하고 나무랄 데 없는 생활을 해온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거기까지만 해도 그게 어딘가?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 하셨다.”고 복음서는 전한다. 여기까지가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덧붙이신다.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그 사람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고 복음서는 전한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끝날 수가 없다. 예수님의 관심은 그 부자 못지않게 그 대화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둘러보시며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하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놀란다. 그때까지만 해도 재산은 하느님 축복의 표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의 놀라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제자들은 절망하여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며 서로 수군거린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뜻이 있어서 이 지점까지 제자들을 몰고 오셨던 것이다. 다음의 진리를 알려주시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는 일이다.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

 

 

7.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요체다. 이 세상에 좋은 가르침은 넘쳐난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도 사람들은 잘 안다고 할 수도 있다.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인간사회를 개선하고 때로는 혁명도 불사하며 꿈에 그리는 세상을 설계해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상향이 사람의 능력 범위를 벗어난 지점에 높이 솟아있다는 데에 있다. 꿈속에 그리는 땅이 저 위에 까마득히 높이 솟아있는 데 반해, 자신의 몸은 어림도 없는 이 아래에 붙어있는 현실을 보며 부르짖은 한 신앙인은 우리 모두의 심정을 대변한다. “하느님, 들어주소서, 제 부르짖음을. 제가 비는 기도를 살펴 들어주소서. 시름없는 이내 마음, 땅 끝에서 부르짖고 있사오니, 저로선 못 오를 바위 위에 이 몸 올려주소서”(시편 60,2-3).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 이 점을 분명히 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제 힘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또 많은 시간과 힘을 허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안 되는 일은 깨끗이 안 된다고 인정을 하고 나면,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길이 보일 수도 있다. 제자들에게는 그 예상치 못한 방향이 바로 저 ‘위’였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하신 말씀은 이것이었다.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49). 루카는 그 복음서 끝 부분에서 이 말씀을 전한 다음, 자기가 기록한 복음서의 후편인 사도행전의 시작 부분에서 같은 내용을 다시 한 번 반복한다.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그리고 사도행전 2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 곧 위에서 오는 힘을 실제로 내려주시는 장면과, 그렇게 해서 비로소 실현된 이상 사회를 이런 말로 전해준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한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사도 2,44-46). 초대공동체의 이 이상은 역사가 흐르고 교회 규모가 커가면서 점점 흐려진 것이 사실이지만, 수도 공동체에서는 거의 손상 없이 전해지고 있다. 교회 전체를 위해서도 이 이상은 깃발처럼 나부끼며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를 가리켜주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 23세 교황님이, “우리가 진짜 공산주의자다.” 하신 말씀은 깊은 의미가 있다. 마르크스식 공산주의에 비해 이 경우는 총이나 대포가 뿜어내는 불 대신, 위에서 오는 사랑의 힘, 사랑의 불길이 원동력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전자가 사회구조를 뜯어 고치는 것을 수단으로 했다면, 후자는 개인의 마음, 그 심장을 바꿔 끼는 것을 수단으로 한다.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주리라. 나의 기운을 너희 속에 넣어주리니, 그리되면 너희는 내가 세워준 규정을 따라 살 수 있고 나에게서 받은 법도를 실천할 수 있게 되리라”(에제 36,26-27).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를 떠난 사람은 잘려나간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버린다”(요한 15,5-6).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게 해주시는 분이시다.

 

 

8.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끝이 없고 그 하나하나가 다 절박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주신 방법 대신 다른 어떤 길을 택한다면 우리는 끝없는 방황과 좌절과 실의를 겪으며 상처만 받고 원한에 싸여 살다가 그대로 삶을 마칠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을 한 치라도 들어 올리는 사람은 세상을 들어 올리는 사람이다”(엘리자벳 러쇠르). 세상을 바꾸는 가장 확실한 길은 내가 바뀌는 일이다.

 

요즈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신앙인으로서의 그 진면목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그분은 손발이 묶이고 쇠뭉치가 달린 채 바다에 수장될 절체절명의 순간에 예수님을 만났고, 이 이후로 하느님의 존재와 그분의 손길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졌다고 술회하였다. 그 믿음으로 그분은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도 자신이 추구해 온 민주와 평화는 반드시 온다는 확신을 가지고 평온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국회의원으로서나 대통령으로서 정치를 하는 과정에서도 평화, 민주,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 등, 보편적 가치에 대한 신념을 지켜나갈 수 있었으며, 그것이 자신의 생전에 실현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평온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시대 참으로 모범적인 신앙인이며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한 개인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 변화될 때, 그것이 사회와 나라를 위해서도 얼마나 큰 의미를 띠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한 나라 한 사회에서 인간의 눈으로 보아도 뚜렷하고 책임 있는 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인간은 설사 한 사회에서 가장 버림받고 무능한 처지에 있다 해도, “외적 유혹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자신의 행복과 불행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동 역할은 자신이 하고 있는 것”(17항)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또 그것을 지킬 수 있을 때에야 자신의 존엄성과 천부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9. 우리 그리스도교 정신은 ‘사랑’으로 요약된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과 억눌린 이들을 위해서 벌이는 사회정의 차원의 투쟁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피할 수 없는 의무다. 그리스도인과 모든 인간은 몸으로 또 마음으로 이 의무를 어떻게 실천했느냐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돌 심장을 살 심장으로 바꿀 때”(에제 36,26; 79항)에만 우리는 “인류 가족 역사의 목표인 하느님의 보편적 도시 건설에 기여하게”(7항) 된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바로 그 살 심장, 그 힘이신 성령을 건네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셨고, 지금은 몸으로 세상에 계실 때보다 성령을 통해 더 확실하게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4,20).

 

* 이병호 빈첸시오 - 주교. 전주교구장. * 인용한 성경구절들은 필자의 요청으로 “공동번역”을 따랐다.

 

[경향잡지, 2009년 10월호, 이병호 빈첸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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