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회칙 민족들의 발전: 가난한 라자로도 부자의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세상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9-23 ㅣ No.686

[문헌 풀어 읽기] “민족들의 발전” - 가난한 라자로도 부자의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세상

 

 

‘개발’과 ‘발전’이란 용어는 장밋빛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20세기 중후반을 풍미하던 대표적인 이 용어가 21세기를 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러하다. 개발을 통해 발전을 경험한 우리는 개발이 행복을 가져온다는 굳건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 경제를 뒤흔들고 있는 오늘날에도 개발을 통한 발전에 매달리는 것은 이런 확신 때문일 것이다. 50년간 발전을 추구하여 온 우리가 차분하게 개발을 통한 발전을 새삼 되새겨보아야 하는 이유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삶이 이러한 발전으로 얼마나 사람다운 삶으로 변화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일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일어난 용산참사 역시 이런 의문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많은 사제들이 그곳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미사를 봉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구를 위한 발전인가?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는 “민족들의 발전”이란 회칙을 발표하였다. 1960년대는 갈등이 첨예화된 시기였다. 제1세계인 자본주의 국가와 제2세계인 공산주의 국가들의 동서 이념 차이, 제2차 세계대전 후 비약적인 경제발전으로 선진국 위치를 공고히 다진 부유한 나라와, 탈식민화를 이루었으나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과거 식민국에 예속된 가난한 나라의 빈부격차가 바로 갈등의 근본 원인이었다.

 

“민족들의 발전”은 개발과 발전을 가난한 이들의 관점에서 고찰한다. 이 회칙이 가난한 민족의 고통을 외면하는 선진국과 부유한 사람들을 향한다는 것은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회칙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이들에게 던지는 것 같다. “너희들이 자랑하는 경제발전은 누구를 위한 발전이냐? 인간 모두가 함께 발전하여야 함에도 인류의 절반 이상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느냐? 그러한 발전이 진정한 발전이냐?”

 

회칙은 가난한 이들의 비참한 현실을 격정적인 용어로 이렇게 지적한다. “여러 대륙에서 무수한 남녀가 굶주리고 무수한 소년소녀들이 영양실조에 걸려 꽃다운 나이에 숨져가고 있고”(45항), “굶주리는 민족들이 오늘 부유한 민족을 향하여 처절히 호소하고 있으며”(3항), “탓 없는 어린이들의 무수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느냐 없느냐, 빈곤에 신음하는 수많은 가정들의 생활이 더욱 더 인간다운 조건을 갖출 수 있느냐, 마침내 세계의 평화와 문명의 장래가 보장되느냐 하는 위기에 봉착한”(80항), 현실 상황은 “분명 하늘을 향해 울부짖을 만큼 정의를 벗어났다”(30항).

 

이어서 회칙은 이러한 상황에서 “부유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자신의 이익에만 급급해한다면 드디어 하느님의 제재와 가난한 사람들의 분노를 자극할 뿐이며, 또 거기서 어떤 사태가 빚어질 것인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49항)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부유한 자와 부유한 민족은 급속도로 부유하여지고 가난한 자와 가난한 민족은 더욱 가난해질 수 밖에 없는 불의한 구조를 하느님과 가난한 사람들은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26항, 8항 참조).

 

40여 년 전에 발표된 이 회칙은 바로 오늘, 우리의 현재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이 회칙은 오늘을 살아 숨 쉬는 문헌이다.

 

 

인간발전에 기여할 때만

 

이러한 잘못된 발전을 보면서 회칙은 발전에 대한 교회의 견해를 피력한다. 회칙은 먼저 인간의 존재 목적이 인간완성을 통한 구원에 있고 이러한 완성을 향하여 발전하도록 하느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았으며, 인간은 공동체로 살아가며 공동체 역시 발전을 통한 완성에 이르도록 기여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설명한다. 회칙은 이를 ‘인간발전’이라 부르고 있다. 회칙은 발전을 “개인이나 전 인류가 인간답지 못한 조건에서 더욱 인간다운 조건으로의 변화”(20항)라고 정의한다. 사람이 더욱 사람다워지는 것이 바로 발전이라는 의미이다. 창조주의 모습을 닮게 창조된 인간이 보기 좋았던 창조 당시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 발전이라는 것이다. 모든 제도와 구조, 사상과 문화 등 인간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것은, 인간완성을 위한 인간발전에 종속되어 기여할 때에만 정당성을 갖게 된다.

 

회칙은 경제발전이 인간발전에 기여하나 경제발전만으로 인간의 발전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14.18-19항 참조). 그 이유는 경제발전만을 완전한 발전으로 이해한다면 이러한 발전은 재화의 획득과 축적만을 추구하는 발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모든 이가 이 덫에 걸려있다. 그래서 더 많이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발전할 수 있고 행복해진다는 신앙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를, 재물을 신으로 섬기는 물신주의에 빠뜨린다. 결국 인간은 재물의 노예가 되어 비인간화의 처지로 전락한다.

 

 

재화와 사유재산권, 완전한 휴머니즘

 

재화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원칙을 회칙은 이렇게 제시한다.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이용하도록 창조하셨다. 따라서 창조된 재화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에 입각하여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게 제공되어야 한다. 이 세상 만물의 주인은 오직 한 분, 창조주 하느님이시며 인간은 지상생활을 하기 위하여 이를 사용하고 임시로 관리하는 하인이고, 이 하인은 주인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사유권과 상거래의 자유는 이 원칙의 실현을 촉진시켜야지 방해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22항; 사목헌장, 69항 참조).

 

사유재산권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사유재산권은 인간발전에 필요한 것이기에 인간의 타고난 권리이다. 그러나 사유재산권이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특히 부요한 이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가진 바를 내어놓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돌려주어야 하는 것을 돌려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함께 사용하도록 주어진 것을 독점하였기 때문이다(23항 참조).

 

한편, 회칙은 진정한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근본 원인을 잘못된 사상에서 찾는다. 그 사상은 “경제 발전의 근본 동기는 ‘이윤’이고, 경제의 최고 법칙은 ‘자유 경쟁’이며, 생산 수단의 사유권은 ‘절대적인 권리’로서 사회적인 한계도 의무도 없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무제한의 자유주의는 ‘금융상의 국제주의 또는 국제적 제국주의’를 낳았으며 폭군 같은 독점상태로 길을 닦아놓았다. 엄숙히 지적하는 바이지만 경제라는 것은 오로지 인간에게 봉사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26항).

 

회칙은 완전한 휴머니즘을 지향하는 발전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완전한 휴머니즘은 인간 개인 전체[全人]와 전 인류의 완전한 발전을 의미한다. 따라서 완전한 휴머니즘은 자신의 사명을 자각하며 절대자이신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는 휴머니즘이다. 인간이 사회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인간관계 구조 속에서 자신의 발전과 타인의 발전에 기여하고, 다양한 문화를 접하여 정신적 성장을 추구하는 휴머니즘은 물질주의 유혹에는 저항하는 사상이다. 특별히 가난한 이나 빈곤한 민족은 부유한 이들과 부유한 민족으로부터 물질주의에 물들지 않는 휴머니즘을 지녀야 한다(42항 참조).

 

 

인류 공동체의 공동 발전을 위한 제안

 

이 회칙은 개발과 발전에 대한 위와 같은 고찰 후에 인류 공동체의 공동 발전을 위한 현실적 제안 세 가지를 하고 있다.

 

그 첫째는 가난한 민족에 대한 원조이다. 이것은 상호 연대성의 의무에 따른 것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선진국은 개발도상국을 원조해야 할 중대한 의무가 있다.”(사목헌장, 86항)고 천명한 바 있다. 이러한 원조는 가난한 민족이 자신의 발전을 이룩하도록 하는 개발원조로, 상호협력의 동반자적 관계를 바탕으로 한 계획성 있는 원조를 의미한다. 긴급한 경우에는 긴급구호적 원조도 필요할 것이다.

 

둘째는 공정한 통상 관계의 실행이다. 이것은 사회정의의 의무에 따른 것이다. 생색내는 원조의 뒤편에서 소리 없이 이루어지는 불의한 통상구조는 가난한 민족을 수탈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불의한 통상구조는 최대한의 이윤, 무제한적 경쟁, 제한 없는 소유권으로 표현되는 자유주의적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유주의적 통상관계가 정당성을 확보하는 조건은 대등한 경제력을 가진 민족 사이에서이다. 대등하지 않은 부유한 민족과 가난한 민족 사이의 통상관계는 정의에 입각한 관계여야 한다. 회칙은 이러한 통상관계를 공정한 통상관계로 부르고 있다. 불균형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통상관계는 쌍방의 합의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말로는 자유합의지만 실제로는 어쩔 수 없이 합의한 국제통상과 무역은 정의와 공정을 벗어난 것이다. 쇠고기 파동으로 말미암은 촛불집회나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강한 저항은 정의에 입각한 공정한 통상관계를 요구하는 소리일 것이다.

 

셋째는 보편적 사랑의 확산이다. 회칙은 오늘날 인류 문명이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은 형제적 사랑의 유대가 끊긴 데에 근원적 원인이 있다고 본다. 보편적 사랑은 국가와 인종, 피부색과 언어를 넘어서서 모든 인간을 받아들인다. 유학생, 이주 노동자, 이주민을 받아들이는 문화, 저개발국을 지원하는 기술자, 전문가, 봉사자들은 이러한 사랑의 표지이다. 특히 젊은이들이 고국을 떠나 어려운 민족에게 다가가는 것은 미래의 인류를 위한 중요한 공헌이 될 것이다.

 

모든 인류가 공동발전을 통해 완성으로 가는 목표를 회칙은 이렇게 묘사한다. “인종이나 종교나 국적의 차별 없이 누구나 다 타인과 자연의 예속상태에서 해방되어 참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계, 명실상부한 자유세계, 가난한 라자로도 부자와 같은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인간 공동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인 것이다”(47항).

 

이러한 사회를 건설해 가는 발전을 회칙은 ‘평화의 새 이름’이라고 명명한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일을 실현 불가능한 꿈으로 생각하지만 회칙은 이 ‘이상’이 더 이상 꿈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이 길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창조 목적을 이루려 하시는 길이며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길이기 때문이다.

 

* 최재선 폴리카르포 - 주교회의 인성회 · 사회복지위원회 사무국장을 지냈으며, 현재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 지학순 정의평화기금 이사 등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09년 9월호, 최재선 폴리카르포]



596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