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교회와 생명: 존엄사 논란과 가톨릭교회의 가르침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8-21 ㅣ No.678

[경향 돋보기 - 교회와 생명] 존엄사 논란과 가톨릭교회의 가르침

 

 

연세의료원 사례

 

연세의료원에서 폐암검사를 위한 폐조직 채취 과정 중 과다출혈로 뇌 손상을 입은 뒤 식물인간 상태에 빠져있던 77세의 김 할머니에 대해 가족은 평소 환자가 이러한 연명치료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며 인공호흡기를 제거할 수 있게 해달라는 소송을 냈다. 결국 가족의 뜻을 받아들인 대법원의 결정에 따라 지난 6월 23일 인공호흡기를 제거하였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환자가 스스로 호흡을 하며 임종하지 않고 안정을 찾자 가족 측은 김 할머니의 상태가 양호함에도 1년 4개월째 호흡기를 부착해 놓았던 것은 과잉진료였다며, 중환자실에서 치아가 빠지고 입술이 변형되는 등 신체의 훼손을 입은 데 대한 수천만 원의 위자료 청구 소송을 다시 제기했다. 지난 3월에 병원 측에서 의료과실로 식물인간 상태에 이르게 했다며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과잉진료까지 추가하기로 한 것이다. 이번 김 할머니 사건을 계기로 최근 우리 사회에 존엄사에 대한 관심과 논란이 고조되고 있으며, 존엄사법 제정 움직임이 일고 있다.

 

그러나 ‘존엄사법’ 제정은 환자가족의 부담이나 경제적인 부담 때문에 치료를 포기하고 생명단축을 선택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기 전에는 시기상조이다. 만일 연명치료 중단이 가능한 경우에 대해 법률로 정한다면 유사한 경우들을 일반화하여 법대로 처리하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 복잡하고 다양한 개별 환자들의 상황을 반영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악용될 여지가 많다. 그러나 자연적인 죽음을 받아들이고자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환자와 보호자의 의사를 참고하여 임상적 근거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

 

 

독일과 미국의 사례

 

독일에서도 1993년 3월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72세의 환자는 심한 뇌손상으로 의식불명 상태에서 2년 반 동안 튜브를 통한 인공급식으로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인공급식을 중단하면 2-3주 내에 환자가 사망에 이를 것으로 본 의사의 제안에 따라 환자의 아들은 처방전에 “주치의의 협조로 나는 지금 담겨져 있는 용기의 음식이 다 소모된 시간부터 어머니께 단지 차만을 공급하기 원한다.”고 기록하여 서명했으나 간호사는 급식을 계속하며 법원에 이 같은 사실을 통보했다. 환자는 그해 12월 폐수종으로 사망하였으며, 이후 지방법원은 의사와 아들에게 살인미수죄를 적용해 벌금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연방법원은 항소심에서 이를 기각하고 지방법원으로 되돌려 보냈다.

 

미국 플로리다 주의 테리 시아보는 거식증을 치료하다 1990년에 쓰러져 식물인간 상태에 빠져 인공급식에 의존해 15년간 생명을 연장해 왔다. 식물인간 상태가 되고 8년 뒤 그녀의 남편은 평소 아내가 인위적인 방법으로는 살기 싫다고 했다며 안락사를 요구하였지만, 그녀의 부모는 병상의 딸이 살기를 원하고 있다며 반대하였다. 결국 2005년 플로리다 주 법원이 남편의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급식관이 제거되어 13일 만에 4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용어 설명

 

존엄사라는 용어는 안락사와 혼용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유의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존엄사를 기본적 치료까지도 중단하는 소극적 안락사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고 영양공급의 중단도 존엄사의 범주로 포함시키고 있다. 미국 오레건 주에서는 심지어 의사의 조력을 받아 죽음에 이르는 적극적 안락사도 존엄사라고 부른다. 이렇게 존엄사를 표방하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단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따라 치료를 중단하는 것이 마치 환자의 존엄을 지키는 것으로 잘못 판단하고 있다. 진정한 의미의 존엄한 죽음이란 효율성이나 치료 가능성을 기준으로 하여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자신의 삶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맞아들이며 삶을 잘 정리하고 평화롭게 임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안락사는 일반적으로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로 구분된다. 소극적 안락사는 생명을 연장하는 치료조치를 하지 않고 죽도록 놓아두는 조처로서, 달리 표현하자면 치료포기와 치료중단을 의미한다. 적극적 안락사는 고의로 생명을 종결시키는 약물을 투약함으로써 의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시행된 것으로 예정보다 빠른 생명의 종식을 의미한다. 의식이 없고 정신적 활동이 전혀 불가능한 인간, 예를 들어 식물 상태의 인간은 생존의 의미가 없으므로 인격의 존엄과 품위를 지키고자 생명을 단축시켜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존엄사 개념은 환자 본인의 의사와 무관한 일종의 비자의적 안락사라고 볼 수 있다.

 

 

존엄사 관련 논쟁들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국내의 사례이든 외국의 사례이든 오랜 공방 끝에 드러나는 존엄사 관련 논쟁들의 이면을 바라보면, 순수하게 환자의 입장에서 본 품위 있고 인간적인 죽음을 위한 조치를 택하고자 하는 것보다 관련자들의 이익을 쫓기 위한 것이거나 부담을 덜고자 하는 데서 오는 갈등이 크다. 연세의료원의 김 할머니의 사례도 의료사고 결과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의료원과 가족들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것이다. 병원비와 배상 문제 등 복잡한 갈등은 드러내지 않은 채 서로 환자에게 마치 최상의 조치를 선택하는 것같이 포장되고 있는 것이다.

 

존엄사 논쟁에서 강하게 대두되고 있는 환자의 자기 결정권은 중요한 권리이긴 하지만 죽음까지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무제한적인 권리는 아니다. 인간의 출생과 죽음에는 어떠한 선택권이 있을 수 없다. 출생에 선택의 권리가 없듯이 죽음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임의적으로 죽을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자연적인 수명이 다했는데 기계적인 장치로 억지로 죽음의 시간만을 연장하려는 것은 옳지 않다. 또한 자연적인 수명이 다하지 않았는데도, 소생 가능성이 적고 고통스럽다고 해서, 또는 경제적인 부담이 크다는 이유에서 치료를 중단하고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 환자의 당연한 권리라고 말할 수 없다. 인간 존엄성은 살아있음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곧 생명의 존중과 연결되며 환자는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필요한 적절한 조치를 받아야 한다.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은 환자나 가족의 의사에 좌우되어서는 안 되고 무엇보다 임상적 근거에 따라 조치해야 한다. 그런데 임상적 근거에 따른 조치가 무엇인지 정답이 있어 의료적 오류를 판가름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면 해결될 것이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같은 환자라도 주치의가 누구인가에 따라 다른 판단이 내려질 수 있다. 환자의 상태에 대한 적절한 치료라는 것이 담당의사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기도 하며, 의료기관의 이념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어떤 의사는 지속적 식물 상태의 환자에게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조차 의미 없다고 보기도 한다. 의료진뿐만 아니라, 환자와 가족도 제각기 다른 입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늘 갈등의 소지가 있다. 그러므로 일반화하여 이런 경우는 모두 이렇게 처리해야 한다는 법규나 제도를 만드는 것 또한 쉽지 않다.

 

 

가톨릭교회의 입장

 

가톨릭교회는 인위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안락사는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모두 살인죄로 본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생명의 관리자이지 소유주가 아니므로 우리의 생명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그 누구도 다른 인간의 생명을 앗아갈 권리가 없다는 것이 교회 입장이다.

 

존엄사라는 용어는 환자가 고통 없이 존엄과 품위를 유지하는 가운데 맞이하는 죽음이라는 긍정적 인상을 갖게 하지만, 실제로는 안락사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즐겨 사용하는 용어이므로 이 용어의 사용은 바람직하지 않다.

 

교회가 말하는 존엄사, 다시 말해 ‘품위 있는 죽음’은 회생 불가능한 인간 생명을 인위적으로 단축시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안락사와 달리, 인간적 삶을 살 수 있도록 최선의 의학적 치료를 다했음에도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이 임박했을 때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함으로써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이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때 치료를 해도 더 이상 생명을 연장할 수 없기에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한다 하더라도 생명이 단축되는 것이 아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2278항에서는 “비용이 크게 들고 위험하며 특수하거나 기대했던 효과를 내지 못하는 의료기구 사용 중단은 정당할 수 있는데, 이는 환자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지나친 치료를 거부하는 것이며 막을 수 없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환자가 능력이 있을 경우에는 환자 본인이 중단 결정을 내려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법적 보호자들이 결정해야 하는데 언제나 환자의 타당한 소원과 정당한 이익을 존중하는 가운데 결정해야 한다.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환자에 대한 기본적인 간호 행위와 영양과 수분의 공급 등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수단’의 의료행위는 언제나 윤리적 의무이다. 그러나 최선의 의학적인 노력을 다했음에도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이 임박한 말기 환자에 대한 단순한 연명 장치로서 인공호흡기, 심폐소생술 등과 같은 ‘예외적인 수단’의 사용 중단을 허용한다. 그러나 단지 ‘허용’하는 것이지 ‘권장’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치료의 중단이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환자의 치료 중단은 환자의 ‘분명하고 확실한’ 의사표시에 근거해야지, 그러리라는 ‘추정’에 근거해서는 안 된다. 또한 환자와 가족 등 관련 당사자들의 양심 안에서 조심스럽게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말기 환자에 대한 ‘무의미한 연명치료’, 또는 ‘예외적인 수단사용’은 ‘과도한 의학적 치료’를 의미하며, 환자와 가족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기 때문에 더 이상 환자가 놓인 실제적인 상황에 맞지 않는 부적절한 의학적 치료 과정이다. 이를 달리 의료 집착적 행위라고도 표현한다. 과도한 의학적 치료는 환자의 의사와 가족의 상황에 따라 조심스럽게 거부될 수 있지만, 환자에 대한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치료는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계속되어 가능한 한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죽음을 맞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최선의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소생가능성도 없이 인위적으로 환자의 고통만을 연장시키는 것은 ‘의료 집착’이며, 이 경우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지는 안락사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죽음’의 과정을 맞이하도록 돕는 행위이다.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질병에서 불필요한 고통과 비용 부담을 제거하는 것이지만, 가톨릭교회의 관심은 죽음을 앞둔 환자가 인간적인 존엄성을 지닌 평화로운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돕는 것이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문이다.

 

안락사의 경우도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고 편안한 죽음을 맞게 도와준다고 하지만 사실은 말기 환자에게 들어가는 경제적 비용을 중단하려고 행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설사 고통의 감소를 위한 조치라 하더라도 인위적으로 인간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은 비윤리적 행위이다. 물론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경우 진통제를 사용해 고통을 경감시켜줘야 하겠지만 인위적으로 죽음까지 이르게 하는 일은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의 의미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어느 정도의 고통은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함을 통해 그리스도와 자신을 일치시키는 영적 체험의 계기를 마련해 주는 역할을 한다. 어떤 말기 환자들은 고통과 싸우는 가운데 하느님께 의탁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을 때 응어리져 있던 미움과 오해를 풀어버리고 용서를 구하며 사랑의 고백을 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떠나면서 품위있는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에게 죽음은 보통 상실, 고통, 이별과 같은 부정적 경험을 동반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죽음은 모든 것이 사라지는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의 시작이며, 영원한 생명으로 가고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며 과정인 것이다. 죽음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생명이 성장하고 완성되는 과정의 최종단계로 주신 인간의 기본 조건이다. 그러므로 죽음과 고통은 우리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부해야 할 것이 아니다. 교회는 죽음이 단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부하고 피해야 할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세상에서 살아온 삶을 정리하여 완결하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순간이므로 오히려 적극적으로 죽음을 준비하고 수용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삶과 죽음, 모두를 주관하는 사랑과 생명의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영원한 생명을 믿으며 지상의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죽음이다.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영원한 생명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결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며 자비로우신 사랑의 하느님께 자신의 삶을 온전히 맡기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 구인회 마리아 요셉 -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교수, 가톨릭생명윤리연구소 소장이며,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학술연구위원회 위원이다. 저서로 “생명윤리, 무엇이 쟁점인가”, “죽음과 관련된 생명윤리적 문제들”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09년 8월호, 구인회 마리아 요셉]



489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