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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 교회와 상업주의 - 시장 시스템 속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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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4-05 ㅣ No.723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 교회와 상업주의 - 시장 시스템 속의 교회

 

 

시장에 대한 교회의 입장

 

시장(市場)은 자본주의의 핵심 요소이며, 현대 자본주의 세계는 이 시장논리에 기초한다. 가톨릭교회 역시 “자유시장은 재화와 용역의 생산에서 효과적인 결과를 보장할 수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중요한 제도”(“간추린 사회 교리”, 347항)라고 밝힌 것처럼 시장 체제를 부정하지 않는다.

 

친시장주의자들은 시장의 자율성과 효용성을 강조하며, 시장 스스로 일자리를 창출하고 수익을 높이며 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해 나간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효율성을 높이고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에 시장 체제만큼 유용한 제도는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일종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시장주의는 이익만을 추구하는 개인들을 양산했으며, 공동체주의를 파괴하는 힘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사실 데이빗 젠킨스가 신랄하게 지적하듯이, 시장은 스스로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다. 시장은 하나의 메타포에 불과하며 자유시장이란 하나의 환상일 뿐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금융시장에서 시장의 자율성을 상징하는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란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하려는 국제 금융자본가들의 조작행위를 상징하는 ‘상층부의 손(the upper hand)’에 불과하다.

 

더욱이 시장주의는 단기간의 효율과 경쟁력을 중시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폐해들을 예방하고 준비하는 데에 둔감하며, 눈앞의 이익 때문에 멀리 있는 또는 잠재적인 손실을 잘 보지 못한다.

 

교회 역시 시장과 시장 시스템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시장의 부정적인 힘에 대해 늘 경계한다. “그런데 이것은 시장의 본성 때문이 아니라 특정 이데올로기의 작용 때문이다. 시장이 순수한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시장의 모습은 시장에 특징과 방향을 부여하는 문화적 형태에 따라 결정된다. 경제와 금융은 그 관리자들이 순전히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하고자 할 때 도구로 악용될 수 있다”(“진리 안의 사랑”, 36항).

 

 

상업논리(시장논리)와 신앙논리

 

시장은 모든 것을 상품화한다. 성의 상품화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욕망마저도 사고파는 상품으로 만든다. 상품화는 결국 돈벌이를 겨냥하는 것이다. 시장 안에서는 모든 것이 돈이 되는 상품 또는 돈이 되지 않는 상품, 그 둘로 나뉜다. 모든 것을 돈이 되는 상품으로 변질시키는 시장은 상업주의(commercialism)라는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유포시킨다.

 

상업주의가 판치는 시장 속에서는 이윤을 극대화하는 효율성을 강조하며, 더 많은 돈을 벌게 하는 경제적 효용성이 최고의 미덕이 된다. 시장을 사로잡고 있는 또 다른 논리는 자유경쟁주의다. 그러므로 경쟁 속에서 소비자를 유혹할 수 있는 상품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다. 시장 시스템 안에서는 결국 돈을 많이 벌게 하는 효율적인 상품, 더 많이 팔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춘 상품이 최고의 존재다.

 

이처럼 상업주의는 상품화, 경제적 효용성, 경쟁력이라는 일종의 상업논리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이 세 가지 상업논리들은 모든 것을 왜곡하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 상품화는 모든 것을 대상화하는데, 대상화는 결국 물질화를 뜻하며, 상업주의는 물질주의를 확산시킨다는 뜻이다. 경제적 효용성을 강조하는 것은 모든 일에서 돈이 되느냐 아니냐의 기준이 최우선으로 작용하는 사회구조를 낳는다. 경쟁력을 우선시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생존과 도태라는 정글의 논리가 횡행하는 비정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이처럼 상업주의 또는 상업논리 안에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본질적으로 상반되는 요소들이 숨어있다. 어쩌면 상업주의 또는 시장논리는 신앙논리와 나란히 설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리스도교 신앙은 대상화 또는 물질화가 아닌 인격화(인격주의, personalism)를 강조한다. 또 그리스도교 신앙은 효용성과 경쟁력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무상성(無償性)과 상생의 논리를 옹호한다.

 

 

상업주의와 교회의 묘한 동거

 

신앙의 논리와 상업논리는 분명히 서로 다른데도 교회와 신앙인들이 실제 삶에서 신앙의 논리보다는 상업논리에 더 익숙한 모습을 보이곤 한다.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 살고 있는 교회 공동체와 우리 자신들이, 자본주의 안의 상업주의 유혹에 걸려 넘어지는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 우리는 도처에서 기업화되는 교회, 상업화되는 교회의 모습과 물질적 이익에만 민감하며 욕망을 사고파는 데에 익숙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쉽게 발견한다. 이 시대에 만연한, 교회 공동체와 자본주의적 상업주의의 묘한 동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필자도 사실 잘 모르겠다.

 

교회 공동체와 상업주의의 동거는, 교회 공동체를 중심으로 농촌의 유기농 생산품과 도시의 건강한 소비형태가 결합하는 도농직거래 같은 생산과 소비의 공동체 운동과는 분명 다르다. 사실 미국의 젊은 신학자 윌리엄 캐버너(William Cavanaugh)가 주장하듯이 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교회 공동체를 중심으로 공동 생산과 공동 소비 운동을 하는 것은 오히려 복음적 대안운동의 일부이기도 하다. 문제는 언제나 그 운동들이 대형화되어 기업화되고 상업화되는 데에 있다.

 

아마도 많은 문제는 종교적 물품들을 상품화하는 과정에 있는지도 모른다. 성전 기금 마련, 성지 개발, 선교 기금 마련, 가난한 사람 돕기 등 교회는 여러 이유로 교회의 물품이나 아니면 교회 공동체와 관련된 지역의 물품들을 상품화해서 판다. 물론 좋은 목적을 위해서 상업논리를 차용하는 것이니까 어느 정도 이해해 줄 수 있는 부분도 많다.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이상 우리는 자본의 논리 또는 상업논리를 차용할 수밖에 없다.

 

여러 선의의 목적을 위해 종교적 물품들과 지역 생산품들을 개별 교회 공동체간에 사고파는 행위는 분명 기금 마련에 더 많은 효용성이 있으며 신앙 공동체 안에 더 많은 나눔과 헌신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교구의 벽을 뛰어넘어 본당과 본당의 친교를 이루어내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세상의 일들에는 양면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수단은 목적을 배반하기도 한다. 특히 자본주의 삶의 논리는 최종적으로 항상 물신에 대한 숭배를 내포한다. 기금 마련의 효용성과 표면적 친교라는 외피 속에 모든 것을 돈벌이의 관점에서 보게 되는 상업논리가 알게 모르게 스며들게 된다. 눈앞의 이익과 효용성 때문에 신앙의 본질적 가치들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또 우리는 가끔 오늘날 교회 공동체가 기금을 증식하려고 주식과 부동산과 채권 등에 투자하는 경우를 본다. 교회의 선교 기금 마련이라는 좋은 명분을 가지고 있고 또 시장 체제 안의 합법적 투자 형태를 띤다 해도 그러한 재정 증식의 방법은 가치관의 전도를 초래할 수 있다. 자본주의 재정 운용 방식 안에는 충실성, 헌신, 호의 등의 원칙보다는 행운(luck)의 법칙이 더 많이 작용하기 때문이다.(사람들은 ‘대박’을 꿈꾸며 주식을 사고 부동산에 투자한다.) 물론 교회 공동체의 재정적 투자는 선의의 목적을 겨냥하는 측면이 있어서 세속의 투자보다 도덕적으로 상대적 우월성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교회의 그러한 투자의 형태를 띤 재정 운용 역시 조금씩 상업주의 논리에 침윤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아주 드물지만 오늘날 교회 공동체 자신이 수익 사업을 위해 기업을 경영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교회가 운영하는 기업을 통해 좋은 물건들을 교회 공동체에 공급할 수 있고 또 수익은 교회 사업에 재투자를 할 수 있으니 ‘꿩먹고 알 먹고’ 하는 좋은 시스템이라고 자랑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신앙의 관점에서 운영하는 이 기업이 사회의 건전한 기업문화 조성에 앞장설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눔과 섬김이라는 신앙의 논리 위에 서야 할 교회가 시장논리를 따를 수밖에 없는 기업을 만들어서 돈벌이에 나서는 것은 그 목적의 좋고 나쁨을 떠나 뭔가 아쉬움이 남는다. 교회가 운영하는 기업이라고 해서 과연 상업주의의 폐해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소비시장 속의 교회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시장의 힘은 교회와 신앙마저도 시장 속의 상품으로 만들기도 한다. 개별 교회들은 신자를 확보하고자 다른 교회들과 경쟁을 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들은 일종의 소비자인 사람들에게 교회 자신과 신앙을 차별화된 방식으로 그리고 좀 더 매력적인 방식으로 제시해야만 한다. 종교적 생산자로서 개별 교회들은 소비자들을 유인하려고 경쟁자인 다른 교회들 또는 다른 종교들이 제공하는 종교적 생산품보다 더 뛰어난 제품을 제공해야만 한다. 소비문화의 시대에 소비자로서 사람들은 교회와 신앙마저도 쇼핑하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소비시장의 상품으로서 교회와 신앙이 작동되는 시장 시스템 속에서 흔히 신앙의 브랜드화가 중요한 이슈가 된다. 상품시장에서는 브랜드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종교적 상징들을 브랜드화하고 그 브랜드 가치를 높이려고 오늘날 개별 교회들은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예를 들면, 한국 가톨릭교회는 마더 데레사와 김수환 추기경을 상징적으로 자주 내세운다. 선교의 효율성과 다른 종교와 교회들과의 경쟁 속에서 더 우월적 위치를 선점하고자 스타성이 강한 인물과 상징들을 브랜드화한다.

 

선교의 효율성과 경쟁력 차원에서 종교적 상징들의 브랜드화는 분명 장점이 있다. 그렇지만 종교적 상징들의 상품화와 브랜드화가 마냥 좋기만 한 일일까? 상품화와 브랜드화란 자칫 실질 내용보다 이미지만을 강조할 위험이 있다. 시장 속에서 실재가치보다는 교환가치가 더 우선시되는 것처럼 종교적 상징들의 브랜드화는 신앙의 본질적 내용보다는 외적 형식과 이미지들만이 부각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 체제가 모든 것을 그 자신 안에 삼켜서 그 안에 시장의 법칙만이 횡행하게 하는 괴력을 지녔다 할지라도, 세상 속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교회는 분명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시대의 교회는 신앙적 상상력을 새롭게 가다듬어야 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 정희완 요한 - 안동교구 신부. 문경 모전동성당 주임이다.

 

[경향잡지, 2010년 3월호, 정희완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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