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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생태 영성: 하느님 나라를 위한 느린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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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4-04 ㅣ No.721

[생태 영성] 하느님 나라를 위한 느린 삶

 

 

빠름의 허구

 

세말과 세시가 되면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을 새삼 피부 깊숙이 느낀다. 시간이 좀처럼 가지 않던 어린 시절과 다르게 언제부터인가는 참 빨리도 흘러간다. 죽을 운명에 놓인 인간은 누구나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지라,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을 잡아보려고 무던 애를 쓴다.

 

돈을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시간은 돈’이라고도 한다. 시간을 절약해 주는 자동차, 휴대전화, 컴퓨터, 전기밥솥, 인터넷 등이 하루가 멀다 하고 그 기능을 향상시키고 있다. 이러한 문명의 이기들을 소유하고 있는 현대인들은 그것을 사용하지 않던 세대보다 훨씬 더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야 마땅하다. 그러나 최첨단의 기기를 사용하는 현대인들은 과연 더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가? 현대인들은 역사상 가장 행복한가?

 

실상은 정반대이다. 현대인들은 역사상 가장 바쁘게 살아간다.  행복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느낄 여유마저 없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최첨단의 상품들은 더욱 새로운 기능을 담고, 더욱 비싼 값으로 팔린다. 최신의 기술이 채용되어, 나의 삶을 더 풍요롭게 꾸미고, 시간도 절약하게 해주는 상품을 구입하려면 지금의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시간은 돈이므로 열심히 일을 해서 신상품을 손에 쥐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은 시간이 없다. 그런데 신상품을 손에 쥐고 나면 또 다른 더 좋은 신상품이 광고에 등장한다. 그것을 부러워한다. 또 그것을 구입하려고 열심히 일한다. 시간이 없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은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역사상 가장 가난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현대 자본주의 산업구조는 새로운 기술로 대량의 이익을 남기고자 대량생산을 하고, 광고 매체를 통해 대량의 소비를 부추겨 대량 폐기물을 양산하는 필연적으로 반환경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자원의 낭비뿐 아니라 인간의 빠른 삶을 위해 자연은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르고 있는가? 빠른 삶을 살려고 하는 이들에게 산과 강은 아름다움의 대상이 아니라 장애물일 뿐이다. 그리하여 산과 강을 따라 굽이굽이 곡선으로 아름답던 길들은 직선화되고, 흉물스런 교량과 터널로 강과 산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야생동물들은 서식처를 잃고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에 죽임을 당하기(Road  Kill) 일쑤이다.  인간의 잘못된 욕망은 인간에게도 자연에게도 큰 불행을 안겨주고 있다.

 

 

느림으로 돌아가는 운동

 

빠름이 인간의 바쁨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느림이 해답이다. 느리다는 것이 나태하다는 뜻은 아니다. 느림은 자연의 속도를 말한다. 자연은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싹을 틔우고 열매 맺고 땅에 떨어지기까지 자연은 순리에 따라 너무 느려서 그 움직임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그렇지만 반드시 변화를 이루어낸다. 그런 자연에 순응하고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느림의 생활양식이다. 느림의 삶은 자연과 사람, 곧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의 소중함을 발견하게 해주고 서로의 배려를 통해 관계를 회복하게 해준다.

 

1998년 일본의 문화인류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쓰지 신이치는 ‘슬로라이프(Slow  Life) 운동’을 전개하였다. 삶의 속도를 줄이고 친환경적이고 지속가능하며 세계화에 맞서는 삶의 방식, 경제적 관점으로만 바라보던 시간의 틀을 깨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의 속도를 지향하는 운동이다.

 

1999년 이탈리아 중북부의 아주 작은 도시 그레베의 시장 팔로 사투리니(Palo Saturini)는 다른 도시(오르비에토, 브라, 포시타노)의 시장들과 함께 느린 도시(Slow City)를 만드는 모임을 조직했다. 슬로시티 운동은 느림과 여유를 지향하며, 지역의 전통과 문화를 보호하고 삶의 속도를 이완하며 축제와 환대의 문화를 되찾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패스트푸드(Fast Food)에 대한 반작용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1980년대 중반에 일어난 슬로푸드(Slow Food) 운동을 기반으로 한다. 세계화에 반대하여 지역이 가진 본래 자연환경과 고유 음식, 전통문화, 시간, 계절, 우리 자신 등을 존중하며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삶을 운동의 목적으로 한다.

 

필자가 다녀온 이탈리아의 오르비에토는 국제 슬로시티 사무소가 있는 곳으로 슬로시티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다. 오르비에토는 바위산 위에 세워져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중세 도시이다. 도시로 가는 자동차 길이 있지만, 자동차 출입을 제한하고 산 아래 마을 입구에서 대중교통인 푸니쿨라(산악열차)나 전기(수소)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마을에는 패스트푸드 식당이나 슈퍼마켓은 들어올 수 없다. 대신에 매주 두 번씩 열리는 재래시장에서 신선한 농산물을 구입한다. 또한 방부제 없이 매일 구워내는 빵집과 수공예 상점들이 가득하다. 대부분의 상점이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문을 닫는데, 여유롭게 점심식사를 즐기고 휴식을 취하기 위함이다. 저녁이 되면 사람들이 시청 앞 광장에 모여 환담을 나눈다. 현대화되면서 사라진 이탈리아의 여유로운 광장문화를 되찾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슬로시티들이 도시 어디에나 있는 광장을 통해 전통적인 먹을거리를 나누고 축제를 즐기는 장소로 부활한 것이다.

 

 

느림의 영성과 하느님 나라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 가끔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고 한다. 말이 너무 빨리 달려 혹시 쫓아오지 못하는 자신의 영혼을 기다리기 위함이라고 한다. 한자로 바쁠 ‘망(忙)’은 마음[心]을 잃어버림[亡]을 뜻한다. 바쁜 삶은 영혼이 없이 사는 것이다.

 

우리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통해, 빠름/바쁨 = 열심/선이라는 공식을 당연시하며 살아왔다. 그것이 어려웠던 경제를 초고속으로 살리는데 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경제 지표는 성장했을지 몰라도 더 소중한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문화, 자연과 인간관계의 단절이라는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그 때문에 창조물을 만드신 하느님과의 관계도 그렇게 차단되었다. 바쁜 세상에서 속도가 최고의 선이기에 하느님보다 속도가 더 중요하게 된 것이다.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미사를 위해서도 기어코 자가용을 타고 성당 마당까지 가기를 고집한다. 자연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느끼는 생태영성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리고 있다. 빠름은 본질적으로 불경(不敬)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빠름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순리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라고 알려준다(“나는 또 태양 아래에서 보았다. 경주가 발 빠른 이들에게 달려있지 않음을 … 모두 정해진 때와 우연에 마주치기 때문이다.” - 코헬 9,11). 또한 마리아와 마르타의 이야기를 통해 바쁜 삶이 열심한 것도, 선도 아님을 알려준다(루카 10,38-42). 천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듯이(시편 90,4) 하느님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 다르다. 그래서 인간의 눈으로 보면 하느님은 한없는 느림보 거북이이시다. 자연은 그런 하느님의 반영이기에, 하느님의 순리에 순명하여 그렇게 느리게 변화되어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싹이 트고 자라는 것이 보이지 않지만 하느님 나라는 그렇게 서서히 성장해 나간다. 우리 마음속에 하느님의 영이 숨 쉬어, 하느님 나라가 자라게 하려면 느림을 감당할 수 있는 영성을 지녀야 한다.

 

느림을 되찾는 운동들은 자연의 리듬을 통해 하느님의 리듬에 응답하도록 우리를 돕는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사는 도시 · 마을을 적어도 슬로시티로 만들 때 가능하다. 전통을 소중히 여김으로써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있는 문화를 통해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느낄 때,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며 생태적으로 건전한 슬로시티를 만들 때,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이 억압과 착취 없이 공정하게 이익과 손해를 분배하는 생태적 정의가 이루어질 때,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사는 지금 이곳에서 가능해질 것이다.

 

슬로시티가 곧 하느님 나라는 아니지만, 하느님 나라가 되는데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필요조건이다.

 

* 이동훈 프란치스코 - 제천 남천동성당 주임신부.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생태신학을 전공하였다. 생태영성연구원 공동대표이다.

 

[경향잡지, 2010년 2월호, 이동훈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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