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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 경제 성장주의와 그리스도교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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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4-04 ㅣ No.720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 경제 성장주의와 그리스도교 신앙

 

 

돈과 건강

 

사람들은 살아가는 동안 두 가지 욕심에 붙잡혀 허우적거리며 비틀거린다. 물질에 대한 욕심, 곧 돈과 재산에 대한 욕심과 건강한 삶에 대한 욕심이다. 새해 첫날 해맞이 장소에서 사람들의 신년 소망을 물으면 거의 대부분 “올해는 가족들이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더 잘살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건강과 돈(경제적 윤택)이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다. 돈과 건강, 이 두 가지가 우리들의 이승의 생을 규정하는 키워드이다.

 

산다는 것 안에는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 두려움이 포함되어 있다. 오래 살려는 욕망, 건강하게 살려는 욕망은, 살아있는 우리 인간에겐 필연적이다. 물질적 삶이 윤택해질수록, 과학의 발전으로 평균수명이 늘어날수록, 건강한 삶에 대한 우리들의 집착에는 끝이 보이질 않는다.

 

그리고 이 지독한 자본주의 시대에 돈은 모든 것의 척도다. 사람의 품위마저도 돈에 의해 좌우되는 시대다. 건강도 어느 정도는 돈으로 살 수 있고, 수명도 돈에 의해 어느 정도 연장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죽는 날까지 저마다 부자가 되기를 원한다. 돈이 없는 물질적 가난은 사람을 참 처연하게 만든다. 물질적 궁핍함은 사람의 표정마저도 참 쓸쓸하게 만든다. 이 세속적 자본주의 속에서 가난은 분명 슬픔이다.

 

이 슬픈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사람들은 돈에 대한 집착을 놓을 수 없다. 또한 죽음이라는 그 소멸의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끊임없이 건강의 문제에 집착한다. 이 이승의 하늘 아래에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이상 돈과 건강에 대한 욕심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돈과 건강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어디까지여야 하는가, 그 한계와 경계는 어디인가?

 

 

호모 이코노미쿠스와 그리스도교 신앙

 

인간은 경제적 동물이다(homo economicus).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가장 큰 특성은 물질에 대한 끝없는 욕망과 자신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함으로써 번영을 이룰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무한한 물질적 욕망은 단순히 생존에 필요한 수단으로서의 의식주마저도 욕망 충족의 수단으로 변질시킨다. 더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하고, 더 비싼 옷을 입어야 하고, 더 화려하고 큰 집에 살아야 한다.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경제행위들은 욕망 충족을 위한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며, 인간의 이기심을 긍정하고 합리성의 이름으로 탐욕적 경제행위들을 옹호한다.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경제행위들 안에서는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한 효율성과 경쟁력만이 가장 큰 미덕이다. 결국 호모 이코노미쿠스에게 합리성이란 효율성과 경쟁력의 다른 이름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 호모 이코노미쿠스 인간관(경제학의 인간관)과 대척 지점에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인간의 참된 행복과 번영은 물질적 수단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유의 버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진정한 번영은 인간적 힘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으며, 은총과 영적인 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는 소유보다는 버림의 미덕이, 욕망보다는 의무와 책임이, 자기를 사랑하기보다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앞서 강조된다.

 

세속의 현대인들은 “행복과 구원을 물질적 번영과 사회적 활동의 본질적 형태로 혼돈”(“진리 안의 사랑”, 34항)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자신이 자기 자신과 자기 삶과 사회의 유일한 주인이라는 그릇된 확신”(34항)에서 나온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은 다른 차원의 인간관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은총으로 창조되었고, “이 은총은 인간의 초월적 차원을 표현하고 드러내준다”(34항). 이러한 그리스도교 인간관에 따르면, 결국 신앙인은 자기 안에 내재하는 은총의 힘으로 자신의 경제활동이 “공동선의 추구를 지향”하게 해야 하며, 자신의 “경제활동의 모든 측면에 정의가”(36, 37항) 있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다시 말해, 신앙인은 “이윤을 거부하지도 않으면서 단순한 등가 교환 논리나 이윤 자체가 목적인 논리를 뛰어넘는 숭고한 목적을 지닌 그러한 유형의 경제활동”(38항)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 좀 냉정하게 물어보자. 정말 신앙인들은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모습으로가 아니라 호모 스피리투스(homo spiritus, 영적 인간) 또는 호모 렐리기우스(homo religius, 종교적 인간)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혹시 신앙인들 역시 여느 세상 사람들과 다름없이 정당한 이윤 추구보다는 부당 이익 취득을 목적으로 하는 투기적 주식 투자나 부동산 투자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혹시 교회 공동체 역시 교회 공동체의 재산을 불리려고 투기적 경제행위에 가담하고 있지는 않는가?

 

 

자본주의 경제 체제 안의 지배 이데올로기들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사회주의의 몰락과 자본주의의 승리는 단순히 경제적 측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을 담고 있다. 사람들의 삶의 방식 모두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새롭게 재편되고 있다. 현대 철학자 들뢰즈의 주장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제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가 인간의 욕망마저도 조작할 수 있고 체제에 부합하도록 길들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물건을 내 스스로 욕망하기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유행처럼 사고 있기 때문에 나도 사는 것이다(모방 욕망). 그리고 광고와 선전 등은 어떤 물건을 사는 행위를 통해서 우리 자신이 자본주의 체제에 안착되어 있는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고, 또 그 물건을 소비하는 계층과 자기 동일시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처럼 후기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우리는 욕망의 자율성마저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이 자본주의 체제 안에 숨겨져 있는 가치 체계들(일종의 이데올로기들)은 보이지 않게 우리 삶을 지배하고, 우리의 행위들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시장 중심주의에 대한 맹신, 효율성과 경쟁력을 우선시하는 태도, 끝없는 소비를 욕망하게 하는 소비주의, 이 세 가지는 후기 자본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자본주의 체제 안의 이 특징들은 우리들 안에 결국 그 어떤 잠재적 가치관을 심어놓는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사람들을 가로지르는 핵심 이데올로기는, 이윤을 극대화하는 자본주의 시장 시스템에서 파생되는, 외적 물질적 성장을 통해 번영을 이루려는 성장주의(발전주의, 개발주의), 모든 것의 상품화를 통해 그 효율성과 경쟁력을 재단하려는 상업주의, 지속적인 소비를 통해 욕구충족을 이루려는 소비주의, 이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아마도 우리가 이 자본주의 체제 안에 살아가는 이상, 알게 모르게 이 세 이데올로기들에 의해 물들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경제(물질적) 성장주의

 

개발과 성장에 대한 열망이 오늘의 한국 경제의 부흥을 이루었다고 흔히들 말한다. 사실 한국인들만큼 성장과 발전에 목매달며 사는 민족도 없다. 강수돌 교수가 지적하듯,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집단적 성장중독증에 걸려있다. 경제적 가치와 경제적 성장만이 지상 최고의 미덕이 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성과중심주의의 태도와 돈벌이가 되는 일에만 집중하는 태도가 우리 삶의 방식을 지배하고 있다.

 

물론 교회는 삶의 참행복은 삶의 양적 측면보다는 질적 측면에서 오는 것임을, 한 사회가 신자유주의적 시장 사회보다는 공동체적 사회를 지향할 때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참다운 인간 발전은 경제적 부의 축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차원의 인간 전체와 관련이 있음을 거듭 촉구한다(“진리 안의 사랑”, 11항).

 

하지만 여기서 또 한 번 정직하게 자문해 보자. 물질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경제적 성장보다는 영적 성장이 참행복의 바탕이 되고 진정한 번영의 길임을 강조하는 교회의 윤리적 가르침과 선언들은 과연 자본주의 시장의 정글에서 실질적인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당위적 명제들을 사회적으로 천명함으로써 교회의 임무는 끝나는 것일까? 교회가 먼저 그 명제들을 실천하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자본주의 시장 체제 안의 교회 모습

 

종교의 소멸을 예견했던 근현대 세속주의 사회에서 뜻밖에도 종교가 더 활발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자본주의 시장 경쟁체제 안에서의 종교의 놀라운 적응력에 있다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교회 당국자들은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고자 효율성과 경쟁력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인다. 효율성과 경쟁력을 강조하는 일반 회사의 구조와 형태를 교회가 모방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세련된 생산품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제공하는 경향을 교회 안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영성적인 것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적당한 위안과 사회적 소속감을 제공하는 종교의 사회 기능적 역할에 알게 모르게 치중하는 편협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미국의 가톨릭 정치학자 마이클 버드는 이러한 경향을 드러내는 교회의 모습을 ‘기업화된 그리스도교’, ‘법인화된 그리스도교(Christianity Incorporated)’라 부른다.

 

현행 자본주의 시장 시스템 안에서는 작은 것은 살아남을 수 없다. 오직 대형화를 통해서만 생존할 수 있다. 복음적 가치의 실현보다 신자 수의 증가에만 교회가 목매달고 있는 현상 역시 어쩌면 교회 자신이 이 자본주의 시스템 안의 성장주의 이데올로기에 물들어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종교의 자유시장에서, 타종교 또는 타종파와의 경쟁에서 더 많은 신자 수를 확보하고자 오늘날의 우리 교회는 효율성과 경쟁력의 이름으로 외적 성장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 정희완 요한 - 안동교구 신부. 문경 모전동성당 주임이다.

 

[경향잡지, 2010년 2월호, 정희완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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