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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 성서 신학의 초창기 모습 - 성경신학(聖經神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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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42

[신앙 유산] 성서 신학의 초창기 모습 : 성경신학(聖經神學)

 

 

머리글

 

우리의 교회사는 외국인 선교사의 선교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겨레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한국 교회는 이 점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의 교회 창설에서 드러나는 이 같은 사실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 특성과 더불어 제한적 의미도 파악해 보아야 한다.

 

그 긍정적 특성 가운데 하나로 우리 문화와 사고 방법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졌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제한점으로는 우리 겨레에는 이질적 요소일 수밖에 없었던 그리스도교 신학에 대한 체계적 이해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들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나라에서 신학이 체계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 선학교의 설립과 신학 교육의 시행이란 사실에 일단은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신학교에서 사용한 교재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초창기 우리 나라의 신학교에서 사용한 교과서로는 현재 “성경신학”(聖經神學) 제일권(20.5cm×31.5cm, 漢裝本, l冊, 120張, 每面 32字 12行 내외)이 전주교구의 호남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은 우리 나라에서의 성서 연구, 나아가서는 신학 연구의 과정을 밝히는 데에 짚고 넘어가야 할 책자로 생각된다.

 

 

우리의 신학 교육

 

우리 나라 사람으로 신학 수업을 받은 인물로는 우선 정하상을 들 수 있다. 그에 이어서 신학을 배울 수 있었던 사람으로는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가 있다. 이들은 조선 땅이 아닌 마카오에서 신학 교육을 받았다. 한편 1854년 이래 말레이 반도 페낭에 있던 신학교에 조선인 신학생들이 비밀리에 파견되어 성직자의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국내에 설치된 신학교로 1861년과 1863년에 각기 전학하여 신학 수업을 계속 받게 되었다.

 

조선 국내에서 신학교가 세워져 운영되기 시작한 때는 1855년이었다. 이때 충청도 배론에는 성 요셉 선학교가 세워져 신학 교육이 실현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신학교는 1866년에 일어난 병인교난으로 말미암아 폐쇄될 수밖에 없었다. 이 배론 신학교에서 사용하던 신학 교재나 교수 내용을 찾아내고 복원하는 일아 불가능하지마는 아니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나라 교회사 연구의 수준은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아쉬워할 뿐이다.

 

조선 국내에서 신학교가 다시 개교하게 된 때는 1885년이었다. 이 해에 부엉골(현재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에서 예수성심신학교가 개교할 수 있었다. 이 신학교는 1887년 서울 용산 함벽정(현재 용산구 원효로 4가 1번지)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곳은 1945년 해방 직후까지도 조선인 성직자 양성의 요람이 될 수 있었다. 이곳 용산의 신학교에서 초창기에 사용되던 교과서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밝힐 수 없음은 유감이거니와, 이곳에서 사용된 교과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경신학”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음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성경신학”의 유래

 

이 “성경신학”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전주본당 출신 신학생이었던 김 토마스가 용산 신학교에서 사용하던 교과서라고 전해지고 있다. 김 토마스는 본당 신부였던 보두네(Baudounet, 1859~1915년) 신부와 함께 동학농민전쟁의 와중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이다. 그는 뒷날 용산신학교에서 나온 다음 전주본당에서 보두네 신부의 복사로 활동했다. 그가 사용하던 교과서를 그의 후손들이 보관하다가 1974년도에 호남교회사연구소에 기증하여 오늘날까지 이 책은 남아 있게 되었다.

 

이 책의 표지에는 “성경신학” “제일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이 책은 여러 권으로 되어 있을 것이나 현재에는 그 일부인 제일권만 남아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용산 신학교에서 직접 편찬한 책자는 아닌 듯하다. 이 책의 첫 부분인 제일장의 제목 밑에는 “page 324”라고 씌어 있어 이 책이 다른 서적의 한글 번역본일 가능성을 임시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번역 저본이 라틴어와 같은 서양어인지 아니면 한문본 천주교 서적인지를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한 가지 분명 한 사실은 “성경신학”이란 제목의 한문 서학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서양어에서 번역된 것이거나, 성경신학(오늘날의 성서 신학)의 강의에서 제시된 성경의 구절들을 한글로 옮겨 적어 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특징은 ‘신학’(神學)이란 말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는 한글로 쓰여진 책자 가운데서는 처음으로 나타나는 사례로 생각된다. 이는 분명 이 책을 엮은이가 ‘교리’의 수준을 넘어선 전문적 신학을 염두에 두고 붙인 이름일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신학교의 교재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제목이 붙여질 수 있었을 것이다.

 

 

“성경신학”의 내용

 

“성경신학” 제일권은 모두 여섯 개의 편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편은 다시 장(章)으로 세분되어 있다.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편명과 장의 수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이 책은 성교회(聖敎會, 18장)와 신덕(20장), 망덕(9장), 애덕(81장) 그리고 지혜(13장)와 의덕(義德, 43장) 등 여섯 개의 편과 184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다. 그리고 각 장마다 그 해당 주제와 관련되는 열 개 내외의 신구약 성서 구절들을 발췌하여 제시해 놓고 있다.

 

우리는 이 책의 구체적 면모를 살펴보기 위해 우선 성교회 펀의 예를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성교회’ 편에서는 세상에서 전쟁하는 교회, 교회의 거룩함과 사도적 전통, 교회의 공번성, 그리스도가 교회의 으뜸이심, 교황직과 교계 제도, 성인 공경 등 열여덟 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다. 그리고 ‘교계 제도’에 관한 부분을 예로 들면 역대기, 하깨, 말라기, 민수기와 같은 구약성서에서 교계 제도에 관한 가르침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구절들을 가려 뽑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고린토 전서, 마태오 복음, 요한 복음, 베드로 전서 등 신약성서에서도 교계 제도에 관계되는 구절들을 선정하여 이와 함께 수록해 놓고 있다.

 

이 책에는 각 편명이나 장의 제목과 직접 관련되는 성서 구절만이 제시되어 있을 뿐, 그에 대한 해설이나 설명이 붙어 있지는 아니하다. 그러므로 이 책은 주제별 성서 구절의 모음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용산에 신학교가 옮겨 간 당시 신학교에서 교육되던 성서 신학의 내용과 성서에 대한 이해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사용되던 당시 우리 나라의 교회에서는 성서가 완역되지는 않았다. 우리의 신도들이 그 시절에 가지고 있던 성서 지식의 수준은 “성경직해”에 번역되어 있던 4복음서의 일부에 관한 것이 전부였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목자들은 여기에서 조금 앞서 신약의 서한문이나 사도행전에 관한 내용 일부를 성서 중 신학의 강의를 통해서 이해하고 있었고 구약성서 가운데에서도 극히 제한된 부분이나마 접할 수 있었다.

 

 

마무리

 

우리의 교회사를 돌아볼 때 지난날 우리 나라에서의 신학 연구 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우리 교회사의 초창기에는 한문 서학서(西學書)의 자발적 연구라는 소중한 학문적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우리 교회에서는 신학에 관한 이성적 접근보다는 신앙의 실천이라는 측면을 더욱 강조한 듯하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연구를 통해 한국 사상사의 새로운 전개에 영향을 미치기보다는 사회 운동적 측면에서 더 큰 파급 효과를 발휘하게 된 듯하다. 그러나 신학의 연구 없이는 선앙의 사회적 기능을 올바로 수행하기는 어려운 일이며, 신앙이 추구하는 구원의 길을 겨레에게 제대로 제시해줄 수는 없다.

 

개항기 우리 나라 천주교회의 신학적 수준은 아마도 “성경신학”을 통하여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수준은 1920년대 후반기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1988년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주관한 교회사 간담회에서 장금구 신부((성신대학 초대 학장)는 자신이 대신학교에 진학했을 때 도서관에는 불가타 성서조차 한 권도 없었다는 충격적 증언을 남긴 바 있다. 이 증언을 참조할 때 식민지 시대 우리의 신학 교육이 가지고 있던 문제점을 확인하게 된다. 당시 우리의 신학계는 황폐한 적막 강산에 지나지 않았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성경신학”을 통해 지난날의 신학 연구 내지는 성서 이해의 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신학 연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확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신학”은 역설적으로나마 우리 신학에 대한 연구와 성찰의 필요성을 촉구하는 책이기도 하다.

 

[경향잡지, 1993년 12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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