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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해맑은 영혼을 위한 공부 - 묵상지장(默想指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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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36

[신앙 유산] 해맑은 영혼을 위한 공부 : 묵상지장

 

 

머리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새로운 가르침인 천주교를 열정적으로 받아들여 믿고 신봉했다. 그들이 믿고 따랐던 신앙의 내용들은 대개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에서 확립된 것들이었다. 이때 확립된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에서는 하느님의 은총을 얻는 방법으로 기도와 성사를 제시해 주고 있었다. 가톨릭 신앙을 새롭게 터득한 우리의 선조들도 기도와 성사가 하느님의 은총을 얻는 첩경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박해의 와중에서 성사의 은혜를 자유롭게 향유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성사보다는 기도를 통해 은총을 얻고자 했으며, 교회의 지도자나 선교사들도 당시의 그 특수한 상황을 감안하여 기도를 우선적으로 장려했다. 이 때문에 박해 시대의 한국 교회에서는 여러 종류의 기도서들이 간행될 수 있었다.

 

기도는 다시 염경(念經)기도와 묵상기도로 나누어진다. 우리 나라에서 간행된 기도서의 대부분은 염경 기도서들이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 교회에서 기도의 또 다른 부분인 묵상 자체가 무시되거나 소홀히 취급된 적은 결코 없었으며, 신앙 전래 초기부터 있었던 묵상에 관한 사례들이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신도들의 묵상을 인도해 주는 책자도 초기 교회 때부터 읽혀지고 있었던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묵상은 우리 교회의 신앙 전통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으며, 그 묵상서들은 우리의 지적 유산 중 일부를 이루었다.

 

우리 나라 교회에 전래된 묵상서들 가운데 제일 먼저 주목되는 것은 “묵상지장”(默想指掌)이다. 이 묵상서가 우리 나라 교회사에서 어떠한 기능을 맡고 있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묵상 기도의 일반적 의미를 점검해 보자. 그리고 당시 중국 교회에서 간행된 여러 묵상서들을 주목하면서 “묵상지장”의 전래와 번역 상황, 그리고 “묵상지장”의 내용과 초기 교회에 있어서 묵상 신공의 실천상을 확인함으로써 당시 교회의 영적 깊이를 가늠해 보고자 한다.

 

 

묵상 기도의 의미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며 친교를 뜻한다.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기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유지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를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으며, 하느님이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구원과 은총을 베풀어 주는 것으로 믿어 왔다. 따라서 어떤 이는 기도를 ‘마음의 호흡’이며, ‘영혼의 음식’으로 표현하기도 했으며, 신앙 생활의 요체가 기도에 있는 것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신앙인의 믿음과 삶을 밝히려는 교회사에 있어서도 당시인들의 기도 생활에 관한 이해는 필수적인 것이다.

 

전통적으로 볼 때 가톨릭 교회에서는 신도들이 구송(口誦)할 수 있는 기도문을 제정해 주었다. 이와 동시에 교회에서는 묵상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묵장의 주제로 흔히 제시되고 있는 것은 신앙의 진리와 신비, 그리스도의 일생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이나 성서의 내용 내지는 성인의 생애 등이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묵상을 통해 신도들은 신앙을 깊게 통찰하고 하느님이 원하는 바를 깨달아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고 교회는 가르쳐 왔다. 즉, 묵상이란 마음과 정신을 하느님께 몰두하여 하느님의 현존 속에서 하느님과 관계되는 모든 일에 관해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묵상 기도를 ‘정신의 기도’라고도 한다.

 

우리의 정신 문화의 일부에는 불교적 전통에서 온 선(禪)이 자리잡고 있다. 물론 불교의 선과 그리스도교의 묵상(Meditatio)이나 관상(Contemplatio)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우리 정신의 한 곁을 차지하고 있는 그와 같은 문화 요소는 선조들이 자신의 믿음살이[信仰生活]를 풍요롭게 하려는 묵상 기도를 실천해 나가는 데 있어서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초기 교회의 신도들 가운데서 외국 선교사들의 도움 없이도 쉽게 묵상 생활에 전념할 수 있었던 사례가 지주 발견됨을 볼 때, 우리는 이와 같은 우리의 문화적 배경에 감사하게 된다.

 

 

“묵상지장”은 어떠한 책인가

 

“묵상지장”의 저자는 구베아(Gouvea, 湯i亞立山, 士選, 1751~1808년) 주교이다. 그는 조선 교회의 ‘기적적’ 창설에 관한 사실을 동료 선교사에게 보고한 “구베아 서한”을 남긴 인물로서, 조선의 신생 교회에 대한 사목적 책임을 지고 있던 베이징(北京) 교구의 주교였다. 그는 재속 성직자였지만 프란치스코 제삼회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했다. 그는 포르투갈 사람으로서 북경 교구장에 임명되었고, 1785년 북경에 도착한 이후 북경교구와 조선 교회의 발전에 기여했다. “묵상지장”이 처음으로 간행된 년도나 장소를 현재로서는 밝히기 어렵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 교난의 과정에서 정부 당국에 압수된 천주교 서적들 가운데 이 책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 책이 1801년 이전에 간행되었음은 확실하다.

 

이 책이 한국 교회에 전해진 시기도 명확히 밝힐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책이 1794년 구베아 주교의 파송을 받아 조선에 입국한 주문모(周文謨, 1752~1801년) 신부가 전래 보급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 책은 1801년 신유 교난 당시 이미 한글본으로 번역되어 읽히고 있었음이 확실하며, 이 책이 번역되어 읽혔다는 사실은 이 책의 주된 독자층이 한글을 지적(知的) 무기로 삼고 있던 비특권적 민중들이었음이 암시한다고 하겠다. 오늘날 남아 있는 한글 번역본은 이때 번역된 것은 아닌 듯하다. 현재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는 한글 필사본(12.1Cm×19.1Cm, 123장)은 원래 블랑(Blanc, 1844~1890년) 주교가 소장했던 책자였다. 이 필사본은 한글 띄어쓰기가 되어 있지 않지만 간간이 마침표와 쉼표를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필사본은 보조 부호의 사용이라는 국어 발달사의 측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자료이다.

 

또한 1896년 파리에서 간행된 쿠랑(Courant, 1865~1935년)의 “조선서지”(朝蘇書誌)에서도 “묵샹지쟝”이라는 책 이름이 나옴을 볼 때, 19세기 말엽에도 이 책은 필사본의 형태로 조선에서 계속 읽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중국에서도 판을 거듭하며 읽히고 있었다. 1924년 홍콩 나자렛 출판사에서 간행한 도서 목록에 이 책이 포함되어 있다. 명저의 생명은 그 지은이보다 몇 배 더 길기 때문에 18세기 말엽에 지어진 이 책이 20세기 전기에도 계속 간행될 수 있었다.

 

“묵상지장”이란 제목에서 ‘지장’(指掌)이라는 말은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처럼 알기 쉽고 하기 쉽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제목은 “손쉬운 묵상 방법” 정도로 풀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묵상의 중요성을 밝힌 서론 부분과 묵상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에 관한 여덟 개의 장으로 구성된 본문 편으로 되어 있다. 본문에서는 묵상의 의미와 큰 줄거리, 그리고 묵상하는 규칙과 그 형식을 밝혀 주고 있다. 또한 이에 이어서 묵상의 효과와 묵상에 방해되는 내용들 및 묵상 과정에서 부딪히게 되는 각종 문제점들을 푸는 방법 등이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구약 성서에 등장하는 솔로몬이나 같은 다윗과 여러 인물들이나 교부 시대 이후 교회사에 등장하는 신비 사상가들의 구체적 사례들을 풍부히 제시해 주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1742년 교황 베네딕토 14세(1675~1758년)가 반포한 묵상을 통해 전대사를 얻는 방법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는 신도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수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여기에 이 책이 우리 교회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올바른 의미가 있다. 즉 이 책은 우리 선조들의 신앙을 심화시켜 주는 데에 기여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수 있다.

 

 

맺음말

 

“천주교에 나오기는 쉬워도 규계를 기키기는 어렵다. 그러나 규계를 지킴에 법이 있으니 그 법은 묵상이라.” “묵상 신공은 천주를 열심으로 섬겨 받드는 신공이니, 사람이 만일 힘써 행하면 천당 진복을 얻기 쉬우리라”(“묵상지장”에서).

 

초기 교회의 신도들은 이 세상의 사물에 궁극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천당 진복을 항상 그리워했다. 이 천당 진복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로 신도들은 묵상 기도를 존중했다. 이 지름길을 이끌어 주는 나침반이 바로 “묵상지장”과 같은 책자였다. 신도들은 이 책을 통해 묵상 기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묵상을 잘할 수 있는 방법과 그 효험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묵상지장”은 신도들의 영성적 수준을 높여준 책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백성들의 믿음과 삶과 생각을 밝혀야 하는 교회사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를 한번쯤은 읽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박해 시대에 관하여 알고자 하는 일반인들도 읽어 봄직한 책자이다. 현재 이 책은 교회사 연구 자료의 하나로 영인되어 손쉽게 구해 볼 수 있게 되었다.

 

[경향잡지, 1993년 6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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