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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연길 5000km 대장정3: 대교동공소와 용정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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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6-16 ㅣ No.124

[연길교구 설정 80돌 특별기획] 연길 5000km 대장정 (3) 대교동공소와 용정본당


간도 복음화 꽃 피운 현장은 공원으로...

 

 

- 현 용정시 지신진 신화촌에 자리한 대교동공소터. 앞쪽 파란 기와집과 오른쪽 기와집 한 채 사이에 대교동공소가 자리했으며, 오른쪽 기와집 기와는 허문 공소 기와를 다시 재활용했다고 한다.

 

 

'조선 이주민들의 첫 정착지' 용정(龍井, 룽징) 공동체는 간도교회의 핵이다. 용정에 첫 공소와 첫 본당이 세워지는 게 그 증거다. 1898년 용정 못미처에 세워진 첫 공소 공동체 대교동(大敎洞, 따쵸우둥) 공소와 첫 공소 설립 이후 11주년을 맞아 1909년 설정된 첫 본당 삼원봉(三元峰, 싼웬펑)ㆍ용정 본당은 간도교회의 주추가 된다. 그 사이 숱한 눈물과 기도, 열심이 있었다. 척박한 땅 용정에 자리를 잡은 신자들은 공동체를 이뤘고 '신앙의 꽃'을 피웠다. 이번 호에서는 대교동공소와 용정 하시ㆍ상시본당, 지금의 용정본당을 살핀다.

 

 

간도 선교전진기지 '대교동공소'와 '용정본당'

 

첫 공소 대교동공소와 첫 본당 용정본당은 '한 포도나무에서 나온 가지'(요한 15,5)였다. 두 공동체 모두 '북간도 12종도' 최문화(베네딕토)를 비롯한 조선족 20여 가구가 일궈낸 공동체였다. 이를테면 '일란성 쌍둥이'였던 셈이다.

 

대교동공소 및 용정하시, 상시본당 위치도.

 

 

1898년 초 부처골(佛洞)에 세워진 대교동공소는 외교인들의 증오와 청국인들의 습격에 집과 농작물이 화재로 전소되는 수난을 겪으면서도 전 공동체가 열심한 선교를 통해 선교 전진기지로 떠오른다. 이에 힘을 얻은 대교동공소는 1900년 육도구(六道溝, 류또우꺼우) 땅 443만㎡를 매입, 신자들 20여 가구를 이주시킨다. 이른바 '용정'의 시작이다. 당시 대여섯 가구밖에 살지 않았던 육도구는 대교동공소 신자들의 이주로 용정으로 지명이 바뀐다. 1901년 조선대목구장 뮈텔(G. Mutel) 대주교가 간도를 첫 사목방문했을 때 간도 신자 수가 700여 명에 이를 만큼 활력이 넘치는 원동력은 바로 대교동공소에서 비롯된다. 이에 뮈텔 대주교는 1909년 5월 1일 용정본당을 설정, 간도 복음화의 이정표를 세운다.

 

이처럼 용정에서 간도교회 초석을 놓은 대교동공소는 삼원봉본당 터에서 그리 멀지 않다. 삼원봉ㆍ대랍자(화룡)본당 터를 나와 윤동주(1917~45) 시인 생가를 지나자마자 항일의 빛나는 역사를 오롯이 간직한 '선구자의 무대' 용정 못미처 '대교동공소' 터가 나타났다. 현 용정시 지신(智新)진 신화(新華)촌 4대(隊)다.

 

그러나 공동체는 이미 와해돼 잔해조차 찾기 어렵다. 중국 현대사의 큰 상처인 1960~70년대 문화혁명 때 신자들을 농장이나 공장 집체호(集體戶)로 내쫓은 '하방(下方)운동'으로 공동체가 무너졌고, 지금은 신화촌 언덕배기 아래 빈 공소 터에 청기와집과 평범한 기와집 등 민가 두 채만이 남아 있다. 다만 공소 건축물 잔해 중 일부가 민가 기와로 재활용돼 옛 신앙을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5년 전 공직에서 물러나 이 집에 이사했다는 조선족 리철(54, 전 용정시 세무국 직원)씨는 "전에 천주교당으로 쓰던 건물 기와를 우리 집 기와로 올렸다는 말을 전해들었다"고 증언한다.

 

 

간도교회 구심점 '용정 하시 · 상시본당'

 

- '선구자의 무대' 일송정 소나무에서 바라본 용정 시내 전경이다. 오른쪽에서 해란강이 흘러들고 넓은 용정벌이 아스라하게 펼쳐진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시내로 들어서니, 어디선가 가곡 '선구자'가 금세라도 들려올 것만 같다. 대한 독립을 꿈꾸며 말 달리던 선구자들을 떠올리다 보니, 용정시 중의의원 앞 '용두레 우물' 공원이다. 용정이라는 지명 기원지가 된 용정 공원에는 1996년 거제시와 용정시가 세운 거룡경천비(巨龍驚天碑), 정자 등이 있고, 마작을 즐기는 노인들로 북적댄다. 옛 신앙의 흔적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이 한적한 공원이 용정본당이 있던 유서 깊은 교회사적지다. 1909년 퀴를리에(L. Curlier, 파리외방전교회) 신부 부임 이후 용정본당은 새 복음화의 전설을 쓴다. 1912년 간도 최초 프랑스식 벽돌 양옥 성당을 신축했고, 해성학교와 해성학원, 진료소ㆍ시약소 등을 세워 선교 발판을 마련한다. 특히 해성학교는 1944년 일제에 학교를 빼앗기기까지 한글을 가르쳐 민족교육의 터전이 됐다. 이에 앞서 1919년 3월 13일에는 성당 종 타종과 함께 3ㆍ1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주역이 되기도 했고, 1936년에는 본당 차원 타르치시오회 회보를 발전시킨 「가톨릭 소년」이라는 월간지도 발행했다. 이 잡지는 당시 조선에서 청소년을 위해 발간한 유일한 간행물로 '조선 소년 소녀 월간물의 왕자'로 불렸다. 해성학원 출신 윤오복(마리아, 82) 할머니는 용정 조선인 사회를 일군 주역은 천주교 신자들이었고, 용정본당은 그 중심에 자리했다며 남다른 자부심을 드러낸다.

 

- 용정본당과 용정상시본당이 연이어 위치했던 용두레 우물가에서 윤오복 마리아 할머니가 두 손을 모으고 어렸을 적 신앙생활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1932년은 용정본당의 분기점이다. 교세가 커지자 용정본당은 용정하시(龍井下市, 룽징싸쓰)에 새 성당과 사제관, 수녀원, 해성학교를 신축 이전한다. 또 성당 이전 뒤 유치원과 학원으로 쓰이던 옛 용정성당은 1936년 9월 용정상시(龍井上市, 룽징썅쓰) 본당으로 분가한다. 용정상시본당은 특히 한윤승(필립보)ㆍ김성환(빅토리오) 신부 등 한국인 사제들과 수도자들(연길 성 십자가 수녀회, 훗날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녀회)로만 구성된 본당이었기에 연길교구장 브레허(T. Breher) 주교와 수도회의 각별한 사목적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이 본당은 1947년 김 신부와 수도자들이 월남한 뒤 1950년 12월 침묵의 본당이 됐다.

 

용정하시본당 터로 향했다. 현재 용정시 평화서로 185호 양광(陽光)학교다. 2000여 명이 한꺼번에 미사를 봉헌하던 성당과 수녀원은 이제 흔적조차 없다. 600여 명이 재학하던 해성학교도 양광중학교로 탈바꿈했고, 해성학교 마당은 용정 세기(世紀)백화점이 자리하고 있다. 햇살만이 고즈넉하게 가라앉고 있다.

 

연길교구 내 유일한 '자립본당'이던 용정하시본당은 1946년 5월 침묵의 교회가 됐고, 중국의 개혁ㆍ개방 이후 1995년 용정본당(주임 조광택 신부)이 재건돼 복음 선포가 이뤄지고 있다.

 

흔적이 다 사라진 용정하시본당 터를 돌아나오며 개산둔에서 만난 용정 할머니를 떠올렸다. 일송정이 자리한 비암산 너머 들녘 평강벌을 개척, 미곡상(천일상점)을 하며 용정하시ㆍ상시성당을 건립한 주역 중 한 사람인 최병학(베르나르도, ?~1933) 회장의 손녀 최용숙(데레사, 76) 할머니였다.

 

취재진과 동행한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송대석 수사에게 슈레플 신부가 1989년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서 뇌졸중으로 투병하다가 선종했다는 소식을 들은 최 할머니는 사제들이 중국 공산당에게 폭행당하던 얘기를 털어놓으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평생 박해를 받으면서도 아버지 최형도씨가 친필로 써준 기도문('성녀 비르지타에게 계시하신 예수 수난 15기도')을 일생 바치며 신앙을 지켜온 터였기에 슈레플 신부 선종 소식을 뒤늦게 접한 할머니의 눈물은 더 뜨거웠을지도 모른다. 용정하시성당 터를 떠나려니 발길이 떼어지질 않는다.

 

[평화신문, 2008년 6월 15일, 오세택 기자, 사진=전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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