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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박해시대의 성인공경 - 나도 성인과 같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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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8 ㅣ No.116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박해시대의 성인공경

 

나도 성인과 같이 될 수 있다

 

 

박해시대에는 성당도 없고 사제도 만나기 어려웠다. 성경도 제대로 번역되지 않았고 교리서도 변변치 않았지만 하느님에 대한 믿음만은 굳건했다. 당시의 신자들이 이러한 믿음을 갖기까지에는 신앙생활의 모범을 보여 준 성인들이 있었다. 신자들은 특히 자신이 세례를 통해 얻게 된 ‘주보성인’ 또는 ‘수호성인’의 모범적 삶을 본받고자 했다. 성인공경은 바로 자신의 세례명으로 표기되는 주보성인과의 만남과 사랑과 본받음에 그 출발점을 마련하고 있었다.

 

서양 가톨릭교회의 전통에서는 신자 개개인뿐만 아니라 여러 직종이나 지역에 따라 수호성인들을 모시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유독 세례를 통해 얻은 주보성인에 대한 존경이 성인공경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박해시대 신자들은 하느님과 주보성인을 만남으로써 자신이 존귀해짐을 실감했던 사람들이다.

 

 

세례와 주보성인

 

서양에서는 교회의 오랜 관습에 따라 태어나 세례를 받을 때 성서상의 인물이나 성인들의 이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이름으로 삼았다. 그 이름에는 세례명으로 주어진 구체적인 그 인물을 모범으로 삼아 평생을 살아가라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신자들은 그를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평생 본받고자 노력하면서 자신을 위해 하느님께 함께 빌어주고 전구해 주기를 요청했다.

 

‘주보성인’이란 말은 원래 ‘주된 보호자인 성인’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이말 대신에 ‘수호성인’이란 용어를 더 많이 쓰고 있다. 신자들은 세례를 통해서 얻게 된 수호성인이 자신을 위해 하느님 앞에서 중재하고 옹호해 주며 보호해 준다고 생각했다.

 

교회에서 수호성인을 정하여 공경하기 시작한 때는 4세기 초부터였다. 그 뒤 이 성인숭배는 서양 중세교회에서 더욱 성행하였다. 그래서 종교개혁 때에 개신교 지도자들은 수호성인에 대한 지나친 신심을 비판했지만,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의 가톨릭 개혁과정에서 수호성인을 공경하는 신심이 다시 부활하였다. “성인공경은 좋고 필요한 일이며, 성인들은 하느님께 대신 기도해 주는 중개인 또는 조정자 역할을 한다.”고 규정한 가톨릭교회의 이 전통은 박해시대 조선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박해시대 신자들은 교회의 관행에 따라 세례명을 부여받았다. 이승훈은 북경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당시 한글로 번역된 교회서적은 베드로를 ‘넓은 돌’이라는 뜻으로 풀이해 놓았다. 그리스도께서 반석 위에 자신의 교회를 세우셨듯이, 북경의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는 이승훈이 조선교회의 반석이 되기를 소망한 결과였다.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 베드로는 이벽과 권일신에게 세례성사를 주었다. 이때 그들은 상징과 의미를 되새기는 우리 문화의 전통에 따라 세례명을 택하는 데도 특별히 숙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벽은 조선의 개종사업을 시작하며 구세주가 오시는 길을 준비하였으므로 본명을 요한 세례자로 하였다. 권일신은 복음전파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동양의 사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을 주보로 하여 그를 모범으로 삼고 그를 보호자로 모시기로 했다.”

 

또한 정약종은 “천주교가 조선에 전파되자 그것을 곧 배웠다. 그러나 그는 즉시 응답하지 않았다. 그는 이벽이 참된 길에서 빗나간다고 자주 되뇌다가, 4-5년 뒤에야 비로소 은총의 권유에 순종했다. 그리고 자기가 그렇게 주저한 데에서 아우구스티노 성인(66쪽 사진)의 망설임과 비슷한 점을 발견하고서 영세할 때에 이 성인을 주보로 삼고자 했다. 교우가 되자 그는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고 어떤 찬사도 미칠 수 없는 열심과 항구심으로 천주교를 봉행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자신이 평생의 사표로 삼을 수 있는 성인들의 이름을 가려 뽑아 자신의 세례명으로 택했다.

 

 

성인에 대한 공경

 

박해시대 신자들은 한문 서학서를 통해서 성인들의 생애를 접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할 때에도 ‘성인들의 전기’를 가져다가 이벽에게 전해주었다. 신생 조선교회의 지도자들은 이를 한글로 번역해 내었다. 최창현이 번역한 책자들 가운데에는 ‘성인들의 전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1801년 박해 당시에는 한문본 “성 안드레아[聖安德助] 전기”가 전래되어 얽히고 있었고, 성녀 칸디다, 성녀 아가타, 성녀 빅토리아의 전기가 한글로 번역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성인들의 전기가 마련되어 있었으므로 교회는 신자들에게 성인전을 읽고 성인을 본받기를 권장했다. 박해시대 교회에서 널리 읽혀지던 한글본 “성년광익”(1865년) 머리말에서는 “사람마다 성인들의 행적을 보고, 그 덕을 본받아 힘써 실천하면 성인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씌어있다. 이와 같은 가르침에 따라서 신자들은 성인들의 행적을 따라 배우고자 노력했다.

 

성인에 대한 공경의 출발점은 주보성인에 대한 특별한 신심이었다. 중세 교회가 남겨준 좋은 유산 가운데 하나인 주보성인에 대한 신심을 1801년에 순교한 주문모 신부도 자신의 신자들에게 강조한 바 있었다. 그리하여 윤점혜 아가타는 자기의 주보성녀를 특별히 공경하며 같은 열심을 주위의 사람들에게 일으키고자 힘썼다. 윤점혜는 “나도 아가타 성녀처럼 순교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자주 말했는데 그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한편, 주보성인 이외의 성인에 대한 숭배도 초기교회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이순이 루갈다는 아가타 성녀를 특히 좋아했는데 이는 그가 자신의 주보성인 이외에 다른 성인의 전기를 읽고 그를 따르려 했음을 뜻한다. 박해시대의 여성들이 특히 선호했던 성녀는 로마 시대의 동정 순교자들이었다. 그들은 아가타나 빅토리아 또는 골룸바 등의 동정 순교행적에 감동했다. 이러면서 그들은 정결을 소중히 여기던 당시 양반사회의 풍습과 정결의 덕을 높이 평가하는 교회의 가르침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나갔다.

 

 

남은 말

 

우리 조상들은 “사기”의 “열전”을 읽거나 여러 “인물전”을 지어 남겨주면서 앞선 사람들의 모범을 따라 자신을 갈고 닦기를 권장했다. 동양사회의 이 관행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중세 서양의 신심 가운데 하나였던 성인공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토양이 되어주었다. 그리하여 박해시대 신자들은 성인전을 읽으며 그 성인을 본받고자 노력했다. 그들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하느님과 주보성인과 자신을 연결시켰다. 그리고 “천주성교공과”에 수록된 ‘본명성인을 향하여 히는 경’을 외우면서 주보성인이 자신의 신덕을 더해주도록 하느님께 전구해 주기를 청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주보성인처럼 실제로 순교하여 또 다른 성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하여 그들의 꽃다운 이름을 후세에 길이 전하게 되었다.

 

새로운 선교지 조선 땅에서도 성인에 대한 공경은 이처럼 발전하여 갔다. 성인공경은 우리나라 신자들이 그리스도교의 전통 안에 자신을 새롭게 몰입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신자들은 ‘모든 성인의 통공’과 ‘그리스도교 신비체’에 대한 교리를 이해하며 실천할 수 있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땅에 깊이 뿌리를 내려갔다. 주보성인을 공경하던 박해시대 이래 교회의 전통은 오늘에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5년 9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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