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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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윤리] 윤리신학과 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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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236

윤리신학과 성서

 

 

성서와 윤리신학의 관계는 단순히 성서에서 제시되는 규범의 틀 안에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윤리신학이 성서를 통해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사건들의 역사적 배경이나 상황 그리고 의도 등을 분석, 수용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곧 윤리신학을 공부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과제는 성서가 "우리들의 영적 생활의 양식"이 될 수 있도록 "하느님 계시의 중요 테마를 파악"하는 일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윤리신학을 위한 우리의 과제를 위하여 간결하지만 매우 명확한 설명을 제공한다. "신학과목들은 그리스도의 신비와 구원의 역사와의 관계를 보다 생생하게 유지하도록 재검토해야 하겠다. 특히 윤리신학을 보완하는 데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그 학술적 해설에 성서의 가르침을 보다 풍부히 가미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이 받은 성소의 고상함을 깨우쳐주고, 세상 생활에 있어서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할 신자들의 의무를 밝혀 주어야 하겠다." 우리가 여기에 접근하는 방법은 먼저 성서의 상황을 이해하고 성서적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이 지니는 의미와 가치를 바라보는 것이다. 성서를 통해서 나타나는 규범과 지침들은 그런 다음에야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성서의 역사적 배경을 의식해야 할 것이고, 그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드러나는 인간의 하느님께 대한 충성과 창조적 의지를 읽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 구약성서

 

윤리신학은 구약성서로부터 위대하고도 날카로운 시각을 배워야만 한다. 구약성서 안에서 특별히 윤리신학을 위해 중요한 주제가 되는 것은 구약성서와 윤리신학에서 다루는 주제가 서로 부합되고, 또한 서로의 주제를 더욱 완전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1.1.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초대

 

성서는 아리스토텔레스나 그 밖의 철학자들과는 달리 하느님을 因果律로서 소개하지 않는다. 즉 성서는 하느님을 인간들의 첫 번째 動因으로 설명하지 않고 창조적인 말씀과 계약에로의 초대라는 관점에서 소개한다. "하느님이 말씀 하셨고, 그대로 이루어졌다." 이는 창세기가 하느님을 소개하는 가장 장엄한 설명이며, 신구약 성서 전체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께 대한 설명 중에서 가장 위대한 시각인 것이다.

 

하느님의 창조로서의 말씀의 주제는 그분의 모습에 따라 그분과 비슷하게 창조된 인간에 관하여 말할 때 가장 장엄한 순간을 드러낸다: "그리고 나서 천주께서 가라사대 사람을 우리와 비슷이 우리 모습대로 만들어 바다의 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에서 기는 모든 길짐승들을 다스리게 하리라 하시고, 천주께서 당신 모습 따라 사람을 창조하셨도다. 천주의 모습 따라 그를 창조하셨도다. 그들을 사내와 계집으로 창조하셨도다."(창세 1,26-27) 창조의 말씀은 우리 인간이 창조주의 모습을 지닐 수 있도록 부르신 하나의 초대일 뿐만 아니라, 자유 안에서 그분과 함께 살 수 있도록 부르신 초대이기도 하다.

 

1.2. 회개와 구원에로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죄에 물들어 있는 세상으로부터 피신하도록, 그리고, 당신께 신뢰를 갖고 충실하도록 노아를 부르신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회개에로, 즉 구원에로 초대하신다. 노아의 역사는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끊임없는 염려를 상징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구원이란 회개와 신뢰라는 일종의 탈출이다. 하느님의 초대와 그분의 은약이라는 선물은 무한히 자비롭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신앙과 회개로써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의 투쟁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성서는 말해준다.(창세기 6-10장)

 

1.3. 하느님의 초대: 선택과 약속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떠나도록' 초대하신다: "너의 고향과 너의 친척과 네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하느님의 이러한 부르심은 선택과 약속의 부르심이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믿음과 충성을 다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하느님 면전을 순례하는 순례자로서 그분께 대한 신앙을 더욱 확고히 하였으며,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그 부르심은 분명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하나의 축복이 되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하느님의 초대'라는 주제가 더 잘 이해된다. 역사는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역사로서 이해된다. 하느님께서는 용기 있는 신앙과, 당신의 부르심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역사를 이끌어나가도록 백성들을 부르시며, 하느님의 부르심은 백성들에게는 항상 선택이며 약속이 된다. 그분은 조상들의 하느님으로 등장하셨으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하느님으로 소개되었다.

 

1.4. 하느님의 초대: 해방과 계약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시고 당신 구원의 역사를 드러내 보이신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사막에서 홀로 살도록, 당신의 현존을 체험하도록, 그리고 한 분이시고 거룩하시며, 해방자이신 당신을 알도록 부르신다. 모세의 역사는 예언자들과 하느님 백성에 대한 충실한 응답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의 역사는 동시에 추락된 신뢰의 역사와 비참한 최후를 보여주기도 한다.

 

하느님의 해방과 구원의 행위는 생명의 기초이다.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과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며, 그럼으로써 이스라엘의 윤리는 일종의 계약의 윤리가 되며, 이는 감사와 충성으로써 조화를 이루는 응답, 즉 함께 참여하는 응답으로써 성립된다. 곧 이스라엘의 자유는 항상 하느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감사와 계약에의 충실함으로써 보호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이스라엘 역사의 주님으로 드러나시기 때문이다.

 

1.5. 백성의 회개와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초대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망각하고 계약에 불충실할 때마다 적들과의 힘든 싸움을 벌이게 되며, 또 절망적인 상태에 빠지게 되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게된다. 그러나 백성들이 하느님의 자비의 약속에 응답하면서 회개하고 하느님을 찾게 될 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탁월한 지도자를 주시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중재하신다.

 

이는 구약성서, 특히 판관기와 사무엘 상하권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주님께 철저한 신뢰를 두고 하느님의 초대에 창조적으로 응답하는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루어내고 있다. 곧 해방은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인간의 회개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1.6. 왕들을 선택하시고 또 쫓아내시는 하느님

 

구약성서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또 하나의 시각은 권위의 가치, 그리고 그것의 불확실성이다. 인간이 하느님을 공경하지 않을 때에는 항상 분열과 파괴의 원인이 되는 권력의 욕망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파견된 모세와 사무엘과 같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은 자기 고유의 왕정이나 권력에 연연하지 않고 공동선의 실현을 위해 헌신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하느님의 '은혜가 넘치는' 왕국의 확실한 상징이 된 것이다. 순수한 카리스마적 권위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커다란 축복이다.

 

계속해서 구약성서는 지상 권력의 불확실성을 보여주는 상징으로서 왕들의 전체 역사를 소개한다. 단순히 왕들의 죄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국가들 사이에서 보여지는 왕의 권력이 지니는 하나의 구조와 표상을 보여주기 위하여 왕을 원하는 백성들의 죄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왕정제도는 결국 악의 끊임없는 원천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1사무 8장 참조).

 

그렇지만 하느님의 의도는 평화와 구원이라는 점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지도자들이 당신께 충실히 머물 수 있도록 그들이 선택되었고, 도유 되었다는 표지를 여러 기회를 통해 제공하였지만 때로는 이스라엘의 왕들과 사제들은 하느님을 모르는 이교인들의 왕이나 사제처럼 행동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왕들이 예언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이시고 진실하신 하느님께 대한 충성을 다할 때에는 항상 그들과 함께 계셨고, 또 축복해 주셨다. 타락을 가져다주는 분열은 무엇보다도 권위를 남용한 결과로서 드러나며, 이는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의 중요 주제가 되며, 나아가서는 예언자들의 메시지가 담고 있는 중요 내용들 중의 하나이다.

 

1.7.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부르심과 그들의 응답

 

구약성서는 선택된 백성들의 삶을 간결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잘 소개하고 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의 계시를 드러내는 텍스트와 담화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하느님께 대해 온 마음과 열정적인 충성심을 가지고 응답할 준비가 아직 부족한 이스라엘의 계시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까지도 소개하고 있다.

 

구약성서의 정점(頂点)은 예언자들의 역사로부터 구성된다. 예언자들은 그들을 부르시고 파견하신 하느님께 완전히 매료된 사람들로서, 하느님의 능력을 백성들 앞에서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사람들로서, 동시에 하느님께 대한 심오한 체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소개된다. 그렇지만 그들은 결코 그 시대 사람들의 역사로부터, 기쁨과 고통으로부터, 그리고 그들의 필요와 희망, 고뇌로부터 분리되어 있었던 사람들은 아니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자비를 동시에 경험한다. 정확한 판단력과 용기로써 그들은 상하-좌우 관계, 거룩하신 하느님께 대한 체험과 정의와 자비, 평화를 위한 인간의 임무 사이의 종합을 이루어낸 것이다.

 

예언자들은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목적으로 해서 '권위'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불렸으며, 또한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서 이렇게 말한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불러 주십시요. 저를 보내 주십시요". 그들에게는 파견에 대한 보상으로 결코 보수도 명예도 전혀 보장되어 있지 않다. 예언자는 전적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봉사에 바쳐진 사람들이며, 자주 고통을 겪어야만 하고,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감수해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이스라엘의 사제들의 역사는 하나의 비극적 역사이다. 카리스마적 지도자 모세를 보조하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기 위해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아론은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으며, 종교를 자신의 고유한 권력의 상징으로 변질시켰던 것이다. 이는 사제 계급이 권력의 상징으로나, 사회적 신분으로 변질될 때에 항상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늘 당신께 대해 충성을 다 할 수 있도록 사제들이 끊임없이 노력할 것을 원하신다. 사제는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혼신을 다하여 백성들이 하느님을 공경하도록 백성을 가르쳐야만 한다. 사제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은혜로운 기억을 간직해야만 하며, 또한 백성들이 하느님과의 계약에 충실하도록 늘 그들을 초대해야만 할 것이다.

 

사제들이 자신들을 어떤 특수 계층에 속한 사람으로서 생각하고 행동할 때에는 그들은 분명 소외될 것이며, 또한 하느님께 대한 어떠한 체험도 얻지 못할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지혜라던가 판단력등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이 형식주의나 율법주의에 얽매이게 될 때에는 결국 모든 백성들을 함께 소외시키는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사제 계급의 타락이 국가들 간의 패권을 위한 전쟁을 통해서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중앙통제와 비참함에로 이스라엘을 몰아넣은 반면에 예언자들은 국가들끼리의 불목 안에서도 이스라엘을 참된 표지에로 늘 초대했던 것이다. 예언자들은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의 세력만을 확장시키면서 결과적으로 다른 어느 국가보다도 막강한 한 국가를 만들기에만 급급했던 이스라엘의 거짓되고 헛된 망상을 질타했던 것이다.

 

1.8 야훼의 종

 

구약성서에서 나타나는 윤리-종교적 예언자 사상의 역사에 있어서의 정점은 "야훼의 종" (이사 42,1-9; 49,1-6; 50,4-9; 52,13-53,12)을 선포하는 신명기에서 드러난다.

 

예언자적 메시지의 핵심은 바로 다음과 같다: 즉 하느님께서는 결국 하느님과 인간의 종인 '한 사람'을 부르실 것이며, 또한 파견하실 것이다. 즉 메시아 안에서의 희망이다. 이분은 모든 국가들의 평화, 정의, 일치, 그리고 하느님의 종으로부터 주어지게될 선물에 대한 희망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임무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모든 국가, 민족들에게 봉사하는 종이 되라는 이러한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다.

 

1.9 계약과 율법

 

노아, 아브라함, 야곱, 모세, 그리고 이스라엘 전체에 대해 주어진 하느님의 부르심은 하나의 계약으로 나타난다. 곧 하느님께서는 구원 계약을 통해 당신 자신을 이스라엘에게 드러내셨고 약속하신 것이다. 하느님 측의 계약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구원의 행위와 계약의 선물에 의해서 이스라엘에게는 율법이라는 선물이 부여된다. 그러나 율법이란 계약의 외적인 것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계약에서부터 흘러 넘치는 선물인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계약을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겸손하게 수행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는 긴 여정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보호하시면서 이스라엘에게 충실하게 응답하실 것이다.

 

예언자, 사제 등의 이스라엘의 거룩한 백성은 거룩하신 하느님의 인도가 이스라엘과 함께 거룩함에로 나아가는 길로 부르시는 것(레위 19장 참조: "거룩한 백성이 되는 길")이라는 사실임을 깨닫는다. 율법이란 선택된 백성의 삶을 고되게하는 어떤 짐이나 강요된 명령은 아니다. 율법은 계약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며, 따라서 이스라엘이 계약에 충실한다는 것은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었으며, 여기서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사제 전승과 예언자 전승이 율법을 말하는 것은 단순히 율법의 반복이 아니다. 이 전승은 계약이 축복이라는 의미를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새롭고도 종합적인 해석을 제공해준다. 예언자들이 수행했던 일은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백성이 진정으로 자유롭고 책임감을 지니며, 동시에 창조적이게 할 수 있는 하나의 지침, 빛, 그리고 선물로서의 율법을 받아들이고 내면화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었던 것이다.

 

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약과 율법을 완성하실 것이며, 계약에 충실하고 책임감을 지니는 한 백성을 찾으리라는 것을 선포하며, 이는 이스라엘에게 희망이 되며 동시에 이스라엘을 성숙시키게 된다. 예언자들의 이러한 선포가 메시아적 희망의 중심이 되며, 따라서 이 희망은 야훼의 종의 노래 안에서 핵심 주제가 된다: "장차 시일이 오리니, - 야훼의 말씀이라 -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의 집안과 더불어 새로운 계약을 맺겠노라. 내가 이들의 조상들을 미쓰라임에서 나오게 하려고 그들의 손을 잡았던 날에 이들과 더불어 맺었던 그 계약과 같은 것이 아니니,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건만, 그것을 - 나의 계약을 - 그들이 깨뜨렸느니라. 그러나 내가 이 다음 날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집안과 더불어 맺으려는 그 계약은 이러하니 - 야훼의 말씀이라 - 곧 나의 법을 그들의 속 안에 두고 또 그것을 그들의 마음 위에 써 놓겠노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에게 천주가 되고, 그들은 나에게 백성이 되리라. 또 다시는 '야훼를 알아 모셔라' 말하며 사람이 자기 이웃에게와 자기 형제에게 타이르지 않으리니, 이는 그들의 적은이로부터 그들의 큰이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모두 나를 잘 알겠음이며 - 야훼의 말씀이라 - 그 까닭은 내가 그들의 허물과 그들의 죄악을 용서하고 다시는 내가 기억하지 않겠음이니라."(예레 31,31-34) 하느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은 끝나지 않았고, 과거 선조들에게 보여주셨던 그 기적들은 이스라엘 모든 이의 집과 마음에 다다를 것이며, 그 기적의 약속은 하느님의 정의를 통해 완수된다: "내가 너희를 뭇 민족 가운데서 데려내 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 고국으로 데려다가 정화수를 끼얹어 너희의 모든 부정을 깨끗이 씻어 주리라. 온갖 우상을 섬기는 중에 묻었던 때를 깨끗이 씻어 주고 새 마음을 불어넣어 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리라. 나의 기운을 너희 속에 넣어 주리니, 그리되면 너희는 내가 세워준 규정을 따라 살 수 있고 나에게서 받은 법도를 실천할 수 있게 되리라."(에제 36,24-27)

 

이렇듯이 구약성서 전반에서 보여지는 주요 시각은 하느님의 은혜가 넘치는 말씀과 행적, 그리고 백성의 기꺼운 수락과 응답이라고 할 수 있는 회개의 유일한 '기쁜 소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 한사람 한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부르심이요 메시지이다.

 

충실한 응답은 성령의 활동이다. 곧 생명을 선사하시고 창조성과 충성의 열매를 더욱 성숙시켜 주시는 성령을 통해 하느님께 자유롭고도 기꺼운 마음으로 응답하라는 것이 구약성서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부르심이며 메시지이다.

 

 

2. 신약성서

 

구약성서 전체를 통해 명백하게 드러난 것은 종교는 하나의 추상적인 철학이 아니고, 오히려 하느님의 백성과 함께 하시는 살아 계시는 하느님께 대한 역사라는 점이며, 또 인간이 하느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하느님의 예언자와 그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며, 인간이 이를 받아들일 때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응답하신다는 것이다.

 

신약성서도 마찬가지로 신앙과 윤리를 하나의 율법적인 체계나 철학으로 전락시킬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한다.

 

신약성서의 중심은 다윗의 자손이며, 인간의 아들이며,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이시며, 신약성서가 제시하는 그리스도교 윤리의 새로운 점은 바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가장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우리 인간에게 직접 보내 주실 정도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사하셨다는 것이다: "과연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는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사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롯되었다. 일찍이 아무도 하느님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의 품안에 계시는 외아들 하느님이신 그분이 알려 주셨다."(요한 1,16-18)

 

2.1. 새로운 계약이신 그리스도

 

이미 살펴본대로 계약(Berith)은 구약성서의 핵심 개념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계약을 통해 불리움을 받았으며 계약의 윤리로써 그 부르심에 응답한다. 계약의 윤리란 계약에 충실하면서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이 대단히 중요한 구약성서적 시각이 신약성서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신.구약을 통틀어 계약의 개념은 가장 중요한 핵심 개념이 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백성의 계약"으로서 선포되신 분이시다. "주(主) 야훼가 너를 부른다. 정의를 세우라고 너를 부른다. 내가 너의 손을 잡아 지켜 주고 너를 세워 인류와 계약을 맺으니 너는 만국의 빛이 되어라."(이사 42,6)

 

그리스도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그 분 위에 이미 구원의 연대를 통해 모든 이의 죄를 짊어진다는 의지가 드러난다. 그때에 성령이 그 분 위에 가시적으로 내려 오셨고,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나는 그를 어여삐 여겼노라."(마태 3,17) 신현(神現)의 이 거룩한 말씀은 메시아가 백성의 계약으로서 선포되었다고 야훼의 종의 첫째 노래에서 분명하게 언급된다. 그 노래는 이렇게 시작된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믿어 주는 자,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나의 종이다."(이사 42,1) 곧 성부께서는 그를 메시아, 그리스도, 도유된 자로서 드러내신 것이다. "가는 나의 영을 받아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 주리라."(이사 42,1)

 

그리스도가 계약의 완성이든지 그분 자신이 새로운 계약이든지 이는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는 하나의 진리이다. 그분은 모든 인류의 죄를 당신 스스로 짊어지신 분이시다. 그분은 인간들에게 당신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놀라운 자유를 부여 해 주신 우리의 형제이시다. 그분께서 성부와 함께 계시고 또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은 그분의 고별사와 사제의 기도에서 드러나는 핵심이다. 그분은 우리 안에 있고 우리는 오직 그분 안에서, 그분의 성령에 의해서 성부와 함께 살아간다: "과연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보았으니 증언하며 여러분에게 알려 드립니다. 그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며 이제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그 생명의 말씀을 여러분에게도 알려 드립니다. 그것은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맺게 하려는 것이니, 우리와의 친교는 곧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차고 넘치도록 이렇게 씁니다."(1요한 1,2-4)

 

성부와 일치하시고 또 우리 인간들과의 연대를 분명히 보여준 예수는 다음과 같은 계약의 법을 선포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5,12) 이 사랑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사랑이다. "여러분은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하고 부르는데 그것은 옳은 말입니다. 사실 나는 그렇습니다. 주요 또 선생인 내가 여러분의 발을 씻었다면 여러분도 마땅히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본을 보여 준 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행한 대로 여러분도 그렇게 행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진실히 진실히 여러분에게 이릅니다. 종이 제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자가 그들 보낸 이보다 높지 않습니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행하면 여러분은 복됩니다."(요한 13,12-17)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법을 채우시고" (갈라 6,2)라고 사도 바울로가 말한 "그리스도의 법"인 계약의 윤리가 바로 여기에 자리 잡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자유를 가져다주는 사랑의 연대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받는 사랑, 그리고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서로 나눌 수 있는 사랑이란 성령 안에서 성부와 성자 사이에 존재하는 '너-나-우리'라는 관계에서 드러나야만 하는 사랑이며, 이것이 곧 참된 자유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공동생활이다. 성부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성자와 성령의 삶에 참여하도록 허락하셨고, 이 사랑을 통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이라는 사도 바울로적 복음은 단순히 '너와 나'라는 정신적인 윤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형제애, 새로운 연대에 관한 계약의 윤리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을 구원의 연대에 참여케 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의 삶과 죽음, 부활에 초대하셨고, 그럼으로써 우리 모두가 그분과의 계약에 함께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 인간은 이렇듯이 그리스도 때무에 죄, 두려움 그리고 죽음의 끈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2.2. 참 예언자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단순히 "예언자들중의 한 분"이 아니다. 그분은 참 예언자이시다. 성령으로부터 도유되었고 인도된, 그리고 성령이 충만하신 그분은 당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성부께 당신 자신을 맡기셨고 동시에 성령 안에서의 삶을 소유할 수 있게 된 당신의 형제들에게 당신 자신을 선물로 내어 주셨다.

 

그분은 오직 성부만을 알고 성령에 의해 세례받은 사람들에게 성부를 알게 하셨다. 그분의 말씀과 행적은 거룩함과 자비 자체이신 성부를 보여 주셨고, 또 예언자들의 역사를 '구원을 위한 투쟁'의 정점으로 끌어 올려 주신 분이시며, 헛된 형식주의와 위험한 율법주의에서부터 우리를 해방해 주셨다. 그분은 영과 진리 안에서 성부를 공경하도록 우리를 가르치셨다: "하느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예배하는 이들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여야 합니다."(요한 4,24). 예수께서는 이렇듯이 소외와 고립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다.

 

참 예언자이신 그분은 예언자들의 학교를 제도화시키지는 않으셨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이란 진정으로 그분을 믿고,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성부께 자신을 의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며, 그분의 예언자적 역할에 참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지난 세대들에게 말씀하신 말씀들을 계속해서 되풀이하지는 않겠지만 그들은 필요한 때에 살아계신 하느님께 대한 창조적인 충성심을 가지고 그분의 모든 메시지와 말씀을 선포할 것이다.

 

2.3. 제자들에게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살아있는 복음과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자가 되면서, 형제들에게 당신 자신을 완전히 내어 주시기 위하여 영의 인도를 받으신다. 해방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성령에 의한 세례와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실현된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께 속하는 사람들은 어떤한 법에도 저촉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하는 이는 육을 그 정욕과 사욕과 함께 십자가에 이미 못박았습니다. 우리는 영으로 말미암아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을 따라 걸어나갑시다."(갈라 5,24-25)

 

신앙 안에서, 늘 감사하면서, 창조적인 생활을 하며, 성령의 인도에 늘 충실한 사람은 누구나 더 이상 율법의 위협 아래 묶이지 않는다. 이웃의 필요를 찾아나서는 일은 하느님께 대한 공경과 감사에 게을리 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맞겨진 법이지만 그들은 이 법을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율법의 지배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안에 있는 것"(로마 6,14)을 강하게 체험할 수 있게 되며, 또한 그들은 새롭게 부여받은 자유를 통해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자신들의 아버지임을 알게 된다. "여러분은 또다시 불안에 떠는 노예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아들의 신분을 주시는 영을 받았기 때문이며, 이 영 안에서 우리는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영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친히 우리의 영에게 증거하십니다."(로마 8,15-16)

 

야고버 사도는 "완전한 법,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법"(야고 1,25)에 대해서 말한다. 사도 야고버가 말하는 완전한 법이란 성령 강림을 통해서 드러나는 그리스도, 즉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세례를 베푸실 예수로부터 확인된 세례자 요한의 약속과 성령의 법에 대한 사도 바울로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다시 강조하는 것이라고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기억과 함께 늘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드러난 계약인 성체성사적 삶을 사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율법의 지배를 받는 종이 아니며, 정의와 평화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다.

 

2.4.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그리스도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 나타나는 하느님 역사의 가장 큰 주제는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충만함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임마누엘, 곧 이미 처음부터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우리의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으로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의 모든 약속의 완성이시며, 그분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영은 마지막 날 그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분의 약속을 끝까지 창조적으로 수행하실 것이다.

 

헬레니즘 철학에서 말하는 사추덕(四樞德)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지녀야 하는 근본적인 특성이나 덕들을 정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 곧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걸어야 하는 길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종말론적인 덕이기 때문이다. 이 덕은 주님께서 행하신 업적에 대해서 늘 감사하는 것이며, 현재의 순간에 늘 자유롭고, 늘 깨어 있으면서 마지막 완성을 항상 기쁨으로 준비하는 것이다.

 

이 주제는 항상 계약 자체이신 그리스도의 빛 아래에서 밝게 드러난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수많은 법을 지키는데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삶과 죽음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선포된 자비와 동정심이라는 위대한 법에 덜 충실하다면 이는 분명히 좋은 표지라고 할 수는 없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여러분도 자비롭게 되시오."(루가 6,36)

 

2.5. 인류 역사 안에 육화된, 성부의 영원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한 말씀이시며, 우리 인간의 비천한 육체와 실존을 취하신 육화(肉化)된 말씀이시다. 또한 그분은 성부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성부의 결정적 말씀이시며, 성령을 불어넣어 주시는 말씀이시다.

 

예수는 단순히 우리 인간에게 오신 성부의 말씀만은 아니다. 그분은 동시에 완전한 응답이시기도 하다. 따라서 그분은 우리가 성부께 대한 흠숭과 신뢰와 사랑의 응답 안에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일치할 수 있도록, 성령의 힘으로써 우리를 초대하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나를 따르라'는 그분의 부르심은 자유와 신뢰, 창조적인 책임감을 가지고 응답해야하는 초대이다.

 

그리스도는 생명을 선사하시는 말씀이시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생명의 충만함에로 인도하시며, 또한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그분을 위해서, 또 생명을 주시는 성령으로써 우리가 성부의 닮은, 성부와 비슷한 존재가 되게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맡기신 성사들도 바로 이러한 시각으로 보아야만 한다. 새롭고도 영원한 계약이 이루어지는 성체성사에 대한 그분의 말씀은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요 육은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한 말들은 영이며 생명입니다" (요한 6,63)라는 그분의 말씀 안에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성체성사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며,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놓으셨다는 것을 끊임없이 기억하며, 또한 우리도 또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완전한 선물로 내어놓을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게 되었다. 이 능력은 철저한 신뢰와 책임감 있는 자유가 기초가 되어 주어지는 능력이다.

 

2.6. 진리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말씀하시며, 하느님께서 당신의 생명과 진리, 절대적 자유를 포함하는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시는 해방하는 진리를 알려 주신다.

 

예수는 살아 움직이는 복음이시다. 그분께서는 성부께로부터 "진리의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신다. "진리의 영, 그분이 오시면 여러분을 모든 진리 안에 인도하실 것입니다. 사실, 그분은 자기 나름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자기가 듣게 될 일을 말씀하실 것이며 또한 앞으로 올 일도 여러분에게 알려 주실 것입니다" (요한 16,13).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시는 순간까지 나타내 보여 주셨던 진리는 하느님 안에서의 완전한 자유, 이기주의의 극복이며, 이웃에 봉사함으로써 비로소 알게되는 그리스도의 참된 모습이다. 성실하고 인자하고, 창조적인 사랑이란 모든 이의 해방을 위한 자유에서부터 시작되며, 이 사랑의 식별은 성령의 선물에 의한 그리스도의 모방에서부터 배울 수 있다.

 

2.7. 주님이신 예수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은 모든 이의 종이 되셨다. 그분은 한없이 부유한 분이셨지만 우리 모두를 부유하게 하시려고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셨다. 성부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당하셨고, 성부께서는 그분을 주님으로 들어 높이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는 특별히 그리스도교 윤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주제이며, 동시에 하나의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준다. 그분의 통치는 "악신의 권력과 권세들,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 천공에 있는 악한 영들" (에페 6,12)과 같은 세속 권력의 가면을 벗겨낸다. 종이 되신 주님이신 예수는 우리에게 권위의 올바른 사용을 가르치시며, 교회와 세상 안에서의 올바른 권위를 향한 길을 제시해 주신다. 그분을 믿고 그분을 아는 사람은 누구든지 결코 통치하려하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인종이나 색깔, 혹은 성별(性別), 그리고 모든 이의 유일하신 성부와 유일하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모든 악습을 거슬러 어떠한 편견에도 자유로울 것이다.

 

2.8. 우리의 정의(正義)이시며 평화(平和)이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전 생애, 특별히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파견으로써 성부의 길에서 멀리 떨어져 성부를 거역하는 자녀들도 보살펴 주시는 성부의 구원 정의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 주셨다. 하느님의 구원 정의, 메시아적 평화는 예수 자신과 마찬가지로 성부의 무상 선물이다. 우리는 이러한 선물들을 받기 위해서 특별히 어떠한 명예나 직위도 필요로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의 평화이시며 정의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하느님의 사랑이 지니고 있는 내적이며 절대적인 자유만이 요구될 뿐이다.

 

부활하신 주님의 선물로서의 은총, 신앙, 평화는 우리가 성체성사적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고, 성령으로부터 우리 안에서 움직이는 평화와 정의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고 찬미를 드릴 수 있는 자유로운 정신은 이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우리의 임무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우리의 평화이시며 구원 정의가 되시는 예수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는 신앙으로부터 나오는 법은 어떠한 이기주의에도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이 법은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를 위한 우리들의 노력을 필요로 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평화와 정의에 부합하는 일치의 표지로서의 다양성을 요구한다.

 

2.9. 그리스도의 모범에로의 초대

 

육화된 말씀이시며 인류의 이름으로 당신의 삶 전체로써 응답하신 그리스는 우리가 당신의 제자가 되라고 부르신다. 그분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시며, 각자에게 특수한 카리스마를 부여하신다. 그러나 그분의 부르심은 '함께하는' 부르심이며, 또한 '함께하는' 초대이다. 공관복음서는 이러한 부르심을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르시는 하나의 초대로서, 그리고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이 당신의 제자로서의 조건을 함께 나누는 하나의 초대로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서로 친구가 되라는 부르심이며,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연대성을 함께 나누면서 살도록 부르시는 초대이다. 사도 바울로와 요한은 이를 우리들의 모든 관계를 결정 짓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으로서 좀더 성사적인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로부터 보여진 구체적인 모범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너무 상투적이며, 우리들 삶의 사건들은 과거의 반복일 수 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는 사람들,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들만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방의 삶이 현명한 삶이라는 것을 알고, 또 자신의 창조적 성향을 더욱 잘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3. 성서와 규범적 윤리

 

윤리신학을 좁은 의미에서 단순히 금지 규정들을 종합해 놓은 규범적 윤리로만 보는 사람은 지금까지 보아온 성서적 시각과 범위를 간과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최근 20년 동안 가끔 서로 연관성을 갖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주제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 진행 되어왔다. 즉 규범적 윤리 안에서의 성서의 사용과 또한 특별히 윤리신학에서의 그리스도교적 특성에 대한 연구가 그것들이다. 규범적 윤리신학이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교적 내용을 최소화하거나 제외시키던 윤리신학자들은 확인될 수 있는 규범과 원리에 대한 윤리와 고정된 윤리법을 제시했던 교과서적 전승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으며, 그러한 윤리신학자들은 계속적인 확인 작업을 통해서 드러나는 어떠한 결정들에 대한 공통적 요소들만 주시하면서 규범들을 찾아내는 일에 골몰한다.

 

자유와 창조적 신뢰로부터 특징지어지는 윤리신학은 성서를 통해서 우리가 발견하는 역동적인 전망과 범주로부터 드러나는 빛 안에서 그리스도교적인 특성을 발견한다. 참된 규범적 가치는 위에서 말한 외적 통제에 맡겨진 규범들이 지니는 어떠한 형태와도 전적으로 다르다. 윤리적 규범이란 전적으로 신앙과 관련되는 것이며, 따라서 반드시 그리스도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알고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따라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그분의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고, 또 성부를 위한 그분의 사랑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따르고 있는 길, 진리, 생명을 항상 더 잘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오직 한 분의 참된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또한 아버지께서 파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구약성서, 특히 신약성서의 전체 시각 안에서는 하나의 순수한 윤리법을 위한 여백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성서의 시각은 우리가 고정된 규범에 대해서 만족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는 항상 구원의 진리, '기쁜 소식'에 대한 신뢰의 역동적인 움직임이며, 또한 하느님의 선물을 드러내 보이면서 우리들의 삶을 안내하는, 평화와 기쁨의 역동적인 삶을 제시한다. 물론 지침이나 계명의 의미에서 볼 때 규범이 있는 것이고, 또한 정의와 사랑, 평화의 나라를 반대하는 것,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생명을 반대하는 것에 대해 규정짓는 규범도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규범들의 효과와 명확성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알게하고 그분의 존엄성 안에서 인간과 그 총체적 소명을 알게하는 구원의 진리에서부터 유래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바로 이런 점에서 역사적 예수에 관한 실질적인 논쟁점이 어떤 것인가를 찾아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더 나아가서 신약성서의 독서 기준의 설정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에 대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대답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시각을 갖는 것이다.

 

저명한 역사학자 Eric Osborn은 교부시대에 크게 부각되었던 "그리스도를 따름"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대한 집중적인 강조와 함께 이해되었다고 말한다. Ernst Kasemann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주목 할만하다: "역사의 예수에 관한 토론은 그리스도의 '그리스도를 따름'에 관한 지성적인 면에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로써 또한 예수의 특성,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예수의 우위성,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한 주(主)에 대한 당위성, 명확성, 그리고 신원(身元)이 강조되게 되었다. 역사의 예수에 대한 연구는 그분의 통치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된다."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예수께 대한 우리의 관심이 본질적인 면들을 벗어날수록 실상 윤리규범이나 원리에 대한 토론은 공연히 우리의 노력을 헛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 것이다. 그분은 단순히 어떤 가정이나 전제 조건이 아니고 오히려 신약성서의 중심을 이루는 분이시다. 예수께 대한 실제 역사는 "항상 하나의 새로운 사건이며, 지금 현재라는 순간은 고양된 주님께 대한 역사이다. 그러나 이 역사는 분명 어떤 한 시대라는, 인간들이 복음에의 부르심을 접하게 되는 지상의 역사 안에 들어와 있다."

 

역사의 예수라는 주제에 대한 현명한 토론은 "사건의 직접성에 곧 바로 연결되어야 할 것이며, 하나의 담화라는 데서부터 시작되어 결국 그분께 대한 신뢰라는 초대에로의 변화로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께 대한 어떤 특정한 면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모든 삶이 마치 전체로서 우리의 삶과 직접 연결된다."

 

Eric Osborn의 다음의 언급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예수의 제자는 그분을 모방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그분을 따르는 사람이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곧 십자가이다. 예수의 제자는 자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 항구하게 산다는 것은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통해서 드러나는 사랑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위의 언급은 단순히 어떤 일반적인 전망에 대해서만 만족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일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예수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들의 시각이나 우리들의 사랑은 우리의 창조적인 자유를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들 전 생애를 통해서 채워 나가야만 하는 주님께 대한 창조적인 신뢰를 더 높이 고양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길게 살펴본 것은 간단하게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리스도교 윤리 안에서 성서의 올바른 사용과 정확한 해석이 반드시 요구된다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윤리 규범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성서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이동익(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 윤리신학) / 이동익 신부님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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