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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환경신학과 그리스도인의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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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17 ㅣ No.658

환경신학과 그리스도인의 사명

 

 

대자연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을 경이와 감탄, 매혹과 신비로 가득 차게 한다. 산과 바다, 강과 숲, 그리고 각양각색의 식물과 동물은 사람들에게 그칠 줄 모르는 기쁨과 영감의 원천이 된다. 이러한 자연환경은 사람을 풍요롭게 하고, 정서적이고 영적이며 창조적이고 심미적인 가치들을 많이 제공해 준다. 그러기에 분명 자연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인간의 삶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토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자연환경은 생태학적 위기를 맞았다.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킨 인간은 오늘날 가장 노련한 자연의 파괴자가 되었고, 산업적 인간은 자연과 인간 생존의 허용 한계를 넘어선 원자무기, 환경오염과 자연착취로 지구를 병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생존을 의문스럽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생태계의 위기는 환경오염이나 자연의 파괴를 넘어서서 삶의 위기로 나타난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인류가 봉착한 문제는 이제 단순히 생태계의 위기뿐 아니라 인류가 살아남느냐, 아니면 몰락하느냐 하는 문제 곧 ‘생존의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환경신학은 전세계적으로 아주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환경신학의 개념

 

환경신학이란 생태학이라는 개념 안에서 설명된다. 생태학(Ecology)이란 말은 독일 생물학자 에른스트 핵켈(Ernst Haeckel, 1834-1919년)이 1866년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로, 희랍어로 ‘집’을 의미하는 oikos와 ‘성찰’ 또는 ‘연구’를 뜻하는 logos를 합성한 말이다. 핵켈은 환경신학을 이렇게 정의한다. “생태학은 살아있는 유기체와 그 환경 사이의 상호 의존성과 상호 작용에 관한 연구이다.” 그러므로 생태학이란 관계 또는 관계에 있는 존재들에 관한 학문이고 예술이라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환경(Environment)이란 좀더 포괄적인 의미로서, 어떤 주체를 둘러싸고 있으면서 영향을 미치는 유형무형의 총체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생태학이란 이러한 환경을 좀더 구체적이고 과학적으로 다루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 생태학이라는 단어는 환경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윤리적 책임을 다루는 환경신학의 한 영역을 일컫는 말로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

 

생태학은 본질적으로 탁월한 신학적 내용을 지니고 있다. 생태학적 관점에서 볼 때, 각 존재는 우주라는 거대한 사슬의 한 고리를 이루고 있고,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우주 전체가 삼위일체의 모습에 따라 만들어지고 이런 신적 관계의 형태로부터 파생한다. 한마디로 우주는 삼위일체의 반영으로서 복잡하고 다양하며 하나이고 서로 얽혀있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모든 존재에 현존하고 모든 관계에서 손짓하며 모든 생태계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자연과 피조물의 성서적 관점

 

창세기에서 자연과 피조물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창세기 1장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6일 동안 창조하신 경위를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며, 그 서술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하느님 작품의 선성을 언급하고 있다.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31).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에는 정의와 질서, 아름다움이 있고, 이것은 만물에 가치를 부여하며 만물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땅을 가득 채우고, 정복하라. 그리고 땅 위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세 1,28)는 하느님의 말씀은 오늘날 많은 논란이 되고 있지만, 이것은 관리인 또는 대리인의 직무라는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해석은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통치를 “인간이 세상을 거룩하고 의롭게 다스리고 정직한 마음으로 통치하는”(지혜 9,3) 책임으로 보는 지혜서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자연에 대한 구약성서의 특징은 자연의 경이와 모습에 내재해 있는 위대한 예지에 대한 경탄이다. 이것은 특히 시편에 잘 나타나 있다. 시편 104장은 다음과 같이 외친다. “주님, 손수 만드신 것이 참으로 많사오나 어느 것 하나 오묘하지 않은 것이 없고, 땅은 온통 당신 것으로 풍요합니다”(24절).

 

선약성서에서도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다양한 창조물과 자연의 진행 과정에 친밀하고 친숙한 태도를 보이신다. 그분은 자연을 지배하거나 통제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창조계에 존중과 관조의 자세를 견지하신다(루가 12,24 참조). 예수님의 많은 비유가 씨 뿌리기, 포도나무, 잃은 양, 양 치는 목자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그분의 가르침에서도 들백합(루가 12,27)과 공중의 새(마태 6,26) 그리고 물(요한 4,13-14), 빵(요한 6,48), 빛(요한 6,30-44) 같은 자연을 당신과 긴밀하게 결부시켰음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직분은 가르치고 치유하고 인간과 창조계 전체를 하느님과 화해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그분은 창조계 전체의 구심점이셨고(골로 1,15-17), 요한 복음 서문에서도 예수님의 탄생과 생애는 우주 역사라는 폭넓은 맥락 안에 정립되고 있다. 그분은 창조계를 태동시키는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신다(요한 1,3-5).

 

 

환경신학을 위한 기본 방향

 

위대한 경제학자 슈마허(F. Schumacher)는 현대인의 태도를 성서적 비전에 반대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인은 그 자신을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외부의 힘으로 인식하고 있다. 심지어 인간은 자연과 싸우고 있다. 그가 그 싸움에서 이기는 순간 이미 패배자의 편에 서있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환경신학자들이 가장 급박한 것으로 강조하는 기본적 태도는 자연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다. 자연에 대한 사랑은 궁극적으로 모든 피조물에 반영되어 있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예지 그리고 사랑에 기초한다. 자연은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신 작품이기 때문에 사랑받아야 한다. “인간은 …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사랑할 수 있고 또 사랑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로부터 받고 하느님 손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보고 존중하기 때문이다”(사목헌장, 37항).

 

독특한 방식으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자연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으며 모든 피조물을 그의 형제, 자매로 대했다. 그리고 그는 그들 모두를 대신하여 하느님을 찬양했다. 소박하고 자연과 형제적으로 일치하는 프란치스코의 삶은 오늘날에도 모든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자연은 하느님의 피조물이고 오로지 하느님만이 자연의 절대적인 소유자이시다. 인간도 하느님이 지으신 피조물 가운데 하나의 피조물로서, 자연 가운데 한 자연이다. 인간은 자연 위에 있는 존재라기보다 자연 안에 있는 존재요, 자연과 함께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성서에 비추어 보면 인간이 자연과 맺는 관계는 만물을 창조하신 분을 섬길 때 비로소 건설적이고 창조적 인간, 공동의 협력자가 될 수 있는 관계에 있다. 인간은 하느님의 사업을 찬미하고 그분께 감사할 줄 알 때 자신과 자연을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세계를 관리하고 보존해야 한다. 인간은 자연을 지배와 소유와 자기 이익의 관점에서 만나지 말고 사귐과 참여와 나눔의 관점에서 자연을 만나야 한다. 이러한 한에서 그는 하느님의 형상이요, 거룩하신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은 창조주를 사랑할 능력과 근거, 그 창조주와 사랑으로 일치할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하느님의 모상인 것이다. 창조와 구원계획의 중심부에는 상호존중과 사랑을 통해서 뿐 아니라, 하느님의 모든 선물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존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인간이 자리하고 있다. 이웃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반영하는 모상으로서 부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자연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또한 반사시켜 드러나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생태계에 대한 우리들의 책임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사랑과 정의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

 

오늘날 극심한 생태학적 위기는 회개로 부르심, 하느님이 주신 자연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라는 부르심으로 보는 예언자적 해석을 요구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창조가 무엇을 뜻하는지, 또한 그것이 인간의 환경과 생태계를 위해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스로 인식하고, 또 다른 이들에게 자신들의 말과 행동으로 그것을 알려주지 않는다면 ‘땅의 소금 세상의 빛’이 될 수 없음을 명확히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란 개인적으로 거룩하고 영적으로 순결한 생활을 하는 일을 뛰어넘어야 하고, 몸을 바쳐 사회 정의를 위하여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방취제나 스프레이, 그리고 합성세제나 일회용 음식용구나 기저귀를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는 것이 생태학적으로 죄악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자연을 파괴하기를 바라시지 않고, 오히려 당신의 창조계를 돌보고 보호하고 열매를 많이 맺기를 기대하신다. 환경을 보호하려면 우리는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몸에 익은 습관을 그만두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많은 것들이 우리에게 이미 자연스럽고 습관화되었기에 이것을 바꾸는 데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프란치스코 성인의 사랑처럼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주위의 사람들뿐 아니라 자연, 사물까지도 겸허하게 대해야 한다. 사랑과 부드러움, 겸손과 평화 등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생활이 될 때 존재하는 모든 생명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는 회개로 사람들을 이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현재 존재하는 미래에 대한 모든 걱정은 좀더 나은 삶을 향한 희망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경향잡지, 1998년 6월호, 오갑현 가브리엘(광주대교구 남평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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