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 착한 기업 또는 신앙적 기업?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7-06 ㅣ No.745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 착한 기업 또는 신앙적 기업?

 

 

국가권력(정치권력)과 시장권력

 

“이미 권력은 국가, 정치에서 시장(자본, 기업)으로 넘어간 것 같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회한에 찬 고백이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는다. 많은 사람이 “시장으로 넘어간 권력을 국가로 되찾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권력과 시장권력을 둘러싼 논쟁이 한창이다. 그만큼 시장권력의 폐해가 심화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후기 자본주의 시대,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러 기업은 국가의 규제와 통제에서 벗어나 오로지 시장논리에 따라 이익을 추구하는 환경을 누리고 있다. 기업의 힘과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커져가고 있다. 기업은 단순히 경제적인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등 사회 전방위에 걸쳐 자신의 영향력을 확산하고 있다.

 

부정적인 측면을 조금 과장한 것이긴 하지만, 한국 사회 역시 기업이, 곧 재벌이 움직이고 있다고 말해도 그리 틀린 것이 아니리라. ‘삼성 공화국’이라는 신조어가 한국 사회를 수식하는 말이 되고 있다. 아래 기사는 이를 시사하고 있다. 물론 이 기사가 전하는 논문 안에는, 시차적 우연일 수도 있는 사건들을 하나의 인과관계의 틀 안에서 수렴하는 논리적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모든 것을 삼성 중심으로 분석하는 약간의 과장법 섞인 해석이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몇 가지 흥미로운 분석을 통해 왜 ‘삼성 공화국’이라는 용어가 한국 사회에서 떠돌고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추론을 제시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본격적으로 떠오른 ‘삼성 공화국’ 현상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박사학위 논문이 나왔다. 현직 고등학교 교사인 이종보 씨(37세)가 성공회대에 제출한 박사논문 “민주주의 체제 하 ‘자본의 국가 지배’에 관한 연구 - 삼성그룹을 중심으로”이다.

 

한국 사회는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두 차례 민주 정부가 들어서면서 형식적 민주주의가 완성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이 씨는 논문에서 형식적 민주주의는 자본권력에 의해 끊임없이 무력화되었다고 분석한다. 노무현 정부 시기 삼성이 정확히 그런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다. 이 씨는 민주정부가 수립된 이후 민주화운동 세력이 기대하고 의도했던 것과 달리 자본의 권력화가 더욱 심화된 ‘민주주의의 역설’이 어떻게 가능했는가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는 노무현 집권 5년간 삼성이 행정부 · 사법부 · 의회 · 시민사회 · 언론 등과 맺은 관계들을 분석했다. 그 결과 삼성은 계급지배 전략의 일환으로 민주주의 체제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전략적으로 접속하는 방식을 택했다.

 

‘삼성이 의회와 정당 내에만 거점을 만들던 것을 넘어 이제 사법부와 행정관료들까지 포섭해 국가기구 자체를 기업 권력의 거점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 ‘삼성경제연구소나 전경련 자유기업원 등 싱크탱크를 통해 친기업 담론을 유포하거나 광고를 통해 언론을 길들임으로써 자본에 의한 계급지배에 대한 지지와 동의를 조직화했다.’는 주장이다. 정당과 의회를 중심으로 한 제도정치권, 행정부의 전문 관료들, 사법부 권력자들, 나아가 교수, 언론인 등 한국 사회에서 힘깨나 쓰는 이른바 ‘유기적 지식인’들이 모두 삼성을 ‘대변’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삼성은 국가기구가 자본을 규제하는 장치인 공정거래법, 금융산업구조개선법률, 출자총액제한제도 등을 효과적으로 무력화할 수 있었다”(경향신문, 2월 4일자)

 

이 기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기업의 힘과 영향력은 무한히 확장되고 있는데 반해, 기업의 무한질주를 통제할 국가의 힘은 약화되어 가고 있다. 원래 초기 자본주의 단계에서 기업은 국가의 후견을 필요로 했다. 기업을 통한 생산이 가능하려면 국가의 법질서와 군사력과 화폐제도 등이 필요했다.

 

따라서 초기 자본주의 단계에서 기업은 국가의 통제 아래 놓여있었다. 하지만 시장의 자율성이라는 신화를 신봉하는 신자유주의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국가가 기업의 후견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세계무대 안에서 삼성과 현대가 없는 한국을 상상할 수 있는가?)

 

기업이 국가보다 우위에 서있게 되면, 곧 시장권력이 국가권력보다 더 강하면 무슨 문제가 있는가? 국민주권의 민주주의 사회 안에서 국가권력은 전 국민을 대표하는 권력이지만, 시장권력은 시장에서 실패한 사람들을 제외한 시장에서 승리한 강자들만의 권력이다. 그리고 시장권력은 경쟁에서 도태된 약자들에 대한 배려를 잘 하지 않는 속성을 지닌다. 또한 기업은 조직 속성상 더 수직적이고 독재적이다.

 

따라서 국가가 기업화되어 기업의 후견 아래 놓이게 되면 시민들이 국가를 통해 정치적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 철학자 김상봉이 지적하듯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 노동조합 활동이 실질적으로 불법화되고 집회와 표현의 자유가 갈수록 더 심각하게 위축되는 것은 한국 사회가 본질적으로 기업에 의해 지배되는 기업 국가의 단계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는 시장의 논리와 국가의 논리 간에 갈등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교회는 시장의 자율성을 최대한 인정하면서도 경제활동의 전 과정에서 정의의 법칙들이 존중되어야 함을 확고하게 천명한다(“진리 안의 사랑”, 37항).

 

사회교리에 따르면, 정치권력은 인간다운 경제 생산 질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책임 있는 역할을 담당해야 하며, 경제활동의 여러 차원에 분산되어 작용하도록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 경제가 세계적으로 통합된다고 해서 국가의 역할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교회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진리 안의 사랑”, 41항). 또한 교회는 시장과 국가와 시민사회가 서로 조화롭게 역할을 담당하는 경제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포기한 적이 없다(“진리 안의 사랑”, 38항).

 

 

기업의 사회적 책임 : 착한 기업(윤리적 기업)

 

기업의 힘과 영향력이 증대될수록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지고 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해,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일종의 시대정신으로 등장하고 있다. 기업의 힘이 큰 만큼 사람들은 사회 핵심 구성 요소로서의 기업이 더욱 책임 있는 역할을 수행하기를 바란다. 단순히 이윤을 많이 창출해서 고용을 확대하는 것만으로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했다고 말하는 것, 곧 기업은 이윤창출과 경제적 성과를 내는 책임만 있다고 말하는 것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매우 소극적인 방식으로 이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신고전주의 경제학파의 입장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친환경 경영, 윤리적 경영, 사회적 공헌에 힘쓰는 일종의 ‘착한 기업’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있다. 제품 생산 과정에서 온실가스 배출의 축소와 환경오염 요소들의 제거에 관심을 기울이고, 제품의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등 친환경 제품 개발에 힘쓰는 기업, 공정한 노동권을 보장하려 애쓰고 하청공장의 노동착취 문제와 사회적 약자들의 고용에 관심을 기울이며 내부적으로 부정부패를 방지하고자 노력하는 기업, 기아퇴치와 문맹타파 등 다양한 분야에서 비영리 기관의 활동을 지원하며 공공의 이익을 위해 기여하는 데 힘을 기울이는 기업, 이런 기업을 ‘착한 기업’이라 할 수 있다.

 

착한 기업만이 사업에 성공한다는 논리는 아직 섣부른 판단이지만, 착한 기업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증대되고, 착한 기업이 성공할 확률이 더 높아지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소비자들도 이런 착한 기업을 선호하고 있다. 윤리적 소비, 착한 소비 운동이란 결국 착한 기업의 제품을 사려는 움직임이다. 인재들도 이런 착한 기업을 선호하는 추세다. 사회적 책임을 잘 수행하는 기업에서 일하고자 더 낮은 연봉도 감수할 수 있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펜실베니아 대학 피터 카펠리 교수는 흥미로운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착한 기업이 보여주는 사회적 책임에 대한 사명이 그 기업 직원들의 내재적 동기를 작동시킨다는 것이다. 직원들이 일에 자부심을 갖고 더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기업의 성공 확률이 더 높다는 분석이다. 또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제하는 국제적 틀도 강화되고 있다. 착한 기업에 투자하려는 윤리적 펀드, 곧 사회적 책임 투자(SRI, Socially Responsible Investment) 펀드가 증가되는 추세다. 윤리적 투자를 위해 윤리적 기업의 주가지수를 산정하는 데 가톨릭 교리에 부합하는 기업인지를 검증하는 ‘가톨릭 주가지수’도 등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음란물 제작, 무기 제조, 출산 제한, 담배 제조, 도박 등에 관련된 기업은 가톨릭 지수 산정에서 철저히 배제한다.

 

 

신앙적 기업?

 

교회는 기본적으로 “기업은 유용한 재화와 용역을 생산함으로써 사회의 공동선에 이바지”(“간추린 사회 교리”, 338항)한다고 천명한다. 교회는 기업의 합법적인 이윤추구와 기업의 생존에 이바지하는 모든 이해 관계자들에 대한 책임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믿는다(“간추린 사회교리”, 340항; “진리 안의 사랑”, 40항). 교회는 기업과 그 기업이 활동하는 지역 사이의 깊은 연계를 인식하여 기업의 투자가 경제적 의미뿐만 아니라 도덕적 의미도 지님을 강조한다(“진리 안의 사랑”, 40항). 또한 교회는 윤리적 경영에 대한 기업주와 경영자의 역할과 중요성을 강조한다(“간추린 사회교리”, 340-345항).

 

기업의 영향력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첫 사회교리 회칙인 “진리 안의 사랑”에서 영리 회사들과 비영리 기구들의 전통적 구분을 뛰어넘어 미래에 대한 실질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새로운 형태의 기업을 시사하고 있다. 이 새로운 형태의 기업은 “이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윤을 더욱 인간다운 시장과 사회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으로 보는”(46항) 기업이며, “전통적인 형태의 기업들의 중요성과 경제적 사회적 이익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경제 주체들이 더 분명하고 완전하게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의무를 완수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이끌어”(46항) 가는 기업이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기업을 통해 “기업 형태가 다양화되면 더욱 수준 높고 더욱 경쟁적인 시장이 발생”(46항)하리라고 교황님은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 정희완 요한 - 안동교구 신부. 문경 모전동성당 주임이다.

 

[경향잡지, 2010년 6월호, 정희완 요한]



57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