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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몸의 신학3: 선물로서의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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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4-06 ㅣ No.725

[몸의 신학] 선물로서의 몸


몸과 혼인에 대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가르침 (3)

 

 

시작하며

 

“상대방에게 부부관계를 요구하지 아니하며, 다른 이성과의 교제 및 성관계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는다.” 남의 나라 부부 이야기, 무지한 사람들의 선언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어느 부부 교수 분들의 사연이었고, 이렇게 ‘각서’까지 서로 작성했지만, 결국 갈라섰답니다.

 

시작부터 남들의 사연을 인용해 죄송하지만, 남들보다 ‘앎’이 많으시고 법정에서 다투신 이분들은 ‘몸’으로 하는 ‘혼인과 가족생활’(헌법 제36조)과 ‘배우자와의 동거’(민법 제826조) 규정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요? 부부 서로에 대한 ‘앎’과 각자의 ‘프라이버시’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요?

 

이러한 질문에 대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해 주십니다.

 

 

‘선물’로서의 몸

 

교황님께서는, 지난 호에서 소개한 대로, 창세기의 ‘처음’ 속에서 인간의 본질 요소인 고독, 단일성, 알몸에 대한 원초적 의미를 읽어내시고,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것 속에서 인간을 이해하고 해석해 줄 ‘몸의 신학’, 곧 ‘적합한 인간학(adequate anthropology)’을 수립하고자 하십니다.

 

먼저, 세상과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bara)’와 ‘창조주’ 두 단어의 관계에 주목하십니다. 그 안에서 ‘무(無)에서 실존으로 불러내주시는’ 창조주만이 아니라, ‘선물로 내어주시는’ 창조주의 의미도 읽어내십니다. 그분이 “사랑이시기”(1요한 4,8) 때문에 창조주의 행위는 ‘내어줌(선물)’의 행위라는 점, 비록 명백한 언급은 없지만, 자주 반복되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라는 말씀 속에서 ‘사랑’으로 된 창조의 신성한 동기가 있음을 밝혀내십니다. 사랑만이 좋음[善]을 생기게 하며 그리고 그 좋음으로써 아주 기뻐하게 된다(1코린 13장)는 것입니다.

 

‘내어줌’의 개념은 주는 존재와 받는 존재가 전제되어 있는 바, 세상은 인간에게 선물이며 인간도 세상에게는 축복된 선물입니다. 그러나 사람(adam)은 세상의 것과는 달라서 ‘고독’하며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아서”(창세 2,18) “알맞은 협력자”(창세 2,20)를 ‘선물’로서 필요로 합니다.

 

그리하여 ‘혼자’에게는 ‘협력자’라는 선물이, ‘협력자’에게는 ‘혼자’라는 선물이 서로 되어줌으로써 ‘원초적 고독감’에서 ‘충족’된다는 것입니다.

 

이 충족감은 축복이며 행복인 바,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라는 탄성과 함께 여성을 만난 남성의 기쁨, 동시에 남성을 만난 여성의 기쁨이 그 절정감을 드러내게 됩니다.

교황님께서는 이 탄성을, “몸{사람}이 살아있는 영혼{생명체}이 되었다.”(창세 2,7: 교황님 문헌의 표현이 새 번역 “성경”이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의 표현과 아주 다를 때, { }를 첨부한다.)는 말씀을 바탕으로, ‘보라, 인격을 표현해 주는 몸을!’이라고 재해석해 주십니다.

 

이제 남성성과 여성성의 몸은 인격적 실존의 친교가 되어주며 하느님 사랑의 증거가 됩니다. 그리하여 몸은 신학의 중심이 되며 그의 성(sex)은 몸의 신학에서 본질적인 요소가 됩니다. 이로써,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 2,24)는 말씀 속에서, 몸의 ‘혼인적인’ 성격, 다시 말해, 부부 - 부모의 생활을 통해 “한 몸”을 향해 기울어지는 ‘단일적인’ 의미와 “풍산”의 축복(창세 1,28)을 누리는 ‘출산적인’ 의미를 확인해 주시는 것입니다.

 

 

‘원초적 결백’의 의미

 

교황님께서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세 2,25)라는 말씀 속에서, 자기 몸의 출산적인 능력을 의식하고 있는 인간이 그 몸의 성적인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원초적 결백’이라고 읽어내십니다.

 

지난 호에서는 ‘원초적 알몸’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금령을 깸으로써 생겨난 죄책감 이전의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로 해석해 주셨고, 여기서는 덧붙여, 하느님의 사랑을 통해 창조되어 선물로 받은 그 둘이 자신을 서로 선물해(내어) 주는 자유를 가진 상태라고 설명해 주십니다.

 

이것은 또한 “처음부터”사랑에서 나와 사랑을 표현해 줄 능력, 인간 인격이 스스로 선물이 되게 해줄 사랑과 그리고 이렇게 선물함으로써 자신의 실존의 의미를 충족시켜 줄 그 사랑을 의미하는 바, 교황님께서는 공의회 문헌을 인용하시면서, 하느님께서 “그 자체로” 원하신 인간 남녀가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선물하지(내어주지) 않으면 자신을 완전히 발견할 수 없다.”(“기쁨과 희망”, 24항)고 재확인해 주십니다. 그리하여 자신을 상대에게 사랑으로 선물하기 위해서는, 원초적 결백의 상태로서 자신에 대해 통달(通達)해 있고 자기를 지배해 줄 자유로움을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범죄는 했어도, 원초적 결백에 대해 의식할 수는 있기에, 인간의 마음속에 선악의 앎 이전의 도덕적 의식도 담겨있음을 보십니다. 선물로서의 상대방을 수용하며 그를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상대방을 ‘나 자신을 위한 대상’, ‘욕정의 대상’, ‘과도한 소유의 대상’으로 환원시키지 않도록, 몸에 대한 ‘에토스’가 인간의 미래를 위해 ‘처음부터’ ‘처음 안에’ 이미 담겨있었다고 역설하십니다.

 

더 나아가, 인간의 ‘가시적인’ 몸은 세상 안에서 ‘비가시적인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전달해 주는 표징으로 보시고, 이를 ‘시원적인 성사’라고 선언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세 2,25)라는 말씀 속에서 가시적인 세상에 인간의 몸을 통해 신령함이 들어왔음을 보시며, “아낌없이 선물해 줄{내어줄}” 몸을 통해 자신을 깊숙이 드러내줌으로써 성사로서의 몸이 비록 죽어야 하지만 동시에 “영광에로 부르심”(로마 8,30)도 받는다고 ‘희망’을 선포해 주십니다.

 

 

‘앎’과 ‘낳음’의 관계

 

교황님께서는 셈족의 단어 ‘야다(yada)’의 문자적인 의미를 통해, “자기 아내와 결합{잠자리를 같이}했다”(창세 4,1)는 말씀을 “자기 아내를 알았다”로 해석해 주십니다. 그 ‘앎’의 결과로 “카인을 낳았으며”, 성모 영보(領報) 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루카 1,34) 하는 말씀 속에서도 그 앎의 의미가 반복되고 있기에, 성경의 언어의 빈곤한 표현력에도, 부부가 한 몸을 이루기 위해 아주 밀접하게 ‘결합’하는 상황을 ‘앎’으로 정확히 읽어내십니다.

 

교황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그런 앎을 통해, 인간적인 ‘자아’는 상대방 성에게 ‘주어지며’ ‘알려지는’ 바, ‘완결된 혼인’ 행위를 통해 여성성은 자기 몸의 모성을 드러내고 남성성은 자기 몸의 부성도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앎’은 ‘낳음’의 조건이 되며, 상대 배우자를 앎으로써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아이를 얻어”(창세 4,1) 새로운 인간을 ‘소유’하게도 되고, 그런 제3자를 통해 상대방을 더 깊게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비록 인간의 몸은 죽어야 할 운명이지만, ‘앎-낳음’의 순환을 통해 하느님의 창조행위를 계속해서 닮아가고 쇄신해 간다는 것입니다.

 

 

인간에 관한 ‘온전한 시각’의 의미

 

교황님께서는 이혼장에 관한 바리사이들의 질문이 오늘날 독신자들, 기혼부부와 약혼자들, 젊은이들, 현대 문화와 문명에 의해서조차도 제기되고 있음을 언급하시면서, 현대인들이 다양한 혼인 - 이혼의 실천 덕택에 인간에 관한 수많은 ‘부분 개념’들에다 기대보지만, 결국 왜곡되고 있다고 보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호소하셨던 그 ‘처음’이 세상과 모든 인간 남녀에게 첫 번째 가는 ‘유산’이며, 인간 신원에 대한 첫 번째의 ‘증언’이고,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격으로서의 자신의 소명에 대한 가장 확실한 ‘원천’임을 단언해 주십니다.

 

교황님께서는 혼인과 책임 있는 출산의 문제점들에 대해 “인간에 관한 온전한 시각”(바오로 6세, “인간 생명”, 7항)의 필요성을 강조하시면서, 그리스도의 육화의 신비를 통해 신학이 몸을 취급하게 되었고, 그 중심 가치로서 몸을 연구하는 ‘몸의 신학’이 더욱 필요하다고 역설해 주십니다.

 

 

마무리하며

 

서두에서 소개한 ‘각서’의 내용을 보면 참 답답합니다. ‘요구되지 않는 부부관계’가 ‘배우자와의 동거’에 대한 부정 아닌가요? ‘책임을 묻지 않는 다른 이성과의 성관계’는 ‘배우자의 간통’을 방임하는 것이지요? 비형법적이며 탈윤리적인 용어들을 사용해 ‘간통죄’에 대한 윤리적이고 사법적인 ‘부담’을 면해보려고 했겠지만, 배우자에게만 배타적으로 선물해 줄 자신의 몸에 대한 죄책감과 배신감을 면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처음’ 상태를 거슬렀기 때문일까요? 고등법원까지 가서 다투어보았지만, ‘쌍방의 귀책사유’이고 해서 ‘받아낼 권리’가 아무것도 없었답니다.

 

이번 호에서도 교황님 가르침의 깊고 풍요로운 의미들을 담아내는 데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독자 분들께서는 교황님의 논조와 저의 표현 방식에 점점 더 익숙해지실 것이라고 믿고서, 다음 호에는 ‘마음으로 한 간음’의 의미, 인간 ‘욕정’의 의미, 그리고 완고한 마음으로서 내어줌을 거스른 ‘소유욕’에 대해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다 읽어주신 인내심에 다시금 감사를 드립니다.

 

[경향잡지, 2010년 3월호, 이동호 프란치스코 신부(가톨릭 대학교 윤리신학 교수, 가톨릭교리신학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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