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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성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 성교절요(聖敎切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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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45

[신앙 유산] 성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 성교절요

 

 

머리글

 

가톨릭 신앙의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로 일곱 가지 성사에 대한 가르침을 들 수 있다. 교회에서는 이를 하느님과 상통할 수 있는 통로로 존중해 왔다. 즉, 가톨릭 신앙의 전통에서는 교회 없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고, 성사 없이는 하느님과 상통할 수 없다는 가르침을 확고히 다져 왔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에서는 여타 개신교 신앙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그리스도께서 제정한 일곱 가지 성사를 가르치며 실천해 왔다.

 

이 일곱 가지 성사 가운데는 초자연적 생명을 얻지 못한 미신자에게 베푸는 세례성사, 신도들에게 성령을 내려주고 신앙을 굳게 지키며 키워 나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견진성사를 우선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영신의 양식을 주는 성체성사와 죄인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회복시켜 주는 고해성사가 있으며, 병에 걸려 죽음으로 나아가는 환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병자성사가 있다. 또한 교회에서 사제가 되어 성사와 미사를 집전하고 봉사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신품성사와 성스러운 가정을 이루는 데에 목적을 둔 혼인성사를 포함하고 있다.

 

일곱 가지 성사는 신도들이 신앙을 실천하는 데 없어서는 아니될 귀중한 것이어서 우리 나라 교회에서도 일찍부터 이를 신도들에게 가르치고자 노력해 왔다. 이렇게 노력하는 과정에서 교회는 “사본문답”(四本問答)과 같은 교리서를 보급시켜 세례성사와 견진성사 그리고 성체성사와 고해성사 등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리고 “천주성교 요리문답”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통해서도 성사에 관해서 밝혀 주고자 했다. 또한 이에 이어서 “성교절요”를 간행하여 좀더 자세하게 일곱 가지 성사에 대해 신도들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다.

 

 

한글본 “성교절요”의 밑뿌리

 

한글본 “성교절요”(聖敎切要)는 원래 중국에서 간행된 같은 이름의 한문 서학서에 그 밑뿌리를 두고 있다. 이 한문본 “성교절요”의 첫부분에는 그 지은이가 아우구스띠노회 소속 선교사였던 백 도마(白多瑪, Thomas Ortiz?)라고 밝혀져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중국에서 선교하던 예수회 계통의 선교사들이 저술한 서적들에 관해서는 꽤 많이 알고 있지만 다른 선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진하다. 안타깝게도 “성교절요”의 저자 백 도마가 어떠한 인물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일부 자료에서 이 책이 처음으로 간행된 연대가 1705년이고, 백 도마의 원래 이름이 오르티즈(Ortiz)라는 기록도 있으나, 그 기록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아직 장담할 수 없다.

 

중국 교회사를 검토해 보면 1575년에 필리핀에 있던 아우구스띠노회에서 선교사를 복건성(福建省)에 파견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1680년대 이후에 이르러서 이 선교회는 중국에서 본격적인 선교를 시작한다. 이때 중국에서는 전례에 관한 논쟁이 한창 전개되었는데, 이들은 예수회의 주장에 반대하며 보유론적(補儒論的) 선교 방법을 거부하였다.

 

이러한 그때의 사정을 감안해 보면 중국에서 선교하던 아우구스띠노회 소속 선교사들은 당시 중국 교회에 풍미하던 예수회 계통의 교회 서적에 맞서려는 의도에서 이 책을 편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글본 “성교절요”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미리 짐작해 볼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들이 쉽게 볼 수 있는 한문본 “성교절요”는 1842년에 중간(重刊)된 책자이다.

 

 

“성교절요”의 전래

 

우리 나라 초기 교회사를 보면, 당시 교회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권일신(權日身, ?~1792년)이 1789년 봄에 최필공(崔必恭, 1745~1801년)한테서 “성교절요”를 빌려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에 한문본 “성교절요”가 전래된 때는 늦어도 1789년 이전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책이 교회 창설 직후부터 널리 읽혀진 것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1801년의 박해 과정에서 압수된 교회 서적 가운데서 이 책을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에 압수된 교회 서적 가운데에는 이 책의 일부를 발췌하여 번역한 것으로 추정되는 책자의 이름도 나타나고 있지만, 이 책의 이름이 직접 나타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한글 번역 작업은 이미 1830년대에 착수된 듯하다. 오늘날 서울의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책의 한글 필사본 가운데에는 1837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사본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목판본으로 간행된 것은 1865년이었다. 이 목판본 “성교절요”(13.9×20.9cm)에는 이 책의 원저자의 이름과 함께 다블뤼(Daveluy, 1818~1868년) 주교가 번역했음을 밝혀 놓았다. 그러나 이 책이 간행되기 이전부터 번역본이 있었다는 당시의 정황이나, 다블뤼 주교가 교회 서적을 번역할 때 조선인 신도들의 도움에 크게 의존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책을 다블뤼 주교가 직접 모두 번역했다고 보기보다는 이를 최종적으로 정리하여 간행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하다.

 

“성교절요”는 1883년 이후 블랑(Blanc, 1844~1890년) 주교의 감준을 받아 서울에서 활판본으로 다시 간행되었다. 그리고 1907년과 1913년에도 거듭 간행되었으며, 1936년에는 종전의 활판본을 대폭 보완한 새로운 번역본이 간행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 책은 1866년의 병인 박해를 전후한 시기로부터 그 이후 식민지 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 신도들에게 성사에 대한 이해를 높여 주는 구실을 맡고 있었다.

 

 

“성교절요”의 내용

 

한문본 “성교절요”와 한글본을 서로 비교해 보면 그 수록된 내용에 상당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즉 한문본 “성교절요”는 대략 네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 첫부분은 성호경, 천주경, 성모송과 사도 신경의 각 구절에 대해 자세한 풀이를 제시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천주 십계에 관한 해설이나 부연 설명을 하고 있다. 또한 이 책에서는 일곱 가지 성사에 대해 심도 있게 설명하고 있고, 그 밖에 교회에서 장려하고 있는 각종 덕목이나 규제의 내용들을 수록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내용 가운데 성사론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전체 분량의 약 37%에 이르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바로 성사론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한글본 “성교절요”에서는 오직 성사론에 관한 부분만 발췌하여 수록하였다. 게다가 성사론에 관한 부분도 한문본의 성사론 가운데 일부만을 가려 뽑은 것이다. 즉 한글본 “성교절요”는 한문본에서 제시하고 있는 일곱 가지 성사에 관한 가르침 가운데 중요한 부분만을 다시 뽑아서 수록했다. 그러므로 한글본 책 이름이 한문본과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은 상당한 차이가 난다.

 

또한 한글본 “성교절요” 가운데 목판본과 초기의 활판본은 그 내용이 동일하다. 그러나 이들과 1936년에 간행된 책자의 경우에는 큰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1936년본은 그 내용의 분량이 그 전의 판본보다 두 배 이상이다. 이는 초기의 번역 과정에서 생략되었던 부분들을 보충 번역하여 간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제법 길고 충실한 내용을 가진 한문본 “성교절요”의 완역본이 간행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맺음말

 

박해 시대 이래 우리 나라 교회에서는 신도들에게 성사 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이때 교회의 지도자들은 일곱 가지 성사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을 제시하고자 하여 중국에서 활동하던 아우구스띠노회의 선교사가 저술한 “성교절요”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책에 수록된 내용 가운데 성사론에 관한 부분만을 따로 뽑아 번역해서 한글본 “성교절요”를 간행하였던 것이다.

 

한글본 “성교절요”는 병인 박해를 전후한 시기부터 널리 읽혀지고 있었다. 이 책은 판을 거듭했고 다시 새롭게 번역되기도 했다. 이는 당시 교회가 신도들에게 올바른 성사론을 가르치고자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 책이 개항기와 식민지 시대에도 판을 거듭한 데에는 가톨릭의 성사론에 대한 개신교측의 도전으로부터 신도들을 보호하고자 했던 의도도 일부 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박해 시대 이래 우리 나라 교회에는 예수회 계통의 교리서들이 주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예수회 계통의 서적 외에도 다른 수도회나 선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저술한 책이나 조선 교회에서 저술한 책자도 일부 통용되고 있었다. “성교절요”도 이러한 비(非)예수회 계통의 서적 가운데 하나이다.

 

만일 우리 나라 신학계에서 우리의 교리 인식이나 신학 사상의 발전 과정을 본격적으로 연구한다면, 교리서의 저작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견해의 미묘한 차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때가 되면 이 책을 좀더 본격적으로 분석하게 될 것이다.

 

[경향잡지, 1994년 3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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