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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한 점 티없는 마음을 위하여 - 성찰기략(省察記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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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34

[신앙 유산] 한 점 티없는 마음을 위하여 : 성찰기략

 

 

머리글

 

우리 나라에 천주교 신앙이 들어온 이후부터 고해성사의 중요성은 계속해서 강조되어 왔다. 신도들은 서슬 푸른 박해의 과정에서도 고해를 비롯한 성사를 받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고, 선교사들 역시 이 성사를 집전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기까지 했다.

 

고해성사의 중요성이 강조된 만큼, 고해를 잘 받기 위한 양심 성찰서들이 요청되고 있었다. 이 요청과 관련하여 “척죄정규”(滌罪正規), “회죄직지”(悔罪直指), “사성찰”(私省察)과 같은 양심 성찰서들이 저술 간행되었고, “십계진전”(十誡眞詮), “성교절요”(聖敎切要), “성교명징”(聖敎明徵)과 같은 책에서도 양심 성찰에 관해 적지 않은 내용을 수록하고 있었다.

 

“성찰기략”(省察記略)도 이상의 책자들과 함께 신도들의 양심 성찰을 돕기 위해 저술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다블뤼(Daveluy, 1818~l866년) 주교였다. 이 책은 1864년 서울의 성서 인쇄소에서 목판본 1책으로 간행되었다. 이 책은 다시 1882년 활판으로 중간(重刊)되었고, 여러 종류의 필사본이 전해지고 있다.

 

 

간행 당시의 환경

 

“성찰기략”이 간행되었던 1864년 우리 나라 교회에서는 오래지 않아 일어날 병인 박해(1866년)의 기미를 전혀 깨닫지 못했고 오히려 신앙의 자유에 대한 부푼 희망만이 감돌고 있었다. 1854년 베르뇌(Berneux, 1814~1866년) 주교가 제4대 조선교구장으로 취임한 이후 교회는 일취월장(日就月將)으로 발전해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1856년에는 충청도 배론에 성 요셉 신학교가 설립되어 국내에서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한 노력이 구체적으로 전개되었다. 1864년과 1865년에는 신도들을 위해 각종의 전례서와 교리서 등이 발행되기도 했다. 당시 신도들에 관한 통계를 보면, 1859년에는 신도 총수가 16,700여 명이었지만 1865년에는 23,000여 명으로 급격히 증가해 가고 있었다. 아직까지 공식적인 박해가 지속 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평균 4% 내외의 신자 증가율이 기록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상대적으로 높은 신자 증가율은 탄압이 이완된 틈을 타서 조선에 들어와 선교를 하던 열두 명의 선교사와 조선인 성직자 최양업(崔良業, 1821~1861년) 신부 등의 노력에 의해 확보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함께 당시 변모되어 가던 국내외의 상황도 교회의 발전에 ‘유리하게’ 전개되어 가고 있었다. 즉 1860년 영국과 프랑스의 침략군에 의해 중국 북경이 함락된 사건이 발생했고, 이 사건은 곧 조선에도 알려졌다. 이 이후 서양의 무력에 대한 두려움이 조선의 조야(朝野)에 널리 퍼져 갔다.

 

또한 1863년 조선에서는 철종(哲宗)이 승하하고 고종(高宗)이 왕위에 올랐다. 고종 즉위 직후 정권을 장악한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도 초기에는 천주교의 성행 현상에 대해 관망하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일시적 소강 국면에 들어서자 교회에서는 교세의 발전과 신도들의 교육을 위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 다블뤼 주교는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다블뤼는 1845년 김대건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한 이후 1866년 순교할 때까지 20여년 간 조선에서 활동했던 선교사였다. 그는 박해 시대를 살았던 선교사들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선교에 종사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이처럼 풍부한 선교 경험은 그가 “성찰기략” 등의 교회 서적을 저술할 때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저술 동기와 목적

 

“성찰기략”이 저술되던 당시의 환경을 살펴보면 그가 신앙의 자유를 충분히 전망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다블뤼 주교는 경신 박해(康申追害, 1859년 12월~1860년 8월)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박해 끝에 체포되었던 신도들이 국왕인 철종의 명에 의해 석방되는 현상을 그는 목격할 수 있었다. 신도들의 석방은 신앙의 자유에 대한 가능성을 더욱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이에 다블뤼는 신도들의 신심을 다지고, 조선인 신도들이 조선이라는 사회 안에서 건실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윤리 규범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는 신도들이 고해성사를 통해 구원의 은혜를 받는 것뿐만 아니라 모범적인 사회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기를 기원했다. 이 기원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성찰기략”의 간행이었다.

 

다블뤼는 “성찰기략”을 직접 저술했고 베르뇌 주교의 감준을 받아 출판했다. 그런데 1860년대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나라에서 통용되던 대부분의 교회 서적들은 한문 교회 서적의 번역본들이었다. 이는 한자 문화권인 중국 사회에서 검증을 거친 교회 서적이었으므로 조선의 선교사들도 안심하고 이를 수용하여 조선어로 번역 간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1860년대에 이르러 조선 교회의 선교 역량이나 신학적 능력은 독자적인 교회 서적을 간행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해 갔다. 그리하여 다블뤼는 한문 서학서의 번역이 아닌 독자적 저서로서 “성찰기략”을 간행했고, 이 책의 내용 가운데에는 조선 사회의 현실과 문제점들이 직접 전제되어 서술되고 있는 부분들이 적지 않게 포함되기에 이르렀다.

 

“성찰기략”은 고해성사를 올바로 예비시키기 위해 저술되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죄의 여러 형태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언뜻 보기에 ‘죄의 목록’(Catalogus peccatorum)으로 비아냥 받아 왔던 전통적 윤리 신학 체계와 관련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죄에 대한 성찰이라는 ‘부정적 방법’을 통해 새로운 그리스도교 윤리의 확인이라는 ‘긍정적 목적’을 수행하고 있었다. 또한 이 책에서는 같은 죄라 하더라도 그 동기나 조건 등에 따라 그 행위의 도덕성이 판단되어야 한다는 그리스도교 윤리학의 원칙을 분명히 해주고 있었다.

 

 

이 책에 담긴 내용

 

“성찰기략”은 서문과 본론으로 되어 있다. 서문에서는 간행의 동기 및 행위에 대한 윤리적 판단의 기준과 이 책에 서술된 내용들을 유추하여 양심을 성찰하는 방안 등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본론에서는 천주 십계와 성교 사규 그리고 칠죄종(七罪宗)에 따라 각종의 죄목들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양심 성찰을 유도하고 있다.

 

즉 천주 십계의 제1계에서는 천주께 대한 절대적 신뢰를 저버리거나 기도를 소홀히 하는 행위를 경계하고 있다. 그리고 배교의 행위, 조상 제사를 비롯한 각종 ‘미신’ 행위들을 반성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제2계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맹세와 사회적 약속을 어기는 행위를 모두 경계했다.

 

제4계에서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관한 여러 사항들을 점검하고, 국가와 백성의 관계에 대해 성찰하기를 촉구하고 있다. 이는 당시 정부 당국자들이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으로 비난하던 데 대한 대응 방안으로 특히 강조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백성들이 국가의 정당한 법을 따라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신앙의 자유를 전망하면서 국가와 신도의 관계를 올바로 제시하고자 하던 의도가 작용되었을 것이다.

 

제5계에서는 사회 윤리, 직업 윤리를 강조하고 생명에 대한 존중과 낙태 금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제6계와 제9계를 통해 남녀 간의 윤리를 엄격히 밝히고 있는데, 이는 당시 정부 당국자들이 천주교를 통색(通色) 집단, 혼음(混淫) 집단으로 비방하던 사회에 관한 대응이었다는 측면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새로운 가정 윤리와 평등한 남녀관계를 밝혀 줌으로써 성리학적 윤리 체계와 그리스도교의 윤리가 다름을 분명히 제시해 주었다.

 

제7계와 제10계 그리고 제8계에서는 사회 윤리 전반에 대해 밝혀 주고 있다. 여기에서는 특히 상도덕(商道德)에 대한 강조를 비롯한 경제 윤리 문제들이 언급되어 있다. 한편 ‘성교사규’와 ‘칠죄종’을 설명하면서 이 책은 신도들에게 열심한 신앙 생활과 건전한 사회 생활을 하도록 강조했다. 이리하여 “성찰기략”에서는 도덕적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이에 매진할 것을 촉구했던 것이다.

 

 

마무리

 

“성찰기략”은 신도들에게 고해에 앞서 양심 성찰을 열심히 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해 주고자 했다. 그리고 고해에 임하는 신도들의 자세를 가다듬도록 촉구하며 이를 통해 새로운 윤리 규범을 제시하고자 했다.

 

“성찰기략”에서 제시하고 있던 사회관, 인간관은 평등성을 전제로 한 새로운 관념이었다. 또한 그것은 인간이 인격적 존재임을 전제한 것으로서, 사회적 불평등을 당연시하고 신분 질서를 강력히 온존시키고자 꾀하던 당시 지배층의 생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찰기략”을 통해 박해 시대의 교회와 신도들이 추구해 나갔던 가치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변화 발전해 가는 19세기 중엽 우리의 사회 사상사를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 한글본 “성찰기략”이 갖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경향잡지, 1993년 4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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