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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25: 아우구스티노 신학 - 신학자요 사목자였던 은총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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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4 ㅣ No.216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25) 아우구스티노 신학 - 신학자요 사목자였던 ‘은총의 박사’

 

 

이탈리아 파비아 성당에 있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무덤.

 

 

[파비아=김상재 기자] 동방교회가 희랍의 철학적 논리에 근거해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의 교리논쟁에 몰두해 있던 것과 달리 서방교회는 구원론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3세기의 치프리아누스와 떼르뚤리아누스 이후 100여년간 뛰어난 학자를 배출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그리스인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던 형이상학적 사색보다는 실천적이고 신자생활에 직접 관계되는 인간 각자의 구원에 대한 윤리실천문제, 자유의지와 죄, 원죄, 은총과 의화 등이 더욱 관심의 초점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적 경향은 후에 서구의 신학을 특징짓는 요소들이 된다.

 

서방의 구원론적 논쟁은 4세기에 이르러 엄격한 윤리주의적 이단인 도나투스 이단과 펠라지우스 이단을 불러 일으켰다. 도나투스 이단은 성사의 인효성을 강조해 "그리스도 교회는 성인들의 집합체로서 거룩한 교회여야 하고 따라서 배교자들이 거행한 성사는 무효이며 성사적 효과를 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깨끗한 순교자들의 교회를 자처한 도나투스주의자들은 그들에게 개종하는 모든 이들에게 다시 세례를 베풀었다.

 

100여년간 북아프리카 교회를 분열시킨 도나투스 이단은 영국출신의 수도자 펠라지우스에게 영향을 미쳐 '인간 구원은 신의 은총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공로를 통해서 성취되고 은총은 다만 좀더 쉽게 착한 행위를 할수 있기 위해 필요할 뿐'이라는 사상이 등장해 교회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위기가 크면 뛰어난 영웅이 나타나는 법. 이러한 교회의 위기 앞에 홀연히 나타나 정통신앙을 수호한 성인이 바로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노다. 사목자요 철학자이며 신비가이자 수도자인 아우구스티노는 서방신학의 아버지로서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서방신학의 상징적 인물이며 중세문화의 형성자 중 한사람으로 오늘날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생애

 

아우구스티노는 354년 11월 13일 아프리카의 누미디아 지방의 타가스테(현재 알제리 북쪽의 수쿠아라스)에서 성녀 모니카와 이교도인 아버지 파트리치우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젖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이름에 취해있었던 사람"(고백록)이라는 자신의 말처럼 아우구스티노는 열심하고 거룩한 어머니 모니카로 인해 그리스도교적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다.

 

아우구스티노는 고향인 타가스테와 카르타고에서 공부를 하고, 타가스테, 카르타고, 로마, 밀라노 등지에서 교사생활을 하면서 지혜의 이상에 매료되고 진리를 찾으려는 그의 노력이 시작됐다. 그러나 이 시기에 단순한 이성을 통해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다는 마니교의 선전에 빠져 9년 간 마니교에 심취했다가 잘못을 깨닫고 회의주의에 빠지고 말았다.

 

성인은 이 시기에 대해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있는 나는 한 때 스스로 속고 있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처음으로 성서를 접했을 때 신심을 추구하기보다는 지적인 문제들을 논하기를 더 좋아했습니다. 불행히도 나는 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보금자리를 떠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날 수 있기도 전에 나는 떨어져 버렸습니다"(설교)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에서 성인을 구한 것은 아들의 회개를 바라는 어머니의 눈물과 자신을 이단으로 빠트렸던 진리에 대한 사랑이었다.

 

'차라리 더 열심히 추구하지 절망을 하지는 말자'(고백록)는 다짐을 한 성인은 암브로시오 성인을 만나 성서에 대한 사랑을 가지게 됐고 암브로시오의 후임 심플리치아노의 도움으로 신플라톤철학을 접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됐으며 심플리치아노가 권한 바울로 서간들을 통해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깨달았다.

 

"집어서 읽어라"(Tolle lege)의 체험 이후 확신의 광명을 얻은 그는 386년 밀라노 인근의 카시치아쿰에서 기도와 명상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부활 때 방탕했던 젊은 시절 얻은 아들과 함께 암브로시오 성인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영세후 로마의 수도원들을 순례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성인은 친구들과 수도생활을 시작했으며 391년 히포로 가서 새로운 수도공동체를 설립했다. 그러던중 사제의 부족을 호소하던 히포의 주교 발레리우스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다가 395년 보좌주교가 되고 발레리우스 주교 선종후 히포의 교구장이 돼 35년간 때때로 식사할 시간도 없을 만큼 열정적으로 사목활동을 하다 430년 76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축일은 8월 28일.

 

 

사상

 

이성과 신앙, 하느님과 인간, 그리스도와 교회, 자유와 은총 등에 관한 신학적 해결을 시도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사상은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몸부림치던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회개이후 교회의 위협이던 네가지 이단, 즉 마니교 도나투스 펠라지우스 아리우스 이단에 대한 논박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젊은 시절의 방황과 방탕했던 시절의 경험은 성인으로 하여금 하느님 은총에 대해 확신으로 이르게 해 교회는 그를 '은총의 박사'로 부르게 했다.

 

마니교의 선악 이원론 사상을 반박하여 악의 문제를 해결했으며 도나투스 이단을 거슬러 교회의 단일성과 성사와 은총을 강조했고 펠라지우스와의 논쟁에서 원죄와 예정설 등의 교리를 발전시켰다.

 

또한 생애의 마지막 10년간을 아리우스 이단과 싸운 성인은 최고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삼위일체론을 남겼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믿으라"고 하는 동시에 "믿을 수 있는 것을 이해하라"고 되풀이해 말한 아우구스티노는 이성과 신앙은 진리를 알도록 도와주는 두 개의 힘으로 이성과 신앙이 함께 작용해야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믿음이 확실해야 한다면 권위를 필요로하고 그 권위는 최고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권위이며 이는 성서에 나타나있고 성서는 가톨릭교회의 권위에 의해 보증된다고 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노는 무엇보다 성서를 사랑했고 그의 수많은 성서 주석서들이 이를 대변하고 있다.

 

성인은 신심의 첫째 양식인 성서에 바탕을 두면서 완덕의 길을 보여 주고자 했고 그 기도의 삶안에서 탁월한 신학적 철학적 가르침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여러분의 소망은 바로 여러분의 기도입니다. 여러분의 소망이 계속되면 여러분의 기도 또한 계속됩니다"(시편주해).

 

[가톨릭신문, 2001년 7월 29일, 김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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