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경기 북부 지역과 한국 천주교(심포지엄)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9-06 ㅣ No.133

의정부교구 역사 · 사적지 파악 위한 1회 심포지엄 - ‘경기 북부 지역과 한국 천주교’

 

잊혀져가는 순교 역사 발굴로 신앙 유산 지켜야

 

 

의정부교구는 한국천주교회의 출발점이자 창립주역들의 왕성한 교류가 있던 지역이기도 하다. 하지만 민족간의 뼈아픈 전쟁으로 인한 분단이 반세기 이상 이어지면서 진행된 변방화로 토착 교우촌이 붕괴돼 당시의 신앙사를 증언해 줄 토박이 신자들을 찾기란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그동안 의정부교구 관할인 경기 북부지역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에 대한 사료나 순교터에 대한 연구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심지어 1980년에 발견된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는 제대로 된 연구는 고사하고, 관리되지도 못한 채 방치되다시피 해왔다.

 

이에 의정부교구는 지난해 9월 순교자공경위원회를 설립하는 한편, 8월 29일 첫 번째 심포지엄 ‘경기 북부 지역과 한국 천주교’를 열어 교구의 역사 및 교회 사적지의 구체적인 현황 파악에 나섰다.

 

다음은 각 주제 발표의 요지.

 

 

제1주제 : 초기 교회시대 경기 북부 지역의 천주교 -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 소장

“나주 정씨 형제는 교회 창설의 주역”

 

마재의 나주 정씨 형제들은 교회 창설의 주역이기도 했고, 창설기의 교회를 이끌어간 주역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정약전은 천주교 교리에 대해 알기 전에 맏형 약현의 처남인 이벽과 함께 서양 서적을 연구했다. 아우인 약용도 혼인한 후 자형 이승훈의 영향을 받아 성호의 유고를 읽은 뒤 그의 학문을 따랐다.

 

이런 가운데 정약전·약용 형제는 이벽과 어울리며 천주학을 점점 새로운 종교인 천주신앙으로 이해하게 됐다.

 

이벽은 정약전·약용 형제들과 함께 이승훈으로부터 천주교 세례를 받았고, 이것이 곧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이며, 마재에 신앙공동체가 정식으로 시작됨을 알 수 있다.

 

이후 1786년 3월 정약전은 아우인 3남 정약종에게 천주 교리를 전하게 되고, 정약종은 권일신을 대부로 세우고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정약종은 1794년경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왕래하면서 교리연구모임을 갖기도 했다.

 

나주 정씨 집안 집성촌이었던 마재는 교회 창설의 주역인 정약전·약용 형제가 천주 신앙을 받아들이고 실천한 초기 교회의 요람지였다. 이곳의 신앙 공동체는 1784년 말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됐을 때 세례를 받은 정약용이 귀가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이후 서울 수표교, 양근 한감개, 서울 염소교 등과 신앙의 끈으로 연결됐고, ‘마재-두물머리-두미협-수표교’로 이어지는 신앙의 줄기는 교회 창설을 가능케 해준 요소가 되었다.

 

이후 정씨 집안에서는 신유박해, 기해박해를 거치면서 순교자를 탄생시켰으며, 이로 인해 시련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집안의 신앙은 끊이지 않는 연속성을 지니게 되는데, 정약종의 ‘주교요지’, 정하상의 ‘상재상서’가 후대에 준 영향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안중근이 이어받은 천주 교리의 내용도 그 하나의 예가 된다.

 

 

제2주제 : 박해시기 경기 북부 지역의 천주교 - 세종대학교 방상근 교수

“박해 진정되자 교회 재건 꿈꿔”

 

이 지역 신앙 공동체는 신유박해로 신자들이 체포·순교함으로써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신유박해 이후 숨어 지내던 신자들은 박해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북경과 교황에게 조선 교회의 상황을 알리며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는 등 교회의 재건을 꿈꾸며 활동을 재개했다.

 

선교사들의 입국 후 한국 교회는 기해·병오박해를 거치면서 또다시 위축됐다. 하지만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가 활동을 재개하면서 한국 교회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게 됐다. 그 결과 1850년에는 신자가 1만1000명에, 185개 이상의 공소가 존재했다. 또한 이 시기 경기 북부 지역의 천주교 신앙이 송도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해 가고 있었음도 확인됐다.

 

고양 용머리 지역은 기해박해 때 김효주 자매가 잡혀 순교한 곳이기도 하지만 이곳에서 태어난 원 수산나가 대세를 받고 성 베드로와 혼인한 사실은 기해박해 이후에도 원씨 집안을 비롯한 여러 신자들이 고양에 신자 공동체를 재건·유지했을 가능성이 있다.

 

파주 출신인 방 안토니오가 덕산으로 이사했다는 기록과 윤쾌영 부부가 파주 잔버들 숫막으로 피신해 있었다는 사실에서 파주 지역의 신자 집단을 추정할 수 있다.

 

한편 19세기 중반 기록 중 출신자는 확인되지만 거주자가 확인되지 않는 지역으로 마재와 교하가 있다. 하지만 마재는 이전까지도 다수의 신자가 존재했던 점으로 신자 집단 유지 추정이 가능하고, 교하 역시 여러 가능성을 고려했을 때 신자들이 존재했을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

 

이처럼 개항 이후 경기 북부 지역에는 양주·연천·송도→고양→교하→파주→포천→장단→적성 등의 순서로 공소가 설립되고 있는데, 이들 장소는 초기 교회 이래 신앙 공동체가 세워졌던 곳이다. 이는 이 지역 신자들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초기 교회 신앙을 꾸준히 이어왔으며, 그것이 오늘날 의정부교구의 신앙 전통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제3주제 : 개화기 · 일제시대 경기 북부 지역의 천주교 - 한국교회사연구소 양인성 연구원 

“새 공소회장 임명 · 공소 설립 활발”

 

선교사들은 병인박해 후 와해된 신자 공동체를 재건하는 데 역점을 뒀다.

 

이를 위해 리델 주교는 교리서 등 교회서적 출판을 계획하는 한편, 사목구역을 나눠 전라도, 충청도, 서울 등지 공소에서 한글을 배우며 신자들을 돌보며 지방 교회조직을 정비했다.

 

이러한 교회 재건 활동에 따라 블랑 신부는 경기 지역의 교우촌과 옛 공소를 찾아 새 공소회장을 선임하고 고양·양주·광주·수원·남양 등지에 공소를 세웠다. 1882~83년 교세 통계표에 따르면 경기 북부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공소는 양주 고령(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가라비(현 양주시 광적면 우고리)·연천 밤골이다. 1883~84년에는 고양 청대(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1886~87년에는 양주 덕두리와 교하 연다산(현 파주시 교하읍 연다산리) 등의 공소가 있었다.

 

이후 1891년 약현본당(현 중림동본당)이 설립되어 경기 북부 지역도 그 사목 관할 하에 놓였지만, 공소수는 1900년까지 2~5개에 머물렀다. 그러나 경기 북부 지역에 1901년 송도본당이 설립돼 연천과 양주·파주 일부 지역, 1909년 행주본당이 약현본당으로부터 분당돼 고양과 파주 일부 지역을 각각 관할했다.

 

1901~24년 공소와 신자수가 크게 증가하며 1927년 신암리본당, 1934년 덕정리본당이 송도본당으로부터 분할됐다. 신암리본당 설립 이후 이 지역 공소수는 감소했지만, 공소가 없었던 지역에까지 신앙이 전파돼 공소가 설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30~37년 교세 통계표에서 확인된 본당 및 공소수는 32개다. 지역별로는 양주 13개, 고양 10개, 연천 5개, 파주 4개다. 이 후 1942년 행주 본당은 신부가 부임하지 않아 공소가 되었다가 2004년 본당으로 승격됐다. 덕정리 본당은 2대 주임 김피득 신부가 의정부로 이전하면서 공소로 격하됐다. 송도 본당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침묵의 본당으로 남아있다.

 

 

제4주제 : 경기 북부 지역의 교회 사적에 관한 기초적 검토 - 한국교회사연구소 이장우 연구실장

“신앙 유산 연구에 전문성 기해야”

 

조선후기 시작된 박해는 오히려 천주교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박해를 피해 각지로 흩어진 신자들에 의해 교우촌이 형성되면서 전국 어디에서나 천주교 관련 사적이 없는 곳이 없게 됐다.

 

1925년 복자 탄생을 계기로 순교자 현양운동의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제기됐지만 조선총독부의 불허로 좌절되다 1946년 복자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을 맞아 ‘조선 천주교 순교자현양회’ 발기식이 개최되며 본격적인 순교자 현양운동이 전개됐다.

 

이후 한국 교회 성장에 힘입어 순교자 현양운동이 전 교구로 확산, 수많은 교회 관련 사적들이 확인·보존되었으며 무려 200여 곳이 성지로 지정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 북부 지방 사적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확인된 사적과 관련 인물들에 대한 규명도 미흡한 부분이 보인다.

 

특히 순교자 황사영의 경우 교회 내에서조차 호교론적 입장에서 황사영의 ‘백서’사건을 옹호하면서도 동시에 민족주의적 해석에 따라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근래에 비로소 황사영과 백서를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국사편찬위원장 이원순(에우세비오)은 ‘근대 민족주의가 성립되지 않았던 상황 아래서 제시되었던 그의 생각을 반민족주의로 규정하는 데에는 재고가 요청된다’고 했다. 당시 상황에서 몇몇 교회 지도자들의 역량으로는 박해를 견디기 어려웠기에 외부의 역량을 절실하게 기대할 수밖에 없었고, 백서 역시 신앙심에 충만해 오로지 교회 부흥만을 희망했던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한편 지역 신앙 문화유산 연구를 위해 자료 조사·수집·정리·보존이 잘 이뤄져야 할 것이다. 여러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을 통해 연구 절차뿐 아니라 수집된 자료들을 종합·처리해야 한다.

 

지역 신앙문화도 해당 지역문화의 일부이므로 지역 역사문화 연구자들과의 긴밀한 유대 속에서 교회 사적에 대한 단서를 찾아내고 규명해야 할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8년 9월 7일]



671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