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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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윤리] 죄와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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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238

죄와 회개

 

 

회개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와 충성을 끊임없이, 그리고 능동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윤리신학의 관점에서 회개란 충분히 의미있는 어떤 기능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며, 따라서 능동적인 윤리신학 안에서 회개는 매우 다양한 문제와 관련이 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죄 자체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말할 때 다만 그것이 어떻게 극복되어질 수 있는가에 촛점을 맞추어 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그리스도로부터의 권능으로서의 회개와 그리스도를 통한 자유와 그분께 대한 신뢰를 지니고 살고 있는 우리들을 온갖 방법으로 위협하고 있는 죄에 대해서 살펴 볼 것이다.

 

 

1. 죄에 대해서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1.1. 죄에 대한 죄스런 대화 

 

만일 우리의 의도가 우리 자신들을 변호하고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죄에 대해서 말하면서 죄를 범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의 악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면서도 마귀를 비난하면서 죄에 대해서 말하기도 하고, 우리들 각자가 죄를 지을 때 아담처럼 행동한다는 것과 또 나아가서는 그럼으로써 이 세상의 죄의 모습이 점점 더 더 크게 자라난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은 아담이나 하와, 혹은 그 둘의 어깨에 자신의 죄를 포함해서 이 세상의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우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자유를 다시 부정하면서, 그리고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가운에 우리가 지니고 있는 자유를 더욱 크게 증가 시켜야 할 우리 자신의 임무를 거부하면서 우리 자신을 변명할 수도 있다. 만일 우리가 자유가 없다고 핑게를 대면서 우리 자신을 변호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해방시키셨고, 자유와 충성 안에서 자라날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신 그리스도를 거슬러 죄를 짓은 것이며,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복합적인 죄의 습성을 더 들추어내기 위해서 죄에 대해서 말할 수도 있다. 구원과 용서라는 진실된 차원과 격리된 일반적인 대화는 슬픔과 비애만을 가져다 줄 뿐이다. 우리가 용서받은 사람이라면, 즉 그리스도인이라면, 화해의 중재자로서 행동하면서, 그리고 온갖 죄와 투쟁하는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해 주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찬미하면서, 죄에 대한 말을 하게 될 것이다. 

 

만일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서의 가장 커다란 부분이라는 점을 감소시키게 된다면 결국 우리가 죄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죄스러운 일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만일 세례는 받지 못했으면서도 아무런 죄도 없이 죽어간 어린이들을 우리가 영원히 소외시켜 버린다면 우리는 모든이의 구원을 진정으로 원하시는 하늘의 아버지를 거슬러서 범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일 우리가 구원의 범위 밖에서, 혹은 구세주의 권한을 축소시키려는 의도에서 원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항상 죄스러운 부분이며, 우리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일일 것이다. 

 

우리가 참된 행복이시며,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으로서의 죄가 아니라 법과 규약을 거스르는 부분으로서의 죄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가지고 죄를 논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죄짓는 일이다. 또한 우리가 죄에 대해서 말할 때 인간이나 인간 공동체를 거스르는 죄에 대해서 보다도 거룩한 사물, 즉 성석(聖石), 성직자의 의복, 거룩한 장소, 성전(聖殿), 聖禮 등을 거스르는 죄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갖고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 올바른 질서를 거슬러 죄를 짓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건전한 인간 관계를 거스르고, 이성에 부합되는 어떤 책임성을 거스르는 죄 보다도 생물학적인 기능들을 거스르는 죄에 대해서 더 강조하는 것 역시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직 중대한 죄를 범할 능력이 전혀 없는 어린아이들이 범하는 대죄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십계명의 육계의 관점에서 볼 때, 무절제한 성생활처럼 명백한 육계의 위반이 영원한 죽음의 벌로 떨어지는 하나의 대죄라는 점만을 부각시켜 가르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어떠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죄에 대해 말 할 때, 만일 우리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참된 지식을 위해 필요한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때는 항상 죄를 범하는 것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회개의 기쁜 소식을 나누지 않고 마음을 돌리려고 하지 않을 때는 항상 죄라는 점을 인식해야만 한다. 

 

모든 종교들 안에서 볼 수 있는 것 처럼 왕의 사제들은 예배에 있어서는 엄청나게 많은 대죄를 지으면서도, 권력과 부의 비호 아래 그들 자신의 이익이나 기득권에 절대로 피해를 보지 않는 범위 내에서 죄에 대해서 아주 천연덕스럽게 말했던 것이다. 그들은 정의와 평화를 거스르는 죄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궁중 사제들은 가난한 사람, 소외받은 자들, 평민들의 죄에 대해서는 가혹하였지만 왕과 사제들, 그리고 권력있는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곤 했던 것이다. 

 

죄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성서의 예언자들을 주목해야만 한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의 회개의 긴박함과 필요성, 그리고 가능성을 선언한다. 그들은 또한 각 개인의 회심과 공동체의 개혁을 요구한다. 그들은 각자가 살고 있는 주변에 대해 지니는 고유한 책임감을 소홀히하는 사람들의 죄에 대해 말하며, 또한 권력가들과 부자들의 양심을 꾸짖는다. 그들은 또한 하느님의 자비를 알려주면서 인정없는 사람들의 죄를 폭로하며, 사랑의 하느님을 선포하면서 사랑없는 사람들의 죄를 비난한다. 또한 그들은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정의를 드러내 보이면서, 우리들 모두가 정의를 위해 억울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용서하고, 치유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예언자들은 또한 하느님과 이웃 사랑, 정의와 사랑 사이의 긴장과 통합이라는 통합적 메시지를 소개하면서 우리들을 율법에로가 아닌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회개하도록 촉구한다. 그리고 그들은 구세주의 평화를 선포하면서 평화의 선물을 받고, 모든 곳에서 평화를 증진시키도록 격려한다. 

 

새롭고 영원한 계약의 사제들은 만일 그들이 이 세상 권력가들의 사제로서 말하게 된다면 도무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예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분의 예언자적 사명을 수행하고, 그분 안에서 기쁨을 가질 수 있기 위해서 그분과 함께 고통을 나누도록 불리움을 받았다. 예언자들은 그들이 비록 죄에 대해서 말한다 하더라도 기쁨의 소식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회개와 화해를 통해서 신앙을 갖고 또 그것을 함께 나누기 때문이다. 

 

왕들의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죄에 대해서 말할 때 그 집단과 종족, 그리고 전통과 그 왕국과 교회를 반대하는 율법을 지지하지만, 하나이신 성부 하느님의 이름을 알고 있는 참된 예언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 모든이의 성부 하느님과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공경하고 하나가 될 수 있기 위해서 인간들로부터 만들어진 인위적인 장애물들을 제거한다. 

 

왕들의 율법학자들은 죄의 목록들을 아주 철저하고도 완벽하게 알고 있지만, 예언자들은 시대의 징표를 알아보고,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깨어 있도록 초대한다. 

 

1.2. 회개의 복음과 죄의 고통 

 

성서를 통해서 볼 때 죄에 관한 언급은 회개의 복음 안에서 함께 찾아 볼 수 있다. 회개의 복음이란 하느님의 거룩하심에로의 초대에 응답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기쁜 소식이며, 그렇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완고하게 거절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위협이 된다. 

 

성서는 매우 구체적인 방법으로 죄와 회개에 대해서 언급한다. 성서는 ????? 개념 안에서, 즉 구체적인 '현재' 안에서, 대화 중의 구체적인 파트너에게 온갖 주의를 다 기울이는 형태로써 죄와 회개를 말하고 있다. 성서로부터 우리는 죄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야만 하는가를 명백하게 배울 수가 있을 것이다. 성서는 항상 거룩한 이름을 가지셨고, 세세대대로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시각에서 말한다. 또한 성서는 역사적 지평을 열어 놓고 있으며, 한 발자국 앞으로 더 나아가도록 촉구한다. 성서는 죄를 지칭하기 위한 어떠한 단어도 가지고 있지 않고, 오히려 여러가지 다양한 상상이나 비유, 그리고 매일 매일의 생활로부터 나타나는 단어들을 보여주고 있다. 성서는 어떻게 올바른 길을 내딛을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치면서 죄의 경험들, 그리고 회개의 경험들을 설명한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안에서의 죄와 회개에 관한 텍스트를 볼 때 각기 매우 커다란 차이점을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일치된 진리는 그것들이 율법의 지배 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정의로운 구원의 계시, 그리고 죄를 깨끗이 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성부의 최종적인 계시 아래 놓여져 있다는 점이다. 

 

"죄의 부정적인 실재는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결코 최종적 개념을 부여할 수가 없다. 더우기 이는 성서에서도 결코 최종적 개념이 아니다". 죄는 첫번째 개념도, 최종적 개념도 결코 아니다. 첫번째 개념은 항상 하느님의 선하신 창조이며, 그분의 원래 의도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모든 선에 대한 것이다. 또한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회개에 대해서 설교할 때에, 신자들에게 설교 할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선(善)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결코 율법과 죄에서부터 시작해서는 안될 것이며, 단드시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에 관한 기쁜 소식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신자들에게 설교하면서, 우리는 항상 어떤 선물을 가져다 주는 신앙의 실재 위에 서 있어야만 할 것이다. 죄에 관한 우리들의 어떠한 토론이라도 복음과 관련을 가질 때에만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회개는 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키셨기 때문에". 

 

구약성서에서의 죄와 회개에 관한 설교와 예언자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같은 주제의 설교 사이에는 분명히 하나의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구원의 충만한 현존 안에서는 분명 거의 필연적으로 구원과 해방, 그리고 긴박하고도 그렇지만 가능한 회개의 요구가 강조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 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청중들의 능력에 따라 강조점이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에, 예수께서 갈릴레아의 가난하고도 순박한 사람들에게 설교할 때에는 분명히 바리새이나 율법학자,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같이 이단이 넘쳐 흐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들에게 설교를 할 때와는 강조의 핵심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1.2.1 하느님의 구원의 정의(正義)와 인간의 불의(不義: adikia) 

 

성부께서는 당신 구원의 정의를 당신의 구원의지가 담긴 사랑을 통하여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내 보이셨다. 하느님께서 자비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실 때, 이는 분명 "성부"라는 이름에 합당하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하느님의 선물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선물을 잃어 버릴 것이고, 성부의 의로우신 관심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구원에 대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구원의 정의에 대해서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다. 

 

당신의 자비와 구원의 정의를 드러내 보이시는 그분께서는 동시에 규정을 세우신다: 즉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 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의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해야 합니다" (마태 5,48). 이웃에 대한 증오, 반목, 완고함, 그리고 자비의 결핍은 하느님의 자녀들이라는 우리들의 신분을 거스르는 불협화음의 불의를 낳고, 또한 하느님의 구원의 정의에 대한 모욕이다. 이웃을 위한 올바른 기원, 특별히 불쌍한 사람들, 그리고 연약한 사람들에 대해 올바른 관심을 갖는 것을 거절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당신께서 행하신 것처럼 당신의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행하라고 명하시는 하느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하나의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계시와 사랑의 성령의 파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대해서 하나의 통치권을 요구하시기 때문에 자녀적 사랑과 정의, 그리고 인간 상호간의 사랑의 거부는 하느님 자체를 반대하는 가장 커다란 불의인 것이다. 가장 폭력적인 불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구원의 정의와 자비를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 보이시기 때문에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어떤 종류의 거절도 모두 성서적 개념 안에서의 불의에 포함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선사받은 새로운 마음으로써 예언직을 수행하는 메시아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만일 어떤 사람이 이기적인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 불의는 더욱 중대하다. 따라서 죄란 올바른 일을 마음으로 거부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외에도 표현해야할 은혜에 대해 배은망덕하는 것이며, 이는 성령을 거스르는 가장 중대한 불의이다. 그리스도의 복음 전체를 함축적으로 선포하고 있는 마르꼬 복음 1,14절의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라는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잘 알 것이다. 즉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하느님을 거스르는 명백한 불의를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과 성령 역시 하느님과 이웃, 그리고 모든 피조물을 거스르는 어떤 불의를 위해 파견되지 않으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의로서의 죄는 하느님을 하느님으로서 공경하는 것과 그분께 감사드리는 것을 거부하는 의미로서의 무신앙 (asebeia)에서부터 비롯된다. 죄의 부당한 모습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반대되는 오만과 이기주의, 그리고 사기와 기만의 타락된 세상을 만든다 (베드로 후서 2,20 참조). 만일 어떤 한 신자가 어떤 기본적인 점에서 부정적인 선택을 함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다면 죄의 부당한 모습은 "하느님의 아들을 짓밟고", "계약의 피를 속되게 다루는" (히브 10,29) 것과 동일하게 중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 

 

성령 안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이 이기주의의 모습을 고집하면서 산다면 그는 분명 죄 중에 사는 것이다. 또한 이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드러내고 더 상위의 것을 추구하며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향해 감사드리는 대신에 자기 자신의 능력과 모든 것을 인간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고 고집하면서 은혜를 거절하는 일종의 소외이며 불의이다.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끊임없는 감사로서의 성체성사라는 선물을 아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은혜를 저버리는 행위는 의심할 나위없이 중대한 불의인 것이다. 

 

성서, 특히 예언자들의 설교와 신약성서는 자기 자신과 이웃을 거스르는 모든 죄는 모든이들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앞에서도 명백히 하나의 불의가 된다는 점을 아주 명백하게 알려준다. 종교와 윤리는 사실상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자기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이 땅위에서의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그 자체로써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 하느님의 자기 계시라는 놀라우신 업적을 보면서 인간은 그러한 업적에 대해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합당한 응답을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인간측의 이러한 응답 행위는 필연적으로 인간이 하느님의 창조 안에서, 하느님의 계속되는 구원 행위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과 그분께 적대되는 모든 힘들 사이에서의 힘찬 투쟁 안에서 파트너로서의 임무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포함하는 행위이다.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는 것, 그리고 아무런 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창조주이시며 구세주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을 거스르는 하나의 불의인 것이다. 

 

1.2.2. 하느님의 생동하는 법으로부터 멀어짐(anomia) 

 

사도 바울로와 함께, 구원받은 사람은 찬미의 노래를 주께 드린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영, 그 영의 법이 그대를 죄 및 죽음의 율법으로부터 해방하였기 때문이다" (로마 8,2).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 하느님과의 우정, 그리고 성령의 이끄심 아래서의 생명과 자유의 충만함이 부여 되었다면 우리는 어떤 것이 진정한 자유이며 죄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법이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죄와 법의 무분별에서부터 나타나는 죄는 우리들의 고유한 내적 법이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보게되는 사람에게는 분명하게 구분된다(1고린 9,21 참조). 

 

성령의 법에 대한 배반과 거절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성령을 통해서 우리들 마음 안에 새겨 놓으신 법에 속하지 않는 규범들과 법 규정들, 그리고 전통들을 위반하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문제이다. 인간들의 법과 무분별한 권위 아래 지배를 받는 것, 악, 그리고 결핍은 우정과 구원의 법인 계약의 법을 거절하는데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개인적 혹은 집단적 이기주의로서의 죄는 말하자면 제 2의 천성이 될 수도 있고, 죄인들의 법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생명을 주는 법을 포기함으로써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결과인 것이다. 성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의 법과 여러가지 형태로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죄의 지배 사이에서 나타나는 드라마와도 같은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로마 3,9; 에페 2,1-5 참조). 그리스도의 해방하시는 법은 인간을 참된 생명이신 하느님께 인도하기 위해 주어진 반면에 죄의 법은 인간을 자기 자신에게 묶어 놓고, 하느님 없는 세상과 죽음의 지배를 받는 종으로 전락시켜 버린다(로마 7장 참조). 이러한 죄의 법은 마치 자기 자신을 법인양 만들어 놓으면서 모든 것을 지배하려 한다. 죄인은 또한 많은 법들을 알 수 있으며, 전통이나 규범들을 다양하게 적용하는 것도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랑에서 나오는 구원의 법을 알지 못한다. 

 

죄 안에서 인간의 자율으로서의 "나"는 "나"를 모든 적대적인 힘에 묶어놓고 마는 이기적인 "나"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만다. 죄인은 비록 그가 법과 전통을 지킨다고는 하지만 자신을 이기적인 "나"의 노예로서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적 가르침과 인간의 마음 안에 새겨진 성령의 생동하는 법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통해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신다.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께 대한 경배와 신앙을 통해서, 그리고 희망과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갖게 되는 것이며, 결국 자기 자신의 참된 "나"를 찾게 된다. 

 

"죄의 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께 대해 적의를 가지게끔 할 때까지 항상 인간의 마음을 점점 더 무디게 하는 경향이 있다. "육의 마음은 하느님에 대한 적의이니 이는 하느님의 법에 복종하지도 않고 실상 복종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 8,7). "이러한 적의는 죄에 대한 사도 바울로의 개념을 구성하는 중요한 한 요소이다". 

 

하느님의 살아있는 법은 인간을 성숙시키는 법이며, 인간을 끊임없이 회개시키는 법이다. 어떤 사람이 성숙하기를 거절하고, 자기 자신이 더욱 끊임없이 회개해야 한다는 점을 망각할 때 그는 하느님의 살아있는 법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1.2.3. 죄의 연대로 인한 구원 계약으로부터의 이탈(hamartia) 

 

인류는 단순하게 그 기원의 시초부터 범죄 때문에 처벌 받았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의 약속과 그분의 계약으로부터 확실하게 드러났다 (창세 3,15; 9,8-17, 1-7; 출애 34,10-27). 인간들은 하느님께서 충실하시다는 것을 믿었으며 하느님께 신뢰를 두면서, 그리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아래서 인간들 사이에 일치를 이루면서, 계약 안에서 충실하게 살아감으로써 해방과 구원을 체험한다. 

 

죄는 단순히 개인적인 법들의 위반만은 아니다. 실제적 의미에서 죄는 계약의 파괴이다. 즉 이는 계약의 조문이 새겨진 돌판을 파괴한 모세로부터 철저하게 상징화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바라보니 너희는 송아지를 부어 만들어 놓고 너희의 하느님 야훼께 못할 짓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도 쉽사리 야훼께서 분부하신 길을 버릴 수 있었느냐? 내가 그 판 두 개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 내던져서 부수어 버리는 것을 너희는 똑똑히 보았다" (신명 9,16-17). 

 

죄란 "목표를 잊어버리는 것" (hata)로서 이해된다. 죄란 단순히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는 귀중한 기회를 상실하는 것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약에 덜 충실한 것을 의미한다. 구약성서 안에서 죄의 개념은 계약의 실현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사회적 범주로서 강조된 죄의 측면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구원의 계약을 저버리는 사람들은 죄의 연대 안으로 빠져들고 만다. 그들은 계약에 참여하지 못할 뿐더러 다른 사람들과 꼭같은 비참한 상태로 빠져들고 만다. 바빌론 유배 초기에 예언자들은 죄가 지니고 있는 사회적인 범위를 전혀 감소시키는 것 없이 죄의 개인적인 측면을 특별히 강조했었기 때문에 실의에 잠겨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각 가정은 각기 고유한 책임을 스스로 떠맡아야만 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의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이 계약의 피로써 인장을 받고 구원된 존재임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 자신이 계약이시며, 따라서 법이시다. 따라서 죄는 구원의 계약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일종의 모독이다. 사도 바울로는 이 진리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육체에 대한 자신의 표상학으로써 설명한다: "마치 몸은 하나이지만 여러 지체를 가지고 있으며, 그 몸의 지체는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이듯이, 그리스도도 그렇습니다. 실상 우리는 모두 한 영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으며,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노예이든 자유인이든, 모두가 한 영을 받아 마셨읍니다" (1고린 12,12-13).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1고린 12,26). '그리스도의 법'만이 확실하며, 서로 남의 짐을 져주게 하며, 모든이의 구원을 염려한다 (갈라 6,2 참조). 모든 죄는 구원의 효과적인 현존을 감소시키며, 악의 힘을 증가시킨다. 그리고 죄는 이웃의 구원을 침해하기 때문에 모든이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께 대한 일종의 공격이 된다. 

 

계약의 피에 의해서 우리는 파멸의 끈으로부터, 그리고 '세상의 죄' (요한 1,29 참조)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범죄할 때마다 죄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며 죄의 영향 아래 매이게 되고 만다. 

 

성서는 가끔 죄인을 종속시키는 의인화된 어떤 힘으로서의 죄와 또한 주위환경에 대해서도 나쁜 영향을 미치는 죄를 보여 준다 (창세 3,17 참조). 창조된 세계는 죄의 영향 아래 고통을 겪고 있으며,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에 참여하기를 열망한다 (로마 8,19-21참조). 창조된 세계와 모든 인류는 우리 인간의 죄를 거슬러 투쟁하고 있다. 

 

자기 자신만의 번영과 구원만을 염려하는 개인주의자는 공동책임이라는 매일의 책무 안에서 구원의 연대를 위한 선택을 의식적으로 수행하지 않는다면 죄의 그늘진 영향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모든 공동체는 공동체 고유의 구원을 위해 노력해야만 하며, 그 공동체 안에서의 각 개인은 그러한 임무를 늘 자각해야만 한다. "얼마 안되는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모르십니까?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이라는 사실 그대로, 새 반죽이 되시오" (1고린 5,6-7). 

 

신약성서는 죄를 뜻하는 (단수로서) hamartia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만일 이 단어가 복수로 사용된다면 개인적인 위반들, 죄의 행위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이 단수로 사용되었다면 죄의 연대성의 범위를 포함하는 죄의 상태, 무딘 마음을 의미한다. 

 

각각의 죄들은 죄들은 양적으로도 많이 번져나갈 뿐더러, 무딘 마음까지도 가져오게 한다. 또한 그러한 죄들은 선을 위한 자유를 감소시키며, 악의 영역을 확장시킨다. 죄를 범하는 사람이 죄의 힘에 예속되면 될수록 그는 집단적인 죄의상태로 떨어지게 된다. 개인적인 죄들은 사회적인 소외로 발전된다: 즉 사회적 소외란 한 개인의 소외, 공동체, 그리고 사회의 소외이다. 이 죄들은 인간의 빗나간 지성에 파고 들어가 모든 주위 환경을 오염시킨다. 즉 선을 위한 자유를 감소시키며, 각 개인들로 하여금 거짓, 불의, 그리고 집단적인 타락에 떨어지도록 부추킨다. 

 

지금까지 우리가 죄에 대해서 말한 모든 것을 통해서, 비록 대죄의 상태에 있으면서도, 어떤 것이 죄의 연대를 위한 분명한 선택을 필연적으로 구성하는 악을 위한 근본 선택이며, 또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대와 구원의 정의를 거스르는 악한 세력과 대항하는 하나의 선택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소죄는 인간의 완전한 성숙을 약화시키고, 건전한 관계에 위험을 초래한다. 만일 소죄가 중대하다면, 인간은 결국 스스로의 분열을 가져오고 만다. 그렇지만 그의 깊은 내면 안에서 그가 아직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면 죄의 상태에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거부할 것이며, 그와 반대되는 힘이 자라나도록 노력할 것이다. 

 

1.2.4. 거짓의 노예로 인한 진리에서의 이탈 

 

이미 우리가 믿는 바와 같이 진리 자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빛 안에서 살고, 이 세상의 빛이 되도록 거짓의 노예상태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다. 빛이신 그리스도는 이 세상 안에서 빛을 발하고 계시며, 그렇지만 아직 어두움을 헤메고 있는 인간들이 있다 (요한 1,5-6 참조). 그들은 빛이신 그리스도를 피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어두운 죄에 대해서 뉘우치려는 기색이 없기 때문이다. 죄를 짓는 사람은 암흑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행동을 하고 무익한 논쟁에 빠져드는 (에페 5,6-10 참조) 반면에, 참된 믿는자들은 선과 정의, 그리고 진리가 살아 움직이는 대낮의 빛 속에서 거닌다. 성서는 암흑 (skotos), 오류, 사기 (pseudos)의 어떤 주체로서의 죄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 및 사회적 차원의 죄에 대해서 말한다. 이는 분명 인간들을 사탄의 자녀로, 거짓의 아비로 (요한 8,44-45참조) 만들어 버리고 만다. 죄인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뒤바꾸었다" (로마 1,25). 

 

우상들, 사기, 그리고 사탄의 지배 아래서의 거짓 생활을 선택하면 할수록 성부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진리와 지헤, 그리고 사랑을 계시하셨다는 사실를 반대하는 결과가 나타난다. 예수님은 당신과 성부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던들 그들에게 죄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자기들의 죄에 대해서 변명할 구실이 없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는 나의 아버지까지도 미워합니다" (요한 15,22-23). 

 

죄에 물들어 있는 이 세상과 죄인 각 개인은 하느님께서 진리의 성령을 보내셨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을 때에는 변병의 여기가 없다: "그분이 외시면 세상을 책망하시며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해서 밝혀 주실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밝힘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 16,8-9). 

 

진리의 성령으로부터 인도되고 그리스도께 대한 순명 안에서 진리의 충만한 증인이 되는 사람들은 우상과 헛된 이념들의 가면을 벗기며, 죄인들을 진리에로 이끌어 들인다. "한편으로 죄인은 그가 범한 죄들에 대해서 책임을 갖는다. 그는 그가 범한 죄 때문에 어두움 속을 방황한다. 또 한편으로는 이미 한번 발을 들여 놓았기 때문에 그는 계속해서 죄를 짓는다. 왜냐하면 그 어두움 속을 방황하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할 수 없고, 마귀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 안에서 신앙을 통한 마음의 정리를 통해서 그러한 죄의 사슬을 끊어버릴 수가 있을 것이다". 정상적으로 회개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빛 속을 거니는 사람들을 향해, 곧 신앙 공동체를 향해 나아간다. 

 

1.3. 유혹 

 

하느님으로부터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는 악을 지향하지 않는다. 이 자유는 선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죄를 지을 가능성은 인간의 불완전성에서부터 기인하는 본래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혹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순수한 가능성과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이다. 자유로운 의지는 탐욕, 즉 과거의 집단적 및 개인적 죄의 열매라고 할 수 있는 악한 경향, 세속화된 세계 안에서의 악한 영향과 악마의 세력으로부터 시험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악마는 "유혹자"이다 (1디모 3,5; 마태 4,3 참조).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을 뒤덮고 있는 죄의 우주적 힘들에 대해서 무지해서는 안될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우리들의 책임을 전가시키기 위한 한 방법으로서의 악마에 대해서는 결코 언급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악한 정신은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선과 정의, 그리고 평화에로 초대하는 '神的 환경'을 넓히려는 마음이 착한 모든 사람들과 강한 유대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힘도 가지지 못한다. 

 

우리는 다음의 기도가 의미하는 바를 알아야만 할 것이다: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악에서 구하소서" (마태 6,13).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이 유혹을 이겨 내도록 도와주신다. 우리의 마음을 바꾸면서, 그리고 우리의 '공동 책임'을 촉진시키면서, 그분께서는 우리들을 많은 유혹에서부터 보호해 주신다. "아무도 유혹을 받을 때 하느님으로부터 유혹을 당하고 있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은 악으로부터 유혹을 당하실 수도 없고 또한 당신 자신이 아무도 유혹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각자 자기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그 꾀에 속아넘어가서 유혹에 빠집니다. 그 다음에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게 되고 죄가 차면 죽음을 낳습니다" (야고 1,13-15). 

 

거만함과 개인적 및 집단적 이기주의가 인간으로 하여금 유혹자로 만들지만 않는다면, 악마는 인간에 대해서 어떠한 능력도 가지지 못한다. 유혹과 탐욕, 그리고 각 개인 안에 자리잡고 있는 이기주의를 통해서 죄에 물들어 있는 이 세상의 모습, 즉 유혹하는 어떤 힘을 만나게 될 것이며, 이는 결국 개인과 집단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죄를 야기시킨다. 

 

주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 믿는 이들의 공동체 안에서 믿음을 발견하고 또 믿음을 주는 사람, 그리고 하느님의 성령께 순응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의 거짓 정신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이 주어질 것이며, 그 반면에 영성적이지 못하고 하느님의 성령에 속해 있는 것을 거절하는 사람은 거짓 세계로부터 쉽게 유혹을 받게 될 것이다. 이기적인 '나"는 죄스런 세상에서 나타나는 유혹들을 끌어 당기기 때문이다. 

 

하느님 없는 세상의 힘, 그리고 우리 안에 잔존해 있는 '낡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힘은 구원의 연대를 부수어 버린다. 믿는자들은 형제적 충고와 격려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법을 완성한다. 왜냐하면 그들도 역시 유혹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갈라 6,1-2 참조). 우리는 형제적 충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것과 더불어 건전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 그리고 정의와 신뢰, 성실성과 자율적 자유를 위해 힘껏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유혹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셨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으로써 순수한 마음, 순수한 의향, 그리고 순수한 동기를 끝까지 유지 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동시에 우리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거짓과 불의가 횡횡하는 세상에서부터 나오게 되는 많은 유혹들을 물리칠 수 있도록 기도한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모든 종류의 시험에 처하도록은 기도하지 않으며, 단지 위험한 유혹들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기를 간구한다. 우리들의 신앙에 대한 성실성의 시험과 외적인 것에서부터 풍성한 내적 은총에로 우리를 초대하는 섭리적인 시련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주님의 사도는 다음과 같이 섭리적인 역경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싸일 때에 여러분은 그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시오" (야고 1,2-3; 1베드 4,12-14 참조). 

 

우리는 시련으로써 단련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또한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성품을 순수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며, 신앙에 따라 신앙과 생명의 순금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신다 (집회 27,6 참조). 즉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욥, 토비트를 시험해 보이셨던 것이다: "언젠가 당신이 잔치자리를 박차고 서슴지 않고 일어나 나가서 시체를 묻어 주던 날, 당신을 시험하기 위해 파견된 자도 바로 나였습니다. 또 당신의 눈을 뜨게 하고 당신의 며느리 사라의 액운을 면케 해 주려고 하느님께서 보낸 자도 바로 나입니다" (토비트 12,13-14). "그것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과연 너희가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따 쏟아 너희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는지 시험해 보시려는 것이다" (신명 13,4). 

 

죄에 물들어 있는 세상의 헛된 망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대답은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결정적인 어떤 임무나 하느님의 자녀들로서 자유에 참여하려는 열망에 응답하는 것처럼 그리 격렬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십자가의 지혜와 이 세상의 빛이 된다는 그들의 사명을 묵상하면서, 그리고 구원의 공동체 안에 스스로를 뿌리 내리면서 기도로써 생동감 넘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지혜와 분별력의 선물들을 획득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외에도 개인적 및 공동체적 同化의 형태를 결정짓기 전에 그들은 개인적 혹은 공동체적으로 그들의 노력을 증명해야 할 것이며, 항상 그들 행위에 대해 예견되는 결과들에 대해서 마음을 두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형태는 물론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고, 그들이 맞는 유혹의 기회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 안에서이다. 

 

1.4. 죄의 벌 

 

현대의 윤리신학에서는 이전 3세기 동안 강조되어 오던 규정집들과는 달리 보속과 벌에 대해 그리 많이 강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복수하시는 어떤 신에 대한 생각때문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신앙의 위기에 대해 의식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쇼크의식이다. 즉 인간의 수작은 보상/벌의 倍數를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과 인간적인 계약관계에 있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께서는 사랑과 성실성의 계약을 인간에게 건네시는 분이시고, 믿는자들은 그들의 동기가 보상이나 벌이 지니고 있는 외적 동기를 초월하기만 한다면 그들이 지니고 있는 올바른 능력에 다다를 수 있게 된다. 

 

또한 우리는 인격의 귀중한 열매, 자아완성으로서의 선 자체가 생성된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보상받기 위해서만, 혹은 벌을 피하기 위해서만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면 선 자체는 참된 행복의 길로 인간을 안내한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죄 또한 악의 온갖 형태 안에서 그 열매를 키워 나간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을 하느님으로서 공경하기를 거부하고 그분께 감사를 드리기를 거부하는 것으로서의 죄의 자연적 결과로서, 이 세상에서 보여지는 타락과 소외에 대해서 설명할 때, 구약성서적 사고방식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로마 1,18-32 참조). 

 

하느님은 복수하시는 하느님이 아니시다. 그분은 죄로 말미암은 고통이 결국 꼭 같이 반복된다는 점을 인간에게 알려주시면서 인간을 회개에로 부르신다: "... 그대는 하느님의 인자하심이 그대를 회개로 이끌려 한다는 것을 모르고 그분의 풍부한 그 인자하심과 인내와 관용을 얕보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대는 그대의 완고함과 뉘우칠 줄 모르는 마음 때문에 진노의 날 곧 하느님이 그 의로운 심판을 계시하실 그 날을 두고 그대 자신에게 내릴 진노를 쌓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 2,4-5). 

 

인간이 범죄할 때,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정말 잔인하다. 만일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선을 위한 자신의 자유를 조금씩 조금씩 파괴하고 마는 것이다. 그의 내적 완성에 결정적인 균열을 일으키고 말 것이며, 결국은 그것을 잃어버리게 되며, 종의 신분을 스스로 선택하고 마는 것이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든지 죄의 종입니다" (요한 8,34). 

 

어느누구도 소죄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태만은 반복되는 소죄를 통해서 결국은 점점 더 중하게 되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소죄는 점진적으로 양심의 예민함을 파괴하며, 전체성과 완전성을 향한 내적 역동성까지고 파괴하고 만다. 그것들은 분명히 대죄에로의 엄청난 유혹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 

 

죄는 인간의 대뇌피질 안에, 기억 안에, 그리고 성향 안에 새겨져 있다. 죄는 개인생활과 주위 환경 안에서 일종의 파괴된 공격으로 나타난다. 인간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벌을 받았고, 또 끊임없이 벌을 받고 있다. 하느님의 육화된 말씀 자체도 인류의 죄의 모습 아래서 가장 극심한 고통을 겪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고통이 구원의 연대 안에서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알려 주셨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근본 선택이 영원한 생명과 하느님과의 영원한 우정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돌이킬 수 없는 소외를 선택하는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계시해 주셨다. 

 

 

2. 죄와 죄들 

 

성서는 힘, 소외, 인간 마음의 타락으로서의 죄와 죄들이라고 말해지는 죄의 표현들, 그에 따르는 다양한 행동들을 구분한다.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볼 때 다양한 종류의 걱정들은 죄의 종류와 세부적 차이점들에 대해서, 태만의 죄와 적극성의 죄 사이의 구분에 대해서, 그리고 죄의 경중의 단계를 구분할 필요성에 대해서 강조하기 위해 죄들의 목록들을 수집하는 경향으로 변화되어 갔다. 

 

2.1. 죄의 목록 

 

죄들 혹은 악습들에 대한 목록을 작성하려는 시도는 구체적인 상황 하에서, 그리고 사회적 혹은 교육적 이유 때문에 생겨났다고 말할 수 있겠다. 예를 들면, 신명기 27, 15-26에서 우리는 그 당시 계약의 백성에게 어떤 특별한 위험을 주는 12개의 범죄들과 연결된 저주들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수 시대에 가르쳐졌던 모세의 율법은 하나의 완전한 윤리 법전을 제공하는 것처럼 여겨졌던 613개의 규정들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죄들에 대한 하나의 목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로의 서간들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죄스런 행동들과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대해서 간단한 목록과도 같은 내용들을 담고 있기도 하다. 1고린 6,9-10에서 사도 바울로는 이교도들 사이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종류의 악습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의 경고는 아마도 그리스도적 자유에 관한 그의 메시지를 반대하여 행동하는 사람들을 향해 던지는 말일 것이다. 또한 이와 비슷하게 갈라 5,18-21 역시 우리 인간들을 자유롭게 하신 그리스도의 자유를 거스르는 행동들에 대한 하나의 단순 명료하고도 예리한 지적인 것이다. 

 

고대에는 죄를 범한 사람은 어떤 특별한 규정의 적용을 받아야만 했었던 (법적 보속), 아주 중대한 죄들을 묶어 놓은 공적인 목록이 있었다. 각각의 지역 교회는 교회가 이러한 상황에는 이렇게 처벌해야 한다는 어떤 특수한 죄들의 간단한 목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일랜드 교회의 보속집은 점점 늘어만 가는 엄청난 수의 죄들의 리스트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지만 그것들은 무엇보다도 보속의 종류를 담고 있는 목록들이었다. 

 

죄들의 목록들은 과거에 대한 것들만 열거한 상투적인 반복만이 아니었고, 주요한 죄들, 어떤 확실한 상황의 무질서, 그리고 어떤 분명한 문화에 대항하기 위한 건전한 반응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가르쳤다. 

 

죄들의 목록은 그것이 회개와 선의 완성을 위한 긍정적인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건설적인 구조 안에서 완성된다면 분명히 치료의 역할을 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2.2. 죄의 세부적 구분 

 

트렌트 공의회는 신자는 세례성사 후에 범한 모든 대죄에 대해서 그죄의 횟수와 특수한 구분에 따라 고백해야 한다는 법을 정함으로써 죄들의 세부적인 구분에 대한 면이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법에 대한 협의의 해석은 신자들로 하여금 아주 세심하게도 만들었으며, 또한 죄의 다양한 종류를 구분할 수 있기 위한 여러 기준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죄의 세부적 형태는 죄를 반대하는 의무, 가치, 혹은 덕의 형태에서부터 생겨날 수가 있다. 예를 들면, 계시된 진리의 실천에 있어서 소홀한다거나 게으른 것, 혹은 자기 자신의 고유한 삶을 변화시키도록 촉구하는 신앙의 진리에 대한 거부는 신앙의 덕(信德)을 거스르는 죄인 것이다. 경신덕(敬神德)은 우리가 하느님만을 공경하도록 요구한다. 거짓 신을 공경하는 것, 즉 우상숭배는 근본에서부터 이 덕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이 덕은 또한 하느님은 하느님께서 지니신 최고의 품위와 선에 합당하게 어울리는 방법으로 공경 받으셔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예배의 소홀, 특별히 모든 형태의 미신행위는 바로 이러한 경신덕의 측면을 거스르는 것이다. 

 

교회, 혹은 국가의 어떤 올바른 법을 위반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은 순명의 덕을 침해하는 것이 되고, 이는 무엇보다도 올바른 법에서부터 드러나게 되는 권리나 가치, 혹은 의무를 침해하는 것이 된다. 만일 어떤 계명, 혹은 긍정적인 규범이 그 자체로 복종에만 그 비중을 두고 그외의 다른 덕이나 가치의 실천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그 계명이나 규범의 위반은 순명의 죄도, 또한 그밖의 다른 덕을 거스르는 죄도 성립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도로교통법을 위반하면서 자신의 생명과 다른 사람의 온전성에 위험을 끼치게 된다면, 이는 복종을 거스르는 죄일 뿐만 아니라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거스르는 죄도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정의화 사랑의 덕을 거스르는 죄라고 말할 수 있다. 

 

고백신부의 사용을 위해 만들어졌던 보속집은 죄에 대해서 너무나 자세하게 세분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 보속집은 기본적으로는 '고백성사가 질료적으로나마 완전하게 이루어졌으면'하는 목표 때문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주된 관심은 무엇보다도 구체적인 경우에 적용되는 가치와 의무, 권리, 혹은 여러가지 덕들에 대해 인간의 양심이 민감하여야만 한다는 것이 우선이다. 죄의 적용이 너무나 세분화되어, 세밀하게 적용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2.3. 죄의 숫적 구분 

 

오늘날 만일 어떤 사람이 범죄를 반복한다면 그 범죄는 특별히 더 중대하게 취급된다는 것을 사람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윤리적인 시각에서 우리는 회개하는 것 없이 반복해서 범해진 죄들은 하느님과 선을 거스르는 하나의 기본적인 표징으로 볼 수 있으며, 혹은 최소한 기본적으로 선한 선택을 위협하는 아주 커다란 위험을 더 증가 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일에 대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거슬러 선택하는 것의 위험은 그리스도인이 어떤 중죄를 범하고 나서 "저는 그 죄를 고백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위험이 어떤 위험인가를 가장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근본 선택에 대해서 주목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말하자면 수학적인 어떤 접근에 대해서 너그러운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죄의 행위가 얼마나 중한가를 따지는 대신에 우선적으로 행위의 수를 셈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 사람이 죄의 습관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얼마나 투쟁하였고, 또 범죄 후에 얼마나 빨리 하느님 앞에서 뉘우치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다. 죄스런 어떤 무질서를 지향하여 뿌리 내리고 있는 죄의 성향은 인간이 아직 유혹에 대항해서 투쟁할 때에도 더 이상 악한 행위를 못할 만큼의 엄청난 죄스런 상태의 노예로 인간을 전락시켜 버린다는 것은 분명하다. 죄스런 행위들의 숫자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아주 근본 질문일 것이다 (고백성사의 측면에서): 즉 전체적인 성장, 혹은 완전한 타락이란 항상 가능한 것인가? 

 

2.4. 태만의 죄와 적극성의 죄 

 

악에 거스르기 위한 적극성의 죄는 하느님 나라와 개인의 성숙에 있어서, 반드시 완성되어야 하고 또 될 수 있는 선에 대해 부정을 하는 많은 죄들이 갖는 위험처럼 그다지 큰 위험을 끼치지 않는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잘 정의된 의무들의 수용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은총의 차원에서의 생활을 위한 근본 선택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도움을 필요로하는 이웃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 선을 추구하기 위해서 현재 주어진 모든 에너지와 기회를 은혜롭게 사용한다는 의미이다. 적극성의 죄에 대해서만 의식적으로 염려하고 있는 사람은 악의 힘을 결코 극복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태만의 중대한 죄들 중에는 선한 것, 참된 것,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지 않는 부주의가 있으며, 게으름과 도피 (이는 타락된 세상에 항상 남아있는 어떤 힘의 근본 원인이 된다)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부주의가 있다. 예외적으로 어떤 금지와 한계를 모아 놓은, 죄들의 한 목록을 작성하는 것은 죄에 대해서 말하는 것에 대해 하나의 죄스런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방법은 구원의 길에서 인간은 제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의 척도에 따라서 성숙하기를 거부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 것은 중죄들 중의 하나이다. 

 

2.5. 마음의 죄와 행위의 죄 

 

성서적 윤리는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마음의 순수함과 감정과 사고, 원의, 의도 그리고 동기의 중요성에 대해서 많이 강조한다. 모든 악한 행위는 인간의 마음 안에 잠재해 있는 무질서에서부터 나온다. 전적으로 내적인 죄가 있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내적인 죄들은 모든 종류의 악한 열매를 맺는 악한 나무와도 같다는 점이다. 내적, 혹은 마음의 죄의 기초가 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나쁜 일들의 주변을 항상 맴도는 상상이나 생각으로써 갖는 마음의 즐거움. 더 방심할 수 없는 것은 죄를 범할 기회를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아까와하거나 이미 행해진 악에 대해서 내적인 즐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간음을 범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 것에 대해 아쉬워하는 것이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들, 즐거움 혹은 아쉬워하는 것은 회개하지 않는 마음을 전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2) 실행하기 어려운 어떤 죄스런 행위에 대한 악한 원의.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단순히 그 사람에게 그 악을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인 경우를 말한다. 이러한 경우를 가리켜 악에 대한 '비효과적 원의: 조건적 원의'라고 칭한다. 

 

(3) 악한 의도. 악을 행하기 위한 실제적인 결심. 비록 외적인 여건이 그 악한 행위를 방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를 가리켜 '효과적 원의: 절대적 원의'라고 칭한다. 

 

이러한 모든 내적인 죄들은 그것들과 관련되는 모든 외적 행위와 동일한 종류의 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항상 동일한 등급의 악은 아니다 (마태 5,28) 참조. 만일 어떤 사람이 이러한 내적 행위의 죄스러움에 대한 명확한 의식을 가지지 않는다면 이는 윤리적, 심리적 미성숙의 표징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죄스런 행위 안에서 자주 긍정적인 면 혹은 긍정적 가치까지도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에 가령 어떤 사람이 내적으로 악에 동의하지 않는 한, 내면 안에 자리잡고 있는 선의 영역을 더 크게 확대시키는 것은 정당한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일 어떤 미혼모가 아기를 가진 것에 대해서 행복을 느낄 때, 이는 그녀가 꼭 죄를 범했다는 것에 대해 꼭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죄가 이미 이루어진 후에, 그녀는 그녀 자신의 책임감을 드러내 보인 것에 대해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아기와 그녀의 모성애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모든 선을 통해서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것이다. 

 

 

3. 死罪와 輕罪 

 

3.1. 모든 중대한 죄는 사죄인가? 

 

사도들의 설교와 초대교회의 윤리적 가르침과 함께 지난 세기의 윤리신학의 역사를 참고한다면 어떤 것이 사죄가 되고, 또 어떤 것이 경죄가 되는가를 규정하기 위한 노력이 너무 과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성서와 敎父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을 격리시킬 수 있었던 죄들의 위험을 거슬러 투쟁하는데에 큰 역점을 두었다. 그러나 고백성사가 실천적인 형태로 정착되자마자 많은 윤리학자들과 사색가들의 사고 안에 사죄와 경죄 사이의 경계를 정확하게 결정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강조점과 전망의 변화는 어떤 결정적인 시기에 교회의 자의식이라는 빛과 문화의 흐름 안에서 가치를 가져야만 한다. 세속을 주시하는 모든 것에 대한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교회의 권한을 엄격하게 선언하던 어떤 교회에서의 사죄 혹은 경죄에 대한 질문은 "조작된 시각 하에서의 지식"에 대한 권한 아래로 예속되곤 한다. 

 

엄격주의자들이 경죄들은 중죄도 심각한 죄도 될 수 없다는 선입견을 가지면서 모든 重罪를 사죄로 규정지었을 때 실상 그들이 가져다 준 혼란은 엄청났었다. 상황은 결국 가톨릭 교회의 커다른 부분을 차지하면서 교회의 엄청난 혼란을 가져다 준 얀세니즘적 엄격주의자들과의 충돌과 함께 더욱 악화 되었었으며, 교회 개혁파들이 맞게된 상황과도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엄격주의에로의 복귀는 인류의 대부분은 영원한 단죄에로 처벌받았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몇몇 사람만이 선에로 예정 되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선을 상실했다는 하나의 神的 규정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지지하는 것을 의미했었던 것이다. 칼빈은 그 당시 엄격주의 신학자들의 가르침에 동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교하곤 했었다: "모든 죄는 사죄이다. 왜냐하면 필연적으로 하느님의 분노를 불러 일으키는, 하느님의 의지를 거스르는 하나의 반역이기 때문이다". 그는 만일 하느님께서 이러한 죄들을 용서하신다면 그분은 그분의 자비 때문에 미리 예정된 사람들을 용서하시는 것이지, 죄 자체의 가벼운 본성 때문에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곤 했었다. 그리고 만일 하느님께서 영원한 처벌에로 미리 예정된 사람들을 벌하신다면 그분은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이는 분명 하느님께 대해서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 없는 하나의 헛된 망상일 뿐이다. 칼비니스트들에게든 가톨릭 신자들에게든 간에 죄에 대한 엄격주의적 개념은 상상할 수 없는 충격과 혼란을 야기 시켰으며, 모든이에게 사랑이 되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흐리게 만들어 놓고만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몇몇 무신론자들이 주장하듯이 만일 어떤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우리가 그 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보다도 훨씬 더 위대하신 분일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하는 도전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사죄와 경죄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에 대해 다시 한 번 숙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세속주의와 무신론 이외에도 다른 많은 이유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새로운 빛의 조명 하에 다시 한 번 생각하도록 우리들을 도와주고 인도한다. 

 

근본 선택보다도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심리학적 지성의 전망 안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 필요할런지도 모른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표현된 교회에 대한 자의식은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왜냐하면 공의회가 표현한 교회는 "구원의 전망 안에서의 지식"이라는 전망 하에서의 자기 모습, 그리고 현대 세계를 위해 살아 움직이는 복음으로서의 자기 모습을 더욱 분명하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새로운 비판적 세대 앞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으면서 교회는 자신의 실천적 모습 안에서, 자신을 통해 드러나는 가르침들과 구조 안에서 자신의 모습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또한 살아 계시고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달한다. 

 

3.2. 성서에 나타난 죄의 등급 

 

신약성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성서도 자주 죄들도 어떤 등급을 가지고 있다고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이는 고백되어져야 하는 죄들 (사죄)와 고백될 수 있는 죄들(경죄) 사이의 어떤 구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서가 죄에 대해서 말할 때, 그 내용은 항상 회개하도록 촉구하는 내용이거나, 혹은 전적, 부분적 소외로부터 벗어나라고 촉구하는 내용이다. 

 

회개에로의 부르심은 특별히 이스라엘에게 긴박하게 요구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계약과 그 계약의 법, 그리고 선과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다른 많은 표지들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죄들은 하느님 자비의 여러 표지들도, 또 그분의 거룩하심에 대한 어떤 지식도 수용하지 못한 이교도들의 죄들 보다도 더 분명한 것이다. 

 

모든 죄들 중에서 가장 중대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 사랑의 충만한 顯現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계약을 거부하는 이스라엘로부터 범해지는 죄이다. 이러한 중대한 죄를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장엄하게 소명을 받고 신앙으로부터 조명되어진 후에 다시 그리스도와 격리된 그리스도인들이 범하는 전률할만한 죄와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진리의 지식을 덩은 후에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다면 죄를 위한 제사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심판을 기다리는 두려움과 반대자들을 삼킬 맹렬한 불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모세의 율법을 거슬렀다면 자비를 얻지 못하고 두세 증인의 증언으로 죽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계약의 피를 속되게 다루고, 은총의 영을 무례하게 대한 사람은 얼마나 더 엄한 벌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히브 10,26-29). 성서의 이 텍스트는 특별히 그리스도를 통해 분명하고도 확고한 근본 선택을 한 다음에 그분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멀리 떨어져 나간 사람들을 겨냥하는 말이다. 

 

그러나 배교 뿐만 아니라 고백한 신앙을 끊임없이 거부하는 삶도 역시 분명히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하나의 근본 선택인 것이다. 단순히 입으로만 하느님을 섬기면서 하느님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결국에는 가혹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범법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하고 선언할 것입니다 (??????)"(마태 7,23). 여기에 또 anomia의 죄와 같은 종류라고 할 수 있는 "이단적인 정설"로서의 죄인 바리새이들의 죄가 있다: "이처럼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이지만 속으로는 위선과 범법이 가득 차 있구나" (마태 23,28). 이와같은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의 고유한 삶에 대한 근본 선택으로써 계약의 법을 멀리하는 사람이며, 또한 하느님의 나라를 거슬러 반그리스도적인 것에 대한 절대적인 선택에 기꺼이 자기 자신을 맡기는 사람이다 (마태 24,12 참조). 

 

요한계 문헌에서 anomia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길을 결정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이웃에 대한 불의와 사랑의 결핍으로 드러난다 (1요한 3,4 참조). 그러나 사도 요한은 참된 신자는 anomia의 죄를 결코 범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요한 1서의 이러한 텍스트에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소결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즉 죄에 떨어진 후일지라도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찾아나서고 사랑하는 신자들의 죄는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다. 또 한편 하느님을 모르는, 하느님으로부터 완전하게 자기 자신을 소외시킨 죄인들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 면전에서 자기 자신이 죄인이며, 용서 받아야 한다고 겸손하게 고백하면서 불경의 죄를 전혀 범하지 않는 신자들도 있다.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우리 안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한다면 그분은 진실하시고 의로우시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온갖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1요한 1,8-10). 

 

신약성서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요한은 낙관적으로 언급한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이는 누구나 죄를 짓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분이 그를 지켜 주시니 악한 자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1요한 5,18). 신자들은 하느님께서는 자신들의 죄와 연약함을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라고 매일 매순간 고백하고 기도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범하는 죄는 비록 그 죄들이 그들을 그리스도로부터 완전하게 격리시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다. "누가 혹시 자기 형제가 죽을 정도는 아닌 죄를 짓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께 청하시오.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 그 죽을 죄는 짓지 않은 이들에게 말입니다. 그러나 죽을 죄도 있습니다. 그런 죄에 대해서 청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불의는 죄입니다. 그러나 죽을 정도는 아닌 죄가 있습니다" (1요한 5,16-17). 

 

그리스도의 사랑 위에서만 기초될 수 있는 그리스도적 낙관론을 결코 감소시키지 않으면서, 야고보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 우리 모두가 많은 실수를 범합니다. 누가 말에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그는 완전한 사람이라 온 몸도 다스릴 줄 압니다" (야고 3,2). 우리 모두는 용서하고 치유하는 우리 상호간의 도움이 필요하며, 또한 매일같이 기도하는 거룩한 속죄자들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진 이들을 용서하듯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마태 6,12; 루가 11,4). 

 

죄의 등급 중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죄 중에서 성령을 거스르는 죄가 있는데, 이 죄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라고 성서는 말한다.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마음은 그리스도의 은총 앞에서조차 회개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회복 불가능한 무딘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죄를 짓고 신성모독을 해도 다 용서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에 대한 모독은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자를 거슬러 말을 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마태 12,31-33; 마르 3,28-29; 루가 12,10; 1요한 5,16-18 참조). 또 하나의 으뜸이 되는 죄는 매일 매일의 무기력함이다. 이는 두가지의 극단적인 것 사이에서 분명 주목할만한 죄의 등급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근친상간과도 같은 매우 중대한 죄들도 있다. 이러한 죄들은 특별히 스캔들이 되는 죄들이며, 동시에 교회의 지도자들로부터 엄한 질책을 받아 당연한 죄들이다: "여러분 가운데 음행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고 또 그것은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없을 정도의 음행으로서 어떤 이는 심지어 아버지의 처를 데리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여전히 교만합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통탄해야 하고, 그래서 이런 짓을 행하는 자가 여러분 가운데서 제거되도록 해야 마땅하지 않았겠습니까? 나는 비록 몸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영으로는 거기에 가 있습니다. 나는 마치 내가 거기에 가 있는 것처럼 그런 짓을 저지른 자를 이미 심판하였읍니다" (1고린 5,1-3). 또한 아마도 사죄는 아닐지라도 "형제적 충고" (갈라 6,1; 1요한 5,16 참조)가 요구되는 여타의 죄들도 있다. 

 

성서에서는 사죄와 경죄 사이의 한계를 구분할 수 있는 어떤 양적인 기준을 나타내는 최소한의 지시도 찾아볼 수 없다. 성서적 시각은 항상 회개에로의 초대이다. 혹은 어두움에서부터 빛에로의 총체적인 회개에 기초하거나 최소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질 위험을 포함하는 심각한 상태에서부터의 회개, 혹은 거룩한 속죄자들, 즉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끊임없는 회개에로의 부르심이다. 성서는 모든 중죄를 사죄로 간주해야 한다고 하지 않을 뿐더러, 또한 모든 경죄를 중죄가 아니라고 간주하지도 않는다. 죄들을 사죄, 경죄라는 두가지 범주만으로 등급을 매기는 것은 성서적이 아니다. 경죄들이 결코 중대한 죄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죽음만이 중대한 것처럼 생각해서 모든 상처나 질병이 중대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비합리적이 아닐까? 

 

3.3. 신학적 반성 

 

만일 사죄와 경죄 사이의 知性的인 구분을 위해 더 새롭게 발전된 인간학적 전망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교회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무엇보다도 회개에 관한 올바른 설교의 의무를 부과하며, 또한 고백성사의 규범에 대한 전반적이고도 긴급한 개혁을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근본 시각은 항상 회개는 가능하고, 따라서 필요하다는 주님의 기쁜 소식의 효과적인 선포를 전제로 해야만 한다. 

 

어떤 사람이 회개에로의 요청을 스스로부터 받았다면, 그는 자신이 저지른 중대한 죄가 사죄가 되는지 혹은 그보다 경한 죄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다. 이미 우리가 강조했듯이 어떤 매우 중대한 죄들의 경우, 즉 배교, 살인, 낙태, 공개된 간음 등의 경우 고대 교회는 이러한 죄들에 대해서 긴 시간의 법적 보속을 부여했었다. 그러한 보속의 부여에 관해 첫번째 기준이 되었던 것은 이미 드러난 스캔들의 중대성이었으며, 따라서 하나의 공적 보속이 필요했던 것이다. 고대 교회는 법적 보속에 처해진 죄들만을 가리켜 사죄라고 선언하지는 않았었다. 고대 교회는 항상 하느님의 나라를 반대하는 죄들에 대해서는 성서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항상 강조했었으며 (마태 25,41-46; 1고린 6,9-10; 갈라 5,19-21; 로마 1,24-32; 13,13; 1베드 4,3; 2베드 2,12-22; 사도 21,27; 22,15 참조), 이는 단순히 사죄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를 구분할 척도로 삼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니었고, 단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 항상 머물기를 바란다면 그들 마음 안에서, 그리고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모든 것들에 대항해서 확고하고도 중단없는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약 4세기 경, 법적 보속 제도가 쇠퇴했었을 때,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겔틱 교회에서는 또 하나의 새로운 형태의 보속이 나타났으며, 이는 중부 및 서부 유럽 전체에 급속도로 확산되기 시작 하였다. 사죄경이 일생에 단 한 번 밖에 주어질 수 없었던 고대의 규범은 폐지가 되었으며, 그 당시부터는 진정한 회개와 보속을 할 의도가 있는 경우에는 항상 화해의 성사를 받을 수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제에게 고백해야만 했었던 죄들의 목록은 현저하게 많이 늘어나게 되었으며, 고백해야 하는 죄들이 비록 사죄가 아니라 하더라도 고백을 해야만 하게 되었던 것이다. 목록은 명확하고도 완전 했었으며, 또한 각각의 죄와 관련된 보속의 정도에 따라 죄의 등급이 매겨졌었던 것이다. 당시의 이러한 모습은 주관적인 죄가 아닌 객관적인 위반에 대해 부과된 죄를 강조했었던 것이기 때문에 사죄와 경죄 사이의 경계 구분에 대한 문제를 다루기에는 그 필요성이 절박하지는 않았으며, 각자는 성사적인 고백 안에서 사제에게 드러내 보여야만 했던 죄들의 목록이 사죄인지 혹은 그보다 덜 한 죄인지를 잘 알 수 있었던 것이다. 

 

8세기와 9세기, 고백성사에 대한 아이리쉬-스코티쉬 실천 방법이 대륙의 대부분의 지역에 퍼져 나가면서 이러한 실천방법은 카를로스 막뉴스 (Carlo Magno: 742-814)의 영향아래 전개된 신학적 개혁 시대에 이미 명확하게 드러났었던 하나의 경향인 내면성의 문제로 발전되어 계속 이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경향과 함께 특별히 Abelardo (1079-1142)와 같은 신학자는 죄의 양적인 면과 보속 행위에 대한 순순한 의미에서의 외적 기준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주장을 한다. 

 

과거의 이러한 사상과 함께 보속에 관한 신학적 특징에 대한 작업은 실천해야 할 객관적 보속들의 실천 문제에 많은 혼란을 주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마음의 회개를 요청하게 된다. 마음의 근본 선택에 관해 커다란 의미를 부여했던 토마스 아퀴나스, 보나벤투라나 그밖의 많은 위대한 신학자들의 시각은 인간 마음의 내면적 행위에 대한 분별력 보다는 하나의 정확한 외적 조정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교회법 학자들의 접근 방법에 더 긴밀하게 밀착되어 있었다. 고백성사와 그 정당성에 관한 트렌트 공의회의 규정들은 신학자들의 숱한 노고의 한 결실이며, 또한 그 기본적인 전망으로서 내면적 신앙으로부터 나타나게 되는 전적인 소외로부터의 근본적이고도 끊임없는 회개에 관한 교회의 시각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트렌트 공의회는 하나의 건전한 발전을 위한 모든 기회를 신학에 제공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율법주의와 엄격주의 그리고 후기 얀세니즘과의 충돌과, 대상화의 으뜸 수단으로서의 양적인 면만을 고려하는 경험주의적 학문의 영향 17-18세기의 윤리신학자들은 단순히 객관적이고 양적인 면에서의 결정에만 치중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이 죄와 보속에 관한 윤리신학의 역사적 발전을 인식하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최근의 전통에 대한 변화를 시도해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죄에 대해 너무 양적인 면에만 치중하는 것에 대한 반론은 실상 지난 세기의 보수주의자들 보다도 윤리신학자들 사이에서 드물지 않게 제기 되었던 것이다. 

 

중세의 위대한 신학자들에게서는 결코 죄의 양적인 면에 대한 강조를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들은 하느님의 시각에서부터 문제들을 접근했었기 때문에, 실상 그들에게는 하느님께서는 어떤 정해진 일정한 등급에서부터 차례대로 당신의 의도와 계명들을 엄격하게 적용하신다는 것은 허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경죄의 역사에 관한 연구에 아주 커다란 공헌을 한 신학자 중의 한사람인 Arthur Landgraf는 성 베르나르도 이후에 "스콜라학파의 어느 누구도 감히 하느님의 계명에 반대되는 모든 것은 중대한 죄를 구성한다는 기본원리를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라고 확신한다. 스콜라학파의 신학자들은 얼마만큼의 많은 횟수이든지 간에 한 계명에 대한 명확하고도 자유로운 거부는 원칙적으로 하느님의 의도에 대한 전적인 거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가를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위와 같은 원리는 경죄의 가능성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그들을 아주 어렵게 만들었던 것이다. 몇몇 학자들은 경죄는 어떤 충고를 소홀히 하는 것으로로 가능해지는 반면에 어떤 계명을 위반하는 것은 항상 사죄를 구성한다고 가르치면서 Duns Scotus를 따랐다. 그러나 중세의 위대한 신학자들중 어느누구도, 이미 우리가 살펴 보았듯이 "각각의 죄는 사죄이다. 왜냐하면 이는 필연적으로 하느님의 분노를 불러 일으키는 하느님의 의도를 거스르는 하나의 반역이기 때문"이라고 가르치던 캘빈이나 그외의 엄격주의자들의 주장을 결론으로 이끌어 내는 신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중세의 여러 신학자들이나 캘빈의 근본 의도는 하느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각자는 온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완전한 회개에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차근차근 가르치려는데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죄에 대한 양적인 사고는 즉시 실천에 옮겨지지 않았으며, 율법주의적인 엄격주의는 신학적 전망을 흐리게 만들어 놓고만 결과가 되었다. 

 

캘빈을 지지하던 한 가톨릭 신학자였던 Giovanni Major는 가르치기를 어떤 부자의 창고에서 밀 다섯 이삭을 훔치는 것은 죄가 아니고, 열 개의 이삭까지는 경죄이며, 그 이상은 사죄라는 것이다. 수많은 윤리신학자들은 자그마한 양적인 차이가 사죄와 경죄 사이의 질적인 차이를 어떻게 설득력있게 설명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숱한 노력을 하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 Claudio Lacrox의 예가 자주 사용되곤 했었다. 즉 그는 설명하기를 알코올의 한 방울 한 방울이 한 인간을 차츰차츰 만취하게 만들 수 있는 것처럼, 그 알코올 한 방울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사죄를 짓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수학적 공식이 인간의 위대함과 연약함에 대한 인식보다 우위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연구를 위한 출발점은 스콜라학파의 위대한 신학자들의 시각이다. 즉, 하느님의 뜻은 그분의 전체성 안에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불완전성과 심리학적 반성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인간의 행동과 행위가 그 전체성 안에서 인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죄는 단지 양심과 자유의 깊은 내면에서부터 드러나게 되는 하나의 근본 선택이거나 혹은 인간과 그의 자유를 극심하게 해치면서 잘못 사용되는 남용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죄스런 결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근본 선택을 통해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며, 자기 고유의 근본 실존 안에서 자기 자신을 결정짓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행위의 대상이 지니는 중요성, 혹은 질료의 경중을 부정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행위의 경중, 혹은 질료의 중대함은 한 인간의 인식력과 자유의 실제적인 발전과 비례하여 의미를 갖게 되며, 또한 우리가 근본 선택이라고 부르는 자기 자신의 내면적 결정의 척도 안에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어디에서부터 사죄이고 또 어디까지가 경죄인지에 대한 양적인 면에서의 정확한 구분을 짓는다는 것은 가능하지가 않다. 인간의 심리학적 구조와 윤리적 및 종교적 경향 안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고, 또한 상황에 따라서도 큰 차이를 고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죄의 가능성에 대한 최종적 근거라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에 대한 해결은 단지 사목적 해결 방법 밖에 없다고 본다. 해결은 은총의 법을 충만하게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이 은총의 법 안에서 탈랜트와 카리스마, 그리고 현재라는 기회와 이웃의 요구가 서로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라도 하느님의 뜻에 대해 결코 수학적인 계산을 하려는 유혹에 떨어져서는 안될 것이며, 결국 이는 사죄로부터 피해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책임감에 대해서 민감하게 만들어 주는 윤리적 가르침과 심리학에 대한 보다 나은 지식으로써 완전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비록 회개에로의 요청을 받은 사람의 깊은 내면에서부터 나타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방법이 결코 자기 자신을 엄격주의에로 이끌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의 성숙과 주위의 많은 영향, 즉 인간 삶의 근본 선택들을 완성하는 장소인 내면에서부터 나타난다고 할 수 없는 수많은 죄스런 행위들이 설명되는 갖가지 상황에서의 영향들은 점진성을 띠고 있다는 점을 항상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 행동의 빛을 향하는 더 나은 근본 선택은 미성년자 혹은 7-8세난 아이들이 범했다고 하는 사죄에 대해서 너무 쉽게 언급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경죄가 마치 "중대하지 않은" 죄로서 정의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이외에도 발달 심리학은 幼兒期와 靑年期가 양심의 성숙을 향한 성장기로서 매우 중요한 시기가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3.4. 공의회 이전의 교리교육 형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사용되는 여러 종류의 교리서들은 어떤 사람이 사죄를 범했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거의 동일한 형태의 내용들을 담고 있다: 즉 만일 어떤 사람이 확실한 인식력을 가지고, 의지의 충만한 자유로써 아주 중대한 질료 안에서 하느님의 법을 위반했다면 그의 죄는 사죄라는 것이다. 만일 어떠 사람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생각되는 질료 안에서 하느님의 법을 위반했다면, 혹은 중대한 질료 안에서이기는 하지만 확실한 인식력, 혹은 의지의 충분한 자유로써가 아닌 상태에서 죄를 범했다면 그는 단지 하나의 경죄를 범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분명히 양적인 면에서 중대하지 않은 질료로부터 중대한 질료를 따로 분리시키는 어떤 분명한 선을 긋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러한 형태는 비록 양적으로는 작은 차이라 하더라도 그차이가 사죄와 경죄 사이에 존재하는 질적으로는 전적으로 다른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는 이 둘이 어떻게 종합을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한 어떤 지침도 찾아볼 수 없으며, 또한 어떻게 인식력과 자유라는 두 요소들이 경죄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가도 알려주고 있지 않다. 또한 행위의 대상과 행위 자체의 불완전성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도 제시되어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심리학적 혹은 문화적 발전을 고려하고 있지도 않다. 따라서 이 형태는 방임주의 혹은 하나의 극단적인 엄격주의에로 발전할 가능성마저 지니고 있다고 본다. 주인으로부터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최소한의 법을 지키면서 아무런 주저없이 네 달란트를 땅 속에 묻을 수 있을 것이지만 한 달란트보다 적게 받은 사람은, 즉 사죄와 경죄 사이의 경계선을 구분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그러한 죄의 범주에서부터 벗어날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오직 절망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교리서는 어떤 오해를 불러 일으킬 위험을 감수 하면서까지 독자들을 생각하지는 않으며, 그 책을 읽는 사람에게 수많은 변명을 늘어놓기까지 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완전한 인식력, 완전한 분별력, 그리고 완전한 자유를 찾아 볼 수 있겠는가? 우리가 교리서에서 기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은 조화를 갖춘 인식력, 균형있는 분별력과 자유에 대한 좀 더 예리한 형태를 갖추었으면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죄에 대한 벌에 있어서 조화있는 자유와 인식작용의 능력에 대해 비중있게 다루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간과되었으며, 그이유는 그 형태들이 단순히 "조정의 시각"에서 안다는 것의 수준에서만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더욱 깊이 안다는 것은 "구원의 관점"에서 아는 것을 의미하는데 바로 이 구원의 관점이 인간의 손에 의해 조정되면서 너무나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지나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3.5. 전류적(全類的) 사죄 

 

사죄와 경죄 사이의 구분에 대한 양적인 측면에서의 어떤 기준이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만일 그 기준이 확정된다면 그러한 결정의 형태가 인간의 행위가 지니고 있는 가치들의 전체 대상에 적용될 수 있는지의 의문이 제기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질료의 작은 한 부분이라도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지난 세기의 많은 윤리신학자들은 사죄, 혹은 최악의 상태에서의 법이나 덕의 위반이라고 추정되는 영역은 항상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고 가르치곤 했었다. 곧 이는 "대상을 선택하는 것 자체가 사죄"라는 가르침이다. 즉 이 표현이 의미하는 것은 사죄란 죄의 어떠한 구분이나 범위에도 관계없이 인간의 행위의 대상 자체가 큰 악일 경우에 그 행위는 항상 사죄라는 것이다. 

 

절대군주들과 교회의 권위들이 어떤 교조적인 가르침들을 이렇듯이 형식적인 방법을 통해서 널리 확산시키고, 또 신자 각 개인을 그러한 틀 안에서 완전하게 지배해야 한다는 생각에 푹 빠져 있었던 시대의 많은 윤리신학자들은 가장 완전한 형식에 관련되는 어떠한 작은 의심이라도 - 생각이나 말, 혹은 편견적인 실천이든 중요하지 않다 - 결코 사죄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 길들여져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하느님의 주요 계명들 - 자비, 정의, 평화, 인간 존엄성에 대한 존중 등 -과 관련되는 것들의 위반에 대해 양적인 면에서의 기준을 용인했었던 것이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죄에 대한 어떠한 양적인 계산도 분명 인간을 비인간화 시키는 것이며, 오늘날의 사고방식으로는 절대로 수용할 수 없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실상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 및 윤리적 문제들 안에서 모든 수학적인 접근에 항상 신경과민의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무질서의 내면에서 볼 수 있는 약간의 양적인 차이가 지옥과 연옥의 차이라는 엄청난 질적인 차이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한다면 하느님은 몰인정하신 분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신앙을 거스르는 가장 확실한 유혹에로 우리들을 이끌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 현대의 윤리신학은 윤리신학의 몇몇 분야에서 모든 실수가 사죄를 구성하고, 또 어떤 분야에서는 사죄는 단지 결정적인 무질서에로의 시작이라는 생각을 가져다 준 전통적인 윤리신학의 범주를 다시 바라보기 위하여 조화된 노력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지각있는 윤리신학자들은 질료의 경중에 관한 죄의 범주는 단지 지침만이 될 수 있으며, 하나의 '위험'이라는 경고로서 이해될 수 있지만, 그것들이 재판관으로서의 고백신부에게, 신자들의 양심을 지배하기 위한 기준으로서 사용된다면 충분한 의미를 가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미사는 예언자적인 관점에서 볼 때, 모든 가치들, 의무, 그리고 중요한 덕, 특별히 사회정의, 평화, 치유하는 용서의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만일 그 미사가 어떤 교조적인 문제에만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면 현대를 사는 인간들에게 어떠한 감동도 주지 못할 것이다. 

 

이외에도 만일 어떤 사람이 역사적 인간에 대한 어떤 인식과 그 삶의 실제적 상황을 잘 알고 있다면, 그리고 시대의 징표를 잘 알아볼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무언가에 대해 예언자적 안목을 지닐 수 있을 것이고, 또 그러한 안목으로 무언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회개를 자극하고, 또 교만한 양심을 꾸짖기를 원하는 윤리신학 안에서는 분명 어떤 추상적인 분류를 위한 공간, 인간의 죄에 대한 수학공식과도 같은 정확한 척도를 위한 공간, 혹은 어느 시대에는 항상 사죄 만을 강조했던 엄격주의를 위한 공간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인간의 전체 영역에서부터 나오는 사죄'라는 사죄에 대한 과거의 전통적 개념은 이제 더 이상 확고부동한 전통에 속하지 않는 것이며, 그 의미도 변화되었다는 점을 다시 발견해야 할 것이다. 

 

3.6. 육계를 거스르는 모든 죄는 사죄인가? 

 

지난 세기에 신자들은 어떤 특별한 강요로 인해 많은 괴롭힘을 당했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상 많은 윤리신학자들과 그들로 구성된 종교재판은 생각이나 말, 그리고 행동으로써 육계를 거스르는 모든 죄들은 대상 그 자체로 사죄 (전류적 사죄)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비단 육계에 관한 가르침 뿐만이 아니라 이와 관련된 다른 여러 분야에서도 이와 비슷한 식의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기본적인 근거가 되던 것들 중의 하나는 정결덕은 인간 생활의 聖性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과거의 많은 윤리신학자들은 인간의 精子는 "하느님께 속한 그 무엇이다. 왜냐하면 정자는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의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확신했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모든 탐색의 죄는 살인과 비슷한 죄라는 생각까지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즉 "이는 인간의 출산행위에 비추어 보아서 이를 분명히 거스르는 무질서이면서, 인간의 살아 움직이는 생명에서의 일종의 이탈"이라는 것이다. 사목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가르침은 하나의 교육학적 훈계로서 이해되었던 것이다. 즉 사람은 가끔 충분한 사고와 자유로써도 이기적인 마음으로 성적 혹은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지만, 만일 그가 사려깊은 의도를 계속 지니고 있다면 그가 추구할 수도 있는 무질서와 모든 유혹에 대해 스스로에게 책임이 돌아간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Kleber의 날카로운 관찰은 이러한 가르침이 다른 의미들을 전달하고 있으며, 아주 자주 교회 내에서 높은 명성을 지니고 있는 여러 신학자들로부터 강한 반대를 받았다는 점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가르침이 교회의 공적인 가르침이라거나 하나의 아주 확고한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1975년 12월 29일 性倫理에 관한 몇가지 질문에 대한 교황청 신앙교리성성에서의 선언은 질료의 일부분이 객관적인 측면에서 동의될 수 없다고 가르칠 뿐만 아니라, 반대의 그 어떤 특별한 표징도 찾아 볼 수 없다면, 각자는 주관적으로도 사죄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해야만 한다고 가르치면서 이러한 엄격주의적인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면까지도 첨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헌은 하나의 공정한 판단을 위하여 인간 학문들이 많은 기여를 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이 분야에서는 선한의도의 사고와 선한의도의 주제, 그리고 사목적 감각이라는 특별한 권위가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의 윤리신학자들은 6계명의 주제 역시 기타의 다른 계명들이 지니는 규범과 정확하게 같은 주제라는 점에 대해서 의견이 일치한다. 성서적 관점에서 볼 때, 형제적 사랑, 정의, 그리고 평화가 지니고 있는 질료가 상대적으로 더 가벼운 것이고, 그 반면에 정결덕의 분야에서의 모든 죄는 사죄라고 단정짓는다는 것은 사실상 받아들이기가 매우 힘들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공통된 노력으로는 다음의 두가지 다른 방향을 볼 수 있는데, 그렇지만 이 두가지 방향은 결국 거의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1) 그 하나는 출발점으로서 하느님의 어떤 계명을 거스르는 완전하게 숙고되고 자유로운 모든 행위는 우선적으로 사죄를 구성하며, 그 행위의 불완전성의 이유로서는 예외적으로 경죄가 될 수도 있다는 중세의 교의를 취한다. 이제 유계명을 포함한 윤리신학의 모든 영역에 이와 동일한 원리를 꼭같이 적용해 보자. 먼저 우리는 어느 누구도 윤리적으로 죄의 위험에 스스로를 내맡겨 버리지 않고서는 결코 하느님의 계명을 악착같이 위반할 수는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때에 우리는 근본선택의 조건과 부합되는 자유롭고도 숙고된 결정이 어떠한 결정이라는 것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우리의 행위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최후 목적으로서의 하느님을 진지하게 찾고 있는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 그 사람 안에 선한 의도의 내면적인 성향이 계속 자리잡고 있을 때 까지는 그가 사죄를 범했다고 추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각각의 행위들은 중대하고, 또 무거울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이 어떤 악한 습관을 극복하기 위해 투쟁하고, 또 즉시, 혹은 거의 즉시 죄를 지은 후에 진실되게 뉘우친다면 그 행위들이 사죄를 구성하지는 않는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결덕이라는 질료 안에서도 특별히 복합적인 면에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즉 생물학적 성숙에 관계되는 것인지 혹은 계속되는 태만에 의한 것인지도 구분되어야할 것이다. 

 

심리학적인 면에서 볼 때, 평범한 한 그리스도인이 자기 애인에 대해서 가령 생각의 성적 쾌락을 가진다거나 혹은 키스 등으로써 자신의 약혼자에 대한 일종의 성적 쾌락을 느낀다고 가정을 할 때, 그가 사죄를 범했다고 추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그가 의도하는 바대로, 선한 의도로써 정결덕을 위하여 투쟁하는 한에는 결코 사죄를 범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2) 전통적인 윤리신학 교과서들의 대부분의 접근 방법은 그 출발점으로써 중대한 질료와 상대적으로 가벼운 질료 사이의 구분을 두고 있다. 하느님의 어떤 계명을 거슬러 단순히 경죄를 범하게 되는 가능성은 행위의 불완전성에서부터 성립되는 것이 유일한 경우라는 것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어떤 경우에는 안내 지침으로서 중대한 질료와 가벼운 질료 사이의 구분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다른 계명에서도 그대로 수용될 수 있다면, 아마도 6계명에도 적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가벼운 질료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인간의 심리적 및 영성적 발전과의 관계를 통해서 인간을 보는 것이며, 또한 성장의 필요성을 전제하면서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한 확실한 분야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가벼운 질료로서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최종적인 회개와 성장 후에는 분명히 더 엄격하게 다루어지게 될 것이다. 

 

실천적인 면에서 볼 때에, 이 둘은 서로 다른 출발점이라 하더라도, 이 두가지 출발점이 이끌어내는 결과들은 비슷하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되어지는 질료들에 관한 결정들 안에서 자유의 완성으로 범해진 결핍일 때, 결론은 만일 일반적으로 선한 의도를 드러내 보이는 행위의 주체가 악한 의도로써 행동하지 않았다면, 비록 그가 유혹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 그렇지만 하느님을 모독하는 상태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로 하여금 사죄를 범하지는 않았다는 희망을 갖게끔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어느 누구도 어떠한 죄라도 결코 중대하지 않으것으로 생각되어 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각자는 모두 그리스도인의 이상적인 규범의 선에서 완전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한다. 

 

만일 이러한 접근 방법이 정결덕의 중요성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하나의 중대한 오류일 것이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모든 계명들을 충실하게 지키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임무를 우리 모두는 지니고 있다는 점에 항상 유의해야만 할 것이다. 참된 성교육과는 달리, 사람들도 하여금 끊임없이 과거에 대한 집착과 또 그럼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사죄를 범했는지 아닌지를 의심하게끔 몰아넣은 엄격주의는 그들에게 내적인 갈등 속에 항상 빠져 있게 하는 위험을 가중시키며, 결국은 끊임없는 유혹과 태만에로 그들을 빠뜨리고 말게 될 것이며, 그들의 참된 자유를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 것이다. 

 

윤리적 가르침은 항상 교육적인 방향을 전제해야만 한다. 정결덕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여 인간의 연약함에서 이와 관련되어 나오는 모든 죄를 사죄라고 아주 단호하게 선언하는 엄격주의와는 달리, 마음과 정신의 평화와 고요함에로 인도하는 하나의 건설적인 접근 방법은 더욱 더 정결덕에로 우리를 잘 인도해 줄 것이다. 만일 모든 것을 사죄로 분류한다면,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참된 영혼을 잃어버리게 되거나 혹은 다음과 같이 질문할 것이다: "이미 나는 하나의 사죄를 범했으니, 어찌 더 극단에까지 나아가지 않으리오?"

 

[이동익 신부님 강의록 / 이동익 신부님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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