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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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윤리]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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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237

양심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은 인간 지성이 지니는 양심에 대해서 매우 훌륭한 텍스트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인간은 양심 속 깊은데서 법을 발견한다. 이 법은 인간이 자신에게 준 법이 아니라 인간이 거기에 복종해야 할 법이다. 이 법의 소리는 언제나 선을 사랑하며 행하고 악은 피하도록 사람을 타이르고, 필요하면 '이것은 행하고 저것은 피하라'고 마음 귀에 들려 준다. 이렇게 하느님이 새겨 주신 법을 인간은 그 마음에 간직하고 있으므로 이 법에 복종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존엄성이며 이 법을 따라 인간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로마 2,14-16 참조). 

 

양심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안방이요 인간이 저 혼자서 하느님과 같이 있는 지성소이며 그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양심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완성되는 그 법을 놀라운 방법으로 밝혀 준다 (마태 22,37-40; 갈라 5,14 참조). 양심에 충실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결합되어 진리를 추구하고 그 진리에 따라서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에서 야기되는 여러가지 윤리 문제들을 해결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른 양심이 우세하면 할수록 개인이나 집단이 맹목적 방종에서 더욱 멀어지고 객관적 윤리기준에 더욱 부합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1. 양심의 개념 

 

1.1. 개념 

 

양심(Conscientia)이라는 개념은 라틴어의 cum(함께)와 scientia, scire (지식, 알다, 지각하다)의 합성어에서 유래된다 (함께 알다). 양심은 인간의 윤리적 능력이며,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내면적 중심이며 성역이라고 할 수 있다. 실상 우리 인간은 우리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을 진정으로 만남으로써만 반사적으로 우리자신과의 참된 만남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우리 자신 안에는 우리를 창조한 말씀의 부르심이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당신과 함께 있도록 우리를 늘 초대하시는 스승의 부르심이 들려온다. 우리의 양심은 이렇듯이 우리를 존재에로 부르신 말씀을 통해서 생동력을 가지며, 우리 인간 생명의 수여자이신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우리를 당신의 제자가 되라고 매 순간 부르시는 그 말씀을 통해서 끊임없이 우리 내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 존재의 심연을 통해서 양심은 우리들의 참된 자아가 그리스도와 일치되게끔 하며, 또한 우리들을 각자의 고유한 이름으로 부르고 계시는 스승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 의탁함으로써만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우리 가자의 고유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준다. 양심의 섬세함과 성실함은 우리를 내외적으로 진리의 성령에로 무장시켜 주시는 스승 그리스도를 신적조명을 통해서 우리 안에 더욱 크게 자라게 해준다. 

 

양심은 비록 자기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양심이 말하는 말은 자기의 것이 아니다. 곧 양심이 하는 말은 모든 사물을 창조하신 말씀, 즉 우리 인간과 함께 지내시기 위하여 육체를 취하신 말씀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양심이라는 은밀한 목소리를 통해서 말씀하시며, 곧 이 양심이란 우리 인간의 전존재를 통하여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우리들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양심은 그 자체로 불꽃이 없는 하나의 초에 불과하다. 이 초는 진리이시며 빛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자신의 진리를 수여 받으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빛을 밝히며, 그리스도의 열을 발하는 것이다. 

 

양심은 진리의 탐구를 통해서 양심의 상호교류 안에서 경험과 반성을 함께 공유하는 촛점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약간의 지식 뿐만 아니라 우리의 경험과 지식 모두를 함께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자유롭게 됨으로써 우리는 서로의 진실된 양심과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시각에서 우리 서로가 서로를 알 수 있을 때,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 서로가 서로의 한 부분임을 인정할 때 우리들의 양심은 충만하게 살아있는 양심이 될 것이며, 또한 창조적인 양심으로 형성 될 수 있을 것이다. 

 

1.2. 성서적 관점에서의 양심 

 

1.2.1. 구약성서 안에서의 양심 

 

구약성서 안에 나타난 양심에 관해서 우리가 연구하기를 원한다면, 다시말해서 '양심'이라는 개념을 지칭하고 있는 히브리적 혹은 희랍적 개념들을 찾아보면서, 그리고 단순히 언어적 연구에만 중점을 두고 '양심'에 대해서 연구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커다란 실망을 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양심을 가리키는 용어인 희랍어 syneidesis (불경한 양심 혹은 악한 양심을 지칭함)는 지혜서 17,10 (악은 원래가 소심해서 제 입으로 자신을 단죄하며 양심의 가책을 몹시 받으면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생각한다)에서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성서는 우리가 양심에 대해서 말할 때 사용하는 실제적 상황을 잘 인식하고 있다. 

 

다른 기타의 문화가 그렇듯이, 히브리적 사고 안에서도 하나의 발전을 찾아 볼 수 있다. 성서 형성시기중 가장 초창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외적이고 객관적인 면에서, 그리고 가끔은 집단적인 측면에서 선과 악의 경험을 바라보곤 했었다. 하느님의 의도는 그들의 전통과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전달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 내부에서 자신들을 부르는 그 어떤 소리, 즉 하느님의 소리를 체험했던 것이다. 내적인 그 어떤 것으로서의 양심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의 위대한 공헌 중의 하나였다. 양심이란 하느님께 충실하도록, 그리고 계약의 백성으로서 충실하도록 불리운 사람의 가장 내면적인 것이며, 이는 인간 자신이 자기 자신을 활짝 열기를 원한다면, 인간의 내면에 자리하여 인간을 인도하는 정신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번 더 인간의 마음에 대한 구약성서의 위대한 시각에 우리의 정신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하느님의 성령으로부터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존재를 부여받으며, 선을 행하도록, 그리고 자유로움 안에서 정직하게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기 위해 불리움을 받았다. 인간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인 인간의 마음은 만일 인간이 자기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따르지 않는다면 손상된 채로 남아있을 것이다. "셈족들에게 있어서 마음은 그들 사상과 원의, 감정, 그리고 또한 윤리적 판단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믿는자들은 "하느님께서는 마음과 정신을 자세히 살피신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또한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성령이 그들의 마음 안에서 자신들을 부른다는 것을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마음은 완성된 행위를 찬미하거나 혹은 비난한다. "내 마음은 이 날 이 때까지 꺼름칙한 날은 하루도 없었네" (욥 27,6). 다윗 왕은 자기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고 과시하기 위하여 병적조사를 실시 한 다음에 그는 양심에 가책을 받는다: "다윗은 병적조사를 하고 나서 양심에 가책을 받았다. '제가 이런 못할 일을 해서 큰 죄를 지었읍니다. 저는 참으로 어리석었읍니다. 야훼여, 이 종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요'" (2사무 24,10). 범죄자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해서 악을 저질렀다는 것을 안다. 여기서는 결코 지적인 앎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마음의 깊은 가책이 관계된다. 비록 카인처럼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들 수 없수 정도가 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이러한 마음의 가책을 통해서 결국 하느님 면전에 여전히 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카인이 야훼께 하소연 하였다. '벌이 너무 무거워서, 저로서는 견디지 못하겠읍니다.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아주 붸아 내시니, 저는 이제 하느님을 뵙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아 다니게 되었읍니다.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창세 4,13-14). 

 

구약성서를 통해서는 사실상 선행적 양심과 후속적 양심에 대한 현대신학자와 심리학자들의 어떠한 연구도 찾아 볼 수 없지만, 사건의 실재는 성서저자들에 의해 명백하게 기술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인간이 악을 저지르고 난 후에 다른 사람이 그 인간을 비난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을 질책한다. 인간의 마음은 또한 그 마음을 조명하고 정의에로 인도하는 성령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일 수도 있다. 만일 마음이 악을 저질렀다면, 성령의 속삭임은 마음으로 하여금 새롭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다정스럽게 부른다. "너희는 가슴이 쓰려 아우성치고 마음이 찢겨 울부짖으리라" (이사 65,14). 시편 저자는 성령으로 충만된 자신의 존재 깊숙한 곳에서부터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그 구원의 기쁨을 나에게 도로 주시고 변치 않는 마음 내 안에 굳혀 주소서. 죄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리니 빗나갔던 자들이 당신께로 되돌아 오리이다" (시편 51,12-13). 진정한 회개는 마음의 고뇌와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 (1열왕 8,38 참조). 

 

성령으로부터 얻어지고 움직여지는 인간 마음의 심오한 시각은 모든 외적인 윤리를 능가한다. 바로 이 점은 성서의 예언자들이 가져다 주는 매우 핵심적인 메시지인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인 인간의 마음에 새기리라 (예레 31,29-34; 에제 14,1-3, 36,26). "죄는 그들 마음의 식탁 위에 새겨져 있다" (예레 17,1). 인간의 마음은 무디어질 수 있지만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무디어진 마음까지도 새롭게 하실 수 있으며, 그들에게 또한 그들의 형제들에 대한 의무와 사랑의 의지에 대해서 새로운 느낌과 열린 마음을 주실 수 있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1.2.2. 신약성서 안에서의 양심 

 

신약성서 안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양심에 관한 경험적 실재는 구약성서의 조명 하에서 살펴 볼 수 있다. 다음은 복음의 메시지이다: 하느님께서 무딘 마음을 제거해 버리시고, 죄인들에게 새로운 마음을 가져다 주시는 시간이 다가왔다. 이제 죄인들은 새롭게 재무장된 정신과 마음으로써 살아 갈 수 있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새로운 정신 뿐만 아니라 당신의 성령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때가 이미 도래했다. 만일 죄인들이 새로운 마음으로 응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의 탓이다. 빛이 새로운 광채로써 그들 위를 비추고, 따라서 그들은 주님 안에서 빛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양순함이 부족할 수도 있으며 따라서 완고하게 남아 있을 수도 있다. "당신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라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읍니까?" (마태 6,23; 루가 11,33-34). 

 

거짓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진리가 바로 위에서 말하는 내적 개혁이며, 새로운 마음, 새로운 정신의 체험인 것이다. 우리 인간들의 마음 안에 늘 울려 퍼지는 하느님의 부르심은 하나의 종교적 체험이며, 동시에 양심의 체험이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하느님을 통해서 불리웠으며, 또한 선을 행하도록 불리움을 받았다. 우리 인간은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면 평화 안에 머무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부르심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법이며, 이는 인간의 마음 안에 새겨져 있다. 

 

1.2.3. 사도 바울로의 사상 안에서의 양심 

 

"신약성사 안에서 모두 30번 사용된 syneidesis 개념은 사도 바울로가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만 모두 14번 사용되고, 그외의 사목적 서한에서 6번,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9,9.14; 10,2.22; 13,18)에서 5번 사용되고 있으며, 베드로의 첫째 편지에서 3번 (2,19; 3,16. 21),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2번 (23,1; 24,16) 사용되고 있다. 이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다르게 표현하자면 신약성서에서 볼 수 있는 syneidesis 개념은 사도행전에서의 두 번, 베드로의 편지에서의 세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도 바울로의 입을 통해서 사용되고 있다는 말이며, 따라서 이 개념은 사도 바울로의 독특한 사상을 표현하는 개념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사도 바울로는 이 세상에 인간의 육체를 취하여 오신 그리스도로부터 소개된 인간의 윤리적 책임감과 내면적 생활을 위한 핵심적인 가르침을 우리에게 가장 잘 제공하고 있는 사도라고 말할 수 있다. 

 

사도 바울로 외에 신약성서의 다른 저자들에게서도 syneidesis 개념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 단어인 ?????? (heart, inner self, mind, will, desire, intention etc.)를 찾아 볼 수 있다 (마태 15,10-28; 마르꼬 3,5.6.52; 8,17; 1요한 3,20-21 참조). 

 

바울로가 취하고 있는 사상의 문화적 배경을 통해서 볼 때 그가 사용하는 syneideis 개념은 무엇보다도 헬레니즘의 영향과, 또 그 반대로 셈족의 영향, 이 두가지 영향을 함께 받으면서도 하나의 정확한 균형을 이루는 사도 바울로의 독자적인 개념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바울로 사도의 텍스트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 처럼, 만일 윤리적 양심에 대해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의미가 이미 전에 알고 있었던 의미가 아니라면, 그리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의미의 해석대로 바울로의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사도 바울로는 syneidesis 개념으로써 윤리적 양심이 지니고 있는 실천적인 의미에로 우리를 인도 하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1.2.3.1. 고린토 전서 8-10장과 로마서 14장 

 

윤리적 양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사도 바울로의 언급들 중에서 가장 먼저 찾아볼 수 있는 성서 본문은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문제에 관한 본문이다. 이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분석해 보기로 한다. 

 

- 1고린 8장에서 사도 바울로는 지식(gnosis)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사랑(agape)도 함께 필요하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1-2절) 본문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 사랑은 하느님 자신으로부터 이미 사랑받은 사람이 가지게 되는 어떤 지식이다 (3절). 어떤 형태로든지 Gnosis 가 지니는 참된 의미는 분명한데 즉, 이 세상에는 어떠한 우상도 없다는 것, 왜냐하면 한 분이신 하느님, 그리고 한 분이신 그리스도 외에는 어느 누구도 하느님일 수 없기 때문이다 (4-5절). 

 

그러나 그러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있으며, 따라서 그들은 "아직까지도 우상들에게 젖어있기 때문에 고기를 정말로 우상들에게 바쳐졌던 것으로 알고서도 먹는다"(7절).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양심도 약해져서 오염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음식이라도 먹을 수 있다는 올바른 자유를 지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만이 행사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8절). 

 

곧 그러한 자유는 분명히 올바른 것이며, 그렇지만 그러한 자유가 형제들을 무지로 빠뜨리는 자유는 아니다. 사도 바울로가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자유로써 그들을 스캔들에 빠뜨리거나 허약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9절). 

 

그러므로 만일 gnosis로부터 나타난 어떤 행동이 허약한 양심을 가진 어떤 형제에게 상처를 주거나 그의 양심을 넘어서는 그 어떤 것을 행하도록 강요한다면, 바로 그 허약함 때문에 그러한 행동은 단죄받게 될 것이며, 또한 올바른 행동으로 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는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죄라고 말할 수 있다 (10-13절). 

 

사도 바울로는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끌어들이면서 그리스도적 자유의 전망에 관한 하나의 고유한 돌파구를 열어놓는다(9장). 그런 다음 현명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호소하면서 다시 우상숭배자들의 문제로 되돌아 온다 (10장 1-12절). 

 

10장에서는 무엇보다도 성체성사에 관한 내용이 언급된다(14-18절): "나는 여러분이 귀신들과 친교를 맺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교도들이 바치는 희생제사는 귀신들에게 바치는 것이지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0절). 

 

그리고 사도 바울로는 성찬 밖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를 더 상세하게 언급하면서 gnosis에 의해 생각되어지는 단순히 할 수 있다는 사실에만 의지하는 행동에 대해서 한 번 더 거부한다: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유익하거나 (synferei) 건설적인 것(oikodomei)은 아닙니다"(23절). 이어서 사도 바울로는 "아무도 자기 자신의 유익을 찾지 말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찾으시오"(24절)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장에서 파는 모든 것은 양심을 가지고 따질 것이 없이 다 먹으시오. 온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은 모두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25-26절). 이와같이 만일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았을 때에는 양심을 가지고 따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27절 참조). 그러나 어떤 사람으로부터 그 음식이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그렇게 알려주는 사람의 양심을 생각해서 먹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27-29절 참조). 

 

이러한 경우에 사실 자기 자신의 고유한 양심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판단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추구하여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내 자신의 양심이 다른 사람들에게 장애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의미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29-32절 참조). 

 

이러한 텍스트와 함께 이제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서 정확하게 규정지을 수 있는 몇가지 점들을 제시해 보려 한다. 

 

1)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내 자신의 구체적인 행위에 대한 선함 혹은 악함을 규정지을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이다. 이 양심은 그 행위가 연약하든지 혹은 강하든지와는 관계가 없으며, 다만 구체적으로 내 자신이 행해야만 하는 것을 항상 나에게 명령하게 될 것이다. 

 

2)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지식과 자유이며,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이 둘의 조화이다. 그러나 이 양심은 그 어느 한 쪽에만 치우쳐서는 안된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이 지식과 자유는 애덕에로 향해야만 하며, 따라서 애덕에 따라서 실천되어야만 한다. 

 

3) 그러나 애덕으로서의 양심은 새로운 존재의 전 심연을 애덕에로 향하게 하면서, 사도 바울로가 양심에 대해서 촛점을 맞춘, 교회와 성령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4) 또한 신자들의 양심으로부터 나타나는 유익은 개인적이거나 이기적인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곧 유익이란 모든 사람들을 위해 드러나고 선포된 구원을 의미한다. 

 

1.2.3.2. 로마서 14장 

 

우상숭배자들에 관한 문제는 로마서 14장에서 다시 언급된다. 이 텍스트는 우리가 이미 살펴본 1고린의 내용과 아주 비슷한 해결 방법을 제시하면서 약한 자들에 대해서 더욱 자세한 내용을 제공해 주고 있지만 신앙에 촛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로는 신앙이 약한 사람들의 소신에 시비를 걸지 말고 형제처럼 받아들이라는 요구와 함께 14장을 시작한다 (1절). "어떤 이는 무엇이나 다 먹을 수 있다고 믿는가 하면 약한 이는 채소만 먹습니다. 먹는 이는 먹지 않는 이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이도 먹는 이를 심판하지 마시오" (2-3절). 그리고 어떤 날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다느니 하고 구분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이와 꼭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5절). 

 

그러나 각자는 주님을 위해 자신의 전 존재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기 자신이 지니고 있는 판단에 대해서 확신을 가져야만 한다(5절).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우리들의 현실에 다가 오시고,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시다(5-9절). 

 

또한 다른 사람들에 대한 판단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 강조된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께 속해 있는 사람들이며, 그러기에 우리 각자는 자신에 대해서 낱낱이 하느님께 보고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12절). 그러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 판단하지 않는다고 해서 절대로 무관심해서는 안된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서로 남을 심판하지 맙시다. 오히려 형제에게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도록 조심하시오"(13절). 

 

"주 예수 안에서 알고 또 확신하고 있는 사실은,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서 부정한 것은 없기" 때문에 믿는 자들은 "혹시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부정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그가 부정하다"(14절)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대의 형제가 음식물 때문에 슬퍼하게 되면 그대는 이미 사랑을 따라 거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그런 이유 때문에 비난 받아서는 안된다"(15-16절). 

 

게다가 하느님의 나라는 "실상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의로움과 평화와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다"(17절). 여기에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하느님께도 마음에 드는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봉사가 성립되는 것이다"(18절). 평화와, 서로를 위한 건설, 즉 사랑은 반드시 그리스도인의 행위에 진리와 자유를 부여하여야 한다(19-21절). 

 

14장의 결론 부분은 결국 고린토 전서와는 달리 신앙에 촛점을 두고 있다: "그대는 그대가 지니고 있는 믿음을 하느님 앞에서 그대 나름대로 견지하시오. 복되도다, 자기 생각대로 하면서도 자신을 단죄할 것이 없는 이여! 그러나 먹으면서도 망설이는 이는 이미 단죄를 받은 것입니다. 믿음에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다 죄입니다" (22-23절). 

 

이 텍스트에 대한 Schlier의 해석은 매우 영감적이다: "확실한 생각 없이 먹으면서도 망설이는 사람, 즉 자신의 신앙을 거슬러 가면서까지 먹는 사람은 절대로 먹어서는 안될 것이며, 그에게는 고기를 먹는 것도 금지된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는 ??? ?? ??????s (믿음에서 나오지 않은 것)를 드러내는 하나의 행위가 되는데, ?????s는 분명히 1고린 8,10-12에서의 syneidesis와 공통적인 점을 지닌다. 그렇지만 절대적으로 동일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믿음은 양심에 대한 하나의 질문이지만, 반면에 양심은 항상 믿음의 질문이 될 수는 없다. 신앙 안에서 완성되지 않고, 그리고 신앙에 대한 복종에로 이어지지 않는 행위는 양심을 거스리는 행위이며 따라서 죄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자신 안에 특별히 확신과 여러가지 종류의 행위를 내포한다. 예를 들면, 연약한 사람들의 행위와 강한 사람들의 행위를 통해서 믿음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면 그것은 분명 주님(?????s: 14,6-8))으로 고백되는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이며, 그분 안에 살아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믿음 안에서는 그 믿음과 함께 나타나는 다양한 행동이 가능하게 되며, 그 믿음으로써 모든 행동이 결정되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하는 믿음과 행위의 이러한 연결이 끊어지고 판단과 행위가 더 이상 믿음으로부터 비롯되어지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자기 충족이 되며(로마 15,1 참조), 따라서 죄가 된다. 자기 충족이란 사람들이 자신들의 연약함을 경멸하면서, 그리고 연약한 자신의 모습에 당황해 함으로써 어떤 강한 것을 지향케 하는 일종의 위협이며, 따라서 이는 믿음 안에서 드러나는 애덕에 반대된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죄는 연약함 때문에도 생겨나는 일종의 위협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믿음으로 드러나는 강인함도 요구되기 때문이다". 

 

고린토 전서 8-10장에서 양심에 관해서 간단하게 요약했던 것처럼, 로마서 14장 역시 다음의 두가지 전망 하에서 양심의 개념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1) 믿음과 양심과의 관계에서 볼 때, 양심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든 인간 존재의 심연을 책임지기 때문에 양심은 곧 바울로적 pistis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모든 생활을 인도하고 생기를 주는 살아있는 실재인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모든 것은 양심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2) 양심에 대한 존중에 있어서, 이는 다른 사람들을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양심을 결코 손상해서는 안된다는 점은 무척 중요하다. 양심에 대한 이런한 존중은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양심과 믿음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을 잘 알려준다. 왜냐하면 판단한다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께만 유보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1.2.3.3. 사도 바울로의 그밖의 서간들 

 

Syneidesis 개념이 표현되는 기타의 사도 바울로의 서간들 중에서 몇가지 중요한 텍스트를 소개하면서 설명하려고 한다. 

 

- 로마 2,14-16: 여기서 양심은 각 개인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재산으로 표현된다: "실상 이방 민족들이라도 비록 율법을 갖지 못했을망정 타고난 본성대로 율법의 요구를 실천한다면 이들에게는 율법이 없는 그들 자신이 바로 율법입니다. 이들은 자기네 마음 속에 율법의 행업이 적혀 있음을 실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양심도 마찬가지로 이를 증언하고 있으며 그들의 판단도 서로 엇갈려서 혹은 고발하거나 혹은 변호합니다. 이 사실은 하느님께서 나의 복음대로 에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들의 숨은 속을 심판하실 그날에 판명될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진리 안에서 우리 각자의 양심을 호소할 수가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이러한 봉사직을 맡고 있으므로 낙심하는 일이 없습니다. 창피해서 숨겨 두어야 할 일들을 우리는 버렸습니다. 우리는 간교하게 행동하거나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하지 않고 오히려 진리를 밝혀 드러냄으로써 하느님 앞에서 사람들 각자의 양심에 우리 자신을 내세웁니다" (2고린 4,1-2). 

 

비록 사람들의 양심이 항상 깨끗하고 완전무결하게 남아 있을 수는 없지만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지만 더럽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깨끗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정신과 양심마저 더러워졌습니다" (디도 1,15). 

 

- 따라서 양심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랑거리가 되며, 탁월하게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행위가 된다: "사실 우리의 자랑거리는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바 이렇습니다. 곧, 우리가 세상에서 처신할 때, 특히 여러분을 대할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순박함과 순진함으로, 따라서 육적인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처신하였다는 것입니다" (2고린 1,12; 로마 9,1; 사도 23,1; 24,16 참조). 

 

그러나 근원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 하에서 말하게되는 증언과 판단이 결정적으로 양심과 관련된다: "내가 여러분에게 심문받든, 사람들의 법정에서 심문받든, 내게는 별로 상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을 심문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나는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의로워진 것은 아닙니다. 나를 심문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1고린 4,3-4). 

 

- 사도 바울로가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와 둘째 편지에서 언급되는 양심은 무엇보다도 인간 행위 전체를 총괄하는 내면으로서 드러나고 있다. 1디모 1,5에서 사도 바울로는 거짓교사들을 겨냥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설교의 목표는 깨끗한 마음과 고운 양심과 거짓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바울로는 하나의 새로운 경고로써 1장을 끝맺는다: "그대는 이 예언의 말씀에 힘입어 훌륭한 싸움을 하고 믿음과 곧은 양심을 지니시오. 어떤 사람들은 이 양심을 저버리고 믿는 일에 파선을 당했읍니다"(1디모 1,18-19). 사도 바울로는 계속해서 봉사자들은 "깨끗한 양심으로 신앙의 신비를 간직해야 한다"(3장 9절)는 점을 강조한다. 사실 올바른 길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그릇된 정신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은 "이미 그들의 양심에 낙인이 찍힌" (4,2) 사람들이다. 1디모와는 달리 2디모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로부터 시작된다. 즉 사도 바울로는 디모테오에 대한 생각을 통해서 "조상들을 본받아 깨끗한 양심으로 내가 섬기고 있는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2디모 1,3)라고 고백한다. 

 

-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도 바울로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들의 양심에 참된 의미의 순수함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견고히 하기 위해서 인간의 내면으로서의 양심에 대해 다시 정리하고 있다. 사실 옛 계약에서는 제물과 함께 제사를 봉헌하지만 "그것이 예배자의 양심을 완전하게 해 주지는 못하고" (히브 9,9), 반면에 그리스도의 피는 "그 죽음의 행위로부터 우리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한다"(9,14). 또한 율법이 미래에 있을 좋은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사실도 제사를 반복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해마다 그들이 계속해서 바치는 같은 제사를 통해서는 가까이 가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완전하게 할 수 있다면 그들은 제사 드리기를 중단하지 않았겠습니까? 예배하는 사람들이 단번에 깨끗하게 되어 더 이상 죄의식을 갖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0,1-2). 이제 이와는 반대로 믿는 사람들의 행위는 진실된 신뢰의 행위가 된다: "... 우리는 진실된 마음과 풍부한 믿음을 지니고 나아갑시다. 악한 생각을 떠나 마음을 깨끗이 하고 깨끗한 물로 몸을 씻고서 나아갑시다" (10,22). 이와 더불어 궁극적으로는 기도에 대한 요구가 나타난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사실 우리는 선한 양심을 지니고 있다고 확신하며 모든 일에 올바르게 처신하려고 합니다" (13,18). 

 

- 이상과 같이 살펴 본 사도 바울로의 양심에 관한 단편적인 텍스트 안에서 몇가지 명확한 점들을 이끌어낼 수 있겠다. 

 

1) 양심은 인간의 내면이다. 여기에서부터 인간은 자신의 행위가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를 구분한다. 따라서 양심은 그러한 가치와 무가치에 대해서 결코 침묵할 수 없는 인간 내면에 대한 하나의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2) 순수함과 선함은 각각의 인간이 지녀야 할 하나의 기본적인 과제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들의 그러한 순수함과 선함에 대해서 판단할 수 없다. 오직 하느님 만이 진리 안에서 인간의 그러한 면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판단 하실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참된 존중을 통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진실되고 신뢰할 수 있는 양심을 지니게끔 하는 지식-자유-사랑의 길을 격려하고 지지해 주어야만 한다. 

 

3) 신자들에게 있어서 구원은 양심의 차원에서 제시되고 생활화 된다: 구원은 성령으로부터 우리들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함으로써 사랑이 된다. 따라서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양심-사랑 만이 진실되다고 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신자들의 행위는 그들의 삶 안에서 사랑이 효과적으로 드러날 때만이 진실되다고 할 수 있다. 

 

1.2.3.4. 사도 바울로 서간의 종합 

 

주님의 사도로서의 바울로는 자신의 사명 안에 구약성서의 시각을 끌어 들였으며, 또한 자신의 사도로서의 사명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마음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만드셨고, 자신을 사도로 불러 주신 주님께 대한 체험을 강하게 부각 시켰다. "다른 사람들의 양심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통해서 볼 때, 그의 감정의 예민함은 자기 자신이 지니고 있는 양심의 섬세함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2고린 1,12 참조), 또한 하느님 앞에서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주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진 것 만큼이나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끊임없는 신뢰(2고린 4,1-2 참조)를 갖는 것에서부터 나타나는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바로 그러한 메시지를 이방인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전달하였던 것이다. 곧 이방인들이 생각하고 있던 종교와 양심에 대한 체험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충만한 빛에로 그들을 이끌어 들였던 것이다. 그는 그들이 지니고 있는 "참된 것과 고상한 것과 옳은 것과 순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과 덕스럽고 칭찬할 만한 것들"을 받아들이고 칭찬 할 뿐만 아니라 스토아 철학의 윤리개념, 즉 syneidesis (양심)이라는 개념을 자신의 사상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사용하는데 까지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성서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사도 바울로가 스토아 학파의 전통에서부터 자신의 사상을 끌어 들인 것에 대해서 서로 많은 논쟁을 한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사도 바울로가 자신의 설교들 듣는 사람들에게 사용했던 개념이 지닌 본 의미에 대해서 무지했던 것은 아니며, 그는 명백하게 희랍어 syneidesis 라는 개념이 지니고 있는 의미 안에서 긍정적이고 수용할 만한 것들을 찾아서 강조하여 사용했던 것이다 "비록 사도 바울로가 자기 시대의 철학적 용어를 빌어 썼을 수 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그는 분명히 '마음'이 지니는 역할에 대한 성서적 전승에 크게 기여한 것만은 사실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영(Pneuma)이라는 역동적인 현존을 우리들에게 소개하면서 그 개념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사도 바울로의 메시지가 그의 편의에 따라서 그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들의 언어를 통해 전달되기는 하였었지만 그가 생각하고 설교하고, 그리고 저술한 것은 근원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성서적 전통 안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로의 시대까지 스토아 학파의 윤리에서는 악한 일에 대한 양심을 표현하는데 있어서만 예외적으로 syneidesis라는 개념을 사용했었다는 사실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개념은 선과 악의 기로에 놓여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실존적인 인식과 일체성(一體性)에로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의 존재론적 열망으로서 이해되었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syneidesis 라는 용어를 죄인을 고발하는 의미에서의 양심을 지칭하기 위해서도 자주 사용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이 성서적 전승에서나 희랍적 전통에서나 다 함께 부합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사도 바울로는 이교도들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서 볼 때, 양심의 개념을 아주 명백하게 예언자적 전승의 조명을 통해서 확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로마서 2,14-15는 아마도 사도 바울로가 옛 것과 새로운 것을 함께 연결하고 있음을 이해하는데 가장 적합한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실상 이방 민족들이라도 비록 율법을 갖지 못했을망정 타고난 본성대로 율법의 요구를 실천한다면 이들에게는 율법이 없는 그들 자신이 바로 율법입니다. 이들은 자기네 마음 속에 율법의 행업이 적혀 있음을 실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양심도 마찬가지로 이를 증언하고 있으며 그들의 판단도 서로 엇갈려서 혹은 고발하거나 변호합니다". 

 

사도 바울로는 syneidesis 개념을 사용하면서 하느님께서 사랑의 법을 새겨 놓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의도하였다. syneidesis 라는 단어는 본질적으로, 아주 명백하게 그러한 맥락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 안에 당신의 법을 새겨 놓으셨다는 것이 syneidesis 를 이해하는데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어떤 후회나 무엇을 고발하는 어떤 양심만을 취급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없다. '마음', 혹은 syneidesis 는 두가지 면을 다 함께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고 말 할 수 있다. 오늘날 성서학자들은 사도 바울로가 syneidesis 개념을 인간의 마음이 지니고 있는 건설적이며 창조적인 질(質)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연구를 하고 있다. 곧 인간의 마음이 지니고 있는 질(質)이란 선하고 의로운 것을 지칭한다. "사도 바울로는 인간이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것을 위한 결정들을 규정하기 위해서 이 개념을 사용한다". 

 

사도 바울로에게 있어서 의문은 인간이 범죄 후에, 상처 입은 양심으로서의 마음만이 유일하게 말을 하는지 혹은 마음과 양심이 함께 협력하는지의 여부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로의 특별한 관심거리는 양심의 통합성에 관한 것이다. 그는 선한 양심이 주체의 일체성을 표현한다는 점을 주시한다. 그에게 있어서 중심이 되는 메시지는 성령께서 인간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따라서 '인간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통회와 회심이 인간에게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로는 우리가 '양심'에 대해서 말할 때 의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양심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사도 바울로는 어떤 사람이 하느님을 안다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은총과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불리움을 받았다는 것을 거부할 때, 내면의 자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열에 대해서 설명한다: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합니다. 그러나 더럽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깨끗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정신과 양심마저 더러워졌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안다고 주장하지만 그 행실로는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흉측하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며 선행이라고는 전혀 할 줄 모르는 자들입니다" (디도 1,15-16). 

 

구원이란 단순히 정신과 사고(思考)의 오류로부터 벗어나는 것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양심의 깊은 내면에까지 파고 들어가는 것까지도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신뢰를 둔다면, "영원한 영(靈)을 통하여 흠없는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그 죽은 행실로부터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것이다" (히브 9,14). 그 뿐만 아니라 양심은 그분을 믿는 이들에게 자신들의 신앙과 삶에 대한 성실성을 드러내 주는 하나의 증거를 제공해 준다. "사실 우리는 선한 양심을 지니고 있다고 확신하며 모든 일에 올바르게 처신하려고 합니다" (히브 13,18; 2디모 1,3 참조). 그러나 선한 양심은 그 자체로 자동적인 보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로 역시 자신의 심판자이시며 구원자이신 주님 앞에 겸손하게 서 있는 것이다. "사실 나는 양심에 꺼리낄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의로워진 것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을 주님이십니다" (1고린 4,4). 사도 바울로는 주님의 면전에서 떳떳하게 생활하고 있는 인간이면서도 결코 자기 자신의 고유한 양심에 대해서는 개별적으로 그것이 어떠 어떠하다고 결코 판단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성숙을 위한 끊임없는 임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양심의 상호성까지도 의식하면서 생활했던 것이다 (1고린 10,25-29 참조). 양심에 관한 바울로 사도의 이 모든 사상은 우리 인간들의 마음 안에 새겨진 사랑의 법에 대한 그의 가르침과 부합한다. 

 

 

2.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의 양심 

 

2.1. 사목헌장 16항 

 

사목헌장 16항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의 양심에 관한 테스트에 한정하여 몇가지 중요한 핵심을 찾아 보도록 한다. 무엇보다도 양심에 관한 우리들의 연구를 위해 의미를 지니는 문장들을 더욱 명확하게 분석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선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이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텍스트를 주의 깊게 읽어 내려가는 일일 것이다. 

 

- 사목헌장 16항은 다음의 점들을 각별히 유의하면서 해석되고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즉 친교와 성사로서의 교회로부터 구원의 역사와 그리스도 중심주의에 이르기까지의 폭넓은 이해, 인간에서부터 출발하여 우리시대의 시대적 징표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또한 하느님의 말씀에서부터 그에 따르는 하느님 백성의 사목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적용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 그리고 또한 이 텍스트가 의도하는 시각을 절대로 벗어나서는 안된다. 사목헌장 16장은 사목헌장 제 1부의 첫째 장,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제목 하에 속해 있는 부분이다. 첫째 장은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12항)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그러한 인간은 역사적으로 결국 죄에 빠지게 되며(13항), 그 다음 항목에서는 일체성을 지닌 인간의 구성에 대해서 언급되며(14항), 그 다음으로는 인간 실존의 내면을 분석적으로 해설하고 있다 (인간의 지성이 지니는 존엄성, 진리와 예지) (15항). 16항에서는 윤리적 양심의 존엄성이, 그리고 죽음의 신비가 언급되는 18항의 바로 전 항목에서는 자유의 우월성에 대해서 언급되고 있다 (17항). 그리고 이어서 체계적 무신론이 지니고 있는 위험을 고발한 다음, 이에 대한 교회의 태도를 말해주고 있으며(19-21항),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들의 근원적인 해결책이며, 목적이 되시는 새로운 인간 그리스도를 소개한다(22항). 

 

이렇듯이 그리스도 중심주의적이며 인격주의적 인간학의 전망 중심에 인간의 양심에 관한 16항의 텍스트가 위치하고 있다는 점은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의 사항들로써 16항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1) 무엇보다도 먼저 양심은 내면적 깊이와 견고성을 지닌다: "양심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안방이요, 인간이 저 혼자서 하느님과 같이 있는 지성소이며, 그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따라서 양심은 인간의 내면이다. 이 내면에 관해서는 14항에서 언급된다: "인간은 자신이 물질 이상의 존재임을 증명하는 동시에 자신은 자연의 한 조각이거나 인간사회의 한 무명요소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도 틀리지 않다. 인간은 그 내적 품위로써 일체의 물질세계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마음속으로 돌아갈 때 이 깊이에 도달하는 것이고 거기에 인간의 마음 속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이 기다리고 계시며 하느님이 보시는 그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 앞에서 영적 불멸의 혼을 긍정하게 될 때 인간은 단지 물리적 내지는 사회적 조건의 소산인 덧없는 환각에 속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깊은 진리 자체를 파악하는 것이다" (14항). 

 

2) 따라서 고립을 의미하는 내면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이는 물론 일치와 친교를 이루는 내면이다. 이는 하느님과 함께 너에게서 너를 찾는 것이며, 하느님의 소리를 경청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또한 형체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치의 내면이다. 즉 인간의 존엄성은 단순히 하느님과의 친교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맺는 친교를 통한 존엄성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 존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12항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성경이 가르치는대로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되었고 창조주를 알아 사랑할 수 있으며, 창조주로부터 세상 만물의 주인공으로 설정되어 만물을 다스리고 이용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외롭게 창조하지 않으시고 시초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그들의 공동생활이 인격적 결합 형태의 시초를 이루었다. 인간은 깊은 본성에서부터 사회적 존재요, 남과 관계없이는 생존할 수도 없고 그 자질을 발휘할 수도 없다" (12항). 

 

3) 이러한 대화형태의 내면은 '지금 이 자리에서' 행해져야만 하는 것에까지 도달하는 일종의 명령을 체험한다: "인간은 양심 속 깊은 데서 법을 발견한다. 이 법은 인간이 자신에게 준 법이 아니라 인간이 거기에 복종해야 할 법이다. 이 법의 소리는 언제나 선을 사랑하며 행하고 악은 피하도록 사람을 타이르고, 필요하면 이것은 행하고 저것은 피하라고 마음 귀에 들려준다"(16항).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내면의 이러한 명령은 결코 어떤 일정한 형태에 묶여있는 명령이 아닐 뿐더러, 최후의 판단에 대한 명령도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총체적인 것 이전의 그 무엇이며, 또한 가장 기본적인 것 보다도 더 기본적인 그 무엇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16항 이전의 15항에서 '지혜'에 관해서 언급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지성을 가졌기에 만물을 초월한다고 판단하는 것은 옳은 판단이다. 인간 지성은 하느님의 지혜로부터 빛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15항). 따라서 진리란 단순히 과학-기술적인 측면에만 한정되어서는 안되며, 그러한 진리는 인간의 지적 진리의 가장 발전된 형태라고도 말할 수 없다. "인간의 지적 본성은 또한 예지로써 완성될 수 있으며 또 반드시 완성되어야 한다. 예지는 인간의 정신을 부드럽게 인도하여 진리와 선을 탐구하며 사랑하도록 이끌어 주므로 인간은 예지를 힘입어 유형한 세계를 통하여 무형한 세계로 옮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또한 성령의 은혜로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 계획의 신비를 관상하고 맛볼 수 있는 것이다" (15항). 

 

4) 여기서 또한 인간의 내면에 자리하는 하나의 법이 나타나는데 이는 인간에게 종속되는 법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새겨진 법이다. "인간은 양심 속 깊은 데서 법을 발견한다. 이 법은 인간이 자신에게 준 법이 아니라 인간이 거기에 복종해야 할 법이다" (16항). 

 

이러한 복종에서부터 보증된 존엄성은 인간 자유의 존엄성이다. 공의회는 다음 항목에서 바로 이 자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인간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상을 말해 주는 표지인 참된 자유는... 의식적 자유 선택에 의하여 행동하기를 요구한다. 즉 맹목적 본능이나 순 외적 강박에 의하지 않고 인격적인 내적 동기에 의하여 움직이기를 요구한다. 인간이 사욕의 온갖 압박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고 자유로이 선을 선택하여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며 유효 적절한 수단을 슬기롭게 마련할 때 인간은 이런 존엄성에 도달한다"(17항). 

 

5)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의 마음 안에 새겨진 이 법은 하느님과 이웃 안에서 완성되어야 할 법이다. 이 법은 물론 자연법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지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모든 법들 중의 으뜸되는 법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법은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장소인 양심으로부터 가장 충실한 방법으로 인식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양심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안방이요 인간이 저 혼자서 하느님과 같이 있는 지성소이며 그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양심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완성되는 그 법을 놀라운 방법으로 밝혀준다" (16항). 

 

6) 이 법은 사랑의 법이기 때문에 공적 요구를 위한 사랑의 실천적인 진리를 추구하게 된다: "양심에 충실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결함되어 진리를 추구하고 그 진리를 따라서 개인 생활과 사회 생활에서 야기되는 여러가지 윤리 문제들을 해결하게 된다" (16항).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곧 윤리적 진리란 양심에 충실함으로써 드러나는 진리이며, 또한 동시에 양심에 충실함으로써 모두가 함께 추구할 수 있는 진리라는 점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자신의 독단적이고 이기적인 행위에서 벗어날 가능성과, 그럼으로써 진리에 더욱 가까와 질 가능성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바른 양심이 우세하면 할수록 개인이나 집단이 맹목적 방종에서 더욱 멀어지고 객관적 윤리 기준에 더욱 부합하도록 노력할 것이다"(16항). 이제 사람들 사이에서의 객관성, 사랑의 객관성, 그리고 양심에 충실한다는 면에서의 객관성이 드러나게 되며, 인간의 삶에 있어서 항상 앞을 가로막는 새로운 장애물들에 부딪힌다고 해도 실망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시된다. 

 

7) 사목헌장 16항은 이제 마지막으로 양심의 불가항력적 오류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종결된다: "불가항력의 무지 때문에 양심이 오류를 범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양심이 그 존엄성을 잃지는 않는다고 공의회는 덧붙인다. 왜냐하면 불가항력의 무지는 실제적인 인간관계를 구체화하고 있는 객관적 윤리 기준에 전적으로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이 그 때문에 손상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곧 인간의 존엄성은 마음 안에 새겨진 법, 양심에의 충실, 그리고 진리에의 추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의 점들이 부족하게 될 경우에는 더 이상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진리와 선을 추구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거나 죄의 습관으로 양심이 점차로 어두워지는 경우에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여기서 16항은 이미 13항에서 언급한 바 있는 죄의 주제를 끌어 들이는데 이 주제 역시 양심의 주제와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의로운 지위에 두셨으나 인간은 마귀의 유혹을 받아 역사의 시초부터 제 자유를 남용하였고 하느님께 대립하고 하느님을 떠나서 제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과연 인간은 제 마음을 살펴볼 때, 자신이 악에 기울어져 있고 착하신 창조주로부터는 올 수 없는 여러가지 죄악에 빠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은 가끔 하느님을 자신의 근원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함으로써 궁극 목적에로의 당연한 질서마저 파괴하고 자신과 이웃과 모든 피조물과의 조화도 깨뜨렸다" (13항). 

 

이상과 같이 분석해 본 사목헌장 16항을 통해서 양심과 관련하여 몇가지 중요한 점들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1) 이제 필요한 관계들 안에서의 명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그 자리에 하나의 구원의 역사가 자리한다. 즉 이는 사랑의 명령이며, 이는 새 인간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진 명령이다 (22항 참조). 

 

2) 이 사랑의 힘 때문에 모든 것은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게 되며, 이를 친교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겠다. 곧 말씀하시는 분으로서의 하느님, 그 말씀을 듣고 응답하는 자로서의 인간, 그리고 형제적 친교를 통해서 본질적인 모습을 찾게되는 인간 상호간의 친교이다. 

 

3) 따라서 양심은 어떤 비인칭적인 기준을 말하지 않고 인간의 고유한 면을 이야기 한다. 즉 친교를 이루는 인간, 하느님으로부터 불리움을 받은 인간. 그리고 형제적 사랑을 나누는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4) 결국 양심에 대한 진리는 비인칭적인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 본연의 자기 모습에 충실하고 사랑의 법을 충실히 따르는 진리이며, 형제적 사랑으로써의 행위를 구별하는 진리이다. 

 

5) 아주 단순하게 양심을 표현하자면 양심은 이제 더 이상 법의 시녀가 아니며, '지금 여기서' 법을 적용하여 실천하는 판단의 기준으로만 제한 될 수도 없다. 

 

2.2. 공의회의 그밖의 문헌들 안에서 

 

사목헌장 16항을 통해서 분석을 통해서 양심의 문제를 살펴 보았다. 사목헌장 16항 이외에도 특별히 종교자유에 관한 선언에서도 양심의 문제를 살펴볼 수 있다. 

 

Dignitatis humanae (종교자유에 관한 선언)의 서문에서 공의회는 종교자유와 관련해서 교회의 입장에서는 어떠한 의무를 지니고 있는지 다음의 두가지 기본적인 점들을 명시하고 있다. 

 

첫째는 신앙인데 이 신앙은 "하느님 자신이 인류에게 알려주신 것으로서 우선 인간이 하느님을 섬김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구원되고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진리 특히 하느님과 그 교회에 관한 것을 탐구하며, 진리를 안 이상에는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준수할 의무가 있다" (1항). 

 

둘째는 하느님과 그분의 교회에 관한 것을 탐구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아울러 거룩한 공의회는, 이러한 의무는 양심에 접촉하여 그 양심을 속박하며, 또한 진리를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정신을 침투하는 진리, 그 자체의 힘으로써가 아니면 결코 인간에게 의무를 지우지 않는다는 것도 선언하는 바이다" (1항). 

 

이렇게 볼 때, 진리에 상응하는 것은 양심이다. 진리의 힘은 그 자체로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양심에 침투한다. 그리고 진리-양심의 생동감 넘치는 일치는 진리 자체와 관련된 모든 일의 척도로서 작용된다.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공의회가 말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면을 늘 의식하면서 생활할 때에만 진리-양심의 일치된 생활이 가능할 것이다: "오늘에 와서 인간은 인격의 존엄성을 나날이 더 의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행동함에 있어 강제를 받지 않고 오직 의무의 의식감에서 자신의 판단과 책임있는 자유를 향유하고 구사할 것을 요구하는 이의 수가 늘어가고 있다" (1항). 

 

이러한 두가지 기본적인 측면에서부터 출발하여 공의회는 무엇보다도 먼저 종교의 자유에 대한 권리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 중의 하나라는 점을 선언하면서 "종교자유의 일반적 원리"에 대해서 언급한다. 곧 공의회가 말하고 있는 종교의 자유란 다음과 같다: "각 사람이 개인이나 사회적 단체나 그 밖의 온갖 인간적 권력의 강제를 받지 말아야 하며, 그와 같이 종교문제에 있어서도, 그 누구도 양심을 거슬러 행동하도록 강요되지 않으며, 또 사적 혹은 공적으로, 단독이나 혹은 단체의 일원으로 정당한 범위내에서 자기 양심을 따라 행동하는데 방해를 받지 않음에 있다" (2항).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단순히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기본적인 의무를 강조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그러한 의무는 인간적 의무, 즉 인간으로서 반드시 가져야 할 의무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인격, 즉 이성과 자유의지를 가졌고, 따라서 개인적 책임을 지고 있으므로, 자신의 존엄성에 의해서 본성적으로 진리, 특히 종교적 진리를 탐구할 충동을 받으며, 동시에 도덕적인 의무도 갖는다. 또 일단 진리를 파악한 이상에는 그것에 고착해서 진리의 요청에 따라 자신의 전 생활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심리적으로 자유를 누리는 동시에 외부적인 강제를 받지 말아야만 본성에 알맞는 방법으로 그 의무를 다할 수 있는 것이다" (2항). 

 

"하느님이 예지와 사랑으로 우주와 인간사회에 질서를 세우시고, 이것을 지도하시며, 통치하시기 위해서 정하신 신적(神的), 영원한, 객관적 및 보편적인 법이 인간 생활의 최고규범" (3항)임을 생각할 때, 위에서 말한 모든 것은 더욱 명료해진다. 하느님께서는 실상 당신의 "유순한 섭리의 계획으로써 불변의 진리를 일층 더 인정할 수 있기" (3항) 위한 방법으로 그러한 당신의 법에 인간을 참여시키시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정당한 수단을 써서, 현명하게 자기 양심의 옳고 참된 판단을 내리기 위하여, 종교에 관한 진리를 탐구할 의무와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3항). 

 

그리고 이러한 탐구는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사회적 성향을 존중하면서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공의회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진리는 인격과 그 사회성에 고유한 방법, 즉 자유로운 탐구, 교도 혹은 교육, 전달및 대화의 방법으로써 탐구되어야 한다" (3항). 그리고 이렇게 탐구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승인으로써, 그리고 자기 자신의 내면이 확고한 마음으로 진리에 부합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바로 이것이 양심이 윤리-종교적 명령에 부합되기 위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신법의 명령을 자기 양심을 통해서 깨닫고 인정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목적인 하느님께 도달하기 위해서는 모든 행위에 있어서 충실히 자신의 양심을 좇아야만 한다" (3항). 따라서 어떤 진리가 양심적인 진리가 아니라면 이는 분명 인간 자신을 통해서 나타나는 정언적 진리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상 인간은 명백히 진리에 대한 용기있고도 충성스러운, 그리고 진실된 탐구의 의무를 갖는다. 그러나 그러한 진리가 양심으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인간 자신에게 어떠한 의무라도 부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공의회는 말하기를 진리와 양심의 일치에로 도달하는 길은 양심 자체의 요구에 따라 행해지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종교분야에 있어서 자기 양심을 따라 행동하는 데 구애를 받아서는 안된다. 사실 종교의 실천은 그 성질상, 우선 인간이 자신을 하느님과 직접 관계짓는 임의의, 그리고 자유로운 내적 행위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순 인간적 권력으로 명해질 수도 방해될 수도 없다. 그러나 종교의 내적 행위를 외부로 표현하며, 종교의 분야에 있어서 타인과 상통하며, 공동체로서 종교를 신봉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사회성 그 자체에 기인한 요구이다" (3항).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다음의 3가지 점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 어떠한 대화나 실천에 있어서 인간의 참된 존엄성이 충실하게 존중되기 위해서는 양심-자유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어떤 단체나 그 단체의 권위, 그리고 개인적인 판단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양심-자유를 배척할 수 없다. 

 

2) 양심-자유의 탐구로서의 진리를 향한 길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현명함과 더불어 참되고 올바른 양심의 판단의 형성이라는 측면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또 영감을 받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노력해야 한다. 

 

3) 결국 복음과 양심이 지니는 관계를 말할 수 있겠다. 즉 복음은 양심을 변질시키거나 말살시키지 않으며, 외히려 복음 안에서는 보더 더 신뢰할 만하고 직접적인 양심에 관한 언급을 찾을 수 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 중에서 양심에 관해 다루고 있는 곳은 이외에도 특별히 사목헌장 41항을 들 수 있겠다. 여기서는 "교회가 개인에게 주고자 하는 도움"이라는 제목으로써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의 문제와 함께 인간의 양심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교회가 개인에게 주고자 하는 도움은 무엇보다도 의미에 관한 질문이라는 지평에 자리 잡는다. 즉 의미에 관한 질문이란 각 개인이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래에도 역시 자신의 삶 안에서 항상 안고 살아가는 일종의 문제 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최후 목적인 하느님의 신비를 밝혀 주는 것이 교회에 맡겨진 사명이르로 교회는 동시에 인간 존재의 의의, 즉 인간에 대한 깊은 진리를 인간에게 밝혀 준다... 인간은 언제나 적어도 어렴풋이나마 자기 생명과 자기 활동과 자기 죽음의 뜻을 알려고 갈망하겠기 때문이다" (사목헌장 41항). 

 

교회가 "세상 안에 현존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이러한 인간 문제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미 "하느님이 인간을 당신 모상대로 창조하셨고 인간을 죄에서 구해 주셨으므로, 그분만이 이런 문제에 완전한 해답을 주실 수 있고, 하느님은 인간이 되신 당신 아들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완전한 해답을 주셨다"(41항)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스스로 더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41항).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교회는 복음의 선포로써 인간적 품위와 자유에 봉사하는 것이다: 실상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느님의 자녀들의 자유를 알리고 선언하며 최종적으로는 죄에 기인하는 온갖 노예 상태를 배격한다. 복음은 또한 양심의 존엄성과 그 자유결정을 거룩히 존중하고 인간의 모든 재능을 하느님께 대한 봉사와 인간들의 행복을 위하여 이용하라고 끊임없이 권고하며 모든 사람에게 박애정신을 권장한다" (41항)고 공의회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복음은 생명과 교회가 행하도록 불리움을 받은 소명 안에서 살아 움직여야만 하며, 동시에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교적 구원 계획의 근본 법칙과 일치"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사실상 "피조물의 정당한 자율성과 특히 인간의 자율성만은 박탈하지 않으셨을 뿐더러 오히려 그 존엄성을 회복시키시고 더욱 견고케"(41항) 하셨기 때문이다. 

 

사목헌장 41항의 이러한 언급은 43항에서 보다 구체적인 활동으로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언급되고 있다. 공의회는 이 항목의 제목을 "신자들을 통해서 인간 활동에 기여하려는 교회의 도움"이라고 붙였다. 

 

43항의 출발은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복음의 정신을 따라 현세의 직무를 충실히 이행할 수 있도록" 권장하면서 시작한다. 현세적 의무를 소홀히 한다는 것은 사실상 이웃에 대한 의무, 아니 그보다도 오히려 하느님께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영원한 구원을 등한시 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아가 43항은 세속적 임무 안에서의 평신도의 역할에 대해서 강조한다.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속적 임무와 노력은 비록 독점적은 아닐지라도 평신도들의 영역이다". 

 

이러한 평신도들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방법이든 단체적인 방법으로든 그들은 "각 분야에서 고유한 법칙을 지킬 뿐 아니라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며 같은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기꺼이 협력해야 한다". 또한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일을 창안하고 실천할 능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신앙의 요구를 깨닫고 신앙에서 힘을 얻어 필요하다면 주저없이 새로운 일을 창안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 모든 점들은 그들이 성숙되고 명확한 양심을 소유한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을 우선적으로 요구한다. 공의회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우리에게 무척 관심을 가지게 하는 대목이다: "현세적 시민생활 속에 신법을 새겨 주는 일은 올바로 형성된 양심을 가진 신자들의 책임이다. 신도들이 영적 빛과 힘을 사제들에게 기대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목자들이 모든 일에 정통하여 무슨 문제가 생기든지 아무리 중대한 문제가 생기든지 언제나 즉석에서 구체적인 해답을 줄 수 있다거나 또 그것이 그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한다. 오히려 신도들은 그리스도교적 지혜의 빛을 받아 교권이 가르치는 바를 깊이 염두에 두고 새겨 두고 그 고유의 책임을 나누어 져야 하겠다". 

 

매우 풍성한 내용을 담고 있는 문장이라고 보겠다. 생활 안에서, 그리고 생활을 통해서 결정하게 되는 경우에 양심의 역할, 올바른 양심 형성의 필요성, 양심의 측에서 결정을 하게 될 때에 책임을 전가하지 못한다는 점, 교도권의 과제, 그리고 양심은 자율적인 결정에 도달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그 책임을 전가하지 못하고 고유한 책임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깊이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모든 것에서부터 서로의 양심에 대한 상호 존경이 싹트게 될 것이며, 또한 분열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을 더욱 풍요롭고도 다양한 일치에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닐 수 있게 될 것이다.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물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사고방식대로 어떤 환경에 처해서 일정한 해결책을 강구해야 할 경우가 가끔 있을 것이다. 다른 신도들은 그들대로 역시 진지한 태도로 임하면서도 같은 문제에 대하여 달리 판단할 수도 있다. 이것은 가끔 있을 수 있는 일이며, 또 당연한 일이다. 이런 경우에 많은 이들은 상대방의 본의를 떠나서까지 자기의 해결책만이 복음의 메시지에 부합한다고 주장하기 쉽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명심해야 할 것은 아무도 교회의 권위를 빙자하여 배타적으로 자기 주장을 고집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언제나 진지한 대화를 통하여 서로 깊이 이해하고 서로의 사랑을 실천하며 공동선을 첫째 관심사로 삼아야 하겠다". 

 

실천적인 진리는 항상 진실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행해야 할 하나의 탐구의 진리로 남게 되며, 이는 권위의 도구화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가 43항을 통해서 살펴본 모든 것을 종합하여 볼 때 실천적인 진리는 결코 도구화된 권위에 의해 위임될 수 없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이는 개인적인 양심 뿐만 아니라 권위 그 자체에까지도 중대한 해를 입히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2.3.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의 종합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양심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루고 있으며, 이외에도 양심에 관한 우리들의 연구를 위해 다른 많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렇지만 그 텍스트들을 하나 하나 자세하게 분석하기에는 시간과 지면이 허락되지 않는다. 단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윤리적 양심에의 접근을 위해 공의회가 제시해 주었던 몇가지 중요한 지침들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요약하는 것으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 나타난 윤리적 양심에 대해 소결론을 내리려고 한다. 

 

1) 윤리적 양심을 "실질적인 삼단논법"식의 추리와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 뿐만 아니라 윤리적 양심을 순수한 심리적 기능으로서 간주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윤리적 양심은 인간으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에로까지 도달하게 하는 하나의 심연이며, 또한 인간 내면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그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2) 윤리적 양심이 규범에 대해서 수동적이거나 또한 순수하게 그 규범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윤리적 양심은 어떤 구체적인 상황 하에서 그 규범을 실행하기 위하여 그 규범을 내적으로 해석하여 경청하는 것이며, 따라서 구체적인 각각의 경우에 대한 정확한 판단력을 가지면서 늘 새로와질 것을 요구한다. 

 

3) 따라서 양심은 윤리적 진리와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윤리적 진리는 항상 필연적으로 양심에 대한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간이 되기 위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3. 인간학 및 신학적 반성 

 

3.1. 양심의 행위 및 양심의 불변하는 요소 

 

사도들은 그들이 머무르는 곳의 다양한 문화와의 접촉을 가지면서 기쁜 소식과 윤리적 메시지를 연결하는 중재자로서의 사명을 완수 할 수 있었다. 양심에 관한 개념의 기초에는 항상 성서가 자리한다. 그렇지만 이 성서는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전달되었고 이해되었으며, 또 읽혀진 것이다. 신자들의 각 공동체에 하나의 권위있는 명령이 된 이 성서는 모든 문화와 모든 시대와 함께 통하는 일종의 대화가 된 것이다. 

 

윤리신학의 역사는 양심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소개되었고 이해되었는지에 따라, 그리고 양심의 구체적인 개념이 실생활에 완전히 적용되어 왔는가에 따라 기록되어 왔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양심의 개념은 항상 구체적인 인간학을 반영한다는 Helmut Thielicke의 생각은 옳다고 본다. 따라서 과거의 신학자들이 양심의 개념에 대해서 말했던 그 개념들을 그저 단순하게 반복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양심의 개념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내용들이 지니고 있는 차이점들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역시 마찬가지로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다. 

 

스콜라 신학과 후기 윤리신학에 대한 신학적 반성을 통해 볼 때, 양심의 개념은 conscientia (이 개념은 어원적으로 볼 때 우리가 말하는 양심의 개념과 부합된다)와 synteresis 혹은 synderesis 사이의 매우 근소한 구분에서부터 아주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Conscientia는 단순히 인간이 선 혹은 악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취하게 되는 행위 혹은 판단으로서 이해되었으며, Synteresis는 인간이 진리를 찾고 그 진리를 실행에 옮기도록, 그리고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도록 인간을 재촉하는, 인간 내부에 있는 어떤 불변적인 요소를 의미하였었다. 이러한 의미는 예로니모 성인의 에제키엘서 주해에서 설명하고 있는 syneidesis 개념의 오염에 관한 것이 신학적 반성 안에 소개된 것으로 사료된다. 

 

Synteresis에 관한 스콜라 신학의 입장은 예로니모의 입장을 계승했었다. 즉 인간이 윤리적 질서와 윤리적 제가치를 추구해야만 하는 존재로서 이해되도록 인간을 의식화하고 인간을 평가하는 인간의 내면적인 능력으로서의 synteresis로 이해했던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를 가리켜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실천적 지성의 선천적인 성향으로 보았다. 모든 스콜라 학파의 학자들은 바로 이 면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의 윤리적 존재가 되게 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유일한 선천적인 성향이라는 사실에 의심을 갖지 않는다. 

  

3.2. 양심에 대한 기타의 이론들 

 

3.2.1. 실천적 지성에 대한 강조 

 

알베르또 막뉴스 (Alberto Magno)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synteresis는 상위의 윤리원칙으로부터 설정되는 실천적 지성의 선천적인 성향인데, 곧 상위의 윤리원칙들은 개별적 존재인 '나'와 모든 인간 존재가 직접적으로 서로 관련을 가지면서 서로에게 적용된다는 의미에서 선천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윤리원칙들은 비록 그 원칙들이 인간 행위의 전적인 윤리적 반성을 주는 원칙적인 주제들을 제공해 주기는 하지만 결코 그것들은 관념적이 아니며, 또한 단순히 어떤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주어지는 선한 것만도 아니다. Synteresis는 인간에게 "반드시 선이 행해져야만 한다", 혹은 "이웃을 네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라" 라고 말할 것이다. 

 

양심의 판단은 synteresis로 부터, 그리고 실천적으로 이웃사랑, 정의 등의 올바른 표현 혹은 선을 구성하는 것에 관한 구체적인 윤리적 판단에서부터 주어지는 하나의 실천적인 결론인 것이다. 토미스트라고 자처하면서 토미즘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윤리신학자들은 이러한 이론을 단순하게 지성적인 측면에서 이해하였었고, 더러는 실천적으로 이러한 이론이 주체의 관점에서의 지식 혹은 인식과 혼합되는 것으로 이해 하기도 했었다. 따라서 synteresis는 더 이상 인간의 일체성과 인간 마음의 내면성으로 이해되지 못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사상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이 결코 아니다. 토마스의 시각은 선의 인식에 대해 아주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한다. 선의 인식이란 여기서는 성서적 '인식'의 의미에서이다. 즉 성서에서는 내면의 마음, 구원에 대한 인식, 그리고 인간의 전체성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하나의 지식이 취급된다. "우리는 다음의 점들을 잘 제시해야만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의지의 자연적 성향은 항상 실천적 이성에 대한 인식과 연결되어 있다. 즉 창조의 법칙에는 이성으로부터 인식된 선을 향하게 하는 인간 내면의 어떤 경향이 인간 의지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경향은 이성으로부터 인식된 선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재촉한다 (이성의 선)". 

 

이외에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토마스에게 있어서 하나의 올바른 윤리적 이성과 가치의 정확한 평가는 현명의 덕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즉 양심에 대한 성실한 판단으로부터 나타나는 것은 synteresis라고 하는 선천적 성향과 현명의 덕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현명의 덕은, 존재하기 위하여, 그리고 행동하기 위하여 선을 위한 기본적인 선택을 미리 설정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위대한 신학자는 성령의 선물이 하느님의 사랑에 넘치는 의지와 동일한 종류라는 사실을, 그리고 직관적으로 선을 이해하도록 만들어 준다는 사실을 결코 망각할 수가 없다. 

 

3.2.2 의지의 선천적인 성향에 대한 강조 

 

Hales의 Alexander, 성 Bonaventura, Gand의 헨리꼬, 그리고 중세 시대의 여러 신학자들은 선(善)으로 인식하는 것을 열망하고 사랑하기 위한 의지의 선천적인 성향을 Synteresis 안에서 본다. 그리고 신비가들은 그것을 영혼의 번뜩임 (scintilla animae)으로서, 그리고 선을 위해서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을 뜨겁게 하는 사랑으로서 이해 했었다. 이러한 이해 양식을 통해서 소위 말하는 올바른 이성으로서 포착되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선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행하고 사랑하려는 의지의 선천적인 경향에서부터 나타나는 각각의 특수한 경우 안에서 역동적인 힘을 지니게 된다. Synteresis 때문에 인간의 의지는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주어진 사랑의 작은 불꽃이 된다. 인간의 의지는 인간의 내면적인 성향 안에서 하느님과 접촉하게 된다. 바로 이 때문에 의지는 양심의 이러한 이론에 대해서 내면적으로 심오한 종교적 모습을 드러내 보이게 되는 것이다. 

 

성 보나벤뚜라는 토마스 아퀴나스로부터 매우 강력하게 주장된 양심의 지성적인 면을 평가절하할 의도는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으로서의 의지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인식된 선을 따르게 하는 어떤 능력으로서의 의지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사람의 위대한 성인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와 보나벤투라 둘 사이에서 결코 서로 반대되는 사상을 찾아 볼 수는 없다고 본다. 오히려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서 자신의 사상을 보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사람은 동일한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단지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학파는 즉시 대립되지는 않았으며, 서로의 다른면에 대해서 서로의 주장만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3.3. 양심의 총괄적 개념 

 

3.3.1. 전체성과 일체성에 대한 내적 열망 

 

오늘날의 대부분 윤리신학자들은 양심은 단순히 하나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심리학자들과 임상치료자들과 보조를 함께한다. 양심이 이제 더 이상 지성 안에서만도 의지 안에서만도 자리잡지 않는다. 양심은 각 개인의 내면에 현존하는 하나의 역동적인 힘이다. 왜냐하면 지성과 의지는 우리 인간들의 심리적 및 영성적 생활의 내면적 영역 안에 함께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양심의 역동성은 "양심의 옳거나 혹은 그른 기능에 대한 인간 인격의 전체성에 대한 반응이며, 이 반응은 양심의 그러한 능력 즉 옳거나 그른 능력의 기능과 관련이 없다. 그러나 이 반응은 인간적 실존과 개체성을 구성하는 능력에 관련된다". 우리 인간은 생물학적, 심리학적, 그리고 영성적으로 볼 때 전체성 안에서 창조되었다. 인간 존재의 가장 내면적인 부분은 인간의 전체성과 일체성을 증진시키고 또 위협할 수 있는 것에 매우 민감하다. 

 

양심의 판단이라고 할 수 있는 현명함의 구체적인 판단은 다양한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위기를 판단하고 현명함의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특징은 전체성을 향하는 양심의 열망이다. 전체성으로 창조된 우리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특별한 상황 안에서 우리를 부르는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선을 구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역동적으로 체험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양심은 인간 존재의 내심과 내면적인 조화를 이룸으로써 인간이 정서적으로도 지적으로도, 그리고 의지의 의욕으로도 완전할 때 건전한 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내적인 깊이는 우리 인간을 창조의 성령과 접촉할 수 있게하고, 우리 인간이 항상 더 큰 일체성으로 옮겨갈 수 있도록 하는 장소가 된다. 이는 "인간 자신을 향해 주어지는 하느님의 부르심이 도달하는 움직임이며, 방향이며, 또한 타기트가 되는 인격적인 중심이 된다". 양심은 윤리적 동인(動因)으로서의 인간의 통합적 주체성과 함께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의지적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는 지성의 움직이뫄 정서적 움직임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 두가지 움직임은 인간이 스스로 인간이게 하는 내면적 움직임을 통해서 상호 교환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양심에 관한 이러한 시각은 교회의 좋은 전통에 결코 벗어나지 않는 시각이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과의 유사성을 지니고 비슷하게 창조된 인간에 관한 신학적 반성과 결코 유리되어 있는 시각이 아니다. 이는 특별히 아우구스티노의 사상 주류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 지식과 사랑의 원천이신 성부 하느님, 하느님의 모든 사랑을 표현하는 말씀이신 성자, 그리고 성부의 사랑과 말씀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성령은 오직 하나의 본성 안에서 3개의 위격(位格)으로서 일치된 본질, 즉 하나의 본질로 일치되어 있다. 인간 역시 그의 전체성 안에서, 즉 지성과 의지의 통합성을 통해서 같은 인격의 본질 안에서 일치되어 있는 존재이며, 따라서 인간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내면적으로 가장 가까운 모상이 된다.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양심의 통일성과 개방성을 통해서 우리 자신은 우리들의 마음과 우리들을 통한 전 세계를 새롭게 만드는 성령의 움직임을 드러내 보여주는 하나의 실제적인 표지가 된다. 인간 정신의 내면 안에서 지성과 의지가 어떤 방법으로든지 분리되어 있음을 감지 한다면, 우리는 실제로 그 중 하나를 다른 하나 없이 발전시켜 나갈 수가 없다. 비록 지성과 의지가 인간의 내면적인 일체성 안에서 어떤 커다른 고통을 겪지 않을 수가 없다하더라도 어떤 방법으로든지 지성과 의지가 서로 대치되고 있다는 사실은 지성과 의지가 지니고 있는 본질의 완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점점 커져가는 틈은 고통으로 느껴지게 된다. 이러한 상처를 느끼면서 영혼은 열정적으로 치유를 원하게 되며, 이러한 절규는 하느님의 참된 모상이 되게 하는 일치와 조화를 인간에게 다시 선사하면서 불목의 비참된 벽을 허물 수 있도록 인간을 초대하시는 성령이 현존한다는 하나의 표지가 되는 것이다. 

 

인간 본성 안에서 지성, 의지, 그리고 감성의 내면적인 일치로 인해서 진리와 선성에 대한 지성의 긴장은 없어져 버리며, 만일 그렇지 않을 때에 의지는 저항하게 된다. 그리고 의지가 선에 대한 보다 나은 인식과 실현을 통한 지성의 열망에 부응하지 못할 때에 의지는 약화된다. 인간의 참된 자아는 전체성과 진리를 향하는 열망을 지니고 있으며, 이기적 자아는 선에 대한 일종의 환상을 붸아 다니는데, 이 두가지 서로 다른 자아 안에서 분열을 경험해야만 한다면 인간은 자신의 전 존재를 통해서 고통을 느끼게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주체의 모든 힘이 지니고 있는 일치의 근원이며 샘인 영혼의 심연은 결과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될 것이고 또한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면에서 양심의 여러가지 요소들 중에서 첫번째 고통의 깊은 이유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자연적이며 전혀 예기치 못하는 고통이 된다. 신학적으로 우리는 우리들 안에서 발견되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상은 우리들 안에 있는 하느님과의 유사성이 왜곡되는 엄청난 상황 앞에서 전률 할 수 밖에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3.2. 전체성, 그리고 진리와 연대에의 개방성 

 

우리들의 양심 안에는 일치와 전체성에로의 부르심이 메아리친다. 여기서는 우리 인간 존재의 모든 가능성 - 즉 이는 동시에 하느님과 이웃에게 우리 자신을 이끌어 주는 가능성까지 포함한다 - 의 완성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 안에는 계약의 실재가 새겨져 있다. 

 

만일 모든 인간 존재가 진리와 불가분하게 결합될 수 밖에 없다는 점에 대한 지성과 이성의 긴장을 수용하지 못한다면 마음(양심)은 평화를 누릴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인간의 본성 안에는 바로 이러한 힘이 우리의 의지와 우리 전존재와 함께 강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 본성은 하나의 순수한 내적 전체성의 특징을 지니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전체성은 이 세상의 처음부터 세상 안에 현존하는 빛에로의 개방성을 전제로 한다. 빛에로의 이러한 개방성은 이웃을 향한 개방을 포함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 인간의 자의식과 선의 인식을 통한 성장은 상호 인간 관계 안에 자리 잡는 여러가지 정신들의 상호영향에서부터 창조된 상징적인 것들에 의해 아주 커다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품위와 전체성을 향한 공통적인 열망에 상응하는 이러한 상호영향을 통해 우리가 커다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면과 전체성 안에서 우리 자신을 더 확실히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사랑으로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양심을 갖춘 사람으로서의 존경을 받을 필요가 있으며, 우리 자신으로서는, 우리가 창조적인 방법으로 이러한 사랑에 응답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양심의 내적 친밀성과 역동성을 바깥으로 표출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양심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계약의 범위는 예레미아 예언자를 통해서 장엄하게 선포되었으며,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로 역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앞으로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가문과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온다. 나 야훼가 분명히 일러 둔다. 이 새 계약은 그 백성의 조상들의 손을 잡아 에집트에서 데려 내 오던 때에 맺은 것과는 같지 않다. 나는 그들을 내 것으로 삼았지만, 그들은 나와 맺은 계약을 깨뜨리고 말았다. 귀담아 들어라, 그 날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란 그들의 가슴에 새겨줄 내 법을 말한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 주어,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예레 31,31-33; 히브 8,8-12 참조). 

 

우리 존재 내부에 울려 퍼지는 법은 황금의 규약이며, 이는 또한 매우 탁월한 법이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바로 모든 율법의 종합이다.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여러분을 위해 해 주기 바라는 것을 그대로 그들에게 해 주시오. 이것이 율법과 예언자들의 정신입니다" (마태 7,12; 루가 6,31).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특성으로서는 그가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이러한 내적 율법을 이해하는데 그 으뜸을 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계약을 전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율법을 드러내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 15,12). 우리들의 마음 안에 새겨진 율법의 이러한 해석은 우리 자신이 성령을 받을 때, 그리고 성령께 마음을 열어 놓을 때 마음 깊이 받아들여지게 되며, 또한 이 마음의 법은 우리가 구원의 잔을 마시고 예수의 선포가 우리들 마음 안에 울려 퍼지는 매 순간마다 항상 새롭게 된다: "이는 새로운 계약을 위한 내 피의 잔이다" (루가 22,20). 우리들 신앙의 중심인 성체성사가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규칙적으로 거행된다면 우리는 우리들 양심을 통해서 전체성에 도달하게 될 것이며, 우리의 이웃과 일치를 이루게 될 것이다 (연대성). 

 

3.3.3. 양심에의 충실과 창조적 자유 

 

양심에 관한 제문제들을 직면하면서 하나의 기본적인 관심으로서 우리가 살펴볼 수 있었던 것은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좋은 나무가 요구된다는 점이었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성숙하고 올바른 양심에 대한 어떤 판단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 판단을 내리게 되는 상황에 관해서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창조적 양심의 판단을 위해서는 진리 안에서 살고, 진리에 따라서 행동하겠다는 강한 의욕과 함께 다음 몇가지 조건이 요구된다: 1) 양심을 부여하시는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는 역동성, 즉 전체성과 개방성을 향하는 선천적인 열망; 2) 전체성과 개방성을 향하는 자연적인 열망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성령의 선물이라고 칭송받을 수 있는 성향인 기본적인 선택의 견고함과 명백함; 3) 깊이있고 선한 기본적 선택을 깊이있게 받아들일 수 있는 모든 기질과 늘 의식적이고 현명할 수 있는 기질의 힘; 4) 창조적인 자유와 신뢰가 자리잡을 수 있고, 그러한 자유와 신뢰를 위해 늘 적극적인 임무를 지니는 환경 안에서 나타나는 양심의 상호교류; 5) 말씀을 실천하기 위하여 준비된 진리에의 탐구를 통해서 나타나는 신뢰, 창조성, 그리고 온유함 등이 그것이다. 

 

양심의 창조적인 질(質)에 대해 연구해 온 많은 신학자들은 선에 대한 직관적인 인식, 즉 선 자체와 함께 우리 자신의 고유성으로부터 가능하게 되는 인식에 관해서는 특별히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을 많이 따르고 있다. 이러한 직관적 인식은 항상 성령께 우리의 마음을 여는 정도에 따라 풍성하게 열매를 맺을 수 있게끔 하시는 성령의 업적이다. "자연적 인간 (비영성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는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만 판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영적인 인간은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1고린 2,14-15). 이는 사도 바울로와 요한 신학의 주요한 주제 중의 하나이다.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으로부터 기름 부어졌으니,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으로 말하면, 그분으로부터 받은 그 기름부음이 여러분 안에 머물러 있으니 누가 여러분을 가르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기름부음이 여러분에게 모든 일에 관해서 가르쳐 주시듯이, 또한 이미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여러분은 그분 안에 머물어 있으시오" (1요한 2,20. 27). 

 

Karl Rahner는 교회 안에 현존하는 역동적인 요소에 대해 고찰하면서 특별히 직관적 인식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 그의 직관적 인식에 관한 설명은 Abraham Maslow의 "경험-최고정점"이라는 주제를 환기시킨다. Bernard Lonergan 역시 이 주제와 관련하여 언급한다: "신앙은 종교적 사랑에 대한 인식의 형태이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신앙 안에는 사랑으로부터 잉태된 하나의 인식이 자리한다. 이러한 인식에 대해서 Pascal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데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다. 즉 마음은 이성이 인식하지 못하는 이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Pascal의 관찰한 바 그 의미는 경험과 이해, 그리고 증명에 의해서 따라오는 사건들에 대한 인식 외에도 인식에는 다른 형태의 인식이 존재하며, 또한 인식은 어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행해진 가치에 대한 판단과 그 가치에 대한 식별을 향해서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해결 방법으로서 창조적인 자유와 신뢰를 주장하는 윤리신학은 결코 인식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범위를 소홀히 취급해서는 안될 것이다. 양심이 지니고 있는 창조적인 측면을 우리는 새로운 범주를 찾아 나서는 양심의 성장 안에서 보게 된다. 곧 양심의 성장이란 발전의 실천적인 단계를 극복하고 더 높은 차원으로 완성시키도록 인간을 가르치는 양심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직관적인 인식에 대한 개방성은 인간이 자신의 양심을 통해서 자아를 실현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4. 전체성과 오류적 양심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오류적 양심에 관한 판단을 위해서 가톨릭 교회의 고전적인 전통을 담고 있는 하나의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불가항력의 무지 때문에 양심이 오류를 범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양심이 그 존엄성을 잃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진리와 선을 추구하는데 관심을 두지 않거나 죄의 습관으로 양심이 점차로 어두워지는 경우에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객관적인 진리와 가치에 대해서 살펴보는 입장이기 때문에,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양심은 절대로 오류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치 평가를 통해서 오류가 자주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공의회는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모든 의도가 올바르고 양심이 성실하게 보다 나은 해결책을 찾으려고 할 때에도 오류는 자주 개인의 탓 없이도 발생한다는 것이며, 또한 양심이 자체의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발생된다는 것이다. 

 

양심 안에는 '불가침'의 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그 무엇이 있다. 왜냐하면 양심은 더욱 밝은 빛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여정에 한 개인의 판단에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매우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양심의 고유한 판단이 오류를 범한다는 것은 하나의 엄청난 불행일 수 있다. 그러나 양심이 만일 성실성의 결핍으로써 오류를 범하게 된다면 이는 더욱 나쁘며, 하나의 윤리적 악이 된다. 가장 큰 악은 양심이 무디고 눈이 멀었을 경우이다. 공의회는 이러한 경우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데 곧 어떤 사람이 진리와 선을 추구하는데 관심을 두지 않으며, 윤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상황에서 특별히 윤리적 인식을 취하는데 소홀히 하고, 결국에는 습관적인 죄로 인해 점점 양심의 눈이 어두워지는 경우이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선과 의(義)를 추구할 때, 그의 양심은 완전무결한 종류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결정적인 확실성을 가지고 양심은 지성에 부합하도록 의지에 명령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존재의 중심 안에 이 둘이 함께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 안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명령은 비록 행위 후에 윤리적 결함이 뒤따른다고 하더라도, 또한 전적으로 잘못된 오류를 범하기까지 한다 하더라도 여기에는 분명 윤리적 당당함이 함께 한다고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오류가 태만이나 악한 의지로 인해 나타난 것이 아니라면 양심의 능력은 잘못된 판단 때문에 행동하게 된 사람에게 양심의 가책을 주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그러한 행동은 양심의 선한 움직임으로부터 지지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아무런 탓 없이 잘못 형성된 양심의 어떤 명령은 어쩔 수 없이 바른 양심의 명령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마치 어떤 하급자가 그의 상급자의 명령을 수행하도록 의무를 지니는 것과도 같은데 왜냐하면 비록 상급자의 명령이 하급자가 수행한 것과는 다른 일이었다 하더라도 하급자는 상급자의 명령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잘 이해한 다음에 그 명령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리에 충실하면서, 그리고 진리에 따라 행동할 의도로써 주님의 의지를 따르기로 노력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들 행위의 결과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을 살피실 것이다. 따라서 Newman 추기경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매우 정확한 지적이라고 본다: "어떤 오류적 양심에 대한 복종도 역시 빛에 도달하기 위한 길을 밝혀준다는 점을 나는 지지 합니다". 

 

Alfonso de Liguori의 윤리신학과 사목신학 안에서 양심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점이 꼭같이 강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어떤 참된 양심이 교회의 실천적인 법 혹은 사회법, 혹은 자연법에서의 필요한 면을 실생활로 내면화 시킬 능력이 없음이 인정되는 경우를 언급하면서 극복불가능할 정도의 오류적 양심에 대해 말한다. 이렇듯이 실존적인 측면에서부터 이러한 양심에 대해서 오류라는 판단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선에 대한 깊은 인식을 향하는 과정에서 첫번째 과정 전에 두번째 과정을, 그리고 두번째 과정 전에 세번째 과정을 미리 행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객관적이고 이론적인 관점에서도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양심은 오류를 범하면서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실존적으로 생각할 때 주체는 더 빛나는 광채를 향해 더 좋은 방법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이 망각되어서는 안된다. 만일 어떤 사목자나 고백신부, 혹은 그와 비슷한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그가 사목을 맡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한 양심을 거슬러 행동하도록 하거나 객관적 규범을 준수하는데 있어서 무분별하고 경솔하게 가르침으로써 그러한 점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계명이나 특수한 규범들을 단순하게 받아들일 능력이 없게끔 만들 때, 이는 분명히 양심의 품위를 거스르는 매우 중대한 죄가 된다. 

 

성 알퐁소의 시기에는 양심의 품위 보다는 규범과 질서의 일관성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교회론학자들과 윤리신학자들이 많이 있었다. 성 알퐁소는 특별히 진실하지만 잘못 형성된 양심 때문에 자신이 창립한 수도회에도 많은 어려움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양심을 존중하여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 때문에 많은 친구들로부터 주목을 받았었다. 알퐁소에게 있어서는 인간의 양심이 억압받는 것을 보는 것 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세운 수도회가 없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 더 낫다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잘못 형성된 양심에 대한 판단은 여러가지 단계 안에서, 그리고 여러가지 다른 이유로써 잘못일 수도 있다. 이는 또한 진리 혹은 선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혹은 충분한 벌을 치루지 않은 과거에 범한 죄의 맹목적인 영향의 중단이나 충분히 조정되지 않은 열정의 변화된 힘 등을 이끌어 내는데 있어서 이따금 커다란 태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만일 사람이 자기 탓으로 잘못 형성된 양심의 명령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그 명령을 따르든지 반대하든지 간에 죄를 범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비록 객관적으로 볼 때에는 그의 행위가 올바르다고 하더라도 그가 자신의 양심을 거슬러 행동했다면 그의 죄는 더욱 직접적이고 명백한 죄가 된다. 그가 양심의 명령을 거슬러 행동했기 때문에 그의 내면적 전체성과 객관적인 선과 진리로서 이해된 것과의 일체성이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이다. 

 

비록 오류적 양심에 대한 판단이 정정될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양심이 인간 내부에 지속되는 한에는 그러한 판단은 실제적으로 그 사람 안에 지속되어 남아있게 된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자기 탓으로 오류적 양심을 가진 사람은 단지 두 개의 선택을 가질 수 밖에 없고, 따라서 그 사람은 필연적으로 죄를 범하게 된다고 단정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한 사람에게도 세번째 선택이 가능하다. 즉 자신의 마음의 심연에 자리 잡고 있는 오류라는 타락된 원천을 정화하면서 양심의 명령을 교정하는 것이 바로 세번재 선택인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 사람이 마음을 바꾸기를 주저하거나 거부한다면 그사람의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그의 행동은 그사람의 양심으로부터의 모든 결정을 오염시키게 되고 만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외에도,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신앙 고백을 하고서 자신이 잘못된 행동을 한 일에 대해서조차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의 고유한 양심을 거슬러서 죄를 짓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친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느 가톨릭 신자가, 즉 이미 가톨릭 신앙 안에서 이미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탓 없이라도 가톨릭 교회를 떠나야만 하는 것이 양심적으로 죄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잘못 형성된 양심에 관해서는 오늘날 매우 복합적인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는 상태이며, 특별히 심리학이나 사회학의 영향 아래 많이 다루어지고 있다. 

 

양심에 대한 이렇듯이 난해한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만일 그러한 문제들에 부딪히는 사람이 진실되게 진리를 찾으면서 생활하면서 자신의 결정을 숙고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그러한 문제들에 관련된 새로운 문제들이 항상 주의를 요한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알아채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가 내리게 되는 어떤 특별한 결정이 그의 양심적 판단에 있어서 절대적인 품위를 지니게 된다는 일반적인 기준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실된 양심의 결정이 주는 표지는 내적 평화이며, 사랑과 정의를 요구하는 어떤 행위를 행하게끔 하는 모든 새로운 기회에 항상 활짝 개방되어 있는 자의식일 것이다. 

 

3.5. 혼미한 양심 

 

혼미한 양심은 오류적 양심의 한 형태로서, 두 가지 다른 의무 앞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더라도 죄를 범할 것 같아 두려워하는 것이다. 과부인 어머니가 어느 친절한 가정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녀는 그 가정의 아버지가 범죄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녀는 도움을 준 가정에 감사해야 할 의무와 자기가 증인으로 채택된 법정에서 진실을 말해야 할 의무를 놓고 혼란과 갈등을 느낀다. 

 

이런 경우에, 만일 양심의 결정을 미룰 수 있다면 먼저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위하여 행동을 미루고 그것에 대하여 심사숙고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결정을 미룰 수 없다면 덜 악하다고 생각되는 쪽을 선택하거나 또는 그래도 결정할 수 없다면 두 가지 중에 어느 쪽이든 선택해야 한다. 이러한 규범을 지키는 것은 형식상의 죄의 문제는 엾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혼란한 상황을 모두 벗어나는 것은 그 사람에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불가능과 자유의 결핍은 죄를 성립시키지 못한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 또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서로 상충되는 의무들의 윤리적 비중이 거의 같다고 생각될 때 보통으로 자연법의 의무가 교회법이나 시민법과 같은 실정법의 의무보다 우선한다는 원칙이다. 따라서 간호사가 주일미사에 참여해야 하는 교회법의 의무와 위독한 환자를 간호해야 할 애덕의 의무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면 애덕의 의무를 실정법의 의무보다 우선적으로 지켜야 한다. 그 외에, 확실한 의무가 개연적이거나 의심스러운 의무보다 우선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혼미한 양심이 오류적 양심의 한 형태로 분류되는 것은 상충되는 두 개의 의무 중에 하나만을 택해야 할 객관적인 의무가 있는데 그 두 개를 놓고 혼란과 갈등을 빚기 때문이다. 사람이 동등한 구속력을 가진 두 개의 의무에 직면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정의와 지혜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결국 그 중에 하나만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윤리 규범에 밝지 못한 사람들에게 흔히 생긴다. 가끔은 전문가나 공동체에 있어서도 의무들이나 권리들을 놓고 특별한 갈등을 빚을 때 혼란한 상태에 놓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이동익 신부님 강의록 / 이동익 신부님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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