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0일 (일)
(녹)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강론자료

2010-03-14.....사순 4 주일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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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0-03-13 ㅣ No.902

사순 제 4 주일 (다해)

여호수아 5,9ㄱ.10-12               2코린 5,17-21              루카 15,1-3.11-32

2010. 3. 14. 등촌3동

주제 : 하느님의 자비

온 세상이 시끌벅적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강을 파헤친다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반대의 소리를 내고, 우리와 떨어진 몇몇 나라에서는 지진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바다도 요동치지요?

  이 자리에서 불안함을 말해야 할 것은 아니지만, 세상이 이렇게 요동칠 때에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그 자세가 당장은 세상을 안정시킨다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처방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인데, 그 일에 나는 언제쯤 참여해야 할 것인지 생각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오늘은 사순시기 4번째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독서보다 아주 많이 길었습니다. 긴 내용을 읽는 것도 쉽지 않지만, 듣는 일도 쉬운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중요 인물은 3명입니다. 아버지와 큰 아들과 작은 아들입니다. 이들 가운데 주인공은 누구이겠습니까?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주인공을 누구라고 하느냐에 따라서, 같은 공간에 들어와 있는 우리가 삶에서 찾는 바는 완전히 다를 것입니다. ①아버지라고 생각한다면,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복음말씀을 되새길 수 있습니다. ②큰 아들이라면 세상에서 더 많은 즐거움을 가질 수 있도록 특혜를 베풀어주지 않은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에서 오늘 복음내용을 생각할 것입니다. ③작은 아들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한다면, 요즘 ‘니트족’에 속하는 젊은이들이라고 분류된 사람들처럼, 부모님을 착취하고 그분들을 이용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찾는 방법을 배우는 것으로 복음을 읽을 수도 있습니다. 주인공은 누구이겠습니까?

  얼핏 생각하면, 복음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참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자녀를 낳은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생각한다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부모로서 자녀에 대한 올바른 교육방법에는 어긋나는 것이죠? 먼 산과 동구(洞口) 밖을 바라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기다리는 일밖에 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가 다 아는 내용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하느님의 시각에서 올바르게 해석하지 않는다면 안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잘못 아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내용은 단순히 아버지와 큰아들, 작은아들로 이루어진 가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를 이야기한 내용은 아닙니다.

  잘못 알아듣는다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아버지는 집안의 대들보인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을 갈라놓고, 가정의 분란을 일으키는 장본인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또 큰 아들은 자기 할 일을 다 하면서도 그 삶의 공로를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속이 좁은 녀석이 되고 말 것이고, 작은 아들은 세상에서 내 것이든지 남의 것이든지 재주껏 가져다가 얼른 쓰고 난 다음에, 내 품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그저 말로만 잘못했습니다....하고 말해도 괜찮은 본보기를 알려주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 말씀을 이렇게 잘못 알아듣는다면, 이 내용을 우리가 미사의 중요한 시간에 읽을 이유도 없고 들어야 할 목적도 없게 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아버지는 인류를 위하여 특별한 마음을 가지셨던 하느님이셨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올바른 태도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전례의도에 따라 첫 번째 독서로 배정된 여호수아 역사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선언 때문입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서 이집트의 수모를 치워버렸다”는 선언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이 소리를 하느님에게서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소리를 하느님에게서 듣는 사람이 되려면, 우리가 지니고 살아야 할 자세를 바르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생각에 따라, 다 똑같은 신앙인이라고 말은 하겠지만, 세상 삶에서 맺는 열매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아버지로 등장하는 하느님은 그저 모든 것을 다 참고 견디어내십니다. 재산을 다 끌어 모아, 집을 나간 아들이 언제라도 돌아올까 싶어서 목을 내놓고 기다리는 어리석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참 어리석은 신(神)이지만, 그에 비교하여, 오늘 복음에는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의 모습으로 나옵니다만, 그 하느님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참 똑똑합니다. 세상살이에서 내 맘대로 하고, 잘 되지 않는 일은 하느님께 투정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똑똑하다고 생각할 사람이 하느님이신 아버지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했기에, 큰 아들은 자기가 들인 노력만 생각하고 반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이용합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하느님은 과연 언제까지 똑똑하다고 생각할 사람들을 향해서, 그 하느님은 어리석음을 참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실상 그 대답은 저도 모릅니다.

  신앙인이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지 않는다면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의 처음 시작은 부모님을 통해서 받은 생명입니다. 그 이후에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얘기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에 붙잡혀 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랑을 실천하며, 화해를 이루며 산다는 말도 될 것이고, 죄를 만들지 않고, 선을 실천하며 산다는 말도 될 것입니다. 특정한 사람이 잘못했다고 내 앞에 무릎을 꿇으면 내가 그때 용서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버릴 수 있는 자세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방법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자비, 예수님의 삶을 통하여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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