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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 윤리적 금융? 신앙적 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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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10-02 ㅣ No.774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 윤리적 금융? 신앙적 대출?

 

 

돈 놓고 돈 먹는 시대 : 경제와 금융

 

우리 시대 자본주의의 모습은 노동을 통해 자본을 축적하는 산업자본주의보다는 자본을 통해 자본을 축적하는 금융자본주의 형태를 드러낸다. 경제에서 금융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져 가고 있으며, 제조업 상품의 생산이나 교역보다는 금융 상품과 금융 거래를 통한 이윤 창출의 계기와 규모가 커지고 있다.

 

세계 금융자산의 규모가 세계총생산의 세 배를 넘는다. 제조업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세계가 금융의 지배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금융이 실물경제를 보조하고 지원하는 차원을 뛰어넘어 금융 자체가 경제활동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각 국가들에서는 금융산업 육성을 세계 경쟁력의 비결로 여기며 이에 진력한다. (동북아 금융허브 조성, 메가 뱅크 육성 등의 구호를 신문 지상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 금융자본의 행태는 자본을 투자하여 상품을 생산하고 시장을 확장하는 일보다는 시중에 유통되는 과잉화폐자본(연금 펀드나 사회보장 저축 등의 형태로 존재하는 일종의 사회적 자본)을 모아 부동산과 주식시장에 재투자하여 부동산 가격과 주가를 끌어올리는 일에 더 몰두하는 경향을 보인다. 금융시장을 위험한 카지노 판으로 만들고 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는 이러한 금융자본의 위험과 한계를 드러낸 사건이었다.

 

교회는 이러한 금융자본의 속성에 대해 분명하게 경고한다. “금융을 잘못 남용하여 실물경제에 커다란 혼란을 가져왔다면 이제는 구조와 운용 방법을 쇄신하여 금융을 더 나은 부의 창출과 발전을 지향하는 도구로 되돌려놓아야 합니다”(“진리 안의 사랑”, 65항). 교회의 입장에 따르면, 오늘날의 금융경제는 “실물경제에 도움을 주고 궁극적으로는 민족과 인류 공동체의 발전에 이바지하여야 할 본래의 근본적인 역할을 포기한 것이다”(“간추린 사회교리”, 369항).

 

물론 교회 역시 경제와 금융은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현대 시장 경제의 전형적인 대규모 투자는 금융시장의 중요한 중재 역할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금융시장은 특히, 경제 사회 제도의 전반적 발전에서 저축의 긍정적 역할을 높이 평가하게 해주었다.”(“간추린 사회교리”, 368항)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다만 교회가 강조하는 것은 금융제도 전체가 윤리적이고 참된 경제 발전을 위한 도구라는 그 본래의 역할을 수행하는 방향으로 늘 쇄신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돈이 돈을 낳는 시대 : 신용대출? 고리대금?

 

이 금융자본주의 시대에는 더 이상 사람이 노동을 하고 노동이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일하고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돈이 돈을 버는 시대, 돈을 벌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휴대전화를 통해, 인터넷 메일을 통해 몇 천만 원까지 신용대출을 해줄 수 있다는 문자를 귀찮을 만큼 받는다. 외견상으로는 대출의 전성시대다. 하지만 현대 신용대출의 금리는 연 40% 정도의 고금리다. 대기업의 캐피털 회사들마저도 고금리의 대출을 하고 있다고 대통령이 지적할 정도다. 대기업의 캐피털 회사의 신용대출 금리가 연 40% 정도라면 숱한 개인 사금융들의 신용대출 금리는 연 50%를 상회할 것이다. 대출이 아니라 대출을 빙자한 악덕 고리대금의 수준이다.

 

가톨릭교회는 성서적 전통을 근거로(탈출 22,24-25; 레위 25,36-37; 신명 23,20-21) 고리대금을 반대해 왔다. 특히 중세 교회는 그것이 소비를 위한 대부(대출)이든 생산을 위한 대부이든 모든 형태의 신용거래를 고리대금으로 비난하며, 고리대금을 법으로 금지했다. 하지만 상업의 발달로 고리대금업의 필요성이 높아지자 교회는 유다인들에게 고리대금업자의 역할을 떠맡겼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 상인’에 나오는 유다인 악덕 고리대금업자는 이러한 중세시대의 풍경을 반영한다.) 물론 중세기 초 수도원들이 때때로 일종의 신용기관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중세 신학자들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 가정에 기반을 둔 자급자족적 경제 형태와 상업적 형태의 화폐경제를 구분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받아들인 중세 신학자들은 화폐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돈은 돈을 낳지 않는다(Nummus non parit nummos).”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자를 겨냥하는 모든 신용거래를 부당한 것으로 생각했다.

 

오늘날의 교회는 신용대출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고금리의 대출(고리대금업)을 비난한다. 교회에 따르면 고리대금업은 우리 시대에도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재앙이다. “폭리를 추구하며 탐욕스런 행위로 인류 형제의 굶주림과 죽음을 유발시키는 상인들은 간접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다.”(“간추린 사회교리”, 341항)라고까지 말한다.

 

따라서 교회는 “사회의 가장 취약한 구성원들이 고리대금에서 보호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 고리대금과 절망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착취를 막아야 한다”(“진리 안의 사랑”, 65항).

 

 

소액금융, 소액대출 : 윤리적 금융을 위하여

 

최근 신문 지상에서 ‘햇살론’, ‘미소금융[아름다운(美) 소(少)액 대출]’, ‘희망홀씨 대출’이라는 일종의 서민전용 대출상품에 관한 기사를 자주 목격하게 된다. 이들은 저소득·저신용자들을 위한 착한 금리(낮은 금리)의 상품이다. 가난한 이들의 생계유지와 자립을 위한 신용 소액대출 상품이다.

 

소액금융(microcredit)이란 제도권 금융을 이용하기 힘든 영세민의 자활을 도우려는 무담보 · 무보증 소액대출을 의미한다. 소액금융에 대한 아이디어가 전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받으면서 확산된 것은, 200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방글라데시의 은행가 무하마드 유누스(Muhammad Yunus)가 설립한 그라민 은행(Grameen Bank)이 성공하면서부터다.

 

유누스는 1976년 고리대금업자에게 시달리는 마을주민 42명에게 자신의 주머닛돈 27달러를 빌려준 것을 계기로 소액금융 사업에 뛰어들어 1983년에는 방글라데시 말로 ‘마을’을 뜻하는 ‘그라민’ 은행을 설립하게 된다. 그라민 은행 고객의 대부분은 방글라데시에서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다.

 

한국형 소액금융의 대표적 상품인 햇살론, 미소금융, 희망홀씨 대출은 그 운영과 규모와 대출 금리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서민들의 고금리 부담 완화를 목적으로 내건 햇살론은 사업운영자금, 창업자금, 생계자금 등 대출되는 자금의 종류가 가장 다양하다.

 

햇살론의 사업운영자금은 2,000만 원까지, 창업자금은 5,000만 원까지, 생계자금은 1,000만 원까지 각각 대출이 가능하다. 저신용자 창업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미소금융은 사업운영자금과 창업자금을 지원한다. 대출 한도는 사업운영자금은 1,000만 원까지, 창업자금은 5,000만 원까지다.

 

반면 서민의 생계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희망홀씨 대출은 생계자금만을 지원한다. 대출 한도는 500만 원부터 2,000만 원까지다. 미소금융의 금리는 연 4.5%의 저금리이며, 희망홀씨 대출 금리는 연 9.9%, 햇살론의 금리는 연 10-13%이다(일간 신문 기사들 참조).

 

교도권 역시 소액금융의 강화와 활성화를 촉구한다. 교회는 “소액금융 대출은 전반적인 경제 침체기라 하더라도 사회의 더욱 취약한 구성원들을 위하여 새로운 사업과 새로운 영역에 도전해 나감으로써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진리 안의 사랑”, 65항)고 믿는다.

 

 

신용협동조합 : 신앙적 대출을 위하여

 

신용협동조합(Credit Union)은 공동유대를 가진 사람들끼리 금융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발적인 조직이다. 세계 협동조합의 역사를 보면, 고리대금 문제를 자율적으로 해결하려는 신용협동조합 운동은 그 출발부터 종교적, 윤리적 색채가 강하였다.

 

신용협동조합 창시자 프리드리히 라이파이젠(Frederich Wilhelm Raiffeisen, 1818-1888년)은 그리스도교 윤리에 입각한 형제애와 사회윤리를 토대로 독일에서 농민들과 함께 신용협동조합을 조직했다. 교회도 역사 안에서 신용조합의 여러 경험들을 소중히 생각한다. 베네딕토 16세 교황 역시 윤리적 금융과 소액대출의 강조를 위해 중세 시대의 일종의 신용금고였던 ‘신심의 산’의 예를 들고 있다(“진리 안의 사랑”, 65항).

 

한국 신협의 역사 안에도 가톨릭교회의 영향이 깊이 미치고 있다. 한국 신협의 뿌리는 1960년 5월 1일 부산 메리놀병원에서 메리 가브리엘라(메리놀 수녀회) 수녀를 비롯해 부산 메리놀 병원과 성 분도 병원, 가톨릭 구제회 직원들, 부산 중앙본당 신자 27명이 설립한 ‘성가신용협동조합(Holy Family Credit Union)’이다. 같은 해 서울대교구 장대익 신부에 의해 서울대교구 신자들을 중심으로 ‘가톨릭 중앙신용조합’이 설립되었다.

 

 

신용협동조합 : 새로운 성찰과 쇄신

 

한때 활발한 활동을 한 신협이 경쟁력 강화를 위한 금융의 대형화와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려는 금융자본주의의 조류에 밀려 쇠락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조합원들의 공동체 의식 고양과 고리대금에 시달리는 서민들을 위한 금융의 지향이라는 신협의 정신은 점점 희박해지고 몇몇 개개인들에 의해 신협의 운용방식이 기업적 금융 기관으로 자리매김할 위험이 많아지고 있다.

 

우리는 빈곤의 악순환이 심화되고 가난한 이들이 새로운 시도를 할 기회마저도 갖지 못하는 금융자본주의 시대, 따라서 그리스도교 정신에 입각한 서민 대중 금융 기관으로서의 신협의 역할이 더 필요해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윤추구가 목표인 일반 금융 기관의 소액 신용 대출은 금융기관의 속성상 어느 정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윤추구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신앙에 바탕을 둔 생활협동조합으로서 교회의 신협이 소액금융의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의 신협운동에 대한 새로운 성찰과 쇄신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 정희완 요한 - 안동교구 신부. 문경 모전동성당 주임이다.

 

[경향잡지, 2010년 9월호, 정희완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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