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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 노동조합 운동의 새로운 상황에 대한 교회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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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14 ㅣ No.763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 노동조합 운동의 새로운 상황에 대한 교회의 이해

 

 

7월 1일부터 시행된 타임오프(근로시간 면제) 제도 때문에 노사간 갈등 이 표면화되고 있다. 타임오프는 노동조합 전임자를 폐지하는 대신 단체교섭을 위한 활동을 하거나 노조원들의 고충을 처리하는 일, 또 산업재해 처리와 예방활동 등 노무관리 성격을 지닌 업무에 종사한 시간을 근로시간으로 인정하고 임금을 지급하는 제도다.

 

회사 규모에 따라 타임오프 한도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특히 대기업의 경우 노조 전임자를 평균 72%까지 대폭 축소해야 한다. 따라서 노동계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정부는 이 제도가 국제노동기준에 부합한다고 강조하지만, 타임오프 제도의 가장 큰 문제는 노사가 자율로 결정할 문제를 왜 국가권력이 개입하느냐다. 노동계는 이 제도를 노조 활동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에서 노동자 파업에 대한 고정관념은 매우 부정적이다. 언론에 소개되는 노동3권 행사는 붉은 머리띠, 수많은 깃발, 집단시위와 농성 등으로 상징된다. 이는 텔레비전에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노동자 권익 주장 현장에 대한 보도 장면이다.

 

언론은 파업의 원인에 대한 심층 보도보다 노동자들의 실력 행사에 보도의 초점을 주로 맞춘다. 방송사는 교통 체증 등으로 시민들의 불편을 매시간 반복해서 방송한다. 이는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긴요한 정보제공이라는 측면이 있지만 그 역기능은 심각하다. 노동운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뿌리를 깊고 광범위하게 만들고, 노동자 파업 등으로 발생하는 부수적 현상이 강조되면서 노동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일반화시킨다”(미디어 오늘, 2009년 12월 9일자 사설에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노동조합과 노조운동에 대해 일반인은 대부분 무관심하거나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다. 타임오프제가 실시되었지만 일반시민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타임오프제에 대한 저항으로 노조들이 파업을 시도하면, ‘민주노총과 결부된 습관적 파업이 또 시작되는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하고 만다.

초기 자본주의 체제의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노동자의 권리와 인간 노동의 존엄성을 확보하고자 결성된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의 연대를 지향하는 노조운동이 왜 이 시대의 한국 사회에서는 부정적 함의를 품은 것으로 부각되고 있을까?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이 ‘반노동조합 정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노동조합에 대한 교회의 이해

 

교회는 언제나 노동조합을 장려하고 지지해 왔다(“진리 안의 사랑”, 64항). 교도권은 노동조합이 사회 전체의 공동선이라는 틀 안에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증진하고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을 촉진하며 노동자들에게 사회의식을 길러줄 의무가 있음을 천명한다(“간추린 사회교리”, 306-307항).

 

노동조합의 중요성에 대한 교회의 이해 밑바닥에는 인간 노동의 존엄성과 노동자들의 연대성에 대한 교회의 확고한 신념이 깔려있다. 교회는 노동과 자본의 상호 보완 관계를 강조하지만, 노동은 자본보다 본질적으로 우위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간추린 사회교리”, 277항).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당신의 선임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인간 노동의 존엄성을 드러내고자 사용한 용어 “품위 있는 노동”을 부연 설명하면서, 그 용어의 의미 안에는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발언권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노동”이 포함됨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진리 안의 사랑”, 63항). 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노동조합의 결성은 “노동자들간의 참된 연대의 실천”을 의미한다(“간추린 사회교리”, 305항). 교회는 더 나아가 노동자의 권리가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노동조합의 정치적 영향력 행사마저도 인정한다(“간추린 사회교리”, 307항).

 

하지만 동시에 “노동조합은 우리 사회의 새로운 문제들에 대처하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진리 안의 사랑”, 64항)라며 오늘날 노동조합 운동이 변화되고 쇄신되어야 함을 지적한다. 사실상 세계화 과정으로 설명되는 현대의 사회 경제 상황은 노동 환경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이는 노동조합의 쇄신과 새로운 형태의 연대를 요구한다.

 

“연대 활동의 범위를 확장함으로써 전통적 의미의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또는 계약직 노동자들, 국제적 차원에서도 점점 더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기업 합병으로 일자리 위협을 받는 이들, 일자리가 없는 이들, 이민자들, 계절노동자들, 시대에 발맞춘 직업 교육을 받지 못해 노동 시장에서 쫓겨나 적절한 재교육 없이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이들까지 보호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간추린 사회교리”, 308항).

 

 

노동 환경의 변화와 노조운동의 쇄신

 

세계화 현상은 자본의 세계화를 가져왔다. 자본은 글로벌 플레이어가 되어 저렴한 노동력과 원료와 에너지원을 찾아 국경을 넘어 움직인다. 또한 이 자본의 세계화는 노동의 세계화를 가져왔다.

 

고용주(자본가)들은 저임금과 재능을 갖춘 노동력을 선호하여 이러한 조건을 갖춘 개발도상국의 노동자들이 선진국의 노동자들을 대체하는 현상이 자주 벌어진다. 그리하여 선진국 노동자들은 퇴출의 공포에 시달리고, 자국에 들어온 이주노동자들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또한, 합법적으로 엄격한 절차와 통제를 거쳐 이동하는 이주노동자뿐 아니라 생계를 위해 목숨을 걸고 불법으로 국경을 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 역시 증가하고 있다. 특히 이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인권침해는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한편, 생산의 자동화는 단순 노동자들의 자리를 점점 빼앗아가고 있다. 물론 기계가 인간을 대체할 것이라는 두려움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대의 자동화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생산성을 높이고 노동력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사실 예전에는 사회학자들이 산업의 자동화가 이루어지면 화이트칼라가 더 늘어나고 서비스 부문의 일자리가 더 창출되리라 전망했었다. 하지만 오늘날 실제로는 사무직과 서비스직의 일자리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자본가와 소수의 전문가(전문직 노동자)들만 살아남고 일반 노동자의 고용 기회가 점점 적어지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또한 생산 기술의 발전과 생산성을 중시하는 기업환경은 점점 노동자들의 퇴출 나이를 낮추고 있다. 노동자가 가진 기술의 유효기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기술 혁신은 또한 특정 직업들을 사라지게 하고 새로운 직업들을 생겨나게 한다. 이러한 생산 현장의 급박한 변화는 노동자들의 적응 능력을 끊임없이 시험하고 있다. 따라서 나이 든 노동자를 밀어내고 젊은 노동자로 대체하는 현상이 점점 더 강화되고 있다.

 

이러한 노동의 세계화(글로벌 노동력의 유입), 생산의 자동화, 고령 노동자의 퇴출 등 노동환경의 변화는 노동자들의 연대로서의 노동조합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요구한다.

 

노동조합 운동이 이러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또 쇄신되지 않는다면, 노조운동이 자칫 노사간 대립이 아닌 노노(勞勞)간 대립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경제학자 이정우가 지적하듯이, 쇄신하지 않는 노동조합은 이기적 집단이 되어 “노동의 고용을 감소시켜 노동자 전체에게 해를 끼칠 뿐만 아니라 비조합원의 고용기회를 제약함으로써 노동자 계급의 소득분배 상태를 더욱 불평등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는 더더욱 노노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정규직 노동자로 구성된 노동조합은 조합원들을 비정규직으로 전락하지 않게 하고자 보호막을 치고, 의도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에 무관심한 경향이 있다. 더욱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임금과 복지의 극심한 차이와 비정규직이 느끼는 인격적 모욕감 등은 같은 노동자라 해도 신분과 이해관계가 확연히 다른 두 노동자 집단으로 분리시키고 있다. 한국 노동 현장에서 보면, 고용주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착취하는 측면도 있지만,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착취하는 측면도 적지 않다.

 

오늘날에는, 비정규직 노동자와의 연대, 대기업 노조와 중소기업 노조의 연대, 이주노동자와의 연대에 대해 노조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 가에 노동자들의 연대로서의 노동조합의 정당성이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교회 안의 노조?

 

한국 교회 역시 대학과 병원 등을 운영하면서 실제로 노조운동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과연 한국 교회는 사회교리의 가르침을 준수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교회가 고용주의 입장에서 교회 기관 안의 노조운동에 접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른 일반 사업장의 노동관행과 별다른 차이점이 없는 것은 아닌지? 이랜드 사태에서처럼 노조운동 자체를 비성경적이고 공산주의적이라 몰아붙이는 한국 보수 개신교적 시각과는 분명히 다르지만, 한국 가톨릭교회 역시 사회교리의 이론적 가르침과 교회 안의 실제 현실의 차이를 실감하고 있지는 않은지?

 

교회 기관 안의 비정규직 문제 역시 심각한 도전이다. 강남성모병원 사태에서 볼 수 있었듯이, 교회 기관 역시 비정규직 활용을 통해 인건비를 절감하고 시장에서 생존해야 하는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한국 교회에서는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가 교회 내의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노력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최기산 주교가 “노동자가 많은 인천교구 교구장이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인 나에게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더 적극 발언했으면 하는 기대가 있지만, 본당마다 비정규직이 있기 때문에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한 솔직한 발언은 교회 안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개선 가능성을 보여주는 반성과 성찰의 첫걸음으로 볼 수도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신앙적 가르침을 말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실천하기란 여전히 어렵다. 교회 자신이 그 신앙적 가르침을 살아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선포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수 있다. 사실, 사회교리는 세상을 향한 도전이지만, 동시에 언제나 교회 자신을 향한 도전이기도 하다.

 

* 정희완 요한 - 안동교구 신부. 문경 모전동성당 주임이다.

 

[경향잡지, 2010년 8월호, 정희완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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