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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새 생활의 새 원칙 - 텬쥬십계(천주십계, 天主十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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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8 ㅣ No.364

[신앙 유산] 새 생활의 새 원칙 : 텬쥬십계(天主十誡)

 

 

머리말

 

구약성서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보면 하느님은 자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인들한테 선택된 백성으로 살아가야 할 지침을 제시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천주십계로 알려진 이 지침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의 백성들은 구원에 이르게 된다. 십계명은 하느님이 선택한 백성으로 살아나가는 계약으로 이해되어 왔다. 신약시대에 들어와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천주십계를 진복팔단(眞福八端)의 가르침을 통해서 완성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가 세워진 이후 천주십계는 진복팔단과 함께 그리스도교 윤리의 기본으로 인식되었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천주십계와 진복팔단의 정신은 서로 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십계에 대한 인식

 

천주교 신앙이 동양에 전파되는 과정에서 십계에 관한 가르침도 함께 전해졌다. 십계는 천주교의 윤리 규범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제시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에 관한 독자적 해설서가 한문으로 간행되기 시작하였다. 십계에 관한 한문 단행본을 간행하여 이를 본격적으로 서술하기 시작한 사람은 엠마누엘 디아즈(Emmanuel Diaz, 陽瑪諾, 1574-1659년)이다. 디아즈 신부는 “성경직해”와 “경세금서”를 저술하거나 번역한 인물인데, 그는 1642년 “천주십계직전”(天主十誡直銓)을 지었다. 이 책에서는 십계명의 각 조목을 신학적 측면과 유교문화적 측면에서 상세하게 해석하고 있다. 우아하고 독특한 문체로 저술된 이 책은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한테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판을 거듭하다가 1798년 북경에서 구베아(Gouvea) 주교의 감수로 재간되었고, 이때를 전후하여 조선교회에도 전해졌다. 조선교회에서는 이 책이 ‘십계진전(十戒眞銓)’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신도들 사이에 필사본으로 나돌고 있었다.

 

십계에 관한 한문 단행본 가운데에는 프랑소와 브랑카티(Francois Brancati, 潘國光, 1607-1671년)가 지은 “십계권론성적”(十戒勸論聖蹟)이 있다. 예수회 회원인 브랑카티 신부는 1650년 중국 호남성에서 1권으로 된 이 책을 간행하였다. 이 책자는 간단명료한 문체로 쓰였고, 계명별로 실천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한편 장 두아르테(Jean Duarte, ?若望, 1671-c.1751년)는 “십계약설”(十戒略說)을 지었다. 그는 중국 호남성에서 오랫동안 선교사로 활동하였고, 옹정제(壅正帝) 시대에 일어난 박해를 극복해 가면서 중국의 예수회원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단권으로 간행된 이 책은 천주십계에 대한 간단한 해설서이다.

 

이상과 같은 책이 한문으로 쓰여지는 과정에서 십계명과 중국문화의 접촉은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책자들에는 당시 유럽 신학이 가지고 있던 십계명에 대한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그때 유럽 교회는 얀센(Jansen, 1585-1638년)의 엄격주의 신학사조가 강조되고 있었다. 이 얀세니즘은 1653년에 단죄된바 있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가톨릭 교회의 윤리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책자들이 얀세니즘의 윤리관을 완전히 불식하지는 못하였다. 조선교회는 책자를 통해서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이전부터 얀세니즘 신앙풍토가 이식되어 가고 있었다.

 

 

“천주십계”의 구성과 전래

 

우리 나라에 천주십계가 전래된 것은 교회창설 직후부터로 생각된다. 당시 교회에서는 신도들이 실천적 윤리생활을 해나가는 데에 새로운 기준으로 ‘천주십계’를 제시했고, 신도들은 이를 실천해 나갔다. 1801년 신유교난 때 압수된 천주교 서적 가운데에는 “쳔쥬십계”라는 한글 책이름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한문 교회서적으로 “십계”라는 책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에서 예수회원들이 간행한 천주교 서적 가운데, 그 책이름이 “천주십계” 또는 “십계”로 된 제목을 찾아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1801년 당시 조선에서 번역된 ‘천주십계’는 중국에서 간행된 한문 교회서적의 번안물이거나 독자적인 저술일 가능성도 있다. 한문본 교리서인 “십계”도 십계에 관한 책이름이 축약되어 표기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책자 가운데 우리가 검토하고자 하는 책자는 “텬쥬십계”(天主十誠, 1冊, 9.8cmx15.5cm)이다. 이 책이 1801년에 압수된 “천쥬십계”와 같은 내용의 책자인지는 알 수 없다. 이 책은 십계명을 순서대로 제시하여 설명하면서 각 계명을 간략히 서술함과 동시에 그 계명에 위배되는 행위가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있다. 즉 이 책에서는 먼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논하는 상삼계(上三誡, 제1계-제3계)를 논한다. 다음은 인간 상호간의 관계로서 인간의 생명과 부부간의 신의, 재산과 증언의 중요성을 밝혀주는 하칠계(下七誡, 제4계-제10계)를 풀어 주고 있다. 그리고 내용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교 윤리관을 천명함과 동시에 윤리덕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위반할 경우에 가져야 할 죄의식을 일깨워주고 있다.

 

 

우리 역사에 드러난 십계

 

천주교가 세워진 직후부터 우리 신앙선조들은 천주십계를 윤리적 실천덕목으로 삼았다. 예를 들면 1791년에 순교한 윤지충은 “우리가 실천하는 것은 십계와 “칠극”(七克)으로 요약된다.”면서 그리스도교 실천윤리의 중심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는 “임금에 대한 충성의 근본도 천주의 명령이요, 부모에 대한 효도의 근본도 역시 천주의 명령이다.”면서, 천주의 명령인 십계를 실천함이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충효의 근본임을 강조해 주었다.

 

이 밖에도 초창기 교회사의 기록을 보면, 천주교에 입문한 새내기들에게 ‘천주십계’가 특히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이들을 천주교 신앙으로 이끌려던 사람들은 천주십계를 가르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정약종이나 황사영은 신입교우들한테 이를 전해주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유관검도 “우리가 마땅히 행할 일이란 이것이다.”라며 십계를 전파하였다. 또한 당시의 신도들은 십계를 범하는 사람은 ‘동류교인(同類敎人)’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1839년에 순교한 유진길의 경우에도 “십계를 지킴으로써 사람들이 하느님을 공경하고 자신의 영혼을 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천주교에 입문한 신도들은 십계가 충효의 근본이 되어야 하고, 구원의 방편임을 선언하고 나섰다. 이는 성리학을 기준으로 삼는 당시 사회윤리로는 분명 이단적 이야기였고 용납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천주십계는 박해시대 신도들의 실천적 신앙생활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정부의 관리들은 천주교 신도들이 “십계의 가르침에 미혹되었다.”고 하기까지 하였다.

 

 

맺음말

 

천주십계는 박해시대 신자들이 실천하던 윤리덕목이었다. 박해시대의 신도들은 한문 교회서적이 전해주는 십계의 가르침을 통해서 천주교의 윤리를 실천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윤리를 실천하면서 박해시대 신도들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죽어갔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드러낸 순교라는 사실에 입각하여, 천주십계를 통해서 터득한 그들의 윤리의식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 수 있다면, 순교라는 열매는 윤리의식이라는 나무에 주목해야 함을 일깨우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선조들이 발휘한 순교에 대한 결단은, 죄의식에 찌든 얀세니즘 윤리관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우리 문화에 입각하여 천주십계를 재해석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실천하며 순교의 길을 걸어갔으리라 생각된다. 그들은 기존의 십계명 관계 서적에서 강조하고 있는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마저도 우리 문화 속에서 창조적으로 해석했다. 그들의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은 얀세니즘에서 전하고 있는 바와 같이 법관 앞에 선 범죄자의 두려움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하느님을 충효의 근본으로 인식했고, 큰어버이로 믿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도 근엄한 아버지에 대한 착한 아들의 두려움이었다. 사랑없는 법관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자식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까지도 희생할 수 있는 사랑 자체인 어버이에 대한 두려움이며 존경이고 사랑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아버지를 위해서 효자노릇을 제대로 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자세에서 우리 신앙선조들이 보여준 십계에 대한 창조적 이해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선조들이 한글로 번역하여 읽고 전파시켜 나간 “텬쥬십계”를 올바로 이해할 필요성을 확인하게 된다. 우리가 이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 책에 수록된 내용만을 검토하는 데에 그쳐서는 아니된다. 우리는 박해시대 신도들이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에 옮겼는지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박해시대 이래 ‘한국 가톨릭 윤리관’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난날 선조들의 신학적 성찰에서 우리 겨레의 체질에 맞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재해석하고 재창조하려던 지적(知的) 노력을 확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경향잡지, 1995년 11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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