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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믿음을 향한 첫걸음 - 천주성교 십이단(天主聖敎 十二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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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47

[신앙 유산] 믿음을 향한 첫걸음 : 천주성교 십이단

 

 

머리글

 

사람들은 누구나 영원한 삶과 행복에 대하여 갈망하고, 죽음과 고통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초라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신’의 존재를 시인하고 믿는다. 이는 사람들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행위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옛부터 사람을 가리켜 종교적 동물이라고도 했다. 이는 기도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박힌 행위라는 말이다. 기도가 없이는 종교가 없고, 종교를 믿는 신앙인이란 곧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사람들은 기도를 한다. 왜냐하면 종교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에서도 기도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강조해 왔다. “끊임없이 기도하라”(1데살 5,17)는 성서의 가르침과 같이 교회는 초창기부터 기도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에 이르러서도 성사 없이는 구원을 얻을 수 있지만, 기도 없이는 아무도 구원되지 못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렇듯 기도는 그리스도교의 신앙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성사에 참여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어려웠던 경우에는 기도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나라에 그리스도교가 창설된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교회사에서는 줄곧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초창기 교회사를 검토해 볼 때 기도하는 사람들에 관한 서술이 상당히 많이 발견된다. 특히 박해 시대 우리 나라 교회에서는 신도들이 교회의 성사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매우 제한되었다. 그러기에 선교사를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일찍부터 은총을 얻는 방법으로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예비자에게도 세례를 받기 전에 기도문 암송을 요구했다. 박해 시대 우리 나라 신도들은 아마도 자신의 선앙을 지성적으로 분석하기보다 은총의 중요성을 이해해 온 듯하다. 그리고 은총을 얻기 위해 그들은 성사 생활에 참여했고, 이에 앞서 먼저 기도해 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교회사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기도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박해 시대의 기도서

 

우리 교회사의 여명기에 있어서 신앙에 대한 이해는 한문 교리서를 통해서 주어졌다. 그러므로 “천주실의”나 “칠극”과 같은 교리서들이 교회 창설에 미친 역할은 결코 과소 평가해서는 안된다. 교회를 유지하고 교회에 활기를 더해 주기 위해서는 기도서가 필요했다. 초기 교회의 창설에 참여했던 많은 지식인들은 한문으로 씌어진 교리서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하여 이땅에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정부의 교회 탄압에 직면하여 교회를 떠나는 ‘기교자’(棄敎者)가 되었다. 이는 그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지적으로 동의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은총을 얻기 위한 방법에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박해의 과정에서 교회를 지키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은 기도를 통해 자신이 이해한 바를 확인하고 이를 실천하고자 하는 다짐을 되풀이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박해 시대의 신도들은 기도문을 외운다는 것을 신앙에 관한 지식을 갖는 것보다 더 우선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당시의 교회 지도자 등은 일반 신도들에게 교리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문답책을 외우기에 앞서서 중요한 기도문을 먼저 외우도록 강조했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1801년의 박해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당시 정부가 압수했던 많은 교회 서적 가운데에는 한글로 번역된 여러 기도문 내지는 기도서들의 제목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때에는 ‘성호경’이나 ‘주의 기도’[天主經], ‘성모경’ ‘천주십계’와 같은 기도문이 번역되어 있었고, ‘천주성교도문’ ‘성인열품도문’ ‘예수도문’ ‘예수수난도문’ ‘연옥도문’ ‘천신도문’ 등과 같은 기도문들이 한글로 번역되어 구송되고 있었다.

 

그리고 “천주성교일과”(天主聖敎日課)나 “수진일과”(袖珍日課)와 같은 중국의 기도서들이 도입되어 번역되기도 했다. 또한 ‘매괴신공’과 같은 기도가 장려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1839년 기해박해 때에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이때에 “천주경과”(天主經課)와 같은 중국 교회의 대표적 교리서가 전래되었고, “천주성교공과”와 같은 우리 나라 교회의 대표적 기도서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이 시점에서 “천주성교 십이단”도 편찬되어 보급될 수 있었다.

 

 

“천주성교 십이단”의 특성

 

“천주성교 십이단”은 열두 가지의 중요한 기도문이 수록되어 있는 책자로서, 박해 시대 이래 우리 나라 교회에서 가장 중시하던 기도서이다. 여기에 수록되어 있는 기도문으로는 먼저 ‘성호경’을 위시하여 ‘천주경’ ‘성모경’ ‘종도신경’ ‘삼종경’ ‘고죄경’ ‘관유하심을 구하는 경’ ‘소회죄경’ ‘천주십계’ ‘성교사규’ ‘삼덕송’ 그리고 ‘봉헌경’ 등을 들 수 있다.

 

이 “천주성교 십이단”은 1838년경 앵베르(Imbert, 1796~1839년) 주교에 의해서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1대 조선교구장이었던 앵베르 주교는 1838년 로마의 포교성에 보낸 보고서에서 네 명의 번역자들의 노력으로 한문 기도서인 “공과”를 번역하고 있음을 말했다. 그의 이러한 업적과 관련하여 로네(Launay, 1853~1927년)와 같은 연구자는 “천주성교 십이단”도 앵베르가 편찬한 것으로 보았다.

 

즉 로네는 앵베르 주교가 “공과”의 번역을 지휘하는 과정에서 열두 개의 주요 기도문을 발췌해서 “천주성교 십이단”을 엮은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1839년의 기해박해와 1866년 병인박해 사이에 이 기도서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책이 비록 앵베르 주교에 의해 편찬되었다 하더라도 그 보급에는 한계가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당시 기도문에 관한 기록들을 검토해 보면 ‘천주경’ ‘성모경’ 등 단편적인 기도문들이 주로 나타나고 있고 “천주성교 십이단”은 특별히 언급되지는 않고 있다.

 

또한 십이단 안에 수록되어 있는 열두 개의 기도문 가운데 상당수가 이미 그 이전부터 한글로 번역되어 봉송되고 있었던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앵베르 주교 당시 번역에 참여하고 있던 사람들은 한국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바쳐 오던 기존의 기도문들을 자신들이 번역하고 있던 기도서에 그대로 채택하여 수록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런데 1887년에 간행된 “조선 교회 지도서”(Coutumier de la Mission de Coree)를 보면 모든 예비자들이 “천주성교 십이단”을 꼭 외워야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이 시기에 이르러 기도 생활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된 결과를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때를 전후하여 이 책은 확실히 편찬되었고 활판으로 간행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판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1902년에 뮈텔 주교의 감준을 받아 간행된 “천주성교 십이단”(9×14.8Cm, 12張)을 들 수 있다.

 

이 책자는 그 후에도 판을 거듭하여 간행되었다. 그리하여 1935년에는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1883~1974년) 주교의 감준으로 이 책이 다시 간행되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이 책의 내용과 순서가 약간 조정되었다. 즉 종전의 판에서와는 달리 ‘고죄경’ 안에 ‘관유하심을 구하는 경’과 ‘사하심을 구하는 경’이 포함되었고, ‘영광경’이 여기에 추가되어 십이단으로 새롭게 구성되었다. 그리고 기도문의 순서에 있어서도 ‘삼종경’이 ‘종도신경’ 다음의 자리로 옮겨져 수록되었다.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천주성교 십이단”은 19세기 중엽 이후 우리 나라 교회에서 “천주성교공과”에 수록되어 있던 기도문의 일부를 발췌하여 편찬한 책자이다. 이 책자는 개항 이후 활판으로 간행되기 시작했고 1972년 ‘가톨릭 기도서’가 간행되기 이전까지 백여 년에 걸쳐서 우리 나라 신도들이 반드시 외워야 했던 기도서였다.

 

이 기도서는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존재를 확인하는 ‘성호경’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가르친 ‘천주경’과 성서의 일부에서 발췌한 ‘성모경’ ‘영광경’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는 6세기경에 형성된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인 ‘종도신경’이 있으며, 가톨릭 윤리의 기본 골격의 일부를 제시해 주는 ‘십계명’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이 기도서에는 그 밖에도 17세기 이래 중국에 파견되었던 유럽 선교사들이 지은 신앙 고백적 기도문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기도문의 봉송을 통해서 우리 나라의 신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와 초대 교회의 가르침에 연결될 수 있었고 근세초 유럽 교회에 풍미하던 신심의 내용도 흡수할 수 있었다. 이 기도서는 상당히 장구한 기간 동안 가톨릭 신앙의 입문서 구실을 했고, 신심의 실천에 있어서도 중요한 기능을 발휘했다.

 

(어떤 연구자는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許筠, 1569~1618년)이 가져 온 ‘계십이장’(戒十二張)을 ‘십이단’으로 해석해서 허균을 천주교 신자로 이해한 바도 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십이단’이 편찬되지도 않았고 그는 신자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허균을 한국 그리스도교 문학의 선구자로 보려는 견해는 취소되어야 마땅하고. 이러한 유의 저서나 박사 학위 논문도 파기되어야 한다.)

 

[경향잡지, 1994년 5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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