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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43: 보름스 정교조약 - 교회, 주교 선출 서임권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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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4 ㅣ No.234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43) 보름스 정교조약 - 교회, 주교 선출 서임권 확보

 

 

- 보름스 대성당. 11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 건립된 이 성당은 마인츠, 슈파이어 대성당과 함께 오토 왕조의 3대 왕실 성당중 하나이다.

 

 

독일 라인강을 끼고 있는 포도주 거래의 중심지 보름스는 독일내 가장 오래된 도시중 하나이다. 부르군트 제국의 수도였으나 5세기 훈족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클로비스 1세에 의해 재건된 유서깊은 곳으로 하인리히 4세와 적발왕 프리드리히, 프리드리히 2세 등이 결혼한 독일제국의 중심도시였다. 이곳에서 1122년 성직 서임권 논쟁의 결말을 짓는 보름스 정교조약이 이루어졌다.

 

 

그레고리오 7세 이후

 

교황권과 황제권의 대립은 정치적으로나 교회 내부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가중 시켰다.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선종 이후 독일은 깊은 당파싸움에 빠져들어 수많은 내전에 휩싸였고 마침내 하인리히 4세는 1105년 자신의 친아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축출된 후 아들과의 전쟁을 준비하다 1106년에 사망했다.

 

교회 또한 개혁파인 그레고리우스파가 한층 강화되었으나 로마의 대부분이 황제의 보호를 받는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를 지지하는 등 어려운 상황이 계속됐다. 그레고리우스 선종 11개월 후에야 정통 교황인 빅토르 3세가 선출될 정도였다.

 

이러한 악화된 상황 속에서 일찍 선종한 빅토르 3세의 뒤를 이어 클뤼니 수도원장인 오스티아의 오도 추기경이 1088년 교황으로 선출돼 우르바노 2세가 됐다. 우르바노는 그레고리오 개혁에 철저한 인물이었으나 대립 교황 클레멘스 3세의 추종자들이 지배세력을 형성하고 있어 로마에 상주하지도 못했다. 이런 재위 초기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 때문에 우르바노는 신중한 온건 정책으로 개혁을 시도했다.

 

우르바노는 1089년 멜피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성직매매와 평신도의 성직서임권에 대한 금지령을 확인하면서도 교회의 승인없이 황제에 의해 서임되었더라도 성직매매의 경우가 아니라면 교황 관면으로 서품을 인정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의 세력이 약화되고 1093년 로마에 상주하게 되면서 교황의 위치가 견고해지자 우르바노 2세는 보다 강경한 개혁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해 1095년 피아첸차에서 교회회의를 열어 클레멘스 3세와 그의 추종 주교 및 그들이 집전한 모든 서품을 무효로 선언했다. 또한 그해 11월에는 클레르몽 교회회의에서 평신도의 성직서임은 물론 성직자의 세속군주에 대한 충성서약도 금지시켰다.

 

이리하여 교황청의 개혁방향은 대립교황으로 인한 교황청 분규와 서임권 투쟁으로 집중되었으나 우르바노 2세가 1099년 8월에 선종한데 이어 9월에 클레멘스 3세가 사망함으로써 평신도의 서임권 문제만이 남게됐다.

 

이즈음 영국에서는 1100년에 헨리 1세가 등극했다. 헨리 1세는 자신의 왕위를 교황청으로부터 승인받기 위해 전왕 월리엄 2세와의 서임권 논쟁으로 로마에 피신해 있던 캔터베리의 안셀모 대주교를 불러들였으나 안셀모 대주교가 교회의 결정을 지적하며 봉신으로서 국왕에 대한 충성서약을 거부했다. 헨리 1세는 안셀모 대주교를 파스칼 2세 교황에게 보내 관면을 요청했으나 거절 당하자 안셀모 대주교의 재입국을 불허했다. 이에 교황은 국왕이 서임한 영국 성직자들을 파문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 파문은 국왕과 대주교의 화해를 불러와 결국 1107년 런던에서 영주와 주교들이 모인 회의에서 국왕은 주교와 수도원장의 선거에 간섭하지 않는 대신 교황청은 주교가 축성되기 전에 국왕에게 충성서약을 수행하는 것을 양보했다. 이때 이루어진 합의가 보름스 정교조약의 기초가 되었으나 충성서약 양보는 후에 영국교회가 국교회의 특성을 지니게 하는 계기가 됐다.

 

 

보름스 정교조약과 영향

 

독일의 하인리히 5세는 그레고리우스 개혁파들의 적지 않은 협력을 얻어 아버지 하인리히 4세를 몰아내고 황제가 됐다. 하인리히 5세는 재위 초기 자신의 지위가 불안할 때는 교황청의 개혁 조치들에 순응하는 듯 했으나 지위 유지에 대한 확신을 느끼는 순간부터 황제로서의 서임권을 주장했다. 따라서 교회와의 싸움이 계속됐다.

 

이 소모적인 논쟁은 1119년에 갈리스도 2세 교황이 선출된 후 해결의 실마리를 보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계속된 논쟁에 지쳐있는 이들에 의해 조정의 목소리가 피할 수 없을 만큼 높아지자 교황이 스트라스부르그로 특사를 보내 황제와 잠정적 합의를 보았으나 합의문 작성에 실패했고 이후 1121년 황제가 제후들에게 교황청과의 평화협정을 시작하도록 하고 교황도 3명의 추기경을 독일로 보내 해결을 시도하였다. 이에 1122년 9월 23일 드디어 보름스에서 평신도의 서임권에 관한 오랜 논쟁의 종지부를 찍는 정교조약이 체결됐다.

 

'갈리스도 조약'이라고도 불리는 보름스 정교조약은 황제는 성직서임권을 포기하고 교회법에 의한 주교와 수도원장의 선출과 자유로운 축성을 보장하는 대신 교황은 황제가 주교 선출 장소에 입회하여 의견이 통일되지 못할 때에 주교를 지명할 수 있도록 했으며 황제로부터 세속 재산과 속권을 부여받은 주교는 황제에 대한 봉사 임무를 갖게 했다. 이로써 교회는 주교 선출의 자유와 교회의 서임을 보장받는 대신 황제는 주교에게 세속적인 직책을 수여할 권리를 인정받았다. 결국 보름스 정교조약은 주교에게 주교로서의 영적인 지위와 영주로서의 세속적인 지위 등 2개의 지위를 동시에 부여하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 정교조약은 독일에서는 밤베르그 제국의회에서 인준을 받았고, 교회에서는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추인됨으로써 평신도 성직서임권 논쟁이 종식됐다.

 

논쟁이 종식됐지만 주교나 대수도원장은 원칙상 교회와 세속군주 모두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결과를 초래해 국가와 교회 사이의 문제에 대한 보이지 않는 대립이 프랑스 혁명에 이르기까지 계속됐다.

 

또한 교회는 이러한 서임권 투쟁을 거치면서 교황권이 계속 강화돼 교황의 주도하에 십자군 원정이 조직되기도 하고 교황청은 문서행정 재무행정 교회법의 정비를 통해 정교한 정부 조직의 형태로 발전했다. 아울러 12세기 이후 로마법과 교회법을 이수한 율사출신의 교황들이 계속 선출됨으로써 교황청을 행정 통치의 중심으로 하고 교황령을 영토로 하는 교황군주국이 건설되어 나갔다. 그러나 인노센트 3세 교황 이후 정치적 사안에 너무 깊이 너무 광범위하게 관여함으로써 교회는 본연의 자세를 견지하지 못하고 억압적 기구로 변모하기도 했다.

 

[가톨릭신문, 2002년 3월 17일, 김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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