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35: 교황청과 프랑크 왕국의 제휴 - 중세 가톨릭 교회의 출발점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4 ㅣ No.226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35) 교황청과 프랑크 왕국의 제휴 - 중세 가톨릭 교회의 출발점

 

 

- 754년 스테파노 2세와 피핀이 동맹을 맺은 프랑스 샹퍄뉴 아데나주 폰티온의 피핀궁전터. 지금은 표지판 하나만이 옛 왕궁터임을 알려주고 있다.

 

 

[프랑스=김상재 기자] 753년 11월 교황 스테파노 2세가 일단의 무리를 이끌고 로마를 나서고 있었다. 랑고바르드족의 로마 침략 위협에 맞서 알프스를 넘어 프랑크 왕국으로 피핀 3세와 협상하러 떠난 길이었다. 후대 역사가들은 이 여행을 '비잔틴 제국으로부터의 교황직 이탈, 교황사에 있어서 동로마제국 시대로부터 프랑크 민족 시대로의 이행(移行)을 상징한 것이다'라고 평했다.

 

 

제휴의 배경과 과정

 

5세기 이후 서유럽이 게르만족들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됐지만 로마제국의 합법적 정부이자 교회의 수호자는 여전히 비잔틴, 동로마제국이었다.

 

그러나 동로마제국 역시 유스티아누스 황제 시절 반달족과 동고트족을 몰아내는 등 옛 영광을 어느정도 회복하는 듯했으나 곧이어 페르시아, 아바르족, 슬라브족 등 많은 이민족들의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다. 무엇보다 아랍의 이슬람 세력이 지중해권 세계를 침략했고 제국의 모든 역량은 이슬람의 팽창을 막기에도 급급한 실정이었다. 따라서 동로마제국의 서로마에 대한 기득권은 이미 유명무실해졌다.

 

한편 8세기의 서로마는 랑고바르드족으로부터 직접적인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레고리오 1세 교황에 의해 개종되긴 했지만 랑고바르드족은 이탈리아 정복에 대한 야심은 버리지 않고 있었다. 결국 리웃프란드가 739년 로마를 재침공한데 이어 아이스툴프가 왕위에 오른 후 이 야심을 노골화 했다.

 

이 새로운 위협은 당시 교황 스테파노 2세가 다시 프랑크 왕국에 원조를 청하는 계기가 됐다. 이미 739년 당시에도 프랑크 왕국의 카알 마르텔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거절당한바 있었으나 이번에는 프랑크 왕국의 정치적 상황도 상당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6세기 이후 클로비스의 메로빙거 왕조의 권한은 상당히 약화됐고 궁정장관(Mayor of the palace)들이 실질적 통치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7세기에 들어서는 피핀가문이 정권을 잡았으며 아랍인들을 스페인에서 물리쳐 서유럽에서 무관의 제왕이 된 카알 마르텔 사망 후에 그의 두아들 카를로망과 피핀 3세가 프랑크 왕국을 양분해 통치했다. 이후 정권다툼이 일어나 형인 카를로망은 수도원에 입회했고 사촌동생 그리포와 테우도알트도 정쟁의 희생물로 사라졌다.

 

프랑크 왕국의 유일한 실권자가 된 피핀 3세는 궁정장관에 머물지 않고 명실상부한 지배자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게르만족에게는 왕은 신으로부터 선택된다는 왕권신수설이 있어 물리적인 힘으로 왕을 폐한다면 신의 징벌을 받는다는 전통이 내려왔다. 따라서 정권투쟁 과정에서 이미 많은 적들이 생겨났고 정당성마저 확보하지 못했으며 종교성이 강한 게르만족의 왕권신수설에도 부담을 느낀 피핀은 이를 극복할 방안을 모색했다.

 

자신의 왕위찬탈에 대한 비난의 무마와 정통성을 더 높은 권위의 인정을 통해 해소하려는 것이었는데 모두가 납득할만한 권위는 당시 서유럽에서 최고의 권위를 갖고있던 교황밖에 없었으며 교황의 권위를 통해 도유로 축성되는 것 외에는 전통적 왕권신수설을 누를 길이 없었다.

 

이에 피핀은 궁정사제인 풀라트를 자카리아 교황에게 보내 '왕의 칭호를 가지고 있지만 실질적 권한은 없는 왕'의 문제에 대해 질문했다. 이에 교황은 "실질적으로 권력을 지닌 사람이 왕으로 불리는 것이 더 좋겠다"는 대답을 했다. 이 대답은 결국 피핀의 왕위찬탈을 승인하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

 

교황은 눈앞에 닥친 랑고바르드족으로부터의 위협을 막아내야 한다는 위기감과 황제교황주의로 끊임없이 교회 내정을 간섭해오던 비잔틴 황제의 영향력으로부터 교권 독립을 수립해야할 필요를 느끼고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한 프랑크 왕국과의 동맹을 돌파구로 삼은 것이다.

 

피핀 3세는 751년 힐데리히 3세를 축출하고 교황이 지명한 프랑크 대주교에 의해 도유 축성돼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그리스도교 왕권이 성립됐고 프랑크 왕국에 카롤링거 왕조가 들어서게 됐다.

 

이러한 교황의 처신은 752년 랑고바르드족이 로마를 위협할 때 그 위력을 나타냈다. 랑고바르드족이 드디어 로마를 직접 위협하자 교황 스테파노 2세는 피핀에게 자신을 초대할 것과 교섭을 위해 방문할 프랑크 왕국까지 호위할 사절 파견을 요청했다. 사실상의 구원요청이었다. 교황의 요청에 대해 피핀은 흔쾌히 승낙했는데 교황에게 진 정치적 빚을 갚을 기회이자 자신의 그리스도교적 왕권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로마를 떠나온 교황은 드디어 754년 1월 7일 폰티온의 피핀 궁전에서 교황청과 프랑크 왕국과의 동맹을 맺었다. 피핀은 로마를 방어하고 랑고바르드족이 정복한 지역을 교회에 돌려주기로 약속했으며 교황은 그해 7월 생드니 수도원에서 피핀을 왕으로 도유하고 그의 두아들 카알과 카를로망을 후계자로 축성해 '로마의 보호자'라는 명예칭호를 부여했다.

 

'피핀의 증여'라고 불리는 이 피핀의 맹세는 754년 프랑크 의회가 결의했는데 그의 사후 카알대제에 의해 탄생될 교황령의 기초가 됐다.

 

 

동맹의 결과

 

지금은 프랑스 샹파뉴 지방의 소도시 폰티온의 사라진 궁전에서 이뤄진 이 동맹은 수많은 갈등에도 불구하고 줄곧 비잔틴을 지향해 온 교황권이 비잔틴을 떠나 서구로 전향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교적 서구사회라는 중세의 출발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 동맹으로 가깝게는 프랑크의 힘을 빌어 랑고바르드족의 위협으로부터 로마와 교회를 구해냈고 비잔틴 황제로부터 교권의 독립을 가져왔다. 또한 교황령의 확보로 독립된 경제기반을 구축함으로써 이후 강력한 군주형 교황권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나 정치적 이해에서 시작된 이러한 동맹은 이후 카롤링거 왕조의 몰락과 함께 교황의 암흑시기를 초래하는 등 정교유착의 폐해를 남기기도 했다. 또한 동방에서는 이러한 프랑크 왕과의 동맹을 고대 로마제국을 계승했다는 자신들의 권리를 배신한 것으로 간주해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정치적 갈등과 이해 차이는 동서방 교회의 분열과 오늘날까지도 잔존해 있는 갈등의 뒷그림자로 남아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12월 9일, 김상재 기자]



692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