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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조선 천주교회와 성화 - 조선 땅에 전해진 서양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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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6 ㅣ No.101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조선 천주교회와 성화

 

조선 땅에 전해진 서양그림

 

 

가톨릭 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성화상을 아껴왔고, 이러한 전통은 선교사들을 통해 중국에도 전파되었다.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도착한 직후 서양의 성화를 소개하자 1598년 중국 화단에서는 서양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원근법과 명암법에 대한 기록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가 1600년에 명나라 황제 ‘신종’에게 증정한 예물 중에는 서양화법에 따라 제작된 천주상 1폭과 성모상 2폭의 그림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뒤 중국에서 간행된 천주교 서적 가운데에는 서양의 종교화를 번각(飜刻)한 그림들이 수록되어 중국인들에게 서양의 미술을 간접적으로 알려주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에서 봉사하던 선교사들은 각종 성화를 직접 제작하여 보급하는 한편 서양화 기법을 중국 화단에 소개하였다. 이 일을 담당했던 대표적 인물이 카스틸리오네(1688-1766년)였으며, 판지(Panzi, 瀋廷章) 등을 비롯한 여러 선교사들이 서양식 그림을 그려 중국사회에 전해주었다.

 

 

서양그림의 전파

 

서양의 그림이 조선땅에 전파된 계기로는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귀국한 사건을 들 수 있다. 소현세자는 당시 북경에서 활동했던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1592-1666년)과 친분이 있었다.

 

소현세자가 1644년에 귀국하자 아담 샬 신부는 그에게 선물을 보냈다. 선물 가운데에는 천문학과 천주교에 관한 책뿐만 아니라 ‘구세주상’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담 샬은 소현세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그린 성화를 선물했던 것이다. 소현세자는 기꺼이 이를 조선으로 가져왔다. 이로써 조선에 서양그림이 전래된 확실한 기록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귀국한 이후 비명횡사하였다. 그가 가지고 온 천주교 서적이나 서양의 그림도 조선사회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소현세자는 종교화의 기능을 나름대로 규정하였고, 서양의 그림을 보고 평을 남긴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18세기에 이르러 중국에 간 조선의 사신들은 그곳의 천주당에서 서양그림을 보고 찬탄하는 말들을 남긴 바 있다. 그들은 서양그림의 특성을 글로 써 조선에 알려주었다. 그리고 조선교회가 창설된 뒤에도 윤유일은 북경의 북당(北堂)에 가서 당시 청나라 조정에서 궁정화가로 있던 요셉 판지 수사를 만났다. 이는 조선인이 북경에서 서양화가를 직접 만나기도 했다는 말이다. 이들을 통하여 서양의 그림이 조선후기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전래된 그림들은 서화를 좋아하던 일반인들과 천주교도들에게 보급되어 갔다.

 

 

서양그림의 제작과 보급

 

조선 후기 사회에 서양의 그림이 직접 보급되는 데에는 두 가지 경로가 있다. 그 첫 번째는 서학서적의 도입과 같은 경로로 중국에 간 사신들이 북경의 서화 골동점 등에서 구입하여 온 경우이다.

 

두 번째는 천주교 신도들이 종교적 신심을 북돋우거나 종교집회 때에 사용할 목적으로 가지고 온 성화들이다. 이처럼 중국에서 제작된 서양의 그림은 종교화나 풍경화 등의 형식으로 조선에 전해졌다. 그리하여 조선의 애호가들도 북경에서 성행하던 서양그림을 수입해서 소장하기도 하였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도 종교화나 성화를 좋아했다. 물론 이 성화들도 서양의 화법에 따라 제작된 그림이었다. 곧, 18세기 말엽 교회사에 관한 기록을 보면 성화를 모시고 전례를 하는 장면들이 확인된다. 이와같은 사례를살펴볼 때, 당시 교회는 서양화의 보급에도 어느 정도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01년의 신유박해 이전 신자들이 사용하던 성화는 중국에서 직접 가져온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성화는 당시 조선교회에서 직접 제작되고 있었다. 뒷날 신유박해 과정에서 기록된 이승훈에 관한 신문 내용에는 1790년에 ‘철상(鐵像)’을 가져와 예수상을 찍어서 보급했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이는 1790년 조선교회에서 윤유일을 북경에 파송했던 일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윤유일은 그때 북경에서 구베아 주교를 방문하여 조선교회의 소식을 전한 다음 세례를 받고 귀국했다. 윤유일의 대부는 청국의 궁정화가였던 판지 수사였다. 아마도 윤유일은 귀국할 때에 자신의 대부인 판지 수사로부터 성화의 원판을 받아왔다고 생각된다.

 

곧, 윤유일과 판지 수사의 만남을 통해서 성화의 형태이기는 하지만 조선의 백성들에게 서양미술이 보급되어 갔다. 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교회는 직접 목판으로 밑그림을 만들고 이를 원판으로 삼아 예수 그리스도의 상본을 찍어서 보급하기도 했다. 그 상본은 채색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직접 성화를 그리거나 팔아서 생활하던 신도도 있었다. 정광수와 최창현이 이 일에 종사했다. 그리고 이희영(루가, 1756-1801년)은 당대 교회 의 대표적 화가였다. 이희영은 원래 경기도 여주에 살던 김건순의 가객이었다. 그러나 김건순이 가문으로부터 천주교 신앙을 금지당하자, 이희영은 김건순과 절교하고 서울 중부 향교동에 살면서 그림을 그려 그것을 팔아 생활하였다.

 

오늘날 서울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남아있는 그의 ‘견도(犬圖)’는 이때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한 마리의 개를 그린 이 그림에도 서양화법이 가미되어 있다고 평가된다. 한편, 그는 예수 화상 3장을 그려 황사영에게 전해준 바도 있었다. 황사영은 그가 성화를 잘 그리는 사람이었다고 증언했다.

 

 

남은 말

 

성화상에 대한 교회의 공식입장은 16세기에 진행되었던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에서 천명되었다. 이때 교회에서는 “성화상 자체에 어떤 신성이 있다거나 덕이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다만 이것을 공경함은 성화상이 표상하고 있는 근본과 관련되어 있을 뿐이다.”라고 가르쳤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화상 자체가 공경대상이 아니라 성화상에 표현된 예수 그리스도를 공경해야 한다는 것을 교회는 이야기한 것이다.

 

조선 초기교회도 성화상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성격을 이해하고 있었다. 성화에 표현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서양그림을 수용하고 보급시켰다. 이와 같은 서양그림의 보급은 서양화풍에 대한 적극적 창작의 의지를 자극했다.

 

조선의 화가들 가운데 일부도 서양의 화풍에 관심을 가졌다. 신자 화가였던 이희영도 자신의 붓으로 서양식 그림을 그렸다. 이희영은 비록 1801년의 박해에서 배교는 했지만 목숨을 건지지는 못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서양화법을 받아들여 성화를 비롯한 자신의 그림에 적용하였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그의 창조적 예술혼은 한국교회의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4년 8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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