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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윤리] 덕: 윤리신학에서의 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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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271

덕(德) : 윤리신학에서의 덕

 

 

덕[(한) 德, (라) virtus, (희) arete]이란 선함을 사랑하는 습성 (habitus operativus bonus) 을 지닌 인간의 의지 혹은 지성의 능력이 온전히 발전된 상태를 의미 한다. 덕행의 대상은 선함 자체이기에, 덕이란 반대에 접하는 상황안에서도 어떤 희생을 감수하며 내적 외적 장애물들을 거스려 인내하고 적극적이고 기쁜 마음으로 바른 것을 행 할 수 있는 힘과 능력(virtus)을 의미한다. 이 선을 향하는 습성과 힘은 인간이 자연적으로 온전하게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인간의 심성안에 심어진 주어진 능력에 의해 덕을 습득 해나가야 한다. 성서에 의하면, 덕이란 일반적으로 인간의 완성을 의미하고, 완전한 인간상을 하느님과의 관계안에서 묘사한다. 인간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하여 덕에 있어서 진보해야 한다. 완전한 인간이란 완전해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사람, 그리고 하느님을 찾아내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그에게 지시해 주시는 길을 따르는 사람이다. 오로지 이길을 따라 가야만이 사람은 그의 인격을 완성시킬수 있고, 하느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이룰수 있다. 그러기에 덕이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지키는것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따르고, 항상 하느님께 향하는 것인 것이다. 덕의 원천은 선하심 자체이신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신뢰를 두는 것이며, 하느님의 구원 은총에 협조하도록 초대받은 책임을 수용할 힘을 의미하게 된다.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덕은 동물적 본성을 제어할수 있는 자아의 힘으로써, 건전하고, 책임있는 선택을 행사할 수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유교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수양에 의하여 몸으로 체득한 것을 의미 하면서, 仁.義.禮.智, 즉 인간이 지녀야 할 근본적인 마음의 태도를 총칭하여 덕이라 말한다.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선 성 아우그스띠노의 말씀처럼 덕이란 바로 "하느님께 대한 최고의 사랑" 인 것이다. 

 

덕은 그 덕의 출발점, 내용 과 목적에 따라 자연적인 습득덕과 초자연적인 주입덕으로 구분 될수 있고, 또 다른 한편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믿음, 희망, 사랑의 대신덕(對神德)과 인간 서로간의 관계를 다루는 지덕, 의덕, 용덕, 절덕(현명, 정의, 온유함, 절제)의 윤리덕으로 구분 할 수 있다. 대신덕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생명을 얻어 누리게하는 하느님의 은혜라 한다면, 윤리덕은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를 영위하며 생활 하도록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혜라고 볼 수 있다. 자연적인 덕과 초자연적힌 덕의 중요한 차이점은 그들의 형상적 대상에 따라 구분되는 것으로서, 습득덕은 인간 이성의 빛에 따라 선을 위해 활동하게 하고, 주입덕은 신앙의 빛에 조명된 이성에 따라 선을 위해 활동한다. 자연덕은 인간의 본성 심층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덕을 의미하고, 물론 끊임없는 훈련에 의해 발전 되어 진다. 이러한 훈련은 개인의 인격을 완성시키고, 본능에 의한 충동이나, 사리사욕에 의해 지배되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성품을 단련 시킬 수 있다. 자연덕은 그것을 습득한 같은 방법으로 즉 행위의 반복으로 증가된다. 어떤 한가지 덕이 증가됨으로써 그 덕을 행할때 그 덕과 연결됨으로 인하여 다른 모든 덕도 동시에 증가된다. 자연덕은 인간의 고유한 행위로 습득되나 초 자연덕은 성화은총과 함께 하느님께서 주입하신다. 그러기에 습득덕은 비록 영웅적이고 완전한 것이라 하더라도, 결코 주입덕의 형상적 대상에 도달하지 못한다. 자연 덕은 단순한 자연적 습성이며, 초자연적 덕은 능력에 가해진 습성으로서 우리의 자연적 능력을 초월하는 보다 높은 능력에까지 들어 높여서 초자연적 행위를 행할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준다. 

 

초자연적인 덕은 하느님의 성화 은총에 의해 주입되는 덕을 의미한다. 주입되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혜를 받음에 있어 인간이 의무적으로 스스로 무엇을 준비해야 한다거나 혹은 어떤 책임이 따른다는 조건이 따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인간의 긍극 목적인 하느님과의 일치 혹은, 지복직관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느님으로부터 성화의 은총과 초자연적 덕을 받아야 한다. 주입된 초자연적 덕의 존재와 필요성은 성화 은총의 본질상 당연하지만, 주입덕은 실제상 성화 은총과는 구별된다. 왜냐하면, 은총은 영혼의 본질속으로 주입된 존재적 습성이지만, 주입덕은 실제로 영혼과는 구별되는 가능태 속으로 주입된 행위적 습성(operative habits)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주입덕은 신앙에 의해 조명된 이성의 빛에 따라 영혼이 그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느님께서 영혼안에 주입하신 작용습성이라고 말할수있다. 하느님의 성화 은총은 인간의 지성과 자유를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향해 변화시키기에, 이 성화은총을 받아들일때 인간의 존재안에 하느님에 의해 심어지는 초자연적인 덕은 인간의 윤리적 삶과 종교적 생활안에서 이미 삼위일체의 신적 생명에 참여하도록 이끈다. 성화 은총에의해 자유로와진 인간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들이고 이에 복종하며 사랑으로써 인간의 지성의 능력을 초월해 들여 높여지는 것이다. 주입덕은 영혼의 기능을 은총 질서위로 상승 시킴으로써 그 기능을 초자연화하고, 그들로 하여금 초자연 행위를 수행할 수 있게 한다. 초자연적 덕은 그 발생과 같은 방법으로 증가되는 것이 아니다. 초자연덕은 성화 자체로써 하느님께서 직접 영혼안에 주입하시지만 이 덕들의 증가는 은총의 상태에서 이루어진 초자연적 선행에 의해서 報酬적으로 부여되는 것으로 人效적(ex opere operantis)으로 행위자의 행위에 따라 증가되기도하고, 事效적(ex opere operato)으로 즉, 성사의 힘으로도 증가 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덕은 인간을 자연적 목적에로 지향케 하고 완성 시키지만, 초자연덕은 인간을 초자연적 목적에로 지향케하고 완성시킨다. 초자연적 덕은 단지 주입된 습성만이 아니고, 초자연적 습성에 의해서 완성된 자연적 능력의 행동이기도한 것이다. 주입덕중 어떤 것은 기능으로 하여금 목적 또는 목표를 지정케 한다. 또 어떤 것은 수단과 관련을 맺아준다. 첫째 부류의 주입덕은 대신덕이고, 둘째 부류는 윤리덕이다. 은총의 질서에 있어서 신학덕은 인간을 본성적 목적에로지향케 하는 자연 질서의 원리와 조화한다. 윤리덕은 수단이란 관점에서 인간을 완성하는 자연 질서의 습득덕과 조화한다. 

 

대신덕의 존재는 성화 은총의 본질상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은총이란 직접 작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완덕에로 성장.발전하기 위한 작용원리들이 필요하다. 이런 원리들 중에서 어떤 것은 초자연 목적(대신덕)과 관계되고, 또 어떤 것들은 그 목적에로 인도하는 수단(윤리덕)과 관계 된다. 대신덕은 바로 그것에 의해서 인간이 초자연 목적인 하느님을 직접 지향하는 바의 작용원리이기에 하느님 자신을 그 질료대상으로 삼고, 하느님이 지닌 속성 중 하나를 그 형상 대상으로 삼는다. 대신덕은 엄격히 초자연적인 만큼 오직 하느님만이 그것을 영혼에게 주입할 수가 있다. 우리 인간은 이 대신덕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온전한 생명에 참여 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고 또 실제로 이 삶에 참여하게 된다. 성서(꼬전 13:13; 데살전 1:3, 5:8)와 전통(DS 1530)에서는 믿음, 희망, 사랑의 세가지 초자연적인 덕들을 열거한다. 믿음이란 인간이 초월자 혹은 절대자에 대해서 믿고 응답해 가는 행위로서, 이 응답은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응답을 뜻한다. 희망이란 하느님의 사랑과 그분의 무한하신 능력에 대한 신뢰를 의미한다. 사랑은 그리스도교적 완덕의 주요소이고 가장 본질적, 특징적 요소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의 척도는 초자연적 완성의 척도이고 따라서 하느님 및 이웃에 대한 완전한 사랑에 도달한 사람은 사실상 완전한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다. 근원 또는 생성의 질서에서 보면 인식(신앙)이 첫째이고 욕구(희망)가 다음이며 향유(사랑)가 마지막이다. 완성의 질서에서 보면 사랑은 대신덕중 가장 탁월하다. 왜냐하면 사랑은 인간을 하느님과 가장 친밀하게 결합시키고 따라서 세 덕 중 오직 그것만이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완덕이 특별히 사랑에 있다고 하여 다른 덕행들의 역할이 순수히 우유적이라든가 또는 그것들이 그리스도교 완덕에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윤리덕들과 게다가 믿음과 희망은 그 자체로 고찰할 때 사랑과 독립하여 그들 고유한 탁월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비록 그리스도인 생활의 모든 행위가 사랑의 명령을 받을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할 지라도, 대부분의 행위는 다른 주입덕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자발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대신덕은 그 실체에 있어서 초자연적이며 자연적 최후 목표에로 지향된 덕을 포함하는 것이기에 자연적이라고도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은총의 본질상 대신덕은 윤리덕을 요구하는데 어떤 목적을 지향함은 바로 수단에 합당한 성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윤리덕은 그 실체에 있어서 자연적이며 그의 상태에 있어서는 초자연적이다. 이리하여 주입 윤리덕은 인간의 기능으로 하여금, 신앙으로 조명된 이성의 명령(초자연 목적으로 인도하는 수단에 관계되는) 을 따르게 하는 습성이된다. 주입 윤리덕은 하느님을 직접대상으로 삼지는 않는다. 여기에 대신덕과 구별되는 점이 있다. 그러나 주입 윤리덕은 인간행위를 초자연적 목적에로 지향케 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그와 상응하는 습득적 본성덕과 구별된다. 많은 고대 신학자들이 주입 윤리덕의 존재를 부인했으나 오늘날 거의 모든 신학자들은 성 아우구스띠노, 성 대 그레고리오, 성 토마스등의 가르침과 일치하여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윤리덕들은 지덕(현명), 의덕(정의), 절덕(절제), 용덕(용기)으로서 성 암브로시오에 의해 처음으로 사추덕, 즉 네가지 기본덕이라 불렸다. 현명이란 행위자의 '올바른 이성'으로서, 목적에로 지향하는 욕구를 올바로 지도하기위한 실천적인 지성을 완성하는 덕이다. 현명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것이 도움이되고 방해가 되는 지를 명시해주는 사랑이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에 어떤것이 유익하며, 방해가 되는 것인지를 명백히 식별할수 있는 사랑이다. 정의란 확고하고 항구적인 의지로서 각자에게 속하는 권리를 각자에게 부여하는 습성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적인 정의란 그리스도로부터 자기에게 부여된 은총에 의해서 그리스도교적 신앙으로 비추임을 받능 인간 이성의 규범에 따라서 각자에게 고유한 권리를 부여하는 초자연적인 윤리덕이다. 그러기에 정의는 사랑하는 사람만을 위해서 봉사하기위해서 올바른 질서를 견지하는 사랑이며,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사하는 사랑인것이다. 절제는 올바른 이성에 따라 감정과 행위, 욕정과 작용의 조절이다. 그리하여 의지가 선으로 부터 후퇴하지 않고 그 안에서 항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기에 절제는 사랑의 대상을 손상 없이 보존하는 사랑이다. 하느님께 대해서 순결하고 손상없는 사랑을 보존하는 것이다. 용기는 정의를 위해서,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서 어떤 고통이나 죽음 까지도 참아 받을 각오와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고통이나 죽음에 대한 감정이 반발할 때 이를 억제하고 불안이나 공포의 감정을 억제하는 훈련을 하여 만일 이러한 것들이 아낌없는 마음을 갖고 선에 봉사하는 것을 방해하는 경우 생명까지도 버리게하는 일응 용기의 덕의 역할이다. 그러기에, 용기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모든것을 감수하는 사랑이다. 하느님을 위해서 모든것을 쉽게 감수하는 것이다.

 

결론으로 모든 그리스도교적 덕은 주관적 형식만이 아니고 그의 소재 또는 대상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를도록 우리에게 재촉한다는 의미로 그리스도 중심의 측면을 갖고 있다. 그이유는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의 모범으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입되는 모든 초자연적 덕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갖고 있는 초자연덕의 충만성에의 참여이다.

 

[한국가톨릭대사전 3권(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심종혁(예수회 신부, 서강대학교 수도자대학원 신학과 교수) / 심종혁 신부님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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