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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안락사는 합법인가, 살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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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11 ㅣ No.588

[이창영 신부의 생명이야기] 안락사는 합법인가, 살인인가?

 

 

얼마 전 사채를 주제로 다룬 드라마 ‘쩐의 전쟁’ 이 인기리에 막을 내렸다. 이 드라마의 시청률이 높았던 것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쩐의 전쟁’ 소용돌이에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살 수 있고 가질 수 있다. 그래서 돈에 환장한 사람이 너무나 많다. 돈 때문에 사랑도, 우정도 팔아먹는다. 돈만 있으면 남을 두들겨 팰 수도 있고, 병역의 의무도 피할 수 있고, 필요로 하는 장기도 살 수 있다. 심지어는 멀쩡한 사람을 돈 때문에 죽이기도 한다.

 

결국 돈을 만들어 낸 인간이 돈 때문에 죽고 사는 시대가 된 것이다. 참담하고 씁쓸하지만 돈의 위력은 이렇게 상상을 초월한다. 안락사의 경우에 있어서도 (비록 예외적인 경우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돈 문제와 전혀 무관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환자 가족 입장에서나 의료인 입장에서나.

 

안락사(Euthanasia)라는 단어는 본래 희랍어 ‘eu(아름다운, 기쁜)’와 ‘thanatos(죽음)’의 합성어로써 ‘아름답고 존엄한 죽음’ 또는 ‘고통 없이 빠른 죽음’, ‘잠자는 것과 같은 평화로운 죽음’, ‘가벼운 죽음’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어원적으로 풀이해 보면 고대의 안락사(Euthanasia)라는 단어는 심한 고통이 없는 ‘편안한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그 말의 본래의 의미를 잃고 그저 질병의 고통이나 단말마적 고통을 없애려는 어떤 의학적 개입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안락사라는 말은 고통을 없애기 위한 안락 살해(安樂殺害) 또는 오랜 동안의 고통스런 생명의 연장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한 안락 살해(安樂殺害)를 뜻하는 특수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안락사라는 말은 생물학적 생명이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서 의식이 없이 인격이 소멸된 경우나 또는 고칠 수 없으며 참을 수 없는 신체적 고통으로 사회생활이 의미 없고 불가능하게 되어 삶의 의미조차 없는 정신적 존재가 소멸된 경우, 또는 어떤 신체적 결핍 때문에 국가나 주변 사람들에게 상당한 부담을 주게 되어서 공동체적 존재로서의 자격이 상실된 경우에는 죽음을 앞당기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합리주의적 사상이 발상이 되어서 직접 행동으로 실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안락사라는 말은 과거와는 달리 “인간 생명이 불가역적인 죽음의 방향에서 인식되었을 때 합리주의적 발상에 의해 이를 인위적으로 단축시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인간의 행위”라고 정의해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정의를 근거로 오늘날에는 의학적 측면에서 좀 더 안락사를 세분화시켜 물리적 또는 화학적 방법으로 직접 죽음에 이르게 하는 적극적 안락사와 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일반 주지(周知)의 의료 행위를 환자에게 시행하지 않아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소극적 안락사로 구분하고 있다.

 

가톨릭교회는 인간 생명의 가치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무후한 인간 존재로서, 태아든 유아든  어린이든 어른이든 노인이든 불치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든 죽어 가는 사람이든 결코 인간의 살해를 용납할 수 없다.”(교황청 신앙교리성, “안락사에 관한 선언”(1980. 5.5.) 중에서) 따라서 가톨릭교회는 죽음 직전의 환자에게 사랑으로 베푸는 행위, 곧 수분 공급이나 간호, 보편적인 투약이나 임종자와의 긴밀한 대화 등은 절대로 안락사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또한 환자의 조건으로 보아 이미 필요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특정한 의료 행위를 그만 두는 것(전통적인 표현으로 말하면 ‘예외적 용법을 포기하는 결정’이다.)은 환자의 죽음을 방관하는 결정이 아니라 사려와 분별에 근거한 합리적인 과정에 따라 적절하게 기술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가르친다. 나아가 가톨릭교회는 환자의 생명을 단축시킬 수도 있는 위험이 있지만 환자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하는 행위는 의사의 소명에 속하며, 비단 질병을 치료하거나 생명을 연장하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환자를 돌보아 주고 고통을 덜어 주는 것도 의사의 소명이라 가르친다. 그러므로 위의 세 가지 경우는 안락사가 아니라 품위 있는 인간적 죽음 또는 존엄사(Death of Dignity)로 이해하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가톨릭교회는 인간 생명의 가치에 대한 절대성과 하느님의 선물로서 주어진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가르치고 일깨워 준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안락사’라는 말의 엄밀한 개념 정립이 시급히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곧 본래의 참뜻인 ‘평안한 죽음’이 ‘안락 살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남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안락사라는 말이 “특수한 행위에 의하여 환자의 생명을 끝내게 하는 것”으로 사용되어야 하고, 그러한 의미에서 안락사는 그것이 적극적인 의미에서든 소극적인 의미에서든 결코 용인될 수 없는 행위임을 확고히 가르친다.

 

그렇다면 회생의 가능성이 없는 말기환자에게 치료를 계속하는 것이 합당한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가톨릭교회의 윤리적 시각에 입각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불치병 말기환자의 치료 중단 문제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기본적인 시각은  교회에서 발표한 ‘안락사에 관한 선언’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곧 비록 불치병의 말기 환자라 하더라도 건강에 이로운 효과를 가져 오는 치료를 받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당연히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경우에 모든 치료법을 다 사용할 윤리적 의무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항상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이다.

 

그리고 말기 환자에 대한 불필요한 치료행위의 중지라는 문제의 핵심은 실상 말기 환자가 맞이하게 되는 죽음이 어떠한 죽음이어야 하는가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말기 환자에게 있어서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을 앞에 두고 자신의 전체적인 삶을 요약하면서, 온전한 자유와 용기를 가지고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이야말로 인간적이고도 품위 있는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불치의 말기환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죽음의 시간을 연장시키는 것보다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을 온전한 의식을 가지고 자기 실존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준비의 시간을 갖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하다. 결국 불치병의 말기 환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 환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의료 집착적 행위로서의 불필요한 치료행위 보다는 오히려 그 환자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기꺼이 수용하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고통 받는 환자들이라면 누구나 극심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안락사 옹호론자들은 환자가 겪는 그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참된 인간적인 의료행위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결코 자기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생명을 포기해서도 안 되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환자가 원한다 해도 생명의 포기를 조장하거나 도와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은 한 개인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라 절대자로부터 주어진 위대한 선물이고, 죽음은 결코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월간빛, 2007년 11월호, 이창영 바오로 신부(가톨릭신문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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